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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편지
정민.박동욱 엮음 / 김영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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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편지를 많은 사람에게 쓰는 편은 아니지만 자주 편지를 쓰는 편이기는 하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오랜 시간을 사귄 친구와 왕래하는 편지가 자주 된다는 말이다. 평소 글쓰기를 즐기기도 하지만 편지를 한자씩 쓰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 마음의 여유를 즐기는 듯 하다. 그리고보면 편지라는 단어는 참 많은 어감을 느끼게 하지만, 이 시대에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가장 강조되는 매체의 대명사이다. 그 때문인지 많은 이들이 편지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지만 본인도 귀찮음으로 쓰지 않고, 그래서 더욱 받지도 못하게 된 그럼 매체가 편지가 아닐까 싶다.
<아버지의 편지>는 그 귀찮음이란 핑계를 차마 꺼낼 수도 없는 아버지가 가족에게 전하는 편지 모음집이다.

<아버지의 편지>는 한번쯤은 이름을 들어본 옛 사람부터, 이 책에서 이름을 처음 듣는 사람까지 다양한 아버지를 포함하고 있다. 아버지가 주로 편지를 쓰는 대상은 주로 자식들이고, 그들에 대한 당부는 크게는 학업에 대한 정진과 집안에 대한 걱정이다. 이런 걱정을 읽고 있으면 어느 시대나 아버지라는 이름에는 어쩔 수 없는 상(像)이 있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아버지라면 자식 공부 걱정은 예외가 없는 듯 하다. 또한 선비들이기 때문인지 가정 경제 생활의 고단함과 걱정이 편지글 간간히 묻어난다. 부족한 식량을 위해 도토리를 이용할 것을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당부를 읽는 아들의 마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서걱거린다.

사실 <아버지의 편지>는 읽는 내내 몸을 배배 꼬을 정도로 재미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책이다. 아버지들의 편지글이 내용이 재미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눈을 반짝이며 읽을만큼 유쾌하다고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저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자식과 집안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매한가지라는 점을 세삼스레 생각하며 씁쓸하게 웃을 뿐이다. 이것 또한 아버지의 걱정을 대하는 자식의 시대를 초월하는 자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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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 나의 꿈 나의 사랑!      

20대를 치열하게 보낸 한국 만화가들이 30대에는 돈이 아니라 예술성 때문에 계속 사회와 소통하며 만화를 만들어내는 그런 ‘문화경제’를 일구고 싶다.                

[71호] 2009년 01월 17일 (토) 01:04:07 우석훈 (경제학 박사·<88만원 세대> 저자)
             
   

ⓒ뉴시스정부가 두 가지 만화 매체에 연 20억원씩만 지원해주면 숨통이 트일 것이다. 위는 만화발전 관련 계획을 발표하는 유인촌 장관.

지난 2주 연속 녹색 뉴딜을 다루느라 문화경제학이 잠시 쉬었다. 그동안 만화 작가 몇 사람을 만났고, 어떻게 하면 만화를 살릴 수 있을까, 꽤 농도 짙은 얘기도 나누었다. 그중 몇 사람은 나와 신작을 같이 하는 공저 관계이지만 이런 비즈니스 관계 말고 만
화 자체를 위해서 만난 사람으로 최규석이라는 분이 있다. 개인적으로 나와는 ‘존경’ 관계이다. 물론 일방적으로 내가 만화가 최규석을 존경하고, 그의 예술 세계를 동경한다. 오늘 글은 그와 그의 동료, 그리고 그와 상관없는 또 다른 만화가들과 나눈 얘기를 정리한 것이다.

