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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과 함께한 열한 번의 건축 수업 - 친절하고 재미있는 강의실 밖 건축 이야기 ㅣ 썬 시리즈 1
권선영 글.그림 / 컬처그라퍼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다정한 수업이다.
책을 보면서 함께 걷고 바라보았다.
아, 눈앞에 건축물이 펼쳐졌고, 그 건축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물론 그것을 상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보이는 것에 즉자적으로 감탄하고 놀라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일, 그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더 좋았다. 당장 볼 수도 없는 것을 내 마음의 눈앞에 끌어들이는 일. 《썬과 함께한 열한 번의 건축수업》이 지닌 미덕이다.
이런 다정한 책이라니. 덩달아 건축수업을 받은 것 같다.
나도 건축에 관심이 많다. 그것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예술이며, 건축과 공간이 삶에 깊이 삼투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축은 삶을 반영한다. 삶은 건축에 의해 움직인다. 당대의 욕망과 시대정신, 이데올로기, 배경 등을 담는 것이 또한 건축이다. 그러니 건축가라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공간을 축조할 수 없다. 더구나 그들에겐 ‘건축주’라는 가장 큰 장애물(?)이 있다. 좋은 건축을 하고 싶다는 열망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는 없다.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진행된 썬의 건축수업은 빤하다. 그런데 그것이 외려 성공적이다.
건축 초보자 혹은 건축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겐 그 빤한 것이 부담도 없고, 가뿐한 마음으로 따라가기에도 편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샤를 할아버지의 다정한 속삭임이, 직접적으론 건축을 말하지만 곧 삶에 대한 이야기여서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썬에게도 좋은 충고이자 위로가 됐겠지만, 훌륭한 건축가의 조건에 대한 샤를 할아버지의 말은 모든 좋은 것을 향한 충고이기도 하다. “모든 예술 분야가 그렇듯이 건축도 남들이 시키는 일을 잘하기보다 자신만의 건축세계를 가지고 그것을 세상에 펼칠 수 있으면 훌륭한 건축가가 되는 거란다.”
그리고 편지에서도 그것은 강조된다. “앞으로 주위에서 무슨 이야기를 듣든, 기죽지 말고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렴. 그게 항상 정답이란다. 영웅은 남이 가는 길을 가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며 자신의 길을 떳떳이 가는 사람이야. 너도 네 인생에서 영웅이 되렴.”(p.287) 이 빤하고 흔한 말이 열한 번의 건축수업에 동행한 나에게도 찡한 감정을 안겨줬다.
그 다정한 건축수업이 아녔다면 느끼지 못할 감정이었으리라.
건축이 좋아서 원래의 전공을 때려 치고 파리로 건축을 공부하러 간 썬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잘 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노력하고 시도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진리.
그러나 현실은 그 열망과 정반대로 향하거나 심지어 짓누르기 일쑤다.
그렇다고 포기하지 않는다. 영웅 서사에서 그건 말도 되지 않는 행위니까.
소박한 영웅 서사를 차용한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지점은 건축에 대한 거리감을 줄여준다는 데 있다. 물론 한국에서 만날 수 있는 건축이었다면 좀 더 실감나고 더 거리감을 좁혔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건축후진국 한국에선 흔히 만날 수 없는 건축물에 대한 일러스트까지 곁들인 세심하고 쉬운 접근은 충분히 칭찬받을 만하다. 내겐 글로만 접했던 현대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의 건물의 속살을 보여준 점도 고마운 점이다.
특히나 건축적 산책. 그 시적인 공간을 걷고 만지고 싶었다. “‘공간을 산책한다’는 의미로, 미로같이 복잡한 내부구조를 뜻한다. 공간 내부가 한눈에 파악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다닐 때마다 시야가 바뀌는 공간구조이다.”(p.69) 아, 생각의 산책을 유도한다. 공간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패턴을 만든다면 책은 그 책을 읽는 사람의 생각 패턴을 만든다.
그러니 좋은 책은 상상하고 사유하게 만드는 책이다.
