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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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에 '여자친구'가 있다면, 나는 그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런데 나는 세계의 끝이 어딘지 모른다. 물론 그것은 물리적 장소(성)만을 뜻하진 않으리라. '세계의 끝'이라는 어감은, 어쩐지 아득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사람들이 맞닥뜨린 곳이, 아마도 세계의 끝이 아닐까. 다시 묻는다. 나는 궁지에 몰린,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진 여자친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김연수의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그것에 대한 일종의 답변이다. 여기에 실린 단편,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가 그렇다. 김연수는 용산을 말했다. “편의점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온 동료들이 다시 사무실로 들어오는 걸 보고 내가 화면을 끌 때까지, 거기에는 타오르는 불꽃과 시커먼 연기와 아래에서 솟구치는 물줄기가 침묵의 공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날 새벽, 거기서 여섯 명의 사람들이 불에 타 죽었다는 건 며칠이 지나서야 알았다.”(p.107)

그러니까, 지금은,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면서 갈 곳을 묻는 이들에게, 국가가 폭력으로 대답하는 시대. 김연수에게 용산(희생자들)이 그랬던 것은 아닐까. 세계의 끝에 내몰린 여자친구 같은 존재. 김연수는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그것을 세계의 끝 여자친구로 표현한 것은 아녔을까.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 구절. 나를 울리기도 했던 이 편지글이 김연수(의 펜)를 추동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렇게 바람을 맞으며 내가 떠올린, 그날 새벽의 타오르던 붉은 불꽃과 시커멓게 피어나던 검은 연기와 아래에서 솟구치는 하얀 물줄기들에 대해서,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읽게 된 편지의 구절들에 대해서. "아버지와 아빠에게"라는 구절로 시작해서 "아빠, 나는 아빠가 보고 싶어. 지금은 이 마음 하나뿐이야.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 꿈속에서라도 한번 나와 줘, 나는 아빠를 힘껏 끌어안고 놔주지 않을 거야. 떠나지 못하게 절대 놔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아빠한테 말할 거야,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2009년 1월 용산참사로 숨진 윤용헌씨의 장남 윤현구군이 쓴 편지 중에서)로 끝나는. 아까 내가 울었던 건 그 편지의 구절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나는 얘기했다.”(p.114)

김연수는 자신이 당장 가닿을 수 없는 세계의 끝에 있는 여자친구에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썼을 것이다. 용산에 대해, 이 세계에 대해. 지금 우리에게 용산은 그렇다.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할 빚이 됐다. 국가권력이 어처구니 없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그 뒷수습은 우리의 것이 됐다. 그 시대도 따지고보면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던가. MB로 대변되는 패악과 몰염치를 잉태한 것은 우리다.  

2009년 1월20일, 용산은 그 날을 기점으로 더 이상 ‘전자상가’로 대변되는 장소가 아니다. 살자고 외치던 이들이 죽었고, 그들은 아직 장례식도 치르지 못했으며, 국가는 아무런 말이 없다. 국가는 국민을 지켜주는 것이 본디 의무이며 사명인줄 알았다. 우리가, 잘못 알았다!  

하지만 일상은 언제나처럼 우리의 의식을 잡아먹고, 용산이 기억 한켠에서 멀어질 즈음, 김연수의 글은, 뇌주름을 건드리고 있었다. 너,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부끄러웠다. 부아가 다시 치밀어올랐다. ‘케이케이’를 사랑했던 미국인 작가(「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처럼, 그랬다. “‘무엇도 영원한 것이 없는, 스쳐 지나가는 것들로 가득한, 좌충우돌의 도시’에서 떠나고 싶다. 지금 당장.” (p.20) 막장이 대세인 지금 이 땅, 세계의 끝에 내몰린 여자친구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가. 다시 책은 묻고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김연수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적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자친구, 그리고 세계의 끝. 필요한 것은 노력이다. 김연수는 그 노력으로 용산에 대한 글을 썼고,(그것이 성공적이든, 아니든) 나는 그것으로 환기받았다. 그 말에는, 꾹꾹 눌러 담은 작가의 흔적이 있었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느꼈다. 김연수는 사랑했던 것이다. 직접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서로 연결돼 있다는 것을.

