후 삼국의 흥망의 원인(p30)

궁예 - 처음 후고구려라는 나라를 세움. 북쪽 지대 고구려 유민의 환심을 얻기 위함. 개성의 호족 출신인 왕건을 휘하에 두고 왕건을 전적으로 신임하고 모든 정사를 맡김. 나라 이름을 태봉으로 바꾼 뒤에는 점차 포악해져 부하들이 왕건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고 궁예를 축출함.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신라에 대해 무자비하게 대함. 결국 신라인들의 민심을 얻지 못함.

진훤(견훤) - 상주 사람으로 신라의 비장 출신. 광주 지역에서 농민군을 이끌어 세력을 키우고 후백제 건국. 그 지역 주민들의 반신라 정서와 백제 유민의 정서를 의식함. 궁예와 마찬가지로 정복자로서 신라의 지도자들을 수없이 죽이고 약탈과 강간을 일삼음. 백제 유민들의 정서를 고려했다고는 하나 정치가로서의 판단력 부족. 특히 넷째 아들 금강을 총애하는 바람에 첫째 아들 신검을 비롯한 다른 아들들의 반발을 초래하여 아들들에게 유폐당함.(저자는 신검이 진훤을 유폐하고 왕위를 빼앗은 것을 단순한 패륜행위라고 볼 수도 있으나 그와 반대로 진훤이 말년에 나태와 안일에 빠져 나약한 모습을 보이자 이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신검을 왕으로 추대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견해를 제시.) 진훤은 갇혀 있던 금산사에서 탈출하여 고려로 투항,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앞장섬.(진훤의 처지가 참 아이러니하다...)

왕건 - 궁예 밑에서 무훈을 쌓은 뒤 궁예가 폭정으로 민심을 잃자 무혈로 왕위를 얻음. 왕건은 궁예나 진훤과는 달리 신라를 정복한 다음에도 신라 왕실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 신라의 지배세력과 백성의 민심을 얻음. 고려는 신라와 전쟁을 벌인 적이 한번도 없으며 신라의 경순왕은 고려에 투항하여 나라를 헌납함.

 

호족의 성격 및 귀족과의 차이점 (p37)

신라는 철저한 골품제로 이루어진 귀족사회였으나 호족은 귀족과는 구별되는 신라 말기 사회의 중추세력임.

호족의 기원은 중앙에서 밀려난 진골 귀족이나 하급 벼슬아치인 6두품 세력이 지방세력을 이루기 시작한 것임. 특히 6두품 세력은 진골세력에 눌려 관등과 관직에서 많은 차별을 받았고 이들이 주축을 이룬 도당 유학생들은 골품에 따른 차별이 없는 당의 제도를 접하고 신라사회의 모순에 더욱 비판적 태도를 지니게 됨(최치원, 최승우 등). 호족들은 방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지방의 문화적, 종교적 수준을 유지 또는 독점하면서 지방민 위에 군림. 호족들은 스스로 무장을 갖추기도 함.

호족들은 신라말기의 농민봉기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도, 반대도 않는 중립적인 자세를 취함.

왕건의 유명한 호족과의 중첩적 혼인관계도 지방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호족들의 지방에 대한 지배권과 특권적 지위를 인정함과 동시에 그들을 형식상 의사일가로 만들어 포섭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임. 왕건은 29명의 부인과 34명의 자녀를 둠. (-0-;;) 그 덕분에 고려 왕가에 자신의 여러 딸을 2대에 걸쳐 왕비로 시집 보내는 일이나 항렬상 이모와 결혼하는 일까지 생김.

결론적으로 왕건은 지방세력인 호족들을 효과적으로 잘 이용하고 포섭하여 이들이 고려를 건국하고 나라의 기초를 다지는데 이바지하게 함. 그러나 호족들은 신라의 귀족들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며 신라가 귀족사회였던 데 반해 고려는 문벌사회였고 문벌의 세력도 영속성이 제한되어 귀족사회와는 성격을 달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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