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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 김경욱 소설집
김경욱 지음 / 창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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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 김경욱 / 창비 (2011) 

김경욱에 대해 제가 갖고 있는 이미지는 구효서의 그것과 김영하의 그것을 반반씩 섞어놓은 모양새입니다. 탄탄한 문장으로 써내린, 평범한 한 사람의 인생사를 꼼꼼히 쫓아가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인물지 단편을 꾸준하게 발표하는 작가라는 점에서 구효서가 이천년대를 살았다면 이런 단편을 썼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가만 살펴보면 김경욱에게는 구효서랑은 조금 다른 구석이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단순히 다른 시대에 나고 자란 탓이라고 하기에는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제법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구효서의 작품들이 철저히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으면서도 마지막에 가서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따뜻함을 지녔다면, 김경욱의 단편들은 철저하게 현실을 냉소하며 좀처럼 희망의 단초를 내보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형식적인 부분에서도 쉽게 드러납니다. 구효서가 완벽한 기승전결을 갖춘, 특히 명확한 결말을 통해 소설 속 인물이 어떻게 되었는지, 작가가 종래에 하고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모던한 소설가'라면 김경욱은 마치 이야기를 하다만 것처럼 갑작스럽게 끝을 맺어버리거나 결말을 모호하게 흐림으로써 작품 속 인물의 정체는 물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조차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포스트모던한 소설가'인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세대의 차이라기 보다는, 작가 개인의 근본적인 성향의 차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 

그렇다면 역시 김경욱은 구효서 보다는 동세대 작가인 김영하를 더 많이 닮은 것일까요? 얼핏 생각하면 틀린 말이 아닌 듯 합니다. 김경욱의 작품들 또한 김영하의 작품들처럼 현대인들의 욕망과 이기심,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잔인함과 냉혹함에 대한 냉소로 가득하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읽고나면 마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과 같은 막막함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김경욱과 구효서가 같을 수 없듯이 김경욱과 김영하 또한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김영하가 인물 자체에 대한 묘사보다는 파격적인 소재와 사건을 보여주는데 집중하며 현대인과 현대사회가 가진 모순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면, 김경욱은 아무리 짧은 단편이라도 한 인물의 총체적인 인생사를 압축해서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생 자체가 가진 숙명적 아이러니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김영하가 횡으로 과실의 단면을 드러내 그 알맹이만 쪽 빼내 건네주는 요리사라면, 김경욱은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종으로 그 껍질을 꼼꼼히 벗겨내 통째로 입에 넣어주는 요리사인 것입니다. 

이 역시 단순한 스타일의 차이라기 보다는, 작가 개인의 근본적인 성향의 차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쯤에서 저는 김경욱이 그 누구보다 특별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선배 작가인 구효서를 직접적으로 계승한 것인지 꼼꼼히 살펴볼 수 있고, 동세대 작가인 김영하와의 직접적인 비교 분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김경욱은 이 둘보다 훨씬 더 드넓은 토대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작가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김경욱이 없었다면, 구효서와 김영하에게 과연 어떠한 접점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김경욱은 그렇게 누구의 적자나 누구의 아류가 아닌, 김경욱일 뿐인 것입니다. 김영하가 될 수 없는 구효서, 반대로 구효서를 따를 수 없는 김영하가 아닌...구효서도 될 수 있고 김영하도 될 수 있으나 그 누구도 아닌, 김경욱이 된, 김경욱 말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번 소설집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는 특히 반가웠습니다. 최근에 선보인 장편인 '동화처럼'에 이어 '김경욱이 된 김경욱'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거든요. 수록된 작품들 중 기존 작품들 처럼 전통적인 인물지 단편에 머무른 '99%'나 '허리케인 조의 파란만장한 삶'이 조금은 아쉬웠다면, 표제작인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와 '하인리히의 심장'은 김경욱의 가장 큰 장점인 탄탄한 기본기를 유지하면서도 자신만의 세계를 유감없이 드러낸 작품임에 분명해 보입니다. 소재와 사건 자체에 집중하면서도 인물의 생생함 또한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김경욱표 단편'이 이제 형식적으로 거의 완성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담담하고 꼼꼼하게 이야기를 엮여가는 듯 하다가 돌연, 모호한 결말로 읽는 이들을 아연케 만드는 지점은 가히 압권이었습니다. '소설 속 그'가 느낄 수 밖에 없는 막막함과 슬픔이 책장을 덮고나서도 계속 남아 저 자신을 파고드는 경험, 소설 속 세계가 계속 연장되어 밤새도록 그 다음 이야기를 상상하고 또 상상하는 경험을 김경욱의 단편이 아니면 어디서 또 할 수 있을까요? 

