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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재인식’의 대화 새역사로의 진보 되길
카의 정의는 ‘역사는 과학이다’ ‘역사는 진보한다’
현재가 과거에 대해 대화 주도권
미래의 새역사 목표로 과거를 극복 대상 삼는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현재와의 대화 요구하지만
진보가 아닌 보수를 위한 비판적 역사
한겨레
»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모습. E.H.카는 역사를 움직이는 건 뛰어난 개인이 아니라 이름없는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보고, 역사는 발전하며 진보한다고 믿었다.

고전 다시읽기/E.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누가 나를 역사가로 만든 책을 꼽으라고 하면 나는 단연코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말할 것이다. 이 책은 나를 포함한 이 땅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거의 모든 역사학도들 뿐만 아니라 1970년대 유신치하에서 반독재 투쟁을 하고 1980년대 우리사회 변혁운동에 온 몸을 내던졌던 청년학도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책이다. 지금 우리 사회를 주도하는 386세대를 키운 것도 바로 이 책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1966년 길현모 교수에 의해 처음 우리말로 번역 출간된 이래 서점가에 10여 군데가 넘는 출판사의 판본이 나와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테제를 요약하면 크게 2가지다. 하나는 “역사는 과학이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는 진보한다”는 것이다. 과학과 진보는 근대의 전형적인 거대담론이다. 탈근대 역사서술의 집중적인 공격 목표가 되는 것이 바로 이 2개의 거대담론이다. 탈근대에서 <역사란 무엇인가>의 핵심을 이뤘던 테제들에 대한 전면적인 수정이 요구되고 있다면, 이제는 카의 근대 역사학을 넘어서는 역사의 새로운 정의가 나와야 한다.

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어떤 식으로 역사의 과학성과 진보를 논증했는지부터 고찰해야 한다. 역사가 하나의 과학으로 성립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치명적인 약점은 역사라는 말 자체가 과거사건(Geschichte)과 그에 대한 기록(history)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전자의 의미에 강조점을 두었던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레오폴드 폰 랑케는 역사가의 임무는 “과거가 본래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문제는 과거는 지나가서 없고 단지 그에 관한 흔적으로서 단편적인 사료들만이 존재하는 현재에서 과거 그대로를 재현하는 역사를 어떻게 쓸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거가 본래 어떠했는지”는 결국 역사가의 마음속에서 재구성될 수밖에 없다면, 역사가의 주관을 배제한 객관적 역사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현재의 역사가는 자신이 의미 있다고 여기는 과거의 사실들만을 역사로서 서술할 뿐이며, 그래서 이탈리아의 역사철학자인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고 말했다.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

카의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정의는 위의 양극단적인 입장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기 위한 시도였다. 역사가의 과거와의 대화의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그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다. 그가 ‘왜’라는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면, 역사의 대화는 시작되지 않는다. 카는 ‘왜’라는 역사가의 질문에는 언제나 ‘어디로’라는 또 다른 질문이 내재해 있다고 보았다. 마치 마르크스가 “문제 안에는 해답이 내재해 있다”고 말한 것처럼. 결국 목적 없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란 성립하지 않는다면, 카는 그 목적은 진보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역사에 대한 최종적인 정의를 “과거의 사건들과 현재에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미래의 목적들 사이의 대화”라고 수정 보완했다. 과거를 해석하는 목적이 미래의 목표들을 하나씩 드러내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미래가 과거 해석의 열쇠가 된다는 것이다.

과거란 실재이고 역사란 그것의 현재적 의미라면, 카는 그 의미와 무의미를 나누는 범주, 곧 역사인식의 패러다임을 진보로 규정했다. 곧 그는 진보를 “역사를 과학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전제”로 설정함으로써, ‘과학으로서의 역사’와 ‘진보로서의 역사’ 사이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진보를 구체적으로 “환경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의 확대”라고 정의했다. 그는 모든 문명사회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를 위해 현재 살고 있는 세대가 희생하는 것으로 발전했으며, 이러한 진보라는 역사의 대의는 중세에서 신의 섭리와 같은 종교적 명분과 마찬가지의 기능을 한다고 말했다. 카는 이처럼 역사의 진보를 하나의 신앙처럼 믿었던 전형적인 근대주의자였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생태계 파괴의 문제에 직면해서 “환경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의 확대”가 과연 진보인지를 회의하며, 진보에 대한 믿음을 갖고 혁명을 통한 사회적 실험을 함으로써 초래됐던 역사의 재앙들을 반성한다. 지난 20세기는 홉스봄의 말대로 역사의 진보에 대한 가장 큰 믿음을 가졌다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재난을 맞이했던 ‘극단의 시대’였다. 혁명의 시대로서 근대가 급진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앤서니 기든스가 <좌파와 우파을 넘어서>에서 말했던 것처럼 “역사에 내재한 가능성을 믿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의 가능성을 믿어야 역사가 진보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어떤 식으로 그 가능성에 대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가이다. 진보란 과거와 현재를 미래의 인질로 삼는 방식으로 하는 역사의 대화이며,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대화가 아니다.

