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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의 노래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8-1 프로파일러 토니 힐 시리즈 1
발 맥더미드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인어의 노래 / 발 맥더미드 / 랜덤하우스 (2011)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시리즈로 이어지는 추리소설을 즐겨 읽지 않습니다. 그러니 며칠 전에 읽었던 '스틸 라이프'와 지금 소개할 '인어의 노래'까지 추리소설을 연이어 읽은 것은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스틸 라이프'가 그랬듯, '인어의 노래'도 시리즈의 첫 편입니다. 그러나 두 소설은 그 느낌이 많이 달라서 '스틸 라이프'가 추리소설의 기본에 충실한 고전의 느낌이라면, '인어의 노래'는 스릴러 영화나 미국 드라마를 보듯 그 무대도 이야기도 흐름도 모두 좀 더 현대적이고 가벼운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책으로 생각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스틸 라이프'에 비해 읽는 맛이 떨어진 건 사실입니다. 소설이 가질 수 있는 매력, 행간 속의 숨은 함의를 찾고 영상매체가 보여줄 수 없는 인물들의 복잡하고 섬세한 속내를 훔쳐보는 재미가 '인어의 노래'에는 담겨있지 않은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이는 물론 작품 자체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치부해버리기엔 작품 자체가 가진 매력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번역이 아쉬웠다는 얘기를 할 수 밖에 없을 듯 합니다. 이는 장르문학이 좀 더 활발히 읽히려면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장르문학의 장점 중 하나가 막힘없이, 시간 가는 줄 잘 읽힌다는 점일텐데 인어의 노래는 자꾸만 몰입을 방해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번역 수준이 떨어지더군요. 조금 더 공을 들여 맛깔나게 번역한다면 훨씬 더 잘 읽힐텐데, 라는 생각이 들어 내내 아쉬웠습니다.

내용적으로 생각했을 때 동성애와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견과 소외, 차별 등사회적인 문제를 살짝 건드린다는 점에서는 물론 좋았습니다. 다만 말그대로 살짝 건드린 탓에 아쉬움 또한 여전합니다. 그들이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와 그들을 평등하게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대안 같은 것까지 기대할 순 없겠지만, 그들을 대상화하고 단순한 악역 이상의 생명력을 부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러했습니다.

'인어의 노래'를 읽고나니, '스틸 라이프'는 굉장히 훌륭한 추리소설이구나 생각이 들만큼, 만족감보다는 아쉬움이 컷던 소설 '인어의 노래'였습니다. 이러한 아쉬움의 정체는 범인이 너무 쉽게 예상이 되었기 때문일까요? 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어의 노래'는 제가 처음으로 범인을 맞춘 추리소설이니까요. (아, 저는 정말 이쪽으로는 문외한이라...'인어의 노래'같은 류의 소설도 추리소설이라고 하는게 맞는지 조차 모르겠네요. 스릴러 소설이라고 불러야 되는 건가요? 따로 묶어 부르는 이름이 있다면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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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라이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스틸 라이프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박웅희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스틸 라이프 / 소설 / 루이즈 페니 / 피니스 아프리카에 (2011) 

저는 추리소설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 많이 읽지 못했습니다, 라고 하는게 정확하겠네요. 접할 기회 자체가 별로 없었으니까. 솔직히 말씀드려서 시간을 때우는 장르소설이라는 편견이 조금은 작용했고, 대부분의 추리소설들이 시리즈로 이어져서 그 많은 연작을 읽을 엄두를 쉽사리 내지 못했던 탓입니다. 

