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사 - 단군에서 김두한까지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1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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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사를 읽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 이다. 처음에 읽었을 때도 나름대로 상당히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는데, 최근 역사서에 관심을 약간 갖게 된 이후에 다시 읽었을 때도 그 충격은 그대로, 아니 더 커졌다. 그리고 그 충격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그렇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한번 읽고도 쉽게 잊어버린 내 자신이였던 것 같다.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사는 그렇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것이 충격이였던 까닭은 지금 돌이켜보면, 한홍구 교수의 날카로운 지적이 우리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고, 그러한 치부가 이제껏 권력에 의해 감쪽같이 가려졌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치부에 대한 흔적들이 너무나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제도화된 교육의 힘에 의해, 때로는 하루하루 사는 것이 바쁘기에, 우리는 우리사회의 치부를 애써 외면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책속의 내용들은 우리가 평소에 별 생각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던 것들의 어두운 이면을 들춰낸다. 우리 사회가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통해 어떻게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같은 민족의 피를 빨아먹고 기생한 친일파들이 사회적 제거를 면하고 지배세력으로 둔갑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런 역사적 배경에 반공주의가 어떻게 작용했는지에 대한 밑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맥아더 장군 동상에 관한 글도 신선했다. 단순히 맥아더 장군이라고 하면, 어린 시절부터 받아온 반공교육의 탓인지는 몰라도 내게는 친근하고 우리 나라의 존립에 큰 기여를 한 사람의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한발자국 물러서서 보면 결국 맥아더의 동상은 자기 나라에 제3국 군인의 동상을 세운 것이고, 임진왜란 때 조선에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사당을 짓고 그를 숭배하는 것과 맥아더에 대한 나의 감정이 본질상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의 동상은 큰 이질감 없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반면 명나라 장수의 사당에는 사대주의의 굴욕감이 느껴지는 것은 아직도 내 자신이 반공교육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태극기의 슬픈역사도 참으로 놀랍고도 안타까웠다. 우리나라의 국기인 태극기, 서울 시청 광장과 월드컵 경기장을 수놓았던 태극기가 중국인의 기본 도안에 일본에 사죄하러 가는 일본 국적의 배 안에서 영국인 선장을 산파로 하여 조선사람들에게 선보이기도 전에 일본에 나부꼈다는 사실(p53)은 국사책에서 배울 수 없었던 우리민족의 고난사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물론 한홍구 교수의 모든 주장에 공감이 가는 것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여중생 사망사건을 다룬 ‘반미감정 좀 가지면 어때?’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 없는 부분도 꽤 있었다. 나도 미국의 신제국주의적 정책과 거만한 일방주의에 반감을 가지고 있지만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서해교전 사건과의 극단적으로 대조되었던 여중생 사망사건에 대해 저자만큼의 큰 역사적 의의를 발견하기는 솔직히 쉽지 않았고 지금도 그 생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반미냐 아니냐를 놓고 사회전체가 극단적 대립을 보이는 우리 사회에서 신세대적인 방식으로 반미를 외칠 수 있게 된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겠지만 사건의 본질에 비해 너무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지 않나 싶다.

이처럼 대한민국史에는 암울했지만 치열했던 독재정권 시대를 직접 겪지 못한 세대들에게는 충격적이지만, 역사적 진실에 한발자국 더 다가갈 수 있는 단초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 진실에 다가갈수록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당성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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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는 우리역사 - 전면개정판
한영우 지음 / 경세원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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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를 너무 몰라서 사극을 보아도 흥미를 느낄 수 없었던 점이 아쉽고 부끄러워서, 우리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이라도 갖추자는 의도에서 서점 역사 코너를 뒤적이다가 찾은 책이 ‘다시 찾는 우리역사’였다. 일단 역사적 배경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한권으로 우리 역사를 훑어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고, 저자가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라는 점도 믿음이 갔다.

