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에 대한 짧은 변명

'왜구'라는 용어는 고대 중국 해안 지대와 한반도에 출몰하는 일본인을 해적 개념으로 받아들인 역사 용어이다. 처음에는 일본 정부와 일본 해적의 무리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았다. 고대에는 일본 열도에 통일된 국가가 없어서 개념이 분명치 않았던 것이다. 고려에 들어와서는 대체로 일본과 왜구를 분리하여 기술하였다. 일본 정부의 공식 사절이나 국서 등에는 일본으로 표기하고, 무리를 지어 노략질을 일삼는 일본인은 별도로 왜구라 하였다.(p180.)

일본에서 12세기 무렵 가마쿠라막부가 출연하였는데 막부의 기초가 된 하급무사들은 이후 일본에서 농업과 수공업의 발전에 따른 상업자본의 축적과 화폐유통으로 경제적 기반이 점차 흔들렸고 영세 농민들은 몰락하였다. 몰락한 하층 무사들과 영세 농민들이 살길을 찾아 해적으로 탈바꿈 하였고 이에 무장한 상인들이 합세하여 '왜구'의 주류를 이루었다. 막부정권에서도 왜구를 외국 침략자와 똑같은 나라의 적으로 다루어 처단하였고 왜구의 침입에 고려가 강력히 항의하자 기타큐슈의 권력자인 쇼니가 고려 사신이 보는 앞에서 왜구 90인을 잡아 죽인 일도 있었다.

왜구는 13세기 초 김해에 침입한 것을 시작으로 간헐적으로 경상도 연안 고을을 침략했으며 고려가 왜구 소탕에 나서면 한동안 조용히 있기도 하였다. 1263년에는 왜구 배 한척이 물도에 침입하여 생활도구까지 싹쓸이해간 일도 있었다. 그 후 고려, 몽골 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하던 기간에는 왜구의 출몰이 거의 없었으나 일본 정벌이 중지되자 왜구들은 1323년 군산도에서 조운선을 터는 등 약탈을 횡행하였다. 1350년 이후에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왜구의 약탈이 자행되었다.

왜구는 한국 사람들에게 몽골인과 더불어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는 '야만과 포악'의 대명사로 굳어져 있지만 알고 보면 이들 역시 살아 남으려고 최후의 몸부림을 친 측면도 있다. (p186)

전쟁의 발견에서 읽은 논지를 몽골의 침입 등으로 피폐해진 고려후기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여하튼 일본의 왜구는 노략질 하기에는 참 좋은 전략적 이점을 가진 듯하다. 물론 그것이 일본이 그 당시에는 문물의 발달이 뒤쳐져 있었다는 대전제에 바탕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 MBC 느낌표 선정도서
김주영 지음 / 문이당 / 2001년 4월
평점 :
절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인간의 역사에서 50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하지만 50여년전 세상은 지금과 참 많이 달랐던 것 같다. 적어도 이 소설의 주인공과 나의 어린 시절을 비교하면 - 물론 작가의 어린시절의 형상화라고 볼 수 있는 주인공이 찢어지게 가난했다는 점과 내가 비교적 유복한 집에서 자라났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 정말로 어린 시절에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참 다르고 그로 인해 어른이 되어 갖는 생각도 참 많이 달라지겠다는 생각이 든다.

