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무제의 변덕과 조선의 굴종

明의 홍무제는 재위 30년 동안 나라의 기반을 다지면서 무수한 살육을 저지르고 신생 조선을 온갖 위협과 변덕로 못살게 굴었고, 조선은 이에 대해 비굴할 정도로 명나라에 사대의 예를 다하면서 굽실거렸다.

홍무제는 걸핏하면 조선이 명나라를 업신여긴다고 하며 군사를 일으킬 것이라고 위협하였고, 조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공물을 요구하고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면 위의 이유를 들어 조선을 힐난하였다.

그런 황제에 걸맞게 명나라 사신의 오만불손함도 하늘을 찌를 듯해서 어떤 사신은 조선에서 마련해준 옷을 술에 취한 채 갈기갈기 찢어 짓밟고 ' 이따위 너절한 옷을 입고 황제를 뵙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고 말겠다.'며 제 목을 칼로 찌르려는 추태를 부린 경우도 있었다.(p 90)

조선은 명나라의 요구로 10개월 동안 9,880마리의 말을 보내기도 하였다.(p 92)

조선에서 책봉을 요청하기 위해 파견한 사신을 억류한 경우도 많았으며(p 98)

예물로 보낸 금안장에 '천(天)'자가 쓰여져 있다는 이유로 조선에 재앙을 내릴 것을 위협하며 말 2만마리(!)를 요구하기도 하였다.(p 99) ...

조선이 역성혁명을 통해 이룩된 왕조라서 중국을 통해 정통성을 확인받고 체제의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의도와 필요성은 이해하지만, 이 부분을 읽으면 '조선은 배알도 없나?'는 생각만 들며 짜증이 솟아오른다. 그런 모욕과 수탈을 당했으면서도 단지 직접 침략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버이로 생각하며 명이 멸망한 이후에도 명을 그리워하다니...옛 사람의 사고의 틀에 한계가 있었겠지만, 정말 또라이 같은 짓이 아닌지...

그 덕분에 우리가 중국의 여러 소수민족과 달리 지금껏 독립된 국가를 이루고 있을 수 있었겠지만, 이 부분의 역사를 읽으면서 드는 씁슬함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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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1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어쩌다 아파서 병원에 한번 가게 되면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건강에 대한 감사함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병원이 직장인, 그 중에서도 가장 극적이고 처참한 상황이 많이 발생하는 곳에서 근무하는 일반 외과 의사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어떠할까?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위치에 있는 저자가 - 물론 엄청나게 따뜻한 마음을 가졌다는 점에서 평균적이지는 않지만 - 자신이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며 의사로서 겪은 일들을 담담하게, 그러나 가슴뭉클하게 풀어내는 이야기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이 책을 통해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이 내 몫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지금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데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웃에게 내민 그 손이 나에게 되돌아올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양심이라는 데에 공감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 책을 통해 희노애락의 극단이 교차하는 병원에서의 인간사... 의사로서의 고뇌, 의료와 관련된 여러가지 사회 문제,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솔직히 받아들이면서도 의사로서의 사명감과 따뜻한 마음(아마도 저자가 말하는 양심 아닐까)으로 끊임없이 이를 극복하려는 저자의 고분분투...를 생생하게 접할 수 있었다

일반인이 경험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외과 의사의 경험을 통해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가 분통이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병원에 가지 않고도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음을 감사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거의가 다 나와 같은 경험을 할 것이다. 다만 그러한 간접경험을 얼마나 오랫동안 간직하고, 생활에서의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일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고 한 가지 내 자신에게 한가지 물음을 묻게 된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그동안 너는 무엇을 하고 있었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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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부기 2005-07-20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동감~
 



아는 형의 싸이월드를 통해 처음으로 78 on the rise를 접하게 되었다. 사진과 글을 통해서 나는 막연히 맛있지만 약간 비싼 중국집, 특히 딤섬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고, 마침 삼성동에 갈 일이 있었던지라 여자친구와 함께 예약을 해서 방문하게 되었다.

음식을 다 먹고 난 지금 결론적으로 말해서 78 on the rise는 ‘꽝’이었다.

우리가 시킨 음식은 주말에만 가능한 딤섬 브런치 세트 (2만원짜리)였다. 음식의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하지만 강남 한복판에 맛있는 집이 어디 한둘이던가? 음식의 맛이란 괜찮은 음식점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지 않는가.