이처럼, 비로소 '김경욱이 된 김경욱'을 제대로 만날 수 있는 단편집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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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거리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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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거리에서 / 히가시노 게이고 / 재인 (2011)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껴지는 가장 큰 정서는 놀랍게도 따뜻함입니다. 참혹한 살인사건들이 마구 등장하는 스릴러와 미스터리의 대가의 작품 속에서 따뜻함이 느껴진다니. 제가 변태거나 작가가 변태인 걸까요? 아니면 아예 둘 다 변태인 것일까요? 안타깝게도, 아니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토록 사랑 받으며 널리 읽히는 걸 보면 저 말고도 많은 분들이 이러한 느낌을 받은 듯 하니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그의 '잔인무도한' 작품을 읽으면서 이처럼 기묘한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요?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단순하게 말씀드리자면, 보편적인 인물들이 등장해 보편적인 감정을 건드리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보편적인 인물과 사건들의 중심 키워드는 '평범함'과 '가족'입니다. 이 중 좀 더 중요한 건 물론 가족입니다. 다른 많은 추리소설들에서도 흔히 평범한 소시민이 뜻하지 않게 사건에 휘말리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곤 하니 '평범함'을 게이고만의 특별함이라고 하긴 조금 힘든 것이지요. 가족 또한 그렇지 않느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겠지만, 게이고가 가족을 이야기 안에서 활용하는 방법은 다른 작가들의 그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솔직히 그의 전작을 모두 읽은 것이 아니기에 성급한 일반화일수도 있겠지만, '백야행'과 '유성의 인연', 호숫가 살인사건'등 적어도 제가 읽은 작품들 속에서는 이러한 공통점을 쉽게 찾을 수 있었기에 어느 정도는 타당성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족. 네 그렇습니다. 게이고의 작품에서 모든 비극의 출발은 가족이며, 사건을 파헤치다보면 밝혀지는 비밀 또한 대부분 가족 내부의 문제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갈등의 근원이자 파탄의 원인이 가족인 것이지요.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이러한 갈등과 파탄이 가능한 것은 그들이 서로 사랑하며 행복한 일상을 공유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즉, 지키고 싶을 만큼, 잃고 싶지 않을 만큼 그들의 일상은 (가족을 중심으로) 안정되고 평화로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어떠한,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그 행복과 평화가 깨어진다면 그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클 수 밖에 없고 그로 인한 상처와 충격 또한 어마어마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백야행'이나 '유성의 인연'이 바로 그러한 유년의 상처를 보듬으며 치유하는 과정을 담은 과거에 방점이 찍힌 이야기라면, '호숫가 살인사건'은 구성원들(부모)의 또다른 구성원(자녀)에 대한 과도한 사랑과 욕심 때문에 가족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현재에 방점을 찍은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 또한 대단한 차이점이라 할 수 없습니다. 두가지 경우 모두 현대 일본사회의 가족해체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게이고의 작품 속에서 가족은 공히 플롯 자체이자 캐릭터 자체, 즉 이야기 자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새벽 거리에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생각하기에 불륜을 소재로 한 이야기라면 남녀 사이의 집요하고 끈적한 치정극이 아닐까, 생각하기 쉬운데 너무나 게이고 답게도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게이고는 불륜이라는 소재도 철저히 가족 중심으로 풀더군요. '새벽 거리에서'는 주인공인 유부남 와타나베와 아키하의 불륜이 주가 아니라 그 두 주인공을 둘러싼 가족이 주인공인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 중심에는 물론 15년 동안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의문의 살인사건이라는 중심플롯이 존재하지만, 이 역시 소설의 중반쯤 되면 가족을 이야기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에 불과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불륜과 그로 인한 엄마의 죽음, 그리고 불륜상대인 여비서의 죽음...그렇게 와해되어버린 아키하의 가족.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아픔을 간직한 채 성장한 아키하에 의해 무너질 위험에 처한 와타나베의 가족. 소설은 아키하와 와타나베의 이 '위험한 사랑'을 통해 과거의 가족은 어떻게 무너져갔고, 현재의 가족 또한 그리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어떻게 무너져 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작가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아키하와 와타나베의 모습을 통해 개인의 솔직한 욕망 발현이라는 현대적 가치와 가족과 공동체의 유지라는 전통적 가치 사이에서 방황하는...현대인이 되지 못한, 근대인으로써의 현대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물론 그의 소설의 끝이 항상 전통적 가치로의 회귀, 즉 안정과 평화를 되찾으며 끝이 난다는 것은 작가 또한 그러한 부딪힘과 혼란의 끝에서 여전히 전통적 가치를 수호하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근대인이라는 반증일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느끼는 따뜻함이란 바로 이러한 작가의 '보수성' 때문일 것이며, 이를 따뜻하다고 느낀다는 점에서 우리들 또한 적어도 생활적인 관점에서는 여전히 현재가 아닌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겉으로는 파편화된 개인, 차가운 도시인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가족과 공동체의 사랑과 관심을 원하고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저이고 여러분인 것입니다. 작가는 바로 그걸 건드린 것이고, 우리는 거기에 자신도 모르게 반응하며 환호하는 것이지요. 이는 좋고 나쁘고의 문제, 혹은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도시를 사는 현대인이 가질 수 밖에 없는 모순이며 양면성인 것입니다.  