카는 역사란 현재의 역사가가 과거의 사실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의 사실’과 대화한다는 점을 토로했다. 현재의 역사가가 과거의 특정 사실에만 발언권을 주고, 또 발언순서까지를 결정한다면, 과거와 현재사의 평등한 대화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근대 경험론의 시조인 베이컨이 자연이 숨기고 있는 법칙을 알아내기 위해 실험을 통해 자연을 고문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카는 과거와의 대화를 한 것이 아니라 실제에서는 역사의 진보라는 명분을 갖고 과거를 문초하고자 했던 것이다.

역사에서 현재와 과거의 대화 방식은 진보라는 1가지 방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4가지가 있다. 먼저 전통적인 역사서술에서는 현재보다 과거에 중점을 두는 대화 방식을 지향했다. 니체는 이러한 전통적 역사담론을 ‘기념비적 역사’와 ‘골동품적 역사’로 구분했다. ‘기념비적 역사’란 과거를 현재의 모범으로 삼는 방식이다. 서구에서는 이것을 “역사란 생의 교사다”라는 말로, 동아시아에서는 “역사의 거울(鑑)”이라는 비유로 표현했다. ‘골동품적 역사’란 전통으로서의 역사를 의미한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의 담론이 바로 그것이다. 오래됐다는 것은 그만큼 시간의 시금석을 통해 검증된 것이기 때문에 골동품적 가치를 지닌다는 의미로 역사의 담론적 효과를 발휘한다.

 

4가지 대화방식으로 생산 담론을

위의 전통적 역사담론과 다르게 근대 역사담론은 현재가 과거에 대해 대화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것 역시 2 가지 대화형식이 있다. 첫 번째는 니체가 ‘비판적 역사’라고 부른 것이다. 이는 과거를 극복대상으로 삼는 방식으로, ‘과거청산’이라는 역사담론이 그 전형적인 예가 된다. 두 번째는 ‘생성적 역사’다. 비판적 역사가 목표로 하는 것은 새로운 역사를 생성하는 것, 곧 새역사 창조다. 이러한 새역사에서 역사라는 말의 의미는 더 이상 과거가 아니다. 새역사 창조란 미래로서의 역사, 곧 역사의 진보를 요구하는 담론이다.

최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이하 <재인식>)이라는 한권의 책이 우리사회를 역사의 내전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이 책은 1980년대에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인식> (이하 <인식>)을 과거로 보고, 2006년 현재와의 대화를 통해 대한민국 역사의 재인식을 요구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대화의 방식이 카와 같은 진보를 위한 ‘비판적 역사’가 아니라 반대로 보수를 위한 ‘비판적 역사’라는 점에 있다. 역설적인 사실은 현실의 진보가 이념의 보수화를 낳음으로써, 현재의 보수주의자들이 과거의 진보주의자들에게 ‘진보’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 김기봉/경기대 교수·역사학

1990년대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우파로 불렸던 시장경제주의자들이 좌파로 지칭되고, 공산주의자들이 우파로 불리는 가치의 전도가 일어났다. 따라서 이제는 진보 개념도 더 이상 좌파의 전유물이 되지 않는 탈근대 상황이 벌어졌다.

이런 탈근대의 조건 속에서 <인식>에 대한 <재인식>은 필요하다. 지금 이 시점에서 <인식>과 <재인식> 사이의 역사논쟁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우려스러운 현상은 우파들이 그 역사논쟁을 정치적 헤게모니 투쟁으로 변질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인식>과 <재인식> 사이의 역사논쟁은 한국사회를 분열시키는 내전이 아니라 우리는 누구인가의 사회적 기억을 합의하고 우리역사의 미래 방향을 정하는 생산적인 담론으로 발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특정 이데올로기에 의거한 1가지 대화 방식이 아니라 4가지 대화 방식이 상호 교차하는 역사담론의 장이 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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