무언가 탁탁 맞아들어가지 않는다는 느낌은 음식을 시키기도 전에 시작되었다. 우리는 싸이월드의 글을 보고 딤섬을 먹으려고 왔다. 그런데 메뉴판을 아무리 뒤져봐도 딤섬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쉽게 사람 부르는 것을 잘 못하는 나는 메뉴판을 3-4번 정독하고서야 그 메뉴판에는 딤섬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런데 요리사들이 요리하는 곳 상단에는 딤섬 메뉴가 분명히 적혀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종업원에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때서야 비로서 딤섬 메뉴판을 주는 것이었다. 물론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일이 겹치고 난 지금 되돌아보면 모두가 시빗거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시킬 줄 몰라 세트메뉴를 시키기로 했다. 딤섬은 크게 골드와 실버로 나누어져 있어 세트메뉴당 골드 2개, 실버 3개..이런 식으로 고르고 식사를 별도로 고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세트 메뉴를 시키려면 5가지 종류의 딤섬을 시켜야 하는데 종업원이 다 정했냐며 옆에서 서 있는데 5가지를 모두 불러주려니 무언가 좀 어색했다. 차라리 세트메뉴를 시키는 사람을 위해서 손님이 체크표시를 할 수 있는 쪽지를 나누어 주었으면 어땠을지. 뭐 그것도 사소한 것이다. 약간 불편하긴 했지만 말이다.

내가 가까스로 5가지를 일일이 불러주면서 고르고 난 뒤에 여자친구도 골드에서 2개를 고르고 나와 다른 것을 고르기 위해 내가 실버에서 무엇을 골랐는지 물어보았고 나는 이미 내가 무엇을 골랐는지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종업원이 내가 무엇을 골랐는지 불러주었지만 내가 고른 딤섬들을 메뉴판에서 일일이 찾아 대조하는 수고를 하는 것은 너무나도 수고스런 일이었다. 결국 여자친구는 실버에서는 나와 똑같은 것을 하기로 했다. 그때까지는 우리는 세트메뉴가 딤섬 5개와 식사로 구성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양이 좀 적겠다는 식으로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딤섬이 나오자 딤섬 하나를 고를 때마다 딤섬이 2개씩 나오는 것이었다. 이런 젠장~ 말을 해 주었어야지. 그랬으면 그냥 다 다른 것으로 10개를 골랐으면 되는 것을...이런 생각이 딤섬이 나오자 마자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우리가 열심히 고르고 있을 때 종업원은 그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뭐, 그것도 괜찮다. 처음에 5개만 먹을 생각을 하고 있다가 10개가 나왔으니까. 사실 세트메뉴의 양은 꽤 많다. 그것은 만족스운 점이었다.

아까 말했듯이 맛은 꽤 괜찮았다. 감동의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런데 여자친구가 간장에 고춧가루를 뿌리려다가 질겁을 하고 말았다. 고춧가루에 곰팡이가 폈다는 것이었다. 나는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고급 음식점에서 음식에 곰팡이라니...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것 아닌가. 어두워서 잘못 보았겠지. 그리고 나는 고춧가루 통을 열어보았는데 그것은 곰팡이가 아니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히 곰팡이였다. 먼지 같기도 하고 솜에 털이 막 삐져나와 있는 것 같기도 한 그것은 곰팡이였다. 참, 황당했다. 나는 음식에 대해 그리 까다롭지 않은 편이라 그것만으로 항의를 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그냥 믿기지 않았을 뿐이다. 분식집도 아니고 이런 고급 음식점에서...(지금 생각해보면 고급 음식점이란 것은 내가 싸이월드를 통해서 받은 이미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세트메뉴의 값이 7만원짜리도 있었던 것을 보면 고급 음식점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다.)

항의를 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종업원에게 알릴 필요는 있었다. 직접 음식은 아니지만, 고춧가루에 곰팡이가 피다니...종업원에게 그 사실을 말했다. 그러자 종업원은 몇 마디 얼버무리더니 스리슬쩍 고춧가루 통을 들고 가버렸다. 죄송하다는 우물거림을 들은 것도 같았다. 곰팡이를 보았을 때도 사실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는데 종업원이 별일 아닌 듯이 고춧가루 통을 들고 나가자 기분이 좀 나빠졌다. 분식집도 아닌 고급 음식점에서는 적어도 매니저가 와서 사과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나...하는 생각과 함께 78 on the rise가 내가 생각하던 꼭 그런 음식점이 아니고 은근히 빈틈이 많은 음식점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식사를 계속했다. 그때까지도 식욕이 그리 떨어진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돼지 군만두를 먹어보던 여자친구가 맛이 이상하다고 했다. 부추가 쉰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사실 잘 몰랐다. 냄새를 맡아보니 시큼한 것 같기는 한데, 꼭 상했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부추 색깔도 약간 노르스름 해 졌기는 한데 혹시 식초를 넣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여자친구는 부추가 상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고, 고춧가루에서 곰팡이가 있었다는 사실이, 돼지군만두가 상했을 수 있다는 사실의 개연성을 높여주고 있었다. 이제껏 음식점을 다니면서 음식이 상했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하물며 이런 고급(?) 음식점에서야...그런데 곰팡이를 본 후로 나는 돼지군만두가 쉬지 않았다고도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종업원을 불렀고, 결국 종업원은 다른 만두를 가져다 주었다. 부추가 상한 것은 아니고 중국부추라서 좀 시큼한 냄새가 나는 것이라고...사실 지금도 그 만두가 상했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 설명을 듣고 쉽게 수긍이 가지 않았을 뿐이다. 차라리 식초를 뿌렸다고 했으면 쉽게 믿었을 텐데.