김연수는 그것을 실토하고 있었다. “이 우주의 90퍼센트는 그렇게 우리가 볼 수 없는, 하지만 우리에게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는, 그런 불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물론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그 불들을 보지 못하겠지만.”(p.32) “나는 숭례문의 그 불꽃에 영향을 주고 또 영향을 받았다. 미신과도 같은 이야기지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p.317 ‘작가의 말’ 중에서)  

단편 사이로 난 길에는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관통하는 소극적인 이정표가 있다. 각기 다른 이야기와 서사로 포장돼 있지만, 그는 우리 사는 세계의 연결성을 포획하고 있다. 「내겐 휴가가 필요해」의 '최'같은 또라이도 그렇다고 내팽개치진 않는다. 분명 편애는 있지만, 차별은 하지 않는다. 공명의 순간을 기다리는 예지자 같은 느낌도 있다. “각각의 삶은 하나씩의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들은 서로 연결돼 있으니, 우리는 어디에서 무엇으로 살더라도 결코 혼자가 아니다. 한쪽 끝을 건드리면 다른 한쪽 끝이 떨린다. 그 공명과 공감 속에서 예수 시절 이래의 ‘정의와 아름다움’이 이어져올 수 있었다.”(pp.294~295)

나는 '이해니, 오해니' 하는 말로 김연수를,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김연수가 공명의 순간을 바란다손, 책을 읽은 모두가 김연수의 마음과 같을 순 없다. 아마 100만부가 나간다손, 그 마음은 분명 100만개로 흩어질 것이다.  

책을 통해 누군가는 이것을, 다른 누군가는 저것을 획득하거나 채집하지 않았을까. 자기만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어떤 것. 살아가는 동안 셀 수 없이 맞닥뜨리는 오해와 이해의 외줄타기. “우리는 모두 헛똑똑이들이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사실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은 ‘우리 쪽에서’ 아는 것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런 처지인데도 우리가 오래도록 살아 노인이 되어 죽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리석다는 이유만으로도 당장 죽을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삶에 감사해야만 한다.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맞다. 좋고 좋고 좋기만 한 시절들도 결국에는 다 지나가게 돼 있다.”(p.81)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나일 수도 있고,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바꿀지도 모른다. 아니 바꾼다기보다 영향을 미칠 것이다. 크든 작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흘러가던 이야기가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영향. 김연수도 그것이 가능함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한쌍의 연인이 1982년 라스베이거스에서 시합을 하다가 링에서 쓰러져 죽은 권투선수(고 김득구) 때문에 사랑했고, 2001년 9․11 테러로 무너진 쌍둥이빌딩 때문에 헤어졌듯(「달로 간 코미디언」).  

내 신경의 무심함을 건드린 김연수의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그렇게 질문을 던진다. 세계의 끝에 있는 여자친구를 위해 너는 무엇을 할 것이냐. 용산은 여전히 현재진형행이다. 계절이 네 번을 바뀌어 다시 그 계절로 왔다. 물론 우리가 느끼는 체감은 지난해와 또 다르다. 생각지도 않았던, 상상도 못했던 일이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됐고, 우리의 상처는 깊다.  

김연수는 이번 소설집을 통해 그의 고민을, 특히 용산에 대한, 드러냈고,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글쓰기)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넸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화답해야 할까. 각자의 방식이 있겠지만, 우리도 여전히 그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 각자는 안드로메다와 지구 사이의 서로 맞닿을 수 없는 머나먼 생명체가 아니므로. “우리는 각자가 하나의 이야기들이고서로 연결되기를 기다리는 별들이다. 그러니 우리가 각자 고독하게 달로 가지 않고 모두 함께 복된 새해를 맞이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 메리 올리버가 가르쳐준 대로 말이다. "절망을 말해보렴, 너의. 그럼 나의 절망을 말할 테니./ 그러는 동안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기러기」)”(p.313 해설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중에서)