그렇기에 이 '스틸 라이프'를 읽는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제법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추리소설을 읽는 가장 큰 이유이자 재미는 추리소설이라는 이름처럼 범인이 과연 누구일까를 짐작해보는 것일 터입니다. 읽는 나와 작가의 게임이자 작품 속 탐정 혹은 형사와의 게임인 것이지요. 어디 한 번 맞춰보라며 작가는 자꾸만 이야기를 꼬으며 스리슬쩍 단서들을 흘립니다. 주인공인 형사 또한 조금씩 조금씩 범인에게 접근해가며 애간장을 녹입니다. 저는 이들이 이끄는대로 적당히 따르면서, 감히 날 시험해? 내가 모를 줄 알구? 하는 심정으로 제 나름대로의 단서들을 부지런히 주으며 범인을 추리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봤을 때 '스틸 라이프'는 아주 충실하게 추리소설의 법칙을 따르는 소설입니다. 추리소설의 고전들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아주 클래식한...일종의 우아함과 품위 같은 게 느껴지는 소설이었습니다. 시대를 조금 앞으로 당기기만 한다면 100년 전쯤 쓰여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나 문체가 꼭 그러했습니다. 

살인사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적하고 평화로운 캐나다의 시골 마을이라는 공간. 그리고 역시 살인 같은 건 절대 저지르지 않을 것 같은 교양있고 우아한 마을 사람들. 그러나 이러한 평화로운 마을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고, 그 우아한 마을사람들 중 범인이 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가마슈 경감과 수사팀이 마을에 상주한다. 

추리소설에 문외한인 저조차도 아주 익숙하게 들리는 이러한 설정들은 분명 추리소설의 고전들에서 많이 보아왔던 그것일 터입니다. 주인공인 가마슈 경감의 캐릭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나이 지긋한 신사이며 아주 합리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 평상시에는 옆집 할아버지 처럼 푸근하고 자상하지만, 사건과 관련해서는 너무나 날카롭고 냉철한 직관력과 판단력을 가진 너무나 매력적인 인간. 그리고 그를 방해하는 니콜이라는 사고뭉치 신참 형사 캐릭터와 그의 충실하고 든든한 조력자인 보부아르 형사까지.  

이들이 사건을 풀어가는 방식과 우아하고 교양있어 보이는 마을사람들의 실체와 속내가 하나씩 밝혀지는 수순은 너무나 담담하고 차분합니다. 하나씩 하나씩 풀어서 아주 천천히 사건의 본질로 파고 들어가는 그 신중함에 절로 감탄사가 나올 지경입니다. 가마슈 경감도 이 소설을 쓴 작가도 그 인내력이 참으로 대단하다 싶을 만큼 말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들의 느릿한 게임에 어느 순간부터 몰입해서 기꺼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1/4 지점 정도부터 범인을 제 마음대로 추측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클라라를 의심했다가, 다음에는 벤을 의심하고, 결국에는 피터로 확신합니다. 매튜와 욜랑드가 진범일리 없다는 것 정도는 저도 눈치챘습니다. 바보는 아니니까요. 그러나 저는 결국 피터로 범인을 확신함으로써 작가와 가마슈가 놓은 덫에 보기좋게 걸리고 말지요. 초보 추리소설 독자 티를 팍팍내고 말지요. 저는 작가와의 게임에서 이겼다고 확신했지만, 그것이 바로 작가가 원하던 것이었던 겁니다.  

어쩌면 이래서 제가 추리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항상 지니까. 그 게임에서 승리하지 못하니까.  

그러나 이는 사실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진짜 범인이 밝혀졌을 때, 저의 예상이 보기좋게 빗나갔을 때...아 정말 탁월하구나, 그래서 이 사람이 범인이구나...싶어지는 추리소설이 생각보다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쉽게도 이 '스틸 라이프'라는 소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진범이 밝혀지고, 그가 왜 진범일 수 밖에 없는지 구구절절 설명을 덧붙이는데...솔직히 그다지 공감이 가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반전을 위한 반전 이상의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인생의 가치에 대해 논하지 못한 채 그저 정말 게임에 불과했다는 허무함이 몰려듭니다. 그러면서 저는 역시나 추리소설은 읽지 말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마는 것입니다. 