먼저 나와 만화의 관계를 정리해보자. 나는 대학 시절 전형적인 딴따라였는데, 음대 수위 아저씨가 내가 졸업할 때까지 기악과 학생인 줄 알았다는 얘기가 따라붙을 정도로 악기나 만지던 인간이었다. 나의 악기는 해금이었고, 연주회 때 가끔 아쟁을 연주하기도 했다. 잔디밭에서 막걸리 마실 때에는 기타를 치기도 했다. 나는 <자본론>과 레닌의 책을 읽으면서 혁명전사의 꿈을 품기도 했다. 바로 그 시절, 내가 꿈꾼 직업이 만화 평론가였다. 음악을 전공하면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고, 실제로는 매주 나오는 만화를 읽으면서 이걸 직업으로 하는 그런 삶, 그런 게 대학 3~4학년 시절 내가 꿈꾸던 ‘보람된 미래’였다. 물론 대학 4학년 때, 경찰에게 쫓기면서 나의 이런 고상한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악기를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고, 손에서는 굳은살이 사라졌고, 먹고살기 위해서 현대그룹에 취직하면서 하룻밤을 꼬박 울었다.

지금 만화는 대학 시절의 꿈과 나를 연결해주는 다리와 같다. 내가 조금만 재능이 있었다면 나도 만화를 그린다고 했을 텐데, 불행하게도 신은 나에게 그런 재능을 주지 않았고, 나 또한 너무 일찍 그 사실을 알았다. 만화는 나에게 꿈과 같다. 그래서 이 문화경제학 시리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구분해 별도의 절에서 다루는 정도이다. 이거 내가 혁명전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던 시절에 대한 사랑과도 같은 일이다.

자, 본론으로 들어가자. 기계적인 통계를 살펴보면, 2006년 기준으로 만화시장의 총규모는 4362억원 정도이다. 1조원도 안 되는 시장이다. <2007 문화산업백서>에 따르면 온라인 만화시장이 309억원 정도니, 오프라인 시장이 훨씬 크다. 간단히 생각해보면, 4000억원 정도가 움직이는 시장으로 볼 수 있고, 한국 경제로 보면 보잘것 없는 규모이다. 수치로 보면, 경제학자가 움직여서 분석하기에는 좀 작은 시장이기는 하다.

잠재성은 높지만 가능성이 차단된 시장


이건 정량적 얘기이고, 만화 시장의 정성적 얘기들을 좀 하자면, 이 시장은 ‘잠재성’은 높지만 그 잠재성을 드러내지 못해 망해가는 시장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아무래도 제일 큰 것은 ‘만화가게’로 형성된 유통망들이 무너지면서 더 이상 대량으로 돈이 들어올 가능성이 차단된 상태라는 것이다. 물론 온라인에서 강풀을 비롯해 몇 명의 스타가 움직이기는 하지만, 그 규모가 아직은 크지 않아서 전체 시스템을 움직이기는 어려워 보인다. 여기에 김대중 대통령 시절 애니메이션 학과와 만화학과들을 만들면서 신규 인력의 만화 시장 진입 통로는 많이 확보했으나, 막상 이 사람들이 움직이기에는 시장이 너무 협소하니까, 한국의 만화 지망생들이 지닌 잠재성을 펼쳐 보일 통로는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라 할 수 있다.


   

ⓒ뉴시스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
이 상황에서 ‘학습만화’ 시장이 출판의 하부 시장으로 펼쳐지면서, ‘만화 장금이’를 비롯해 이미 원작이 있는 이야기들을 기계적으로 만화화하는 일에 상당한 인력이 투입되어 월 100만 원에서 150만원 정도를 어렵잖게 받을 수 있는 정말 우스운 형국이다.

그런데 한국의 만화 소비자들의 눈이 웬만큼 높은가? 나부터도 우라사와 나오키를 신으로 떠받들면서 ‘마스터 키튼’ 같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말이다. 왜 너네는 이렇게 못해? 사실 질문은 그렇게 하지만, 속사정을 아는 나로서는 서로 속 터질 얘기를 하는 셈이다. 물론 나는 경제학자로서 한국에서도 우라사와 나오키 같은 사람이 나올 만한 구조를 만들고 싶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만들어낸 스튜디오 지브리 같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생기도록 정책을 디자인하고 싶다. 그런 것들을 정부에 건의하고 싶기는 하다. 그런데 이게 어렵다. 만화산업에 기꺼이 투자하던 김대중 정부를 넘어서 10년 동안 정부도 할 만큼 했는데 말이다.

