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의 실체 (p115 이하)

묘청의 반란사건의 성격을 두고 사대파와 자주파, 유교파와 불교파, 개경세력과 서경세력의 대결로 평가하는 사가들이 있음.(단재 신채호 선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확실하진 않다.)

개경세력 vs 서경세력 - 정지상 등 서경관료 또는 신진 관료는 서경 천도를 통해 중앙 정계의 중심세력으로 자리잡고자 했고 이는 개경 세력의 전통적인 권위와 우월의식에 도전한 양상이었음. (이 측면에서는 개경세력과 서경세력의 대결이라는 평가는 어느정도 타당한 것 같다.)

불교파 vs 유교파 - 묘청으로 대표되는 불교세력과 유학자이자 개경 문벌 출신인 김부식의 유교세력이 갈등을 빚은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불교세력으로 꼽을 수 있는 지도자는 묘청 한 사람뿐이었음. 절을 짓고 도량을 베푼 일도 일반적인 것이었으며 특별히 불교적 이념을 내세운 적도 없다. 따라서 불교파와 유교파의 대결로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닐런지. (고려시대에 불교가 사회 전반적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점을 감안한다면 묘청이 승려였다는 점만으로 불교세력과 유교세력의 대결로 보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고려사회는 신앙과 사회 생활 면에서는 불교가, 국가의 통치와 지배이념, 사회윤리적인 측면에서는 유교가 지배한 이원적 구조를 가지고 있던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불교보다는 오히려 서경천도을 기도할 때 풍수지리사상이 전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도교의 영향이 더 크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사대파와 자주파 - 자주를 내세우는 묘청의 금나라 정벌계획은 군사양성의 준비도 없고 제나라와 협공한다는 표방도 실체가 없는 등 구호만 요란할 뿐 엉성한 점이 많았음. 따라서 칭제건원의 자주성도 어느 정도만 인정할 수 있음. (예전에 어디에선가 묘청의 반란을 자주파의 반란으로 평가하면서 묘청의 난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역사가 크게 달라진 것이라고 평가한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당시에도 수백년 전의 한 사건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든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저자의 글을 읽고 나니 그런 주장이 다분히 민족주의사관에 근거하여 단순한 권력쟁탈전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한 역사해석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당시 동북아의 실질적 패권자인 금나라를 정벌하려 했다면 금나라로부터 어떤 피해를 입었을 지 모를 일이다. 오히려 고려가 외교술로 금나라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겉으로는 예를 갖추어 금으로부터 호의적인 대우를 받은 부분을 읽으면서는 참 다행이라고 느낄 정도였다.  그리고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정벌을 주장한 것은 조선시대에 중국을 지극히 받드는 사대주의와 모순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묘청일파의 운동은 어디까지나 서경 천도를 실현하여 기성세력을 꺾고 개혁을 추진하는데 목표를 둔 권력 쟁탈이 그 실체임.(by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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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발견 - 한국 고대사의 재구성을 위하여
이희진 지음 / 동아시아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사게 된 것은 주말 신문의 북리뷰란을 통해서였던 것 같다. 고대전쟁사를 통해 고대사를 재구성한다는 내용이었고 마침 그때 이이화 선생의 한국사 이야기 중 삼국시대 부분을 읽고 있었던 터라 충동적으로 책을 구매하게 되었다. 전공서 말고는 처음으로 책을 읽다가 관련된 다른 책을 읽어보고 싶은 충동도 크게 작용했다. 이제까지는 독서를 많이 하려고 노력은 했었지만 그때 그때 읽고 싶은 책을 읽었을 뿐 책을 읽고 그 책의 내용과 관련되는 내용의 책을 또 찾아서 읽은 적은 없기 때문이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고 첫 번째 부분은 고대 삼국시대의 전쟁사를 몇 개 되짚어 보면서 당해 전쟁과 관련된 편견, 나아가 그런 편견이 가져온 더 큰 역사적 왜곡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고대 전쟁에서의 제요소를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전쟁에 대한 관념으로 과거의 전쟁을 이해할 때 얼마나 많은 오해가 생길 수 있는지를 철저히 보여준다.