꼬는 것은 쉽지만 푸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것인가 봅니다. 아니, 풀었을 때 꼬였을 때의 주름을 말끔하게 펴는 것이 그만큼 힘든 일인가 봅니다. 인생이 언제나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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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할 순 없습니다. 모르면서 아는 척을 하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탄로가 나기 마련이지요. 그러므로 저는 이번에도 정직한 고백으로 시작할 수 밖에 없겠습니다. 최인호의 소설을 처음으로 읽는다고. 그러니 최인호의 지난 시간들이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지, 최인호가 얼마나 대단한 작가였는지, 솔직히 나는 알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별들의 고향', '겨울나그네', 심지어 '상도'까지. 저에게 최인호의 소설들은 영화와 드라마의 원작으로 기억될 뿐입니다. 그러니 저는 순수문학보다는 대중들의 기호를 잘 파악하고 그들이 쉽게 접근 가능한 베스트셀러를 양산한 작가 정도로 최인호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 맞게 알고 있는 것인지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지조차 감이 오지 않을 정도로 저에게 최인호는 그저 잘 모르는 소설가일 뿐입니다.

이와 같은 무지로 인해 저는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때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습니다. '최인호? 이제 제법 나이가 많을텐데 아직도 소설을 쓰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그저 신문의 서평란을 지나치려는 참이었지요. 그런데 웬일인지 이 노작가의 신작 소식이 책 소개란 첫머리에 그것도 대문짝만하게 실려있더군요. 지치고 초췌한 기색이 역력한 작가의 사진과 함께 말입니다. 그제서야 저는 이 노작가가 최근 암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으며 그렇게 생사를 오가며 병과 싸우는 와중에도 펜을 놓치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낯인은 타인들의 도시'라는 소설은 바로 그러한 사투의 결과물이더군요. 이쯤되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체 어떤 소설이기에 끝내 써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작가란 언제든 어떻게든 쓰는 사람이라지만 죽음과 맞바꿔도 좋을 정도로 작가의 모든 것을 불사르게 하는 이야기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그래서 읽어봤습니다. 최인호라는 작가의 소설을 처음으로, 하필이면 (현재까지의) 마지막 소설을, 말입니다.
 

미칠 수 있겠니 / 소설 / 최인호 / 여백 (2011)


그러나 소설은 솔직히 좋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상한건진 모르겠지만 쉽사리 몰입되지 않았고, 정독하기도 쉽지 않아 띄엄띄엄 빠르게 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조금 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조금은 뻔하고 지루했던 탓입니다. 솔직한 이유를 하나 더 보태자면 문체와 대사가 자꾸만 부대끼고 서걱거렸던 탓이었습니다. 즉, 내용도 형식도 저에게는 그리 인상적이거나 매끄럽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작가의 전작들을 알지 못하기에 이것이 생사의 경계에 선 절박함에서 나온 과도한 의욕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그런 것인지, 그도 아니라면 그냥 요즘 젊은 작가들의 재기발랄한 소설들에 길들여진 제가 문제인건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가 동시대를 사는 작가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K라는 남자의 3일간의 혼란과 방황이 자신을 찾는 여정이고, 부서지고 해체되어 자신이라 여겼던 것들은 낯설어지고 낯설기만 했던, 전혀 자신과 무관하다 여겼던 타인들이 낯익은 듯 느껴지는 순간을 경험한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이미 많이 보아온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새로운 이야기란 대체 무엇이냐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야기 자체의 익숙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과 그 이야기를 통해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주제가 지금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삶과 그리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즉 우리는 여전히 불확실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이제는 불확실을 불확실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어느덧 낡아 보이는, 불확실을 확실하게 말해도 좋은, 불확실에 이미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모호함의 정체를 두 눈으로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불치병과 싸워가며 가열차게 이야기를 지어낸 그 가상함을 기특하게 여기며 칭찬만 할 순 없겠습니다. 그 눈물나는 사투 때문에 소설이 특히 더 좋게 느껴졌으며, 군데 군데 순간 순간 울컥했노라고 할 순 없겠습니다. K가 곧 작가이며, 죽음과 가까운 삶을 경험한 작가가 존재의 무력함과 존재의 상대성을 새삼 깨닫고는 그 깨달음을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애썼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박수치고 싶진 않습니다. 정말 그런 것이었다면 작가는 조금 더 진심어린 소통을 위한 고민을 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과잉된 자의식과 지나친 이입이 조금 더 뜨거워도 좋을 소설을 되려 차갑게 식게 만든 것은 아닐까. 자꾸만 아쉬운 마음이 드네요. 