가볍고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장르소설 한 편 읽고 쓸데없는 말이 길었네요. 언제나 평균 이상의 재미를 보장하면서도 이처럼 간단치 않은 생각거리까지 던져주는 게이고의 이야기, '새벽 거리'에서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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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 한국 사회의 위선을 향해 씹고, 뱉고, 쏘다!
한홍구.서해성.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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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 한홍구 서해성 고경태 / 한겨레출판 (2011)

9기 마지막 서평도서로, 천만 뜻밖에도 인문분야의 책인 '직설'을 읽게 되었습니다. 담당자 분의 귀엽고 유쾌한 실수 덕분인데, 솔직히 받아보고 아쉬움 보단 기쁜 마음이 컸습니다. 안 그래도 내내 소설만 읽은 탓에 다른 분야의 책이 그립기도 했거니와 한겨레 신문에서 간간히 읽어왔던 '직설'이라는 칼럼의 모음집이라니 차라리 잘되었다 싶기도 했던 것이지요. 원래 왔어야 할 '네 개의 손'도 물론 읽고 싶었던 책임에는 분명하지만 9기 서평단 활동의 마무리를 이렇게 다른 분야의 책으로 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듯 합니다. 

사실 '직설'에 담긴 칼럼들 중 절반 정도는 한겨레 신문 연재시에 읽었습니다. 그래서 '직설'은 대단히 새롭다기보다는 이미 읽은 이야기들을 한꺼번에 모아서 가지런하게 챙겨 읽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책이었습니다. 

직설. 말그대로 대놓고 솔직하게 말한다, 라는 뜻일 겁니다. 거침없는 말솜씨를 자랑하는 한홍구 교수와 서해성 작가, 그리고 재기발랄한 글솜씨와 기막힌 편집감각으로 유명한 고경태 기자가 뭉쳐 그때그때 관심 가는 인터뷰이를 모셔놓고 보통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차마 하지 못했던 질문들을 마구마구 던지는 컨셉. 그것이 바로 이 '직설'이라는 칼럼인 것이지요.

그 덕분에 책을 읽는 내내 저는 어느 정도의 통쾌함과 속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책 덕분에 묻고 싶었던 것들을 묻고 듣고 싶었던 걸 들을 수 있었으니까요. 제가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던 인물들의 새롭고 솔직한 면모를 이 책으로 알 수 있었으니까요. 특히 정두언이나 홍준표 같은 여당 정치인들, 문재인이나 박원순 같은 재야의 고수들이 진행자와 인터뷰어들의 공격을 능수능란하게 받아치다가도 정말 곤란한 질문이 나오면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무는 모습에선 말은 남을 찌르는 가장 훌륭한 무기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찌르는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측면에서 직설은 아쉬움이 크기도 한 기획이었습니다. '한겨레'라는 공식적인 지면의 한계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것이지요. 눈치보지 않겠다 했지만, 인터뷰어도 인터뷰이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몸을 사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유시민의 절독 선언이나 노무현 쪽의 사과 요구와 그에 따른 한겨레의 공식사과 같은 소동을 겪다보니 어쩔 수 없이 그리 된 것일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초의 기세를 밀고 나가지 못한 것은 직설이라는 제목값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장안의 화제인 나꼼수와 비교하면 그 아쉬움은 더욱 커집니다. 나꼼수라는 진짜 제대로 된 직구에 이미 눈이 익숙해진 독자들에게 직설이 던진 공은 직구가 아닌, 예리함이 떨어지는 밋밋한 변화구 정도로 보이는 것입니다. 애초부터 추구하는 목표가 달라 직접적인 비교는 물론 의미가 없는 일이지만, '직설'이 제목답지 못하게 조금은 싱겁고 맥이 빠지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인 듯 합니다. 