우선 책을 읽고 받은 가장 큰 느낌은 저자의 주장이 무척 논리적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가야정벌의 주체가 백제였는지 왜였는지를 밝히는 부분에서 대부분의 책들은 왜가 그 당시 대륙으로의 체계적인 침략을 할 정도로 국가체제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든지 일본서기가 정확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백제의 근초고왕이 가야정벌의 주체였다는 주장을 펴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마치 자신이 근초고왕의 머릿속에 들어간 것처럼 당시 한반도 남부의 강국 백제의 국왕 근초고왕의 입장에서 주변국들과의 정세와 백제의 실익을 꼼꼼히 따지면서 근초고왕이 교묘한 전략으로 별다른 무력행사 없이 가야를 백제의 영향력 하에 복속시켰다는 자신의 주장을 전개한다. 이러한 주장의 핵심적인 논거로 저자는 신흥세력인 신라가 가야에 영향력을 미침으로써 가야를 통해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던 왜가 큰 타격을 받았고 가야를 세력권에 백제의 세력권에 포함시켜 고구려에 대항하려던 백제가 왜의 그와같은 이해관계를 적절히 이용했다는 점, 당시 한반도의 정세가 북쪽의 고구려와 남쪽 대항세력과의 관계라고 할 때 대항세력의 주체를 왜로 보기에는 문헌의 근거나 왜의 사회발전 정도로 보아 여러 가지 무리가 있다는 점 등을 들고 있고 그러한 논거는 무척 설득력이 있었다. 저자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커다란 틀 뿐 아니라 세부적으로 사람들이 의구심을 가질 수 있는 부분 - ex) 왜가 일방적으로 신라를 침략한 것이 왜의 세력이 신라보다 강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 대해 신라에 대한 왜의 침공은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국가의 사활을 건 문제였음에 반해 왜에 대한 신라의 침략은 당시 사회의 발전정도나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왜의 지리적 이점과 신라의 항해술 등을 고려할 때 실효성도 별로 없고 위험성이 높은 전략적 가치가 떨어지는 선택이었기 때문에 신라가 왜의 본토를 침략하지 않은 것이지 결코 신라의 국력이 왜보다 약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명쾌히 설명해준다. - 에 대해서도 현시대를 살고 있는 독자들의 상식에 비추어 이해하기 쉽도록 상세하게 논거를 들어 의구심을 풀어준다.


물론 내가 고대사를 연구할 수 있는 자료를 직접 읽어보지 않아서 저자의 주장에 쉽게 동조하는 것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저자가 우리가 오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파고든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편견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한 것은 단순히 삼국사기 등의 기록을 문자그대로 인용하거나 교과서에 실린 내용만으로 국사를 배웠던 나에게는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고 적어도 이 책만을 기준으로 보자면 저자의 주장은 무척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저자가 역사소설을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하나의 문장과 다음 문장이 논리적으로 아귀가 맞아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내가 책을 읽으면서 이런 느낌을 받는 것은 로버트 치알디니의 ‘설득의 심리학’이후 처음인 것 같다.)