옛 이야기라면 옛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우리 부모님 세대의 어린 시절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그리 오래전도 아닌 그 시절, 아버지 없이 품앗이로 생계를 꾸려가는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살아가는 소년은 항상 굶주리다. 소년은 때묻지 않았지만, 눈치로 어른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경우도 있고, 자신의 동생을 챙길 줄도 안다.  그러나 그도 조금씩 세월이 지나면서, 또한 삶을 구성하던 주위 사람들과 하나씩 이별을 하면서, 조금씩 성장해 간다...는 것이 이 소설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내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작가는 헐벗고 굶주리며 순박하지만 자기나름대로 삶의 지혜(?)를 터득해가고 있는 소년의 눈을 통해 그 시대의 모습을 맛깔난 우리말로 그려냈다. 또한 지독한 배고픔, 가난한 집의 어린 장남으로서의 자존심과 수치심, 그런 상황에서의 어머니와의 미묘한 감정 대립 등에 대한 묘사는 책을 읽으면서 '아, 정말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으면 이런 감정이 느껴지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만큼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쳤다. 나와는 정말로 다른 어린 시절을 경험한 주인공 - 또는 작가자신 -  의 이야기를 읽으며 이런 것이 정말로 간접경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 덕분에 부모님 세대의 가난함을 안고 자라난 소년의 어린시절을 간접적으로 경험해 본 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려인의 life style

고려의 국왕이 황제를 칭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 대해 자주성과 자부심이 강한 사회였다. 

그리고 불교와 무속의 결합(불교의 역사가 깊음을 새삼스럽게 느끼며 점집에 왜 불교의 만자가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이 신앙생활 및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 사회였다. 그에 따라 사찰이 사회, 경제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국가의 통치이념은 유교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나 도교적 풍수지리사상도 만연했다. 결국 유교, 불교, 도교에 민간 무속신앙까지 각각의 영역에서 고려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고려는 다원화되고 열린 사회였다.

고려시대에는 상업과 무역도 발달하였으며 고려의 청자, 먹, 비단 등은 당시 세계적으로 수준 높은 공산품으로 인정받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한국생활사박물관 7 - 고려생활관 1 한국생활사박물관 7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찬위원회(7권) 지음 / 사계절 / 200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는 옛 사람들이 살았던 발자취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시대에 직접 가볼 수 없기에 과거의 자료를 근거로 과거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를 막연히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껏 우리가 알고 배워왔던 역사는 **년에 아무개(영웅이나 위인)이 어떤 정책을 시행했다든지 **년에 어떤 나라와 전쟁을 해서 **명이 전사했다든지 등의 딱딱한 숫자와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짧막한 의미지움밖에 없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 자체도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사건의 역사적 평가는 후세에 의해 내려지는 것일 뿐이다. 예컨대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쟁의 현장에 있던 병사에게는 당장 어떤 군복을 입고 어떤 무기를 들었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 어떤 생활을 꿈꿀 수 있느냐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 전쟁의 승패가 갖는 역사적 의미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다. 우리와 같은 대다수 범인들의 삶은 후세 사람들이 보면 별 의미없는 일상생활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실제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무수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과거를 살았던 사람들이 실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놀이를 하며 살았는지, 즉 과거 사람들의 실생활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이기도 하지만 기존의 사건 중심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것과는 또다른 면에서 무척 의미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탄생한 책이다. 책의 각 부분을 박물관의 각 전시실로 구분한 발상도 무척 참신하고 풍부한 사진자료와 삽화(그리고 삽화에 곁들여진 설명)를 통해 실제 눈으로 옛 사람들의 생활상을 경험할 수 있다. 과거 인물의 글을 통해 그 인물의 시점에서 그 시대를 재구성한 것도 무척 생동감이 있어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머릿속에 그 장면이 그려지는 듯하다. 처음에 책 표지만 보고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책을 다 읽고 나니 어른들을 위해서도 훌륭한 역사서로서 손색이 없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신정권시대 (p121 이하)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태우는 일이 불씨가 되었다가 20년 후 수박시합을 하다 늙은 대장군 이소응이 젊은 군사를 이기지 못하고 도망가는 것을 보고 한뢰가 이소응의 뺨을 치며 모욕을 가한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100여년 간의 무신정권 시대가 시작됨. (1170년~1270년)

1. 정중부, 이의방, 이고, 이의민

이고는 과대망상증에 걸려 왕인 명종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려 했다가 이의방과 채원에게 제거당함.

이의방은 그 후 실권을 잡고 승려 2천여명의 반란을 잔인하게 제압하며 권력을 휘두르다가 결국 정중부의 아들 정균(筠)과 승려 종참에게 살해됨. 그후 정중부 부자가 최고 권력을 잡게됨. 그러나 경대승에게 정중부 일가는 몰살당함.