서로가 서로를 껴안을 때 우리는 어쩌면 행복해지는 존재들이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엄마의 품에서 안전함과 평화를 느낀 존재가 아니었던가. “불편한 자세로, 우리는 물속에서 서로 껴안고 있었다. 우리는 입을 열지 않았다. 물에 젖었건 땀에 젖었건, 내가 사랑한 케이케이의 몸은 언제나 젖은 몸이었다. 나는 케이케이의 젖은 몸이 내 몸에 닿는 게 좋았다. 그 젖은 몸은 보통의 육체와 달랐다. 그 젖은 몸은 보통의 육체와 달랐다. 한없이 부드럽고 또 연약했다. 소년의 몸. 가만히 두면 물에 풀리는 물감처럼,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는, 젖은 몸. 나는 그걸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한사코 케이케이에게 매달렸다. 내가 아는 행복이란 그런 것이었다.”(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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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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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모든 것의 방식이 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무엇. 옳고 틀리고,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냥 자신만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김훈은 《공무도하》를 통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강경감의 말처럼, 해망은 해망의 방식대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p.320) 균열이 있었다손, 그것은 다시 제 방식대로 간다.   

김훈에게도, 김훈만의 방식이 있다. 그의 글을 읽노라면 어쩔 수없이 감내해야 할 무엇이다. 싫으면 안 보면 그만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읽을 수밖에 없는 무엇도 있다. 때론 그(가 쓴 글)에게 베일 때가 있다. 피가 흐른다. 그 피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다. 닦아내봐야 소용없는 짓임을 알기 때문이다. 피를 닦는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그저 피가 응고되기를 기다려야 하는 시간. 《공무도하》가 그랬다.

그곳에는 어쩔 수 없는 것들, 인력으로는 바꿀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다. 살인이나 치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토록 무덤덤한 일상 혹은 서사가 있을 뿐인데도, 나는 그 속에서 내 빨간 피를 봐야했다. (할 수)없는 것은 (할 수)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일까.  

《공무도하》는,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성립되지 않는 질문에는, 당연히 답하지도 않았다. 언론이, 미디어가 세상을 담는 그릇이라지만, 세상에는 신문에 쓸 수 없는 것들, 담아지지 않는 것들, 써지지 않는 것들, 말로써 전할 수 없고, 그물로 건질 수 없으며, 육하의 틀에 가두어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다가갈 수 없고, 긍정할 수 없는 죽음도 있으며, 해석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죽음도 있었다.
 
온통 없는 것 투성이였다. 혹은 없는 것을 붙잡기 위한 발버둥도 가끔 있었지만, 그것은 허사였다. 왜 그랬을까를 묻지는 마라. 그래야만 하는 것도 있으니까. 바다사자의 모습이 그랬다. 인간의 세계에 어쩔 수없이 발을 디딘 녀석은,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고 허우적거렸고, 일어설 수 없는 몸을 일으키려는 몸부림을 쳤다. 그래야만 했던 것이다. 존재증명을 위한 것도 아니었고, 그것은 그만의 방식이다.  

사람이라고 다르냐. 아니. 저 멀리 떠나있던 아들의 개죽음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오금자가 있었다. 어처구니 없는 딸의 개죽음에도 목소리 제대로 내지 못한 채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방천석도 있었다. 그 한편에는 그들을 취재할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결국 포기한, 추적할 수 없고 전할 수도 없는 세상을 말할 수밖에 없는 문정수도 있었고,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노목희도 있었다.  

《공무도하》는 애초에 포기하고, 아니 그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이해를 바라지도 않고, 억지로 설명을 하려 하지도 않았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폭력적이 되곤 하는데, 김훈도 늘 말하지 않았던가. 세상을 이루는 근간은 폭력과 악이라고. 그는 일찌감치 이해되기를 바라지 않는 투다. 그것을 폭력(적)이라고 여겨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김훈이 덕지덕지 묻은 글 속에서 나는 자꾸만, 버티고 견뎌야 하는 우리네 일상이 중첩됐다. 가감없이 그대로 드러난 어떤 일상의 벌거벗은 몸.   

