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발해 계승의 역사의식 (p46이하)
이승휴의 제왕운기 - 발해가 거란에 멸망당하였을 때 같은 갈래인 고려로 귀화한 사실을 들어 발해를 고구려의 계통을 이은 우리나라의 역사의 한 부분을 이루는 국가로 봄.
이규보의 동명왕편 - 신라의 시조 혁거세편을 쓰지 않음. 이것은 고려가 신라가 아닌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의미임.
왕건은 발해를 고려의 친척 국가로 칭하면서 발해를 멸한 거란과는 국교수립 거부. 요가 942년 사신 30여명과 함께 낙타 50마리를 보내며 우호관계를 맺으려 하였으나 왕건은 사신일행을 섬으로 귀양보내고 낙타는 개경 만부교 아래에 매어놓아 굶어죽게 함. 이와 같은 왕건의 확고한 의지에서 한국 민족주의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고 발해를 한국사에 포함시키는 데에 왕견이 결정적인 공로를 세웠다고 볼 수 있음.(p58-60)
과거제 개관 (p74이하)
과거제도는 958년(광종9년) 쌍기의 건의에 따라 처음 실시됨.
진사과(進士科) - 시부(운문)와 시무책(정책을 적어내는 논술고시)을 시험봄.
명경과(明經科) - 주역, 서경, 시경, 춘추 등 기본 유교 경전을 시험봄.
잡과(雜科) - 의술, 지리, 율학, 산학 등을 시험봄.
진사과와 명경과는 대체로 중앙 관직자와 지방 향리의 자손에게 응시자격이 주어졌으나 후기에는 양인 모두에게 개방되었고 잡과는 처음부터 일반 서민들에게 개방됨. 다만 향, 부곡의 천민들은 잡과에도 응시할 수 없었음. 과거를 실시하는 시기도 매년, 격년, 4년에 한번(고려후기) 등 일정하지 않았음. 무관을 뽑는 과거는 실시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수시로 등용함.
과거제는 귀족신분에게만 관직이 주어지던 관례를 깨고 능력에 따라 관직을 주는 제도임. 그러나 잡과와 같은 기술직을 천대하고 무과시를 치르지 않아 문무의 차별의식을 조장하는 등 인재 등용의 한계를 드러냄. 또한 시험과목이 유교 경전 중심이어서 국가 이념의 정신적 역할은 불교가, 정치와 교화는 유교가 담당하는 이원적 통치철학이 만들어지기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