역사가 과거의 사실에 대한 기록이기에 필연적으로 주관이 개입되고 그에 따른 왜곡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역사서를 읽는 순간에는 그런 점을 잊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을 읽으면서 또한 역사적 사실이 얼마나 왜곡되기 쉽고 그러한 왜곡된 사실을 우리가 얼마나 쉽게,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 왜곡이라는 점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를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대부분의 왕조의 몰락은 지배층의 부패와 무능, 그에 따른 민심의 이반의 결과라고 배워왔고 또한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일 것이다. 사회 대다수 구성원의 불만이 극에 달하면 비록 고대사회에서라도 그러한 불만을 해소하고 새로운 욕구에 부합하기 위한 신흥세력이 나타나고 그들에 의해 정권 내지는 왕조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의 지적대로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이 우리이 사고에 끼친 영향은 그 이상이다. ‘의자왕’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백제가 멸망당하려는 순간에도 삼천궁녀와 함께 술판을 벌이면서 충신들의 간언을 무시한 타락과 무능의 화신이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아무리 생각이 없고 술에 쩔어 있는 왕이라도 한나라의 지도자이고 한때 해동증자로까지 불렸던 사람이 수백년 이어내려온 왕조의 존망이 위태로운 순간에 누구나 알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군사를 배치하라는 충신의 간언을 무시하고 술판을 벌일 수 있을까?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사실도 조금만 시각을 달리해서 보면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안간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나도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기존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조금만 달리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을 꼼꼼하게 따져보기 싫어하는 귀찮음에 근거한 비이성적 합리화로 - 사람 망가지는 것은 한 순간이고 술에 쩔어 있다보면 국가가 망하는 순간에도 궁녀들과 놀아날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따위의 합리화 -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는 점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자는 백제가 실제로 당나라가 상륙하는 지점에 군사를 배치하여 싸웠었고 성충, 흥수의 주장과 그에 반대하는 귀족들의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당시 백제의 전략적인 입장에서는 백제가 그와 같이 전장을 선택하고 싸웠던 것이 합리적이었다는 점을 논증한다. 한가지만 생각해보자. 그 당시 사람이라고 생각이 없는 무뇌아는 아니지 않는가?

저자의 말대로 전쟁에는 틀에 박힌 규칙이 적용되지 않고 전쟁에 인간의 의지가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이전까지 승자의 기록인 역사서에 기재된 논리를 그대로 따른 순박한 단순논리로 - 전쟁에서 졌다면 지휘관이 능력이 부족해서였다든지 전쟁에 동원되었다는 군사의 숫자로 단순하게 당시 전쟁의 규모와 상황을 추측하는 등의 단순함 - 삼국시대의 전쟁사를 해석하고 그에 따라 그 시대의 역사를 이해하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한 저자의 문제의식과 그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들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각주가 있다고는 하지만 여백이 너무 많이 남게 편집이 된 점은 좀 아쉬웠고,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인 스타크래프트와 비교해서 설명한 부분이 자주 등장하는데 스트크래프트류의 게임을 잘 이해하고 있는 나로서는 저자의 의도대로 고대의 전쟁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았지만 게임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혼란만 가중시킬 것 같다. 또 책 내용의 진지함을 떨어뜨리는 부작용이 있지 않았나 싶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사소한 옥의 티이고 책의 전체적인 완성도 측면에서나 이 책을 통해 과거사를 밝혀 내는 새로운 시각을 엿볼 수 있고 우리가 가지고 있던 역사의 단면들에 대한 편견을 깨는 중요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강하게 일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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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부기 2005-04-14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서평이 너무 길어서 읽다가 포기했어. ㅜㅜ
 

흔히들 누군가 힘든 상황에 처해 있거나 단순히 육체적으로 아프거나 힘든 일에 처해 있을 때,

참 힘들겠다고 한다. 어떤 이는 힘들고 아프겠지만 조금만 참으라고 한다.

사실 옆에서 보는 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 뿐이다.

하지만 역시 실제로 그런 아픔이나 고통을 겪는 것과

책에서 읽고 간접적으로 경험하거나 주위의 친한 사람이 직접 겪는 것을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물론 우리가 모든 것을 직접 몸으로 부딪치면서 경험할 수는 없다.

대부분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토대로 알게되고 또 그러한 아픔이나 힘든 상황을 공감하는 것이다.

그러나 직접 겪은 사람과 간접적으로 겪은 사람에게 그 경험의 충격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함부로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다고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간접적으로 겪은 사람은 진지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공감을 할 수 있도록,

직접적으로 겪은 사람은 과거의 아픈 경험에 속박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열몇 시간을 추위에 떨고 나서 문득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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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부기 2005-06-06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갸... 접때 보초섰을 때인가 보네. 그치?
이궁, 그래도 잘 버텼네. ^^

외로운 발바닥 2005-06-08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초 한번 서고 이런 생각하다니 부끄럽소.
 