일단 일본에 비하면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다는, 늘 정답이지만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할 수밖에 없는가 보다. 우라사와 나오키를 비롯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들고 나왔던 일본의 일류 만화가들이 20대를 지나 30대에도 이런 양산 시스템을 지속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부닥쳤을 때, 그들 통장에는 이미 수십억원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같은 방식으로 한국의 만화가가 20대를 치열하게 살았을 때, 그들에게는 마이너스 통장만 남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이 차이는 극복이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도 한번 해보고 싶다. 20대를 치열하게 보낸 한국의 만화가들이 30대에는 돈 때문이 아니라 예술성 때문에 계속 사회와 소통하며 만화를 만들어내는 그런 ‘문화경제’를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

인식의 문제는 그 다음 문제로 치고, 일단 제대로 된 주간지·월간지가 너무 적다. 웹툰에서 매일 새로운 만화가 나오는데, 이런 전통 매체를 살릴 수 있을까? 별수 없지 않나, 이런 걸 살리는 수밖에. 정부가 눈 딱 감고, 매체 두 개 정도만이라도 지원을 해주면 좋겠다. 1년에 20억원씩 딱 두 개 정도를 지원하되 하나는 시사 만화, 하나는 예술 만화, 이렇게 주간지 두 개쯤 만들어주면 일단 20대 만화가들의 숨통이 트일 것 같다. 그러면 정부 입맛에 맞는 것만 하게 되지 않을까? 독립적인 위원회 정도로 ‘예술적 독립성’을 보장해주는, 그런 길을 찾아보자.

그 다음에는 만화가의 연구 여건인데, 그들이 소통할 수 있고, 훈련받을 수 있는 그런 소통 센터가 필요할 것 같다. 좀 기이한 발상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만화가들이 시민과 만나고 동시에 학자와 과학자, 그리고 관료들과 직접 소통하면서 시대의 이야깃거리를 찾고 동시에 고민할 수 있는 그런 공간 말이다. 이런 것들은 만화가 우리 시대의 전위 매체로 맨 앞에 설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단행본은 꼭 돈 주고 사서 보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비자의 문제이다. 개개인에게는 제발 소장을 위해서라도 단행본을 돈 주고 사보라고 호소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으로는 마치 노래방에서 그렇게 하듯이 대본소에서 건별로 비용을 물게 하는 제도를 정착시키는 것 등이 필요하다.

많은 10대 청소년 그리고 20대 문화 생산자가 만화가의 삶을 여전히 희망한다. 그들이 예술가이고 만화가로서 세상에 데뷔하게 해주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이 좀 있다. 제2의 최규석을 기다리는 우리의 소망이 문화 한국으로 가는 또 다른 길 아닌가? 만화, 이대로 죽이기에는 너무 아까운 한국의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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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의 제목을 '구입한 책'이라고 할 때마다 이놈의 작명센스를 탓하게 된다.
하지만 딱히 다른 제목을 넣을 수도 없는 '오늘의 구입한 책' 포스팅 되시겠다.
요즘은 책을 사들이기 보다는 읽는 쪽에 좀 더 집중하자고 마음 먹고 있어서 책을 사들이지 않았는데
오늘은 지난 주에 받은 상품권도 있고 해서 아주 약간 마음에 동(?)했다.

우천염천 / 브로크백 마운틴 /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우천염천은 하루키의 남아있는 얼마 안되는 책이다. 지금까지 발간된 그의 에세이와 수필집은 모두 섭렵했는데
아직 섭렵하지 못한 책이 얼마전에 나온 <승리보다 소중한 것>과 <우천염천> 두권이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읽으면서 하루키표 에세이에 다시금 홀딱 반했다. 조금 외도를 했으니 오랜만에 집중해서 
긴장감있게 읽어봐야지 싶다.

<브로크백마운틴>은 사실 영화에서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두 배우의 연기가 별로였다거나 이야기가 별로
였다거나 한건 아닌데, 참 이상스럽게 영화 자체에 몰입이 되지 않는다고 해야하나. 그런데 부분 발췌한 원작소설을 
읽어보니 왠건 영화보다 소설이 낫지 싶다. 그 때는 느끼지 못했던 그들 사이에 흐르던 무언가가 한껏 느껴져서
소중하게 읽고 싶어지는 그런 책이다.