노목희는 말한다. “그래도 기사는 쓰지 마. 치사해. 막막한 쪽이 치사한 쪽보다는 견딜 만할 거야.”(p.129) 하지만, 나는 쓴다. 그것이 나만의 방식이니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애초 기대하진 않았지만, 《공무도하》는 여느 그의 (역사)소설보다 더 깊게 서걱거렸다. 희망도 절망도 아닌 끝에서, 나는 어떤 일상적 풍경과 마주대했고, 너무 오염돼서 괜히 입에 올리기가 민망한 '희망'을 거들먹거리는 것은 실례인 것처럼 느껴졌다.   

맞다. 애초 희망은 위정자들의 언어일지 모른다. 그저 일상을 즐기고 거기서 충분히 행복을 느끼며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돈과 집, 자동차를 들먹이며 안락함을 미끼로 그것을 '희망'이라는 단어로 한데 묶었던 것은 아닐까. 돈, 집, 자동차를 갖춰도, '더 많은, 더 큰, 더 좋은'을 수식어로 붙여 사람들을 현혹한 것이다. 그것을 역시 '희망'이라는 말로 포장한.  

《공무도하》에는 그래서 서툰 희망 따윈 없다. 재미있는 건,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된 지금, 돈을 희망으로 등가시킨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하물며, 화재현장에서 귀금속을 턴 뒤, 소방서에서 퇴직하고 고철인양업체의 전무가 된 박옥출도 돈돈돈하지 않는다. 어쩌면 딸의 억울한 죽음을 돈으로라도 보상 받으려는 심리가 발동할만한 방천석도 그러지 않는다. 그들은 강은 건너지 않고, 아니 건너려고조차 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저 이 더러운 세상에서 자포자기하듯 발을 디딜 뿐이다.
  
따져보면 노목희도 그렇고 문정수도 그렇다. 그들에겐 어떤 야심도 찾아보기 힘들다. 다른 등장인물들에 비해 좀 더 먹물을 먹은 그들이지만,  그저 자신 앞에 놓인 일만을 처리할 뿐이다. 특히 노목희는 늘 문정수를 먹이고 재운다. 그의 어리광을 거의 받아들여주고 다독여주기까지 한다. 즉, 늦은 밤, 갈 곳을 찾는 어린 양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하사한다. 먹일 목(牧)에, 계집 희(姬). 짐승을 거두어 먹이는 목희라니. 그 이름 한번 절묘하다.   

하지만, 그게 다다. 그들은 놀지도 않는지, 《공무도하》는 퍽퍽한 스트레이트 행보로 모든 것을 종결 짓는다. 좋고 나쁘고를 얘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책을 덮고 나는 스산했다. 아무리 퍽퍽한 일상이라도 찰나의 즐거움과 행복이 있을진데, 그들에게선 그것을 찾기 어려웠다. 그나마 베트남의 산간에서 이국 땅으로 팔려(!)왔으나, 꿋꿋하게 버티고 견디는 후에가 가장 인간적이었달까. 강을 건너지 못하고 약육강식의 갯벌에서 발을 빠뜨린 채, 그 나름의 환경에 적응만 하는 등장인물의 면모가 질척거렸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들이 작은 것이라도, 사소한 것이라도 부둥켜안는 것을 봤으면 하는 바람.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진 않아도, 꾸역꾸역 살고 있어도, 찰나일지라도 삶의 하중을 덜 느끼면서 지내는 모습도 봤으면 했다. 노을이 지는 강변에서 노을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그 찰나의 행복감 같은 것 말이다.   

《공무도하》는 무엇보다 삶을, 일상을,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내 삶의 이유는 이것'이라고 못박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자신을 위한 넉살이다. 누구에게도 삶이 지속돼야 할 이유가 굳이 따로 있진 않은 것 같다. 그렇다고 삶을 절단내야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우리는 그냥 사는 것 아닐까.    