당연히 《썬과 함께한 열한 번의 건축수업》이 그렇다는 말이다.
《르 코르뷔지에》를 쓴 일본 건축가 도미나가 유즈루의 언급은 그런 면에서 내게 새로운 건축적 사유를 촉구한다. “건축은 공간 예술이지만 회화나 조각과는 달리 한 번에 파악되지 않고 음악처럼 운동에 따라 잇달아 일어나는 시간 예술이다. 시점의 이동과 함께 습득되는 현상이다.”
잊지 않기 위해 쓰자면, 오스마니앙 건물.
내가 아는 공간의 이런 건물이 떠올랐다. 파리 건물 대부분은 오스마니앙 스타일이라고 했다. 1850년대 오스망 시장이 파리의 도시 설계를 새로 하면서 지은 양식인데, 내가 아는 그 공간의 이런 구조가 궁금했었다. 유럽에서 볼 수 있는데 내 주변의 누구도 이것이 어떤 양식인지에 대해서는 몰랐는데, 그 궁금증이 풀렸다. 다 이 책 덕분이다.
한국, 특히 서울에 살면서 가장 큰 불만족의 하나가 미감(미적감수성)이다. 도대체 이 도시엔 그런 미학이 없다. 흉측한 건축(물)이 주는 혐오감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미적감수성을 다치게 할 뿐이다. 우리네 삶이 이렇게 강퍅하고 비루한 건 건축에도 분명 책임이 있다.
그저 높고 번듯하게 지으면 다 되는 줄 안다. 랜드마크는 또 어디서 들어서 그렇게 남발해대는지. 중요한 것은 건축과 삶(생활)의 조화다.
주위환경과 잘 어우러지는 것도 얼마나 중요한가.
“할아버지는 건축물 자체도 중요하지만 주위 환경을 잘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그 건물이 주위 환경과 잘 어울리는지 아닌지, 잘 안 어울릴 경우 어떤 요소 때문인지, 그 요소가 결국 그 환경을 새롭게 만들어 주는지. 하여간 살펴볼 것들이 많았다.”(p.95)
이 책을 통해 거듭 확인한 바는 건축은 곧 삶의 문제라는 것이다. 사는 사람은 물론 방문하는 사람들의 삶과 생각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그들에게 어떤 존재로 다가갈 수 있는지와 같은 질문들도 고려해야 한다는 썬의 깨달음은 나의 것과 일치하고 있었다.
르 코르뷔지의 이 말을 새긴 이유다.
“건설의 목적이 건물을 지탱하는 것이라면, 건축의 목적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데 있다. 건축은 조화의 문제이며, 그것은 정신의 순수한 창조물이다.”
샤를 할아버지도 덧붙인다. “건축가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예술가야.”
커피 만드는 사람으로서도 분명 적용되는 지점이 있다. 마시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것, 감동시키는 것. 커피나무를 자라게 하는 대자연과 만물의 순환, 모든 커피노동에 관여하는 노동자들이 빚어낸 육체와 정신의 조화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리라.
좋은 건축가의 의도가 빚은 건물에서 맛있는 커피를 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축과 커피의 조화. 얼마나 향기롭고 감동적인가.
그리고 뭣보다 빛. 빛이 절묘한 화음을 연주하는 곳이면 좋겠다.
빛의 사용이 아주 특이하고 흥미롭다는, 르 코르뷔지에가 거의 마지막으로 설계한 건축물이라는 롱샹 성당이 가고 싶어졌다.
샤를 할아버지는 썬을 롱샹 성당에 데리고 가면서 훌륭한 음악회에 데리고 가겠다고 말을 했었다. 르 코르뷔지에가 빛으로 작곡한 교향곡, 롱샹 성당을 방문한 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공간 역시 빛으로 작곡한 교향곡이 흐르는 곳이면 좋겠다.
커피는 자신 있으니, 그 교향곡만 갖춰지면 된다. 생각만 해도 설레는 일이다.
자, 당신을 초대할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