그럼에도 작가의 다음 작품을 또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이전 작품을 더 늦기 전에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역시나 이 작품을 둘러싼 작가의 스토리가 제 마음을 움직인 탓일테지요. 이렇게 이야기를 둘러싼 이야기가 더욱 극적이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 그것이 곧 역사이고 이야기인가 봅니다. 장대하고 경이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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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칠 수 있겠니
김인숙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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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난번에 '소현'을 소개하고 벌써 두번째이니 일견 그렇게 보일수도 그렇다 말할수도 있을 것 같네요. 그러나 고백하건데 '소현'과 중국 여행기인 '제국의 뒷길을 걷다' 말고 김인숙 작가의 작품 중 제대로 읽은 게 무엇인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단편 몇 편이 떠오르긴 하지만 그마저도 너무나 오래전이어서 내용은 물론 그 정확한 제목마저 희미합니다. 그러니 내게 김인숙은 아주 최근에야 주목하게 된 이름이고, 그의 작품의 진가 또한 겨우 '소현'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이럴진대 아무리 새 장편이 나왔다고, 제법 재빠르게 찾아 읽었다고, 작가에 대해 많이도 알고 있는 것 마냥 주절거릴 순 없는 노릇입니다. 즉, 김인숙다운 것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번 소설이 참으로 김인숙 답다, 혹은 영 그답지 못하다고 넘겨짚으며 마음대로 재단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제가 이제부터 늘어놓는 이야기들은 오롯이 이번 소설에 국한된 것일 겁니다. '소현'과의 구체적인 연관성마저 찾기 어렸웠던 만큼 김인숙의 작품세계를 섣불리 논하며 알지도 못하는 큰 이야기들을 주절거리는 일 또한 없을 것이구요.

사설이 길었네요.

김인숙의 새 소설이 나왔고 저는 찾아 읽었습니다. 아, 제목. 제목은 '미칠 수 있겠니' 입니다.

미칠 수 있겠니 / 소설 / 김인숙 / 한겨레출판 (2011)

'미칠 수 있겠니'의 주인공은 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국 여자와 이야나라는 이름의 외국 남자입니다. 여기에 진과 꼭 같은 이름을 가진 진의 사랑이자 남편인 진이 있고(구분의 편의상 소설에서처럼 앞으로는 유진이라 칭함) 이야나의 약혼자인 수니가 있고 모든 사단의 시발점인 외국 여자아이가 있습니다.

등장인물만 보면 일견 복잡해보이지만 이야기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던 유진이 어느날 갑자기 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고는 홀연 외국의 섬으로 떠납니다. 그런 유진을 이해할 수 없었던 진은 한국에 남지만 유진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유진과의 '생이별'을 견딜 수 없습니다. 도서관 사서인 진은 일년에 몇번씩 휴가를 내서 유진이 있는 섬에서 지내다오곤 하지만 근본적인 불안감이 해소될 리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진은 유진이 하녀로 부리는 현지인 여자아이와 정을 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믿었던 유진의 배신에 엄청난 분노와 질투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배가 부른 채 진의 집에 누워있는 여자아이를 발견하는 순간, 더 이상 자신을 제어하지 못한 채 여자아이를 찔러 죽일 생각을 하기에 이릅니다.  

한편 섬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택시운전을 하는 현지인 이야나는 자신의 불안정한 미래 때문에 평생의 사랑이자 약혼녀인 수니를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고는 자괴감에 빠져 무력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실수로 개를 치어 죽이고는 찜찜한 마음으로 시내를 배회하던 이야나는 호텔을 나서는 진을 태우게 되고 의도치 않게 진과 하룻밤을 보내게 됩니다. 관광객인 진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잘아는 이야나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감정을 단도리하며 진을 잊으려 애써보지만 자꾸만 진이 떠올라 혼란스럽습니다. 