장철수는 그 옛날, 노목희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난 아무래도 이 세상을 단념할 수가 없어.” 또 다른 이말도. “세상을 긍정하니까 단념할 수 없는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이런 세상은 아니야.” 단념할 수가 없음에도, 살아있음이 고통스러운. 그래서일까. 장철수의 이 말은 김훈을 대변하는 것 같다. “…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던적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시급한 현안문제다…”(p.35) 

《공무도하》로 나는 얼마나 바뀌었을까. 나는 제대로 책을 읽은 것일까. 지금 나는 어디를 건너고 있을까. 그저 나는 일상과 샅바를 움켜쥐고 씨름을 하고 있는 중이다. 강을 건널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아직 나는 제대로 삶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누구도 나의 설명을 바라진 않겠지만. 하나 더 분명한 것이 있다. 나도 나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 나의 방식대로 자리를 잡을 것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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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llyours 2010-08-09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무도하>를 다시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리뷰군요!
추천, 꾹 누르고 갑니다.
모든 것은 모든 것의 방식이 있다
한 번 써보고(쳐보고) 싶었어요.

책을품은삶 2010-08-09 21:43   좋아요 0 | URL
그 추천의 방식에 고맙단 인사 드려요.^^

모든 것은 모든 것의 방식이 있다

제가 쓴 것이지만,
moon님의 댓글을 보자니, 저도 갑자기 다시 한 번 쓰고 싶어졌어요. ^^
 
인문학 스터디 - 미국대학 교양교육 핵심과정과 한국에서의 인문학 공부안내
마크 C. 헨리 지음, 강유원 외 편역 / 라티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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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혹하고 까칠한 공황의 시절.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 몸도 몸이지만, 마음을 다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그리하여, 마음의 치유와 치료가 절실한 때다. 주변의 위로와 위안도 좋지만 마음치료를 위해서는 자존감을 회복하고 삶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말하자면, 마음의 튜닝. 인문학은 그 중심이다. 최근 일종의 트렌드처럼 흩뿌려지고 있는 인문학. 최고경영자부터 노숙자, 수감자들에게까지 파고들어가고 있는 인문학의 향기.   

 

그런데, 과연 우리는 제대로 인문학과 마주하고 있는 것일까. 인문학이라 지칭되는 것을 무턱대고 흡수하면 될까. 편식도 안 되지만, 과식도 위험하다. 여기, 시민 가까이의 인문학을 위한 가이드가 나왔다.

《인문학 스터디 : 미국대학 교양교육 핵심과정 한국에서의 인문학 공부안내》(마크C.헨리 지음|강유원 외 편역/라티오 펴냄). 아마도, ‘인문학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지난 2월20일, 서울 신촌 토즈에서 책 출간기념으로 강유원 박사를 위시한 편역자들이 “인문학 공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가졌다. 일반인들보다 ‘인문학’을 깊이 연구한 편역자들의 목소리를 엿들었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질끈 동여맨 긴 머리가 허리 부근까지 내려와 ‘철학과’ 포스를 내뿜는 강유원 박사가 등장했다. 졸업하고 취직하지 않아도 욕을 먹지 않고, 취직을 안 해도 괜찮을 것 같아 철학과를 갔다는 말로 청중의 긴장을 푼 강 박사는 인문학의 요체를 한마디로 이렇게 설명했다. 文(문학) 史(역사) 哲(철학). 그렇다면 인문학은, 무엇인가. “어떤 사태에 부딪혔을 때 그 사태를 해명하는 근본 원리에 대해 따져 묻는 학문”이란다. 방점은 ‘따.져. 묻.는.’이 되겠다.  

 



몇몇 청중에게 요즘 가장 고민거리가 무엇인지 묻는다. “이명박”이라는 답변 앞에, 강 박사는 그런 대통령을 선출한 국민과 정치제도에 대해 되묻는다. “근본적으로 민주주의라는 것이 모든 사람의 욕구를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는 제도인가.” 숱한 희생을 거치고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행에 따라 그닥 의심한 바 없이 받아 들여왔던 제도.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그것을 되물어봐야 하는 ‘사태’를 맞이한 것이다. “정치공동체로 사는 게 행복한지, 부족사회에서 사는 게 더 행복한지를 물어봐야 한다.”

그는 다른 일례도 들었다. 역사를 주로 다루는 한 블로그. 그 블로그는 이른바 ‘환빠’(환단고기에 열광하고 믿어 의심치 않는 매니아)의 허점도 지적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역사적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환빠’들은 재차 공격한다. “한민족의 위대함을 깎아내리는 자기 비하 아니냐.” 그럼에도 해당 블로거는 다시 반박한다. “위대한지 아닌지 이전에, 사실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냐.”