고려의 토지제도 (p92이하)

역분전(役分田) - 태조가 940년 실시. 녹읍제의 폐지를 의미. 개인의 품성과 행실의 선악 및 공로에 따라 차등 지급함.(논공행상의 성격을 띔) 자손에게 물려줄 수 없었음.

녹봉제의 시초 - 광종 원년인 949년 공로자를 네 등급으로 가려 쌀 12/15/20/25섬을 정기적으로 지급.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 - 976년(경종 1년) 실시. 처음 정한 전시과라는 의미. 직관과 산관에게 논밭과 땔나무를 대는 산판을 지급한 제도. 인품에 의한 4색 관복제에 기초하면서 관품에 따른 구분도 반영. 이러한 수조권은 상속불가.

훈전(勳田) - 전시과는 관료 중심으로 실시되었기에 새로 귀순한 세력이나 공신들에게 수조지를 지급해야 할 필요성에 따라 실시. 훈전은 상속가능.

개정전시과 - 998년(목종1년)  시정전시과를 크게 개정. 관직 반열의 상하만을 지급 기준으로 삼음. 무반을 문반보다 낮게 책정.

경정전시과 - 1076년(문종30년) 전시과 정비. 일반 관료와 구분하여 승려와 지사에게 별사전시과라는 수조권 토지를 지급. 향리, 여진의 추장 등 새로운 세력에게도 전시과 지급.

cf. 신라의 토지제도와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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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발해 계승의 역사의식 (p46이하)

이승휴의 제왕운기 - 발해가 거란에 멸망당하였을 때 같은 갈래인 고려로 귀화한 사실을 들어 발해를 고구려의 계통을 이은 우리나라의 역사의 한 부분을 이루는 국가로 봄.

이규보의 동명왕편 - 신라의 시조 혁거세편을 쓰지 않음. 이것은 고려가 신라가 아닌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의미임.

왕건은 발해를 고려의 친척 국가로 칭하면서 발해를 멸한 거란과는 국교수립 거부. 요가 942년 사신 30여명과 함께 낙타 50마리를 보내며 우호관계를 맺으려 하였으나 왕건은 사신일행을 섬으로 귀양보내고 낙타는 개경 만부교 아래에 매어놓아 굶어죽게 함. 이와 같은 왕건의 확고한 의지에서 한국 민족주의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고 발해를 한국사에 포함시키는 데에 왕견이 결정적인 공로를 세웠다고 볼 수 있음.(p58-60)

 

과거제 개관 (p74이하)

과거제도는 958년(광종9년) 쌍기의 건의에 따라 처음 실시됨.

진사과(進士科) - 시부(운문)와 시무책(정책을 적어내는 논술고시)을 시험봄.

명경과(明經科) - 주역, 서경, 시경, 춘추 등 기본 유교 경전을 시험봄.

잡과(雜科) - 의술, 지리, 율학, 산학 등을 시험봄.

진사과와 명경과는 대체로 중앙 관직자와 지방 향리의 자손에게 응시자격이 주어졌으나 후기에는 양인 모두에게 개방되었고 잡과는 처음부터 일반 서민들에게 개방됨. 다만 향, 부곡의 천민들은 잡과에도 응시할 수 없었음. 과거를 실시하는 시기도 매년, 격년, 4년에 한번(고려후기) 등 일정하지 않았음. 무관을 뽑는 과거는 실시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수시로 등용함.

과거제는 귀족신분에게만 관직이 주어지던 관례를 깨고 능력에 따라 관직을 주는 제도임. 그러나 잡과와 같은 기술직을 천대하고 무과시를 치르지 않아 문무의 차별의식을 조장하는 등 인재 등용의 한계를 드러냄. 또한 시험과목이 유교 경전 중심이어서 국가 이념의 정신적 역할은 불교가, 정치와 교화는 유교가 담당하는 이원적 통치철학이 만들어지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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