소설은 이렇게 두 사람의 시점에서 진행되는데 방금 설명한 진의 이야기와 이야니의 이야기는 사실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야나와 진이 만나는 시간은 현재이고, 진이 절대 잊을 수 없는 여자아이와 마주치는 순간은 7년전의 과거입니다. 그럼에도 소설은 특별한 설명없이 오로지 진과 이야나의 감정의 흐름에 따라 7년전과 현재를 수시로 오가며 씨줄과 날줄로 두 사람의 인연을 얽어갑니다. 7년전 시간의 중심에는 여자아이의 죽음이라는 살인사건이 있고, 현재의 시간의 중심에는 대지진과 쓰나미라는 재앙이 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현재를 잠식하며 여전히 진을 7년전의 시간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드는 여자아이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대지진이라는 절대적인 대재앙 앞에서 조금씩 무력해져 갑니다. 눈 앞에 펼쳐진 진짜 지옥의 한복판에서 진은 비로소 지난 7년간의 마음 속 지옥에서 조금씩 벗어나 현실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옆에는 바로 이야나가 있습니다. 7년전의 지옥에서 진을 끄집어내는 것도, 쓰나미로 인한 대혼란 속에서 목숨을 잃을 뻔한 진을 구해내는 것도 모두 이야나입니다. 그렇다면 이야나는 진의 진정한 영웅이며 구세주인 걸까요? 물론 그렇진 않습니다. 이야나의 현재 또한 진 못지않게 시궁창이며 남루합니다. 사랑하던 수니를 잊지 못해 괴로워하지만 자신의 현재 처지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그저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던 이야나입니다. 그렇게 희망 한 쪼가리 없는 나날의 끝에 진을 만나게 된 것이고, 연이어 지진이라는 대재앙과 맞닥뜨리게 된 것입니다. 차라리 미치기라도 했으면 좋겠건만, 차라리 세상이 망해 없어졌으면 좋겠건만, 너무나 멀쩡한 자신과 세상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던 이야나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진을 만나자 자꾸만 마음이 쓰입니다. 그리고 믿기지 않게도 세상마저 미쳐 버립니다. 모두가 미쳐 날뛰며 울부짖습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 생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그렇게 지옥의 한복판에서, 이야나는 비로소 깨닫습니다. 자신은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자신마저 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멀쩡한 정신으로 멀쩡하게 잘 살아서...진이라는 여자를 이 미친 세상에서 구해내야 한다는 것을.

소설은 대부분 진의 시점에서 진행되지만 이렇듯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이야나입니다. '미칠 수 있겠니?' 라는 질문은 진과 이야나 두 사람 모두에게 공히 해당되는 질문이지만 그에 대해 최종적으로 답하는 것 또한 이야나의 몫입니다. 이야나가 아니었으면 진은 진짜 미쳤을 것이고 끝내 자신이 만든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야나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진은 다시금 현실로 돌아와 남은 생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는 그렇게 읽었습니다. 
 
(어떻게) 미칠 수 있겠니.

중요한 것은 결국 '미칠 수 있겠니'가 아니라, 생략된 '어떻게'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앞에 놓일 이 한마디 일 것입니다.

당신을 두고.

어떻게 미칠 수 있겠니.

당신을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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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러 나가다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숨 쉬러 나가다 / 소설 / 조지 오웰 / 한겨레출판 (2011)

국내 초역. 이 한마디의 홍보문구와 그 옆에 새겨진 조지 오웰의 이름만으로 우리는 이 책, '숨 쉬러 나가다'를 꺼내 듭니다. '1984'와 '동물농장',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은 독자라면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고, 이 세권의 대표작을 아직 읽지 못한 그러나 언젠가는 읽어봐야지 했던 예비 독자들 또한 오히려 이 세 편을 읽기 전에 그의 초기작으로 시작하는 것도 그럴듯 하겠다는 생각에 선뜻 손이 갔을 터 입니다. 저의 경우는 뭐 그 중간쯤입니다. 세 권의 대표작 중 아직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지 못했으니까요. 그럼에도 그의 작품 중 아직 번역되지 않은 작품이 있었다니, 얼른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으니까요. 