강 박사가 강조하는 지점은 이것이었다. ‘환빠’는 이미 한민족이 위대하는 신념체계를 갖고 있다는 것. “인문학은 사실을 냉정하게 따져보는 한편 무념무상의 경지에서 근본적으로 사실에 접근하려는 태도를 뜻한다.” 그런 면에서 인문학은 우리가 세계를, 사물을, 현상을, 그리고 인간을 바라보는 자세와 태도를 뜻하는 셈이다. 개념으로 무장하자는 말. 무개념, 탈개념의 박쥐(주. ‘로꾸거’ 읽을 것)가 활개 치는 세상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인문학 스터디》에 대처하는 자세

편역된 이 책은 원서와 다른 면도 많다. 차례도 다르고 편역자들이 새로 쓴 부분도 있다. 한국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려면 필요한 영역들은 따로 넣었다는 것이 강 박사의 설명이다. 6명의 편역자들이 전공과 관심 분야에 따라 카테고리를 맡고 의견을 보탰다.

“이 책에는 최신 이론이 담겨져 있지 않다. 그러나 최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말라. 내가 1980년에 대학에 입학해서 30여년 동안 이 나라에서 2년 이상 뜨는 철학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만큼 유행에 민감한 풍토를 지적함과 동시에 고전이야말로 진정한 옥석임을 강조한 말이렷다. “이 책은 기껏해야 막스 베버와 카를 마르크스가 있다. 서양 현대철학사는 최신 이론에 지나치게 매달리면 돈 낭비다. 번역의 오류도 많고 연구자가 없어 검증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이 책을 통해 인문학 공부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강 박사는 우선 ‘꼼꼼하게 읽’을 것을 권한다. 한 리뷰어가 ‘다소 독단적인 저자의 선택’이라며 ‘bias(편견, 편향)’라는 단어로 이 책을 평했는데, 강 박사는 “‘논거를 갖춘 확신’을 편견이라고 일컫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책은 논거를 가진 확신이다. 저자인 마크C.헨리는 어리숙하고 띨띨한 사람이 아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장난이 아니다. 이 책이 얼마나 잘 쓰여 졌는지 봐야 한다. 본문내용만 충실히 읽는 것이 인문학 공부의 가이드라인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문장 하나, 문단 하나에 핵심적 내용이 압축된 예.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저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서구 문학의 기원이 최고 지배자가 아닌 모범적인 개인의 이야기로 시작됨으로써, 서구 문명은 모범적인 황제들이나 신들의 행동을 설명하는 고대 또는 초창기의 문학을 보유한 다른 문명과 구별된다.”(p.37) 우리나라의 주몽이나 박혁거세와 같은 왕이 아닌 장군의 이야기에서 시작함으로써 개인주의에 대한 역사적 전통을 알 수 있다는 것이 강 박사의 설명이다. 이처럼 단어 하나부터 충실한 책 읽기가 이뤄진다면 160페이지에 불과하지만, 인문학 전 영역을 포괄하고 궁리 끝에 압축적으로 액기스만 뽑아낸 진수를 맛볼 수 있다. 

또 이 책은 해당 영역마다 ‘읽어야 할 도서 목록’이 있다. 주요 저자의 핵심 저서를 다룬 ‘원전’부터 개괄입문서, 역사책, 세부주제 입문서와 연구소 등으로 층위가 나눠져 있다. 자신이 원하는 공부의 깊이와 방향에 따라 위에서부터 차례로 잡는 것이 좋겠다.




