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토수복의 노력과 유익의 귀부

1370년 공민왕은 이성계를 보내 요동에 있는 동녕부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성계는 크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 지역의 사인테무르가 김백안과 공모하여 동녕부를 근거로 군사를 일으켰다. 고려군은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사방에 방을 붙여 요동일대가 고려의 땅임을 공표하였다. 그러나 말로만 밝히고 실제로 그 땅을 차지하고 다스리지는 않았는 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안정복은 이를 매우 안타까워했다.(p157)

저자는 이에 대해 왜구의 침입을 막아야 하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지적이라고 반박하고 있으나 유익의 귀부와 위화도 회군에 대해서는 비판을 같이 하고 있다.

유익의 귀부란 요양성의 행정 책임자인 유익이 고려에 귀부하고자 하였으나 고려 조정에서 아무런 회답이 없어 유익이 관할 지역인 금주, 복주, 개주, 해주 등지를 명나라에 귀부하여 명나라가 아무런 힘을 들이지 않고 이 지역을 손에 넣게 된 사건을 말한다.(예전에야 국토 개념이 희박했겠지만, 우리 조상들이 조금만 더 땅 욕심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위화도 회군

우왕과 최영은 요동정벌을 은근히 추구하였고 마침 명의 홍무제가 철령위를 설치하여 요동 지역을 지배하려 함에 따라 철령 이북을 명에 내어 줄지 고려의 국토로서 수호할 것인지가 문제가 되었다. 우왕과 최영은 요동정벌을 강하게 추진하여 이성계를 지휘관으로 삼아 요동정벌에 나서게 했다.

이성계는 소위 '사불가론'을 들어 반대의사를 밝혔다. 즉,

1.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옳지 못하다.

2.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3. 왜구들이 그 틈을 탈 것이다.

4. 여름비로 활에 입힌 아교가 풀어지고 전염병이 돌 것이다.

는 이유를 들었으나 요동성이 텅텅 비어 큰 희생을 치르지 않고 쉽게 차지할 수 있다는 등의 좋은 조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고 '이소역대(以小逆大)'를 처음에 든 것에서부터 이성계의 사대성을 엿볼 수 있다. 이성계 일파는 결국 냇물이 많아 건너기 힘들다는 핑계를 대고 위화도에서 의주로 회군하였고 거의 모든 군사를 요동정벌에 동원하였기 때문에 우왕과 최영은 반란을 진압할 수도 없이 제압당하고 말았다.

이성계 일파는 우왕은 간통과 놀이를 일삼으며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고 하고 최영은 함부로 사람을 죽였다는 등으로 헐뜯어 기록했다.(헐뜯어도 그 정도밖에 흠잡을 것이 없었다는 점에서도 최영은 대단한 사람같다.)

명은 요동에 정요위를 두어 고려의 진출을 방해하고 북권과의 교류 통로를 막았다. 게다가 철령위를 세우려 하면서 한마디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참을 두고 군사를 배치하였다. 철령위 지방은 여진 또는 원과 피나는 싸움을 벌여 확보한 고려의 영토였음에도...또한 명은 고려가 도저히 따를 수 없을 정도의 무리한 요구를 많이 했다. 전략적으로도 요동성에 군사가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투도 해보지 않고 큰 나라를 거스를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위화도에서 회군한 것은 우리 역사의 큰 오점으로 남아있다.(p224..) 이성계 일파는 이와 같이 사대정책을 맹목적으로 추진하여 '사이불복(事而不服)'의 외교 전통을 뭉개버렸다. 이러한 사대외교 노선은 조선이 멸망할 때가지 계속되었다.(p22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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