소문만 무성했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이 책은 그야말로 소문은 무성한데 정작 읽은 사람은 없어서
읽고 나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는 그런 책이다. 마치 야마다 에에미의 <풍장의 교실>이 무수히 많은
소문에만 둘러 쌓여있다가 도서관 구석에서 만난 그런 기분이랄까? (난 대학 도서관에서 정말 우연히 찾았다)
<풍장의 교실>만 같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아 기대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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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나는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다는 것, 더군다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삭제된 역사를 알게 된다는 것은, 무지로 인해 보호받아 온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운, 사회에 대한 분노, 소통의 절망 때문에 상처받을 수 밖예 없는 일이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생물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도너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이렇게 말했다. "과학 지식은 목적에 관한 것입니다. 특정한 것을 안다는 사실은, 설명 가능성의 의미를 변화시킵니다. 목격은 언제나 해석적인, 우발적인, 예약된, 속기쉬운 참여입니다. 목격이란 증언하는 것이고, 서서히 공공연하게 자신이 본 것과 기술한 것을 해명하는 것이며, 자신이 본 것과 기술한 것에 마음의 상처를 받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때문에 여성주의는 사람들은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편안함은 더욱이 없다. 다른(Alternative)렌즈를 착용했을 때 눈의 이물감은 어쩔 수 없다. 여성주의 뿐만 아니라 기존의 지배 규험, '상식'에 도전하는 모든 새로운 언어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삶을 의미있게 만들고, 지지해준다(empower). 여성주의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의문을 갖게 하고,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대안적 행복, 즐거움 같은 것이다. (p12)


 페미니즘은 그렇게 거창하거나 '무서운'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 잘 들리지 않았던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보자는 것이다. '다른 목소리'는 혼란이 아니라 다양성과 창조력의 원천이다. 사람들도 소품종 대량 생산 사회보다 다품종 소량 생산 사회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는가.
 초등학교 교실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다. 5학년 남자 어린이가 별뜻 없이, 또래 여자 아이들에게 말했다. " 너희들 , 하느님이 나는 진흙으로 직접 만드시고, 여자는 내 갈비뼈로 만들 거 알아?" 그러자 두 명의 여자 아이들 말이 걸작이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근데, 누가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니?","그러니까, 너는 질그릇이고 나는 본차이나(Bone China)네!" 여성주의는 남자 어린이의 말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여자 어린이들의 재치있는 대응대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성주의는 그러한 '다른 목소리'가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고, 여성도 남성도 성장시킨다고 믿는다.(p70)

정희진 / 페미니즘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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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바지 세상을 점령하다]의 서평을 써주세요
청바지 세상을 점령하다 - TBWA KOREA가 청바지를 분석하다
TBWA KOREA 지음 / 알마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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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이 지나가고 2009년이 시작할 무렵, 아니 굳이 이 때가 아니어도 시간에 큰 쉼표가 찍히는 순간, 사람들은 시간을 돌아보는 일을 하곤 한다. 무엇으로 시간을 돌아보고 또한 조직해서 세상을 바라볼지를 고민해야 하는 시간이다. 2008년에도 많은 단어가 세상을 수놓았고, 많은 이들이 다양한 단어를 내놓았다. 그런 이야기 속에 조금 재미있는 소재로 세상을 본 책이 등장했다. 청바지라는 소재로 미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한국까지 이야기하는 책 <청바지 세상을 점령하다>