그러나 막상 읽게 된 '숨 쉬러 나가다'는 생각했던 것과는 혹은 기대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소설이었습니다. 조지 오웰의 작품들에 익숙한 독자들이라면 실망과 당혹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할 만큼, 조지 오웰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그의 작품세계와 스타일을 오해할 만큼 그 형식이나 내용이 낯설고 그다지 '조지 오웰'스럽지 않다고 느껴졌거든요.   

일단 제가 당황스러웠던 것은 선명한 비유와 풍자, 그리고 숨 샐 틈 없이 직조된 촘촘한 구조로 독자들을 자신이 만든 세계로 몰아넣어 그 억압된 세계의 부조리함을 몸소 체험할 수 있게 해주었던 것과 달리 이번 소설은 마치 일기나 에세이를 보는 듯 너무나 느슨하고 헐거운 읆조림에 불과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여전히 날카롭고 통찰력있는 비유와 진단들이 곳곳에서 빛을 발하긴 했지만 그 역시 한 개인의 사적인 주절거림 뒤에 숨은 탓에 그리 인상적이거나 도드라져 보이지 않았으며, 전체적인 구조는 구조라 칭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단선적이고 평이합니다. 가족과 직장이라는 견고한 울타리에 둘러쌓인 채 전쟁을 앞둔 침울한 사회분위기에 염증을 느낀 중년의 남자가 숨을 쉬기 위해 소소한 일탈을 감행했다가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여정이 이 소설에 담긴 이야기의 전부이며, 이 이야기는 주인공 남자의 일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의 소설이 물론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이렇게 일상적이고 사변적인 방식의 소설을 조지 오웰이 썼다는 것이 조금 놀라웠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조지 오웰은 왜 이러한 소설을 썼던 것일까요? 아마도 이에 대한 답이 바로 이 소설의 주제이자 메시지일 것일 테지요? 제 짧은 생각으로는 아마도, 1차대전이 끝나고 2차대전이 발발되기 직전의 영국 서민계층의 별볼일 없는 일상을 통해 당시의 숨막힐 듯 답답한 사회분위기를 가감없이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1차대전을 이미 겪은, 전쟁의 무서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중년의 주인공이 다시 또 끔찍한 전쟁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직감하고는 전쟁 자체보다 그 이후에 대해 걱정하고 염려하며 몸서리치는 모습. 그러면서도 자신이 왜 이런 걱정을 하는지 알 수 없다며 자조하며 전쟁이 곧 시작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정작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모습. 가장으로써 가족 누구와 진심으로 소통하지 못하면서 그저 돈버는 기계로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자신의 처지에 답답해하며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잠시 잠깐의 숨 쉴 수 있는 여유를 찾고 싶어 발버둥치는 애초로운 모습을 통해 작가는 이것이 바로 현대를 사는 우리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는지요. 불평하고 비난하며 불안해하고 걱정하지만, 자신은 억압받고 있고 고통받고 있다고 강변하지만, 정작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 행동하고 발언할 용기는 갖고 있지 않은, 여전히 순응하고 복종하며 그러한 부조리한 사회의 일원으로 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 말입니다. 

무려 80여년전에 쓰여진 이 소설을 읽으며 이렇게 깊게 공감하고 있다는 건, 지금 현재도 그때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뜻일테지요? '1984'와 '동물농장'을 읽었을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조지 오웰의 혜안과 통찰이 새삼 경이롭게 느껴지는 오늘입니다. 이 일상 깊숙이 침투한 우리의 패배감과 무력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지난 시간들에 대한 추억과 향수를 통해 젊은 날의 꿈과 희망을 잠시 잠깐이나마 떠올리며 남은 생의 활력을 되찾기 위해 애쓰는 주인공의 모습이 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까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하기엔 우린, 최소한의 낭만 조차 허락되지 않은 세상을 살고 있는건 아닌지요. 이것 참. 모르겠습니다. 저도 훌쩍, 단 며칠이라도, 이곳을 떠나, 좋았던 그 시절 그 곳으로 가봐야겠습니다. 그저, 숨이라도 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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