그리고 이 책을 산지 약 1년이 흘렀다. 그때 이 책을 사면서 읽기 시작한 ‘이이화의 한국사이야기’를 병행해서 읽다보니 시간도 걸리고 중간중간 다른 책을 읽다보니 이 책은 고려시대까지 읽고 손을 놓아버렸던 것이다. 그동안 약간의 역사책을 읽다 보니 애당초 우리나라 전체의 역사를 한권의 책에 집어 넣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조금은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후 이 책을 재빨리 마저 읽고 난 뒤에 여러 가지 실망도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한권이라는 말도 안되는 분량상의 제약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나 비평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그래도 결코 짧지 않고 무수한 사건이 있었던 우리 역사를 크게 빠지는 부분없이 한권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은 저자덕이 아닌가. 어차피 한권으로 된 우리역사 전반에 관한 책은 앞으로 있을 심도있는 독서나 공부에 대한 개론서 역할을 하는 것이니 애당초 나의 불만이 지나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는 이 책에 비교적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내용면에 대해 간단한 분석을 하자면, 저자는 고대, 중세사에서는 비교적 전통적인 학설에 충실하며 새로운 학설을 간단히 소개하고 그에 대한 가벼운 반박을 달고 있으며 조선에 대해서는 사대주의적이라는 비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호의적인 시선을 보인다. 사대주의를 두둔하는 듯한 서술에는 공감할 수 없었으나 조선시대의 유교문화에서 나름대로의 긍정적 기능을 발견하려고 한 것은 참신했고, 민족적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저자의 열의가 느껴졌다. 조선말과 대한제국으로 이어지는 일제를 포함한 외세의 침략기에 대한 서술은 문체가 지나치게 담담하여 좀 거북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우리가 기존에 너무 그 시대의 역사를 주관적으로 바라본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게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근현대사 부분은 남북한 각자의 정치, 경제, 사회적 발전과정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있게 잘 서술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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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의 삶은 9.11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질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9.11테러는 미국인들의 삶을 엄청나게 바꾸어 놓았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심장부에 테러리스트의 여객기 자체가 미사일처럼 꽃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을 어떻게 미국인들이 잊을 수 있을까? 물론 9.11테러 자체의 조작가능성을 주장하는 견해들도 많고(대표적으로 마이클 무어의 ‘Hey, Dude. Where's my country?' 등..) 개인적으로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9.11 테러를 계기로 미국의 극우세력들이 미국인들의 공포심을 악용하여 테러를 방지한다는 미명하에 전 사회적인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사건이 자작극인지 여부에 관계없이 9.11 테러 현장 또는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 사건은 정말 충격적이고 아마 평생 동안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삶의 패턴을 바꿔 놓을 것이다.

논의가 약간 벗어 났는데 9.11 테러나 역사적인 화재나 비행기 참사의 경우 반응할 여유도 없이 죽음을 맞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대피할 상당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여 죽음을 맞는 경우도 많이 있다고 한다. 타임지의 이 기사는 9.11 테러를 중심으로 바로 그러한 대참사의 순간에 살아날 기회가 있는 경우에도 사람들이 얼마나 소극적으로 반응할 수 있고 그 결과 처참한 결과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9.11 테러 당시 제1타워 73층에 있던 제대뇨씨는 폭발소리를 들었고 건물이 흔들리며 쓰러져버릴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제대뇨씨는 무슨 일이냐고 소리쳤지만-그녀가 본능적으로 재빨리 빠져 나온다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내심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다가와 ‘아무것도 아니야. 걱정하지마. 그건 니가 착각한 거야.’라고 말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이상한 반응은 9.11 테러에서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 제대뇨씨는 건물 밖으로 재빨리 대피하라는 동료의 고함소리를 듣고 건물을 빠져나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우리의 삶에서 9.11 테러나 큰 화재사건은 지극히 비일상적인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평소에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정작 그런 극히 예외적인 불행이 닥쳐올 때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리 없어.’라는 생각으로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의심하고 부인하려는 반응을 보인다. 이것을 정상상황선입견(normalcy bias)이라 하는데 이러한 경향은 사람들이 화재 등의 경우 건물에서 재빨리 빠져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흔히 발생한다.