아무튼 싸이월드를 보고 기대에 부풀어 예약을 하고 찾아간 78 on the rise는 우리에게 그와 같은 해프닝을 안겨 주었다. 사실 지금도 그 음식점에 크게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종업원이 불친절한 것도 아니었다. 음식도 먹을 만했다. 다만 일련의 사태 때문에 음식을 먹고 나서 만족스럽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연속된 해프닝은(곰팡이 하나였다면 너그럽게 넘어가 줄 수도 있겠지만...넘어갈 수 없는 문제인가? ^^;;) 음식점의 운영과 음식관리에 무언가 상당한 허점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78 on the rise는 종업원의 서비스와 음식의 맛, 위생관리 면에서 정말 괜찮은 고급 중국식 레스토랑이라고 하기에는 80% 정도 모자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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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사과 2005-07-24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이름만 그럴듯하게 내 걸고 서비스나 음식면에서는 떨어지는 가게가 많지요.그런데도 사람이 몰리는 것을 보면 광고의 효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홈페이지같은 곳에 맛집을 소개해놓으면 그걸 보고 그 음식점에 가는 사람이 한 둘이겠습니까? 저번에 저도 스파게티전문점에 갔었습니다. 볼...무슨 스파게티를 시켰는데 제 것만 탔더군요. 제 친구들은 오븐스파게티를 먹었기 때문에 별 지장이 없었는데..저는 다른 걸 시켰더니 타서 먹는 내내 탄네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심했던 저는 한 마디도 못하고 탄 음식을 다 먹고 나왔었죠.많이 억울했었습니다. 그 곳은 막 개업한 집이 었는데...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외로운 발바닥 2005-07-24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간사과님 반갑습니다. 첫 외부 방문객이라 긴장이..^^;; 혹시 제가 아는분인지...
저도 예전에는 소심해서 음식점에서 음료수 리필 시키는 것도 주저하면서 했었죠. 지금도 뭐 크게 다르진 않지만. 그래도 비싼 돈 주고 먹는 바에야 최소한의 이의제기는 할 권리가 있겠죠. 그리고 요즘은 정말로 막나가는 음식점이 아니고서는 손님들의 문제제기를 무시하지는 않을테니까요.

우기부기 2005-07-26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8...가 80%만족이라니, 말도 안 된당. 40%라면 모를까..
기본이 안 되어 있는 음식점이야. 곰팡이에 중국산 쉰 부추라니.. 별루다. 쳇!

외로운 발바닥 2005-07-31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0% 부족하다는 뜻, 즉 20% 만족이라는 뜻인데...
글 안 읽었지? -0-

우기부기 2005-08-01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었어읽었어. 체쳇!
너무 길어서 부족을 만족으로 생각한 거지. 으음..
 

고토수복의 노력과 유익의 귀부

1370년 공민왕은 이성계를 보내 요동에 있는 동녕부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성계는 크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 지역의 사인테무르가 김백안과 공모하여 동녕부를 근거로 군사를 일으켰다. 고려군은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사방에 방을 붙여 요동일대가 고려의 땅임을 공표하였다. 그러나 말로만 밝히고 실제로 그 땅을 차지하고 다스리지는 않았는 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안정복은 이를 매우 안타까워했다.(p157)

저자는 이에 대해 왜구의 침입을 막아야 하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지적이라고 반박하고 있으나 유익의 귀부와 위화도 회군에 대해서는 비판을 같이 하고 있다.