혹시라도 이와 비슷한 기획의 인터뷰 칼럼이 다시 기획된다면, 그때는 좀 더 독하게,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진짜 작정하고 던진 직구를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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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는 아니지만 - 구병모 소설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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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의 첫 단편 모음집 '고의는 아니지만'을 읽었습니다. '위저드 베이커리'와 최근에 출간되었던 '아가미'라는 장편으로 이미 제법 알려진 작가지만 부끄럽게도 저는 이번 소설집으로 그를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앞서 나온 두 편의 장편을 읽지 못한지라 그에 대해 논하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할 듯 싶습니다. 이번 작품집이 참으로 인상깊었기에 빠른 시일 내에 전작들을 모두 챙겨읽고 그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 그러니 오늘은 그저 짧게 이번 작품들과 그에 대한 첫만남과 첫인상에 대한 일기 몇자 적고 다음을 기약해야 할 듯 합니다. 

고의는 아니지만 / 소설 / 구병모 / 자음과 모음 (2011)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한 첫인상은 우선 당혹스러움이었습니다. 당혹스러움이란 좋고 나쁘고의 판단 이전의 감정이지요. 아니 감정이라기 보다는 본능적인 반응이라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에게, 그의 작품에게 그러한 반응을 저도 모르게 보인 것은 예상치못한 장황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장황한 문체는 처음이었습니다. 특히 번역된 외국 소설이 아닌 한국 소설에서 쉼표들과 '~만', '~고'로 연결지어진 긴 문장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작품을 보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습니다. 현대소설에서는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문체가 미덕이라 여겨져왔고, 장황하다해도 그것은  윤대녕식의 화려한 비유와 수식 혹은 신경숙이나 은희경식의 화자의 내면을 묘사하는 내적 비유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기실 장황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더랬습니다. 그런데 이 구병모의 소설들은 좀 다르더군요.  

뭐랄까요. 그는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필요한 모든 것을. 자신이 보여주고 싶고 이해시켜 주고 싶은 모든 것을. 여기서의 설명과 이해란 내적 비유나 화려한 묘사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정확한 단어선택과 최대한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자신이 하고 있는 이야기와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인물의 객관성을 확보하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그의 문장은 장황하지만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바로 제가 당혹스러움을 느낀 이유입니다. 장황함이란 화려함을 대동하기 마련인데, 장황하면서 화려하지 않다니. 소설에서 이럴 수도 있는가. 이런 문체가 과연 소설에 적합하다 할 수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차라리 시나리오나 연극 대본에 적합한 문체입니다. 그렇습니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그의 소설은 오랜 시간 영상매체 혹은 공연매체의 극본을 담당했던 시나리오 작가나 극작가가 소설가로 전업해서 쓴 작품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적인 문체와는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즉, 요즘 젊은 작가들의 마치 영화를 보는 듯 간결하고 스피디한 문장과 구성이랑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사실에 집착하는 신문기자들의 객관적인 문장과도 또 다른 느낌이었으니 이것 참...더 이상은 설명이 힘들 거 같네요. 그저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겠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것 이면의 진실마저도 객관화해서 사실적으로 드러내고 싶은 몸부림. 