학문은 정통적으로, 자세는 겸손하게

아직은 ‘인문학자’라는 타이틀이 ‘쪽’ 팔린다는 강 박사는 한국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15년에 걸친 ‘공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책 한권을 외우면 5년 동안 술자리에서 화제가 마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자 소리를 들으려면 공부를 20년은 해야 한다. 문학, 역사, 철학에서 제1영역을 어디로 잡든 10년을 하고 나머지 두 영역을 5년씩 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는 학문은 유행이 아님을 상기시켰다. “절대 유행 따라 읽으면 안 된다. 정통적인 것에 대한 까닭 없는 반항이 있는데, 학문은 정통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통적이라는 것은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다. 대학원 등에 가서 철학을 공부하고자 한다면, 커다란 주제를 잡아라. ‘자유’, ‘존재’, ‘필연성’과 같은 무시무시한 주제를 다루고 그런 주제를 다룬 가장 잘 된 책들을 만나라. 피카소는 세밀화의 왕이었다. 그것이 있어서 추상화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즉, 정통에 대한 추구가 있었기 때문에 창조가 가능했다.” 마크C.헨리도 말했다. “뉴만의 가르침을 상기하자. 시간의 편협함을 피하라. 다시 말해 최신 사유라고 해서 최선인 것은 아니다.”(p.123)  

 




이런 공부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강 박사는 선생과 태도를 들었다. “즐기는 수준을 넘어서고자 하면 하루 1시간씩 빡세게 공부하고 매주 2매씩 글을 써봐야 한다. 그러려면 선생을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는 선생이 꼭 필요하다.” 이는 책에 나온 내용과도 일맥상통한다. “대학 교육에서 가장 큰 성과를 거두고자 한다면 두 가지를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바로 스승과 친구다.”(p.27)

강 박사는 선생의 ‘야단’이 곧, ‘절호의 찬스’임을 강조한다. 선생의 말에 담긴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도 공부의 기본이다. “좀 더 도전적인 책을 골라서 써 보라”는 말을 들었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무슨 책을 쓸까요”라고 물어보는 것이 기본이라는 것이다. “(선생이) 아끼고 사랑하면 야단을 치게 돼 있다. 그럴 때는 그냥 대가리를 밀고 들어가야 한다.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의 간극을 채우려면 혼자서는 안 된다. 선생에게 배워라. 선생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정통적인 학자(교과서)를 찾아라. 간극 때문에 인생이 망가질 수도 있다. 독학은 안 된다.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은 일로 만드는 것이 인문학 공부다.”

그리고 겸손함. 배움에 있어 가장 필요한 덕목이라고 강 박사는 강조, 또 강조한다. 자신이 공부한 것을 정리하면서 읽는 자세 또한 겸손함에서 나온다. 아무리 날고뛰어도 대가들 앞에서는 ‘삽질’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 법. “자기 자신을 겸손하고 냉정하게 파악하고 지적인 겸손함에서 인문학 공부는 시작된다. 인문학의 출발점은 곧, 아주 겸손한 마음이다.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모르면 ‘잘 모르겠다’는 소리를 해야 한다. 어떤 질문을 해도 대답하기 위해서 공부한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인문학은 그리하여, 개념교육이다. 무개념이 양산된 것은 인문학을 소홀한 결과다. 교양 없는 인간의 잉태. 지금 우리가 처한 공황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경제정책의 실기와 고민의 부족. “어떠한 경제정책이나 경제체제가 적합한가라는 문제에 대한 접근은 단순히 경제적 생산과 분배의 효율성을 따지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특성에 대한 깊은 인문학적 이해로부터 시작해야 한다.”(p.91)


강연 후기

강연은 즐거웠다. 어쩌면 그것은 인문학의 즐거움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다시 인문학을 고민한다. 지금-여기에서 인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할까. 나는, 우리는 인문학을 통해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책은 어쩌면, 일반 시민들이 공부하고 향유해야 할 인문학에 대한 접근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 “지적 균형감각은 교양교육을 받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열매다.”(p.123)

그리고 이 말, 명심해야 할 것. “인문학 공부는 책을 읽고 이해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자신이 이해한 바를 글로 써서 정리할 때에야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p.18, 편역자 서문 중에서) 공부를 하는데, 이해가 안 된다고? 그렇다면, 또 이 말. “마음을 어지럽히는 텍스트에 맞서는 가장 좋은 방어 방법이 있다. 바로 여러 번 읽고 비판적으로 읽는 일이다.”(p.123)

“스타가 되고 싶어? 스타가 되고 싶으면 연락해”라던 한민관 노브레이크 엔터테인먼트 대표(<개그콘서트>)의 말을 빌자면, “인문학을 공부하고 싶어? 인문학을 알고 싶으면 책을 사~” 인문학,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고? 이 엄혹한 시대를 관통할 지혜를 얻고 싶다고? 16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이 책 하나로, 당신은 세상을 향한 또 하나의 문을 열게 될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는 그랬다. 자신의 무지를 자각할 때에만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책을 펴라. 눈과 귀를 열어라. 마음치료의 의사는 바로, 당신이다.    