유익의 귀부란 요양성의 행정 책임자인 유익이 고려에 귀부하고자 하였으나 고려 조정에서 아무런 회답이 없어 유익이 관할 지역인 금주, 복주, 개주, 해주 등지를 명나라에 귀부하여 명나라가 아무런 힘을 들이지 않고 이 지역을 손에 넣게 된 사건을 말한다.(예전에야 국토 개념이 희박했겠지만, 우리 조상들이 조금만 더 땅 욕심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위화도 회군

우왕과 최영은 요동정벌을 은근히 추구하였고 마침 명의 홍무제가 철령위를 설치하여 요동 지역을 지배하려 함에 따라 철령 이북을 명에 내어 줄지 고려의 국토로서 수호할 것인지가 문제가 되었다. 우왕과 최영은 요동정벌을 강하게 추진하여 이성계를 지휘관으로 삼아 요동정벌에 나서게 했다.

이성계는 소위 '사불가론'을 들어 반대의사를 밝혔다. 즉,

1.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옳지 못하다.

2.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3. 왜구들이 그 틈을 탈 것이다.

4. 여름비로 활에 입힌 아교가 풀어지고 전염병이 돌 것이다.

는 이유를 들었으나 요동성이 텅텅 비어 큰 희생을 치르지 않고 쉽게 차지할 수 있다는 등의 좋은 조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고 '이소역대(以小逆大)'를 처음에 든 것에서부터 이성계의 사대성을 엿볼 수 있다. 이성계 일파는 결국 냇물이 많아 건너기 힘들다는 핑계를 대고 위화도에서 의주로 회군하였고 거의 모든 군사를 요동정벌에 동원하였기 때문에 우왕과 최영은 반란을 진압할 수도 없이 제압당하고 말았다.

이성계 일파는 우왕은 간통과 놀이를 일삼으며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고 하고 최영은 함부로 사람을 죽였다는 등으로 헐뜯어 기록했다.(헐뜯어도 그 정도밖에 흠잡을 것이 없었다는 점에서도 최영은 대단한 사람같다.)

명은 요동에 정요위를 두어 고려의 진출을 방해하고 북권과의 교류 통로를 막았다. 게다가 철령위를 세우려 하면서 한마디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참을 두고 군사를 배치하였다. 철령위 지방은 여진 또는 원과 피나는 싸움을 벌여 확보한 고려의 영토였음에도...또한 명은 고려가 도저히 따를 수 없을 정도의 무리한 요구를 많이 했다. 전략적으로도 요동성에 군사가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투도 해보지 않고 큰 나라를 거스를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위화도에서 회군한 것은 우리 역사의 큰 오점으로 남아있다.(p224..) 이성계 일파는 이와 같이 사대정책을 맹목적으로 추진하여 '사이불복(事而不服)'의 외교 전통을 뭉개버렸다. 이러한 사대외교 노선은 조선이 멸망할 때가지 계속되었다.(p22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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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의 등장과 개혁의 불길

공민왕은 21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가 원나라에서 10년간 숙위 생활(볼모로 잡혀 있는 것)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변발에 몽골 옷 차림이었다. 그러나 이연종의 간언으로(사실은 오랜기간 동안의 결심으로 인한 것이겠지만) 변발을 풀고 몽골 옷을 벗으며 고려 말기 미완의 자주적 개혁의 서막을 알린다.(p31)

공민왕 시대에는 기철, 김용의 반란 등 수많은 역모가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많은 반역을 겪으면 정말 왕노릇 하기 싫겠다는 생각이 계속 들 정도였다. 또한 원나라의 세력을 배경으로 한 간신들이 원의 순제와 그 주변의 환관과 기황후를 충동질하여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덕흥군을 추대하게 한 일도 있었다. 원나라에서의 숙위생활과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공민왕은 반원, 자주적인 사상을 갖게 되지 않았나 싶다. 이처럼 많은 난관과 위기가 있었으나 공민왕은 이를 잘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공민왕은 또한 원의 연호 사용을 거절하고 선왕의 시호와 국가의 제사 의식을 원래대로 회복하는 조치를 시행하였으며 변발을 금지하는 등 원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주적 정통성을 확립하는데 힘썼다.

구체적 개혁 (p56~)

기철 일당을 제거하고 원의 연호를 폐지하는 단계인 1356년(공민왕 5년)부터 시작되었다.

1. 원나라의 지시에 따라 인사권을 행사하던 정방을 폐지.

2. 권문세가들이 자행한 토지 점탈의 비리를 척결

3. 조세부정 개혁

4. 무당, 부호들의 비리 근절. 홀아비, 과부, 고아 구제.

5. 군사제도 개선.

신돈의 개혁정치

신돈의 원래 이름은 변조다.