예상치 못한 재난 상황에서 10-15%의 사람들은 냉정을 유지하고 재빨리 가장 효율적으로 대처한다. 또 다른 15% 정도의 사람들은 냉정을 읽고 울거나 비명을 지르면서 대피를 지연시킨다. 나머지 70-75%의 사람들은 놀라고 당황스러워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두뇌는 새로운 상황, 특히 그런 상황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경우에는 주어진 정보를 분석하고 상황에 대처하는데 있어 많은 시간이 걸린다. 인간행동 전문가의 말처럼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경우에 훨씬 더 적절하게 행동한다. 따라서 화재나 테러와 같은 예상치 못한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그런 돌발상황이 발생하였을 때 어떻게 할 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결국 그에 관한 교육이 필요하다.

화재와 같은 재난상황을 경험해 보지 못한 내가 지하철을 타고 있던 중에 대구 지하철 참사와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고 치자. 처음에 연기가 발생하면서 매쾌한 냄새가 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고서도 섣불리 소리를 치거나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키지 못할 것이다. 성격이 소극적이라서 먼저 그런 행동을 하기도 쉽지 않겠지만 불길에 직접적인 위협을 느끼거나 다른 사람들이 대피하는 등 행동을 취하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단순한 기계 고장이겠지. 뭐 별일 있겠어?’라는 생각으로 적절한 행동을 취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것이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다. 그런데 그렇게 낭비한 몇 분 또는 몇 십초에 내 생사가 갈릴 수도 있는 것이다.

조그만 연기나 싸이렌 소리에도 극단적인 공포심을 느끼면서 과도한 반응을 보이거나 서로를 불신하게 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현재 미국 사회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보고 있노라면 세계를 선도하는 민주국가 미국이 맞는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많다. 그러나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사건, 수많은 화재 참사 사건을 겪은 우리 나라의 경우 그러한 참사를 겪으면서 실질적으로 어떠한 개선책이 마련되었는가 의문이다. 형식적인 소방규정의 강화 외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그러한 예상치 못한 재난이 발생했을 때 개개인이 어떻게 반응하여야 하는지 교육을 하고 실제로 훈련을 하게 하는 것 아닐까. 전국민에게 공포심을 조장한다는 비판도 있긴 하지만, 그래서 미국에서와 같은 전문적인 연구나 그에 따른 학교와 현장에서의 교육을 기대하기는 불가능 하지만, 적어도 그런 시각에서의 연구와 교육은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재난 상황에 놓고 상상해 보자. 그리고 어떻게 반응할지,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떠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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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2disc) - 할인행사
프란시스 로렌스 감독, 키아누 리브스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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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을 보게 된 것은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통해 본 멋진 특수효과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괴물 같은 것이 사람에서 튀어나왔는데 그것이 상당히 자연스러워 보였고 액션의 규모도 컸던 것으로 기억에 남았나 보다. 그래서 여자친구를 설득하여 DVD를 빌려 보았는데...보자고 한 것이 민망할 정도로 영화는 형편없었다.

키에누 리브스가 나온다는 점 말고는 3류 액소시스트 영화의 범주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듯하다. 적어도 악령의 목적이나 악령이 깃든 물건에 대한 최소한의 논리적인 배경도 전혀 없으며 주인공의 능력이나 캐릭터에 대한 설명도 전혀 없다. 악마의 아들이 왜 여주인공을 영매로 삼으려는 지도 불분명하다. 키에누 리브스가 현세에 침입한 악마의 아들을 제거하고 세상을 구한다는 지극히 단순한 줄거리만으로 영화를 억지로 끌어간다는 느낌이다.