이의민은 수박의 명수로 그로 인해 의종의 총애를 받아 별장이 된후 김보당의 난, 조위총의 난에서 공을 세워 권력을 잡게 됨. 의종을 수박기술을 이용해 살해하기도 함. 경대승이 권력을 잡았을 때는 잠시 숨어 있다가 그가 죽은 후 권력을 잡고 세 아들들과 함께 전횡을 부리다가 최충헌에게 제거됨.

2. 경대승

청주출신으로 아버지가 상장군이어서 무관이 됨. 아버지로부터 부당하게 착취한 토지를 물려받았으나 군인들에게 모두 나누어 줌. 호위병 허승, 김광립 등을 끌어들여 정중부 일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쟁취함. 그는 정균이 차지하고 있던 승선 벼슬을 문관들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사양하고 100명이 넘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경비를 서게 함. 그들이 머무는 곳을 도방이라 하는데 이전에 중방에서 정치가 이루어진 것과는 달리 도방은 정치기구는 아니었음. 무신세력을 평정한 뒤에는 벼슬 없이 집에서 지냈으나 큰 일이 있을 때는 궁궐에 나와 의사결정에 참여함. 도방의 군사들이 약탈을 하면 자신의 부하라도 서슴없이 제거함. 그렇게 5년을 지내다가 30의 나이에 병사함. 그는 무관이었으나 무신정권을 만들지 않았으며 문무관을 가리지 않고 비리를 저지르는 자들을 제거함. 그 방법이 지나치게 과감하긴 하였으나 자신이 권력을 잡으려 하지도 않았고 임금을 능멸하지도 않았으며 축재행각도 하지 않음. 그가 죽었을 때 백성들은 길에 나와 통곡하였다고 함. (무신정권시대 중간에 등장한 인물들 중 유일하게 멋진 인물이다.)

3. 최씨일가 - 최충헌, 최이, 최항, 최의(4대 62년)

동생인 최충수와 함께 이의민 일당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음. 명종을 폐하고 신종을 세움. 최충수가 왕에게 태자비를 내보내고 자신의 딸을 맞이하라고 강요한 일을 계기로 동생인 최충수와 대립을 하여 결국 최충수를 제거하고 권력을 독점함. 김준거, 박진재 등 많은 사람들이 반란을 꾀하였으나 모두 진압됨. 그는 벼슬을 돈으로 팔고 궁궐처럼 화려한 집에서 몇 천의 종을 거느리며 왕부럽지 않은 절대권력을 누리다가 1219년 71세의 일기로 역사에 오명을 남기고 죽음.

최이는 최충헌의 맏아들로서 최충헌의 권력을 승계함. 처음에는 좋은 정치를 펴려고 노력하는 듯 하였으나 곧 격구장을 위해 민가 수백채를 허는 등 만횡을 부림. 몽골이 침략하자 임금을 압박하여 1232년(고종 19) 강화도로 천도하게 함. 몽골에 강경책으로 일관하였고 그의 눈치를 보느라 임금을 비롯한 다른 이들이 유화책을 주장하지 못함. 몽골침략을 유발한 장본이라 할 수 있음. 강화도로 온 지 17년 만에 죽음.

최항은 최이가 기생으로부터 얻은 큰 아들로 최이가 죽은 뒤에 권력을 물려받음. 몽골에 대해 강경책으로 일관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감. 축재와 공포정치를 일삼다가 8년만에 죽음.

최의는 최항이 절의 종에게서 얻은 아들로 최항으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았으나 권력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임연 등이 이끄는 자신의 사병들에게 죽임을 당함. (1258년)

이후 임연 등 무신 잔당들이 권력을 휘둘렀으나 내부 분열을 거듭하다가 몽골의 후신인 원의 간섭과 지배를 받을 때인 1270년 종말을 맞이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