공민왕이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칼로 자신을 죽이려고 할 때 한 승려가 구해주는 꿈을 꾸었는데 마침 김원명이 신돈을 데려와 인사시켰는데 그의 용모가 꿈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한 승려와 똑같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공민왕은 신돈을 자주 불러 설법을 들었고 후에는 그를 사부로 삼고 국정을 자문하였다. 공민왕은 기득권의 반발을 우려하여 신돈을 전면에 내세워 개혁을 단행하였다. 당시 조정관료는 기득권을 누려온 권문세가의 자손과 공민왕이 등장시킨 신진과 유생, 대사찰과 연결된 불교세력, 그리고 외침으로 성장한 무장세력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p108) 신돈은 많은 이들의 비판과 견제를 받았으나 공민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수차례 개각을 단행하여 마침내 거의 왕권의 대행자라고까지 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이때 그의 정식 직함은 51자로 김부식이 받은 24자의 직함보다 훨씬 길었다. (p110)

공민왕은 양민으로서 권문세가의 농노가 된 사람들을 양민으로 환원시키기 위해 형인추정도감을 한시적으로 설치하였으나 토지 문제를 도외시 하여 일정한 한계를 지녔다. 후에 형인추정도감은 신돈의 건의로 전민추정도감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신돈은 스스로 판사가 되어 권문세족의 농장의 무분별한 확대, 토지 및 농민 강탈, 부역 대상자의 은닉 등의 문제를 시정하려 하였다. 이 정책의 핵심은 농장에 부당하게 편입된 토지를 본래 주인에게 되돌려주고 농장에 소속된 일꾼을 양인으로 환원하여 국가의 부역을 지우겠다는 것이었다.(p115)

신돈은 또한 신진 유학세력을 등장시키고 과거제를 개선하는 정책도 폈다.(p122) 그리하여 몽골의 침략을 거치는 동안 기능이 거의 마비된 성균관의 건물 복구와 교육 내용의 개선을 맡기도 했다.

공민왕과 신돈의 허망한 최후

신돈은 여자를 밝히고 급진적인 개혁을 폈기 때문에 정적이 많았고 좋지 않은 소문도 많았다. 그런 일들로 궁지에 몰리자 공민왕을 죽이고 반역을 꾀하려 하였으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공민왕에게 잡혀 죽었다. (이 부분에 대해 저자는 조작의 냄새가 짙은 역모사건이라 하고 있다. 그 말에는 충분히 공감이 가지만 오골계와 백마를 잡아먹고 아들을 두었다는 사실에서 바로 궁지에 몰렸다고 넘어가는 것은 좀 비약이 심한 것 같다. 많은 사실이 생략되었겠지만 독자로서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공민왕이 신돈을 제거한 이유는 무엇일까?(p128)

1. 신돈의 개혁정책으로 기득권의 상당부분을 상실한 권문세가와 무장세력의 반대를 더이상 억누를 수 없어 신돈을 희생량으로 삼은 것이다.

2. 신돈이 키운 신진 유학자들이 성장하여 공민왕에게 친정체제를 요구하여쓴데 신돈은 신진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성리학적 소양이 없었다.

3. 원나라가 연경에서 쫓겨났고 명나라가 새 제국을 선포하고 중국의 실체로 떠올랐는데 고려는 친명 외교 노선을 추구하였고 신돈은 국제 정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해가 잘 안간다.)

공민왕은 말년(?)에 자제위와 두리속고치를 두어 고위층 자제들 중 미소년을 선발하여 집단으로 남색을 즐기고 소년들을 폭행하고 술주정을 하는 등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공민왕의 폭행과 답답한 생활에 불만을 품은 최만생이라는 자제위 소속의 청년 등에게 살해 당하였다. (참 허망한 죽음이다.)

신돈개혁 정치가 실패로 끝난 것만은 아니었다. 토지와 노비 정책은 뒷날 전면적인 토지 개혁이 있었을 때 하나의 모델이 되었고, 노비의 대우가 개선되는 결정적인 단초를 열었다. 그는 불승들에게 아련한 신화를 남겨주었고, 민중들의 가슴에 정신적인 주인으로 아로새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돈은 역사에 막된 인물로만 기록되어 있다.(p128) 신돈은 간음을 즐겨하며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면서 겉으로만 청렴한 척 한다는 등의 기록이 많고 공민왕도 나쁜 면이 부각되게 기록된 것이 많다. 이는 역성혁명을 통해 새로운 왕조를 연 이성계 일파가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역사를 왜곡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고 상당부분 공감이 간다.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자손으로 몰아세운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는 것이 실감나는 부분이다. 불과 수십년 전의 일, 아니 현재의 일도 지배적 세력의 이해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고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그것이 사실처럼 굳어져 버릴 수도 있는 것이 현실인데 하물며 수백년 전의 일이야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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