배후로 등장하는 천사가 어설픈 자기 합리화를 하는 부분이나, 주인공 남녀가 사랑에 빠지려는 듯한 장면에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피곤해서 이기도 했지만 최근에 영화를 보면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졸았던 적이 없을 정도로 보고 나면 왜 흥행에 실패했는지를 절실히 느낄 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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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부기 2005-12-18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 좀 별로였지. ㅋ
 
우리 역사 최전선
허동현·박노자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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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근대 100년의 역사에 대해 개인주의적 진보주의자 박노자 교수와 건강한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허동현 교수가 치열한 논쟁을 벌인다. 100년전 개화기와 현재의 국제정세가 놀랄 만큼 유사하고, 과거의 뼈아픈 경험으로부터 역사점 교훈 내지 시사점을 얻고자 하는 점은 두 교수 모두 공통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난 100년의 사건들을 바라보고 분석하는 틀은 두 교수가 크게 다르다.

박노자 교수는 우리 사회에서 결코 자생적으로는 탄생하기 힘든 배경을 지닌 한국인이다. 외모만으로는 아직도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하기 어려울 지도 모르겠지만, 그가 가진 한국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애정은 어느 토종 한국인 못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한국 사회와 역사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은 신선하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한국사회와 역사를 제3자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무척 진보적이다. 그의 지적은 기존 이론과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을 까뒤집는다. 적어도 그에 비하면 상당히 보수적인 기존 교육을 받은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에 반해 박노자 교수의 공격적인 지적에 대해 주로 반박글을 쓴 허동현 교수의 글을 읽으면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이론이나 상식들이 완전히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고, 어떤 점에서는 문제가 있지만 박노자 교수의 지적에도 이런 문제점이 있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왠지 모를 안도감 같은 느낌이랄까.

두 교수의 논쟁을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근대화에 끼친 일본의 영향력을 논함에 있어서도 박노자 교수는 일본이 만든 ‘국민’이라는 개념에 주목하여 개개인에 앞서 사회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현상이 지금도 잔존하고 있음을 지적함에 반해 허동현 교수는 일본을 통해 번역된 근대라는 논점을 중심으로 아직도 우리 사회가 그로 인해 정체성의 혼란에 빠져 있다고 지적한다.

구한말 위정척사파 최익현의 평가에 관해서는 박노자 교수는 최익현을 빈라덴에 비유하면서 그의 자주성을 높이 평가하며 후기 자본주의 사회 지식인의 비애를 부각시킴에 반해 허동현 교수는 최익현은 몽상가에 불과하며 일부 긍정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는 있으나 결국 시대 흐름에 역행하였다고 주장한다. 박노자 교수는 자주성과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여 미군의 한국 주둔에 반대하며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미국의 패권에 대항하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지역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까지 제시한다. 그에 반해 허동현 교수는 현실적인 상황을 중시하여 세계적 패권국가인 미국의 존재와 영향력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책에는 우리의 근대사의 여러 사건들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 두 교수의 논쟁의 핵심적인 사항의 하나는 근대화를 보는 관점의 차이에 있는 것 같다. 역사 발전의 보편적 과정 내지 단계로서 근대화를 인정할 수 있느냐가 여러 논쟁의 출발점이 아닌가 싶다. 흥선대원군에 대한 평가에서 이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에 관해서 개인적으로는 허동현 교수의 관점에 더 많이 공감이 간다. 우리의 근대를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하는 박노자 교수의 지적이 시사하는 바가 많지만, 근대화 되는 것이 반드시 개개인의 삶의 관점에서는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어도 근대화가 전 세계적인 역사의 흐름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런 근대화의 개념을 도외시 한 채 역사적 평가를 하는 것은 국제적인 현실을 배제한 이상론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두 교수의 논쟁을 읽으면서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우리의 근대 100년 역사에 대해 나는 어떠한 견해를 가졌는지 돌이켜 보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고, 교과서로만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우리의 근대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 최익현과 빈라덴의 비교라든지 김일성과 박정희의 비교 등 - 무척 유익한 독서였다.

ps. 부록에 있는 ‘빈라덴의 편지’에서 빈라덴의 주장이 무척 논리적이고 그다지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도 빈라덴이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인 미국의 공적 1호라는 점을 고려하면 정말로 모순적이고도 충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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