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의 등장과 개혁의 불길
공민왕은 21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가 원나라에서 10년간 숙위 생활(볼모로 잡혀 있는 것)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변발에 몽골 옷 차림이었다. 그러나 이연종의 간언으로(사실은 오랜기간 동안의 결심으로 인한 것이겠지만) 변발을 풀고 몽골 옷을 벗으며 고려 말기 미완의 자주적 개혁의 서막을 알린다.(p31)
공민왕 시대에는 기철, 김용의 반란 등 수많은 역모가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많은 반역을 겪으면 정말 왕노릇 하기 싫겠다는 생각이 계속 들 정도였다. 또한 원나라의 세력을 배경으로 한 간신들이 원의 순제와 그 주변의 환관과 기황후를 충동질하여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덕흥군을 추대하게 한 일도 있었다. 원나라에서의 숙위생활과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공민왕은 반원, 자주적인 사상을 갖게 되지 않았나 싶다. 이처럼 많은 난관과 위기가 있었으나 공민왕은 이를 잘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공민왕은 또한 원의 연호 사용을 거절하고 선왕의 시호와 국가의 제사 의식을 원래대로 회복하는 조치를 시행하였으며 변발을 금지하는 등 원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주적 정통성을 확립하는데 힘썼다.
구체적 개혁 (p56~)
기철 일당을 제거하고 원의 연호를 폐지하는 단계인 1356년(공민왕 5년)부터 시작되었다.
1. 원나라의 지시에 따라 인사권을 행사하던 정방을 폐지.
2. 권문세가들이 자행한 토지 점탈의 비리를 척결
3. 조세부정 개혁
4. 무당, 부호들의 비리 근절. 홀아비, 과부, 고아 구제.
5. 군사제도 개선.
신돈의 개혁정치
신돈의 원래 이름은 변조다.
공민왕이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칼로 자신을 죽이려고 할 때 한 승려가 구해주는 꿈을 꾸었는데 마침 김원명이 신돈을 데려와 인사시켰는데 그의 용모가 꿈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한 승려와 똑같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공민왕은 신돈을 자주 불러 설법을 들었고 후에는 그를 사부로 삼고 국정을 자문하였다. 공민왕은 기득권의 반발을 우려하여 신돈을 전면에 내세워 개혁을 단행하였다. 당시 조정관료는 기득권을 누려온 권문세가의 자손과 공민왕이 등장시킨 신진과 유생, 대사찰과 연결된 불교세력, 그리고 외침으로 성장한 무장세력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p108) 신돈은 많은 이들의 비판과 견제를 받았으나 공민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수차례 개각을 단행하여 마침내 거의 왕권의 대행자라고까지 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이때 그의 정식 직함은 51자로 김부식이 받은 24자의 직함보다 훨씬 길었다. (p110)
공민왕은 양민으로서 권문세가의 농노가 된 사람들을 양민으로 환원시키기 위해 형인추정도감을 한시적으로 설치하였으나 토지 문제를 도외시 하여 일정한 한계를 지녔다. 후에 형인추정도감은 신돈의 건의로 전민추정도감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신돈은 스스로 판사가 되어 권문세족의 농장의 무분별한 확대, 토지 및 농민 강탈, 부역 대상자의 은닉 등의 문제를 시정하려 하였다. 이 정책의 핵심은 농장에 부당하게 편입된 토지를 본래 주인에게 되돌려주고 농장에 소속된 일꾼을 양인으로 환원하여 국가의 부역을 지우겠다는 것이었다.(p115)
신돈은 또한 신진 유학세력을 등장시키고 과거제를 개선하는 정책도 폈다.(p122) 그리하여 몽골의 침략을 거치는 동안 기능이 거의 마비된 성균관의 건물 복구와 교육 내용의 개선을 맡기도 했다.
공민왕과 신돈의 허망한 최후
신돈은 여자를 밝히고 급진적인 개혁을 폈기 때문에 정적이 많았고 좋지 않은 소문도 많았다. 그런 일들로 궁지에 몰리자 공민왕을 죽이고 반역을 꾀하려 하였으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공민왕에게 잡혀 죽었다. (이 부분에 대해 저자는 조작의 냄새가 짙은 역모사건이라 하고 있다. 그 말에는 충분히 공감이 가지만 오골계와 백마를 잡아먹고 아들을 두었다는 사실에서 바로 궁지에 몰렸다고 넘어가는 것은 좀 비약이 심한 것 같다. 많은 사실이 생략되었겠지만 독자로서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공민왕이 신돈을 제거한 이유는 무엇일까?(p128)
1. 신돈의 개혁정책으로 기득권의 상당부분을 상실한 권문세가와 무장세력의 반대를 더이상 억누를 수 없어 신돈을 희생량으로 삼은 것이다.
2. 신돈이 키운 신진 유학자들이 성장하여 공민왕에게 친정체제를 요구하여쓴데 신돈은 신진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성리학적 소양이 없었다.
3. 원나라가 연경에서 쫓겨났고 명나라가 새 제국을 선포하고 중국의 실체로 떠올랐는데 고려는 친명 외교 노선을 추구하였고 신돈은 국제 정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해가 잘 안간다.)
공민왕은 말년(?)에 자제위와 두리속고치를 두어 고위층 자제들 중 미소년을 선발하여 집단으로 남색을 즐기고 소년들을 폭행하고 술주정을 하는 등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공민왕의 폭행과 답답한 생활에 불만을 품은 최만생이라는 자제위 소속의 청년 등에게 살해 당하였다. (참 허망한 죽음이다.)
신돈개혁 정치가 실패로 끝난 것만은 아니었다. 토지와 노비 정책은 뒷날 전면적인 토지 개혁이 있었을 때 하나의 모델이 되었고, 노비의 대우가 개선되는 결정적인 단초를 열었다. 그는 불승들에게 아련한 신화를 남겨주었고, 민중들의 가슴에 정신적인 주인으로 아로새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돈은 역사에 막된 인물로만 기록되어 있다.(p128) 신돈은 간음을 즐겨하며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면서 겉으로만 청렴한 척 한다는 등의 기록이 많고 공민왕도 나쁜 면이 부각되게 기록된 것이 많다. 이는 역성혁명을 통해 새로운 왕조를 연 이성계 일파가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역사를 왜곡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고 상당부분 공감이 간다.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자손으로 몰아세운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는 것이 실감나는 부분이다. 불과 수십년 전의 일, 아니 현재의 일도 지배적 세력의 이해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고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그것이 사실처럼 굳어져 버릴 수도 있는 것이 현실인데 하물며 수백년 전의 일이야 어떠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