그것이 바로 그가 장황한 문체로 이 기묘한 이야기들을 꾸역꾸역 써낸 이유가 아닐까요. 실재하지 않을 것 같은 인물, 그들에게 벌어지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사건들, 그러나 알고보면 그 누구도 아닌 나 혹은 내 옆사람이 겪었거나 겪을 수 밖에 없는 너소름끼치도록 현실적인 이야기. 이러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려다보니...우리 모두가 아는 단어와 표현으로 우리 모두가 알지 못하는 진실을 끄집어내어 보여주려다 보니...자연스럽게 그렇게 장황한 문체가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느낀 당혹스러움이란, 다시 말씀드리지만 좋고 나쁘고를 판단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그의 짧은 이야기들을 몽땅 읽고 나서도 여전히 그 당혹스러움이 가시질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의 전작들을 읽기 전에는 그에 대한 호와 오를 판단할 수 없겠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날까 합니다. 

조만간 오늘의 이 기분 나쁘지 않은 당혹스러움의 정체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네요.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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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명의 백인신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천 명의 백인 신부
짐 퍼커스 지음, 고정아 옮김 / 바다출판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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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천명의 백인 신부'는 실제하지 않았던 역사적 가정을 전면에 내세운, 우리가 흔히 팩션이라 부르는 가상 역사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역사가들은 말하지만 이야기를 창조하는 작가들은 조금 생각이 다른 듯 합니다. '이렇게 되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흥미로운 가정하에 지난 역사를 비틀고 재해석 하는게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어차피 허구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으니 일어나지 않은 일을 충분한 개연성을 바탕으로 풍부한 상상력을 보태 독자들에게 보여준다면 지난 역사를 현재로 불러와 되살리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들이 즐거워할 수 있는 훌륭하고 재미난 이야기 한 편을 창조해내는 희열까지 느낄 수 있으니 팩션은 역사를 소재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야기꾼들에게는 언제나 염두해둘 만한 '옵션'인 것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봤을 때 얼마 전에 읽은 '천명의 백인 신부'는 제가 여태껏 접해본 팩션 중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천년의 백인 신부'는 팩션이 흔히 범하는 실수와 팩션이 가질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영리하게 피하면서 실화를 바탕으로 한 그 어느 이야기보다 더 진짜같은 생동감과 묵직함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 작품인 것입니다.

천명의 백인 신부 / 소설 / 짐 퍼거스 / 바다출판사 (2011)

역사

앞서 말씀드렸듯이 팩션은 실제 역사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 진짜 일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가정에서 시작합니다. 요즘 한창 인기리에 방영중인 텔레비전 드라마 '공주의 남자'가 바로 팩션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김종서의 막내 아들이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김종서의 막내 아들과 수양대군의 장녀가 사랑하는 사이였다면? 이라는 가정이 이 드라마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그러한 가정을 바탕으로 그 다음에는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이들의 생존과 사랑에 최대한 개연성을 부여할 수 있도록 캐릭터를 창조하고 플롯을 엮어서 한 편의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천명의 백인 신부' 또한 그러한 흥미로운 가정을 바탕으로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수백년 전,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 부족 중 하나인 샤이엔족의 족장인 리틀 울프가 미국의 대통령에게 천 필의 말을 내어줄테니 그 대가로 천 명의 백인 신부를 달라는 조금은 어처구니없는 제안을 했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작가는 이 이야기의 단초를 떠올린 것입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물론 이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백인 신부들이 인디언들의 아내가 되어 자식을 낳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비록 실현되진 않았지만, 역사서의 한 귀퉁이에서 리틀 울프의 이러한 제안이 실제했었다는데 흥미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는 리틀 울프의 제안을 미국 대통령이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가정을 하고 이야기에 살을 붙여보기로 결심하기에 이릅니다. '일종의 실험이자 미끼로 갈 곳이 없거나 범죄를 저지른 백인 여자들 수십명을 선발대로 샤이엔족에게 보냈다면? 그들 백인 여자들이 정부당국에 이용당한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면서도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모험을 기꺼이 하기로 결심한다면? 오호, 이거 재밌겠는걸?' 작가는 자신이 떠올렸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재미난 이 이야기의 컨셉이 너무도 마음에 들어 당장 집필에 들어갔을 터 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도저히 실제했던 역사라고 생각되지 않는, 이 한 줌의 역사적 사실이 없었다면 이 이야기는 시작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즉 허구보다 더 허구같은, 리틀 울프의 이러한 제안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 작가의 창작이라면 이 이야기의 재미는 반감되었을 것이고 작가 스스로도 말도 안되는 상상이라며 현실화하기를 포기하고 그냥 반짝하는 아이디어 상태에서 자신의 노트북 깊숙한 곳에 처박아버렸을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천명의 백인 신부'라는 소설은 팩션이 갖춰야 할 첫번째 조건인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흥미로운 가정'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플롯