<청바지 세상을 점령하다>는 청바지의 탄생부터 현재까지, 청바지의 역사와 그 청바지와 함께 한 미국과 세계의 흐름에 대해서 말한다. 종교의 박해에서 벋어나 자유를 찾아 떠난 이들이 만든 미국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들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기존에 유럽에서와는 다른 삶의 방식을 받아들여야 했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은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했기에 그들에게 변화에 대한 적응은 곧 생존이다. 1840년대 한창 서부개척이 이루어지고 골드러시라는 이름으로 모든 이들이 미국 서부로 달려갈 무렵 그들에게는 동양에도 서양이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청바지가 등장했다. 굳은 일을 해야하는 이들에게 싸고 해지지 않는 질긴 옷으로, 미국 서부의 변화를 대변하는 옷이 바로 청바지였다. 그렇게 탄생한 청바지는 미국을 벗어나 전 세계로 팍스 아메리카나의 이름으로 퍼져나갔고, 세계 사람들은 미국의 문화를 향유하며 청바지로 대변되는 자유로운 문화를 즐겼다. 때로 청바지는 자유로운 문화의 상징으로, 사회에 대한 반항의 메세지, 이제는 청바지 사이즈와 가격으로 자신을 대변하는 문화에 맞게 변화를 하며 사람들의 필수품이 되었다.

   
  청바지가 프래그머티즘을 만나지 않았다면? 한떄 유행으로 끝났을 것이다.
사람에 옷을 맞추기 보다 옷에 사람을 맞추었다.
생산 속도를 폭발적으로 가속시키는 컨베이너벨터 장치에 올라타 대량 생산을 시작했다.
그 결과 청바지는 가장 많은 개체들의 피부가 되었다.
프래그머티즘에 기반을 둔 제품들은 미국을 경제적으로 성공한 강국으로 만들었다.
실용성, 효용성을 찬양한 결과다. 가격도, 혁신도 감수했다.
살아남아야 하는 절박감 갑자기 팽창해버린 사회를 유지해야 하는 긴장감.
그들은 현재에 도움이 되는 대답에 관대할 수 밖에 없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 미국의 사회 상황은 실용성에 기반을 둔 크리테이더 들로 넘쳐났다.
포드,에디슨, 라이트형제가 있었고 아인슈타인은 미국으로 망명했다. 채플린, 앤디 워홀 같은 아티스트들도 등장했다.
 
   
<창바지 세상을 점령하다>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책도 두텁지 않고 내용도 어렵지 않고 책도 일반적인 보고서라고 하기에는 자유롭다 싶을 정도로 제작되었다. 오히려 이 책은 표지만 때어놓고 보면 패션잡지의 특별판 같은 느낌으로 매우 가볍다. 이 책에 들어간 활자를 읽는데 걸리는 시간은 물리적으로 1시간 남짓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내 청바지를 보면서, 사람들이 입은 청바지를 보면서 생각하는 시간은 물리적인 1시간에 비할바가 아니다. 청바지를 미국 프로그머티즘과 결합하여 시대를 읽을 수 있는 코드로 만들고, 그 코드가 현대까지도 유효함을 정리한 것이다. 왜 미국은 그토록 실용적인 것을 강조하는가, 그들에게 왜 변화는 생존인가, 21세기 보보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이들은 사회를 어떻게 살아가는가, 미국으로 대변되는 문화에 너무나 익숙해져 이제는 일상을 놓고 보면 미국인지 한국인지 구분할 수 없는 이 삶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이 책은 한 광고 기획사 신입직원들의 보고서이다. 그들이 청바지를 가지고 세상을 읽어보라는 과제에 대한 산물이다. 이 얼마나 멋진 결과물인가. 우리는 청바지 한장을 보면서 그 가격과 디자인을 생각하고 지나갈 뿐이지만, 그들은 청바지라는 매일 접하는 단순한 한장의 옷에서도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생각을 할 수 있다. 사실 한가지 장점이자 단점은 이 책의 표면적 구성이라고 생각한다. '청바지 탄생 150주년 기념'으로 나온 패션 잡지의 특별판처럼 지금까지 읽던 책이라 보기에는 화려하고 독특한 디자인이 인상적이다. 아마도 광고 기획사라는 특성상 책 디자인도 지금 20,30대들에게 접근하기 좋도록 디자인 되어 있는 듯 하다. 나에게는 다소 부담스럽게 나가온 면이 많았지만 지루하지 않은 책 읽기에는 분명 나쁘지 않을 듯 하다. 즐겁지 않고 재미있지 않으면 접하려고 하지 않는 21세기 한국 사회를 반영하는 디자인이라고 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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