그러나 아무리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흥미로운 가정'이라 해도 이를 풀어가는데 있어서 개연성이 떨어진다면 독자들은 금세 흥미를 잃고 그게 말이 되냐며 불평 불만을 늘어놓고 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지금부터가 진짜이며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실제하지 않았지만, 실제보다 더 실제같은 이야기', 이것이 바로 팩션이 갖춰야 할 두번째 조건인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에 부합하기 위해서 작가는 현실성과 상상력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해야 합니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독자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완벽한 이야기로 '튜닝'해내야 하는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아무래도 팩션이니 상상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정작 더 중요한 것은 현실성일지도 모릅니다. 팩션이기에 사실 상상력은 기본이고, 이러한 상상력을 진짜처럼, 실제 있었던 일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선 당시의 현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천명의 백인 신부'가 돋보이는 것은 비로 이러한 현실성입니다. 주인공인 메이와 그녀의 동료 백인 신부들이 샤이엔 족의 생활에 적응해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문화적 충격과 어쩔 수 없는 갈등은 물론이고 이들 백인 신부들을 이용하는 미국 정부의 교활한 술책과 이들을 대하는 미국인들의 냉랭한 태도까지...실제하지 않았던 역사임에도 작가는 어느 역사적 사실보다 더 생생하고 현실감 있게 그려내는고 있는 것입니다. 그 덕분에 독자들은 이 이야기가 허구라는 걸 알면서도 메이와 동료들, 그리고 샤이엔 부족에 동화되어 그들에게 닥쳐올 슬픈 운명에 함께 마음 졸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캐릭터

그러나 이러한 공감과 이입이 가능한 것은 흥미로운 역사적 가정과 이를 실제라 믿게 만드는 플롯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메이를 비롯한 동료 신부들의 캐릭터에 빚진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천명의 백인 신부'의 주인공인 메이는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의 총체이자 이 소설 자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절대적인 존재감을 가진 캐릭터 입니다. 아름다운 외모는 기본이고, 여성다운 섬세함과 지혜로움은 물론이고 남성못지 않은 용기와 결단력까지 갖춘 캐릭터...거기서 더 나아가 종래에는 무리를 아우르는 리더십까지 보여주는 캐릭터인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메이를 통해 작가는 독자들을 이야기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입니다.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자신의 운명에 맞서는 메이의 모습에서 독자들은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은 물론이고, 작가가 보여주고자 했던 역사의 아이러니를 배우고, 거기서 더 나아가 지난 역사에 대한 객관적인 재평가까지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문명화라는 미명 하래 말살해버렸던 인디언들의 문화가 얼마나 선진적이었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었는지 독자들은 점차 샤이엔 족에 동화되어 가는 메이를 통해 알게 되는 것입니다. 푸른 눈과 하얀 피부를 가진 샤이엔족 메이가 꿈꾸는 세상을 통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융화와 공존이 무엇인지 독자들은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독자들은 메이 뿐 아니라 그녀의 동료 신부 캐릭터들과 리틀 울프를 비롯한 샤이엔 족 캐릭터들 또한 용맹, 평등, 용기, 화합 등 작가가 추구하는 가치를 상징한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캐릭터가 이야기 자체가 되고 캐릭터가 메시지 자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천명의 백인 신부'가 가진 최고의 장점이자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처럼 '천명의 백인 신부'는 우리가 팩션에게 기대하는 거의 모든 것을 갖춘 훌륭한 작품입니다. 우리는 실제하지 않는, 실현되지 못한 지난 역사의 재현을 통해 지금도 반복되는 반목과 갈등의 역사에 대한 해답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이 소설을 통해...너무 이상적일 수도 있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정체성을 인정하려는 구성원 개개인의 노력과 이러한 구성원들의 존경을 받는 지도자들의 현명하고 용기있는 선택과 결정이 가능하다면 우리 모두 함께 어울려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을 잠시나마 해 볼 수 있었습니다. 일견 보잘것 없어 보이는, 한 편의 이야기가 이처럼 크고 절절한 울림을 줄수도 있다는...그렇게 이야기의 힘이란 결코 작지 않음을 새삼 깨닫게 해 준 소설, '천명의 백인 신부'...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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