 





p.s… 이날 강연을 제대로 듣고 음미하고 싶다면, 강유원 박사의 블로그(
http://allestelle.net)에 들어가면 된다. 좀 더 자세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나온다. 책을 읽기 전에 이를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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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 101주년.

글쎄, 사실은 축하할 날인지는 모르겠다.
여성의 권리와 지위가 충분히 보장되고 향상됐다면,
진즉에 없어졌어야 할 날이 아닌가 싶어서.
그만큼 이 세계의 여성들은 여전히 억압받고 불익을 받고 있다는 것 아니겠나.

멀리 볼 것도 없다.
지금-여기의 현실만 봐도 여성들이 처한 상황은 '악'소리가 난다.
우리나라 여성의 평균 임금은 남성의 61%에 불과하고,
비정규직의 70%가 여성이다.
지난 1월 남성 취업자는 1만9000명 줄었으나,
여성 취업자는 8만4000명이 줄었다.(통계청)
(☞ "일하는 아줌마·할머니 '악' 소리 낼 힘도 없어요"
[3·8 여성의날] 구조 조정·임금 삭감 1순위…여성 노동자의 비애
)

지금의 공황이 빌미다.
사정없이 칼날을 내치는 수컷들의 비겁함은, 아무래도 역사적 전통인가.
마초노가다 출신 '박쥐(주. 거꾸로 읽을 것)'는 한결 더한 놈이다.
여성 인권이나 사회 참여는 여느 부문에서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것마냥,
한참을 돌려놓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뒤떨어진 부분인데 더욱 매몰차다.
약자를 긍휼히 여기고 돌보는 것이 진정한 보수주의적 색채이거늘,
이 텐버드들은 무슨 '보수보수' 따라지 합창만 늘어놓지, 꼴통수구수컷들이다.
뇌 구조를 전면'보수(補修. 고쳐 수리함)'해야만 하는 보수주의자들이긴 허지.

어쩌다가, '본투비마초'가 세상을 움직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연재했었다.
별 대수롭지 않게 시작한 일이었지만, 한마디로 '놀랐다'.
그 여성들이 지닌 힘과 능력부터,
그것을 억눌렀던 시대나 사회(정확하게는 남자)의 흉포함까지.
나는 수컷들이 얼기설기 짜놓은 이 세상이,
얼마나 허구인지, 부시 같은지, 박쥐 같은지, 좀더 깨닫게 됐다고나 할까.

이 연재를 통해 나는, 빈말이 아니라,
가능하면 여성(여성의 탈만 쓴 '바끄네' 같은 여자수컷마초들 말고)들이 세상에 좀더 큰 영향력을 미쳐야 한다고 확신하게 됐다.
이 모든 전쟁과 분쟁, 피는 온통 수컷들에게서 비롯된 것 아닌가.

할리우드 배우에서 지금은 사회활동가로 활동하고 있는 '미아 패로'의 이말.

 

그리하여,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한다. 수컷이라면, 공감해야 할 이말.


남자는 맞아야 한다.
부제는, 성차별과 편견에 대한 수컷 반성기

아는 분이 낸 책이다.
양성평등 카툰모음집.
많이 사 주시라.
아, 그런데 맞아도 정신 차릴까.
맞아서 정신이라도 차리는 수컷은 그나마 가능성이 있으니,
여성들이여, 거둬주시라.

그리고 이 엄혹한 시대.
여성노동자가 일궈논 '여성의 날'.
여성들이 다시 들고 일어설 때,
나는 당신들 편에 서서 돌을 던지겠다고 약속한다.
 

☞ '여성의 날'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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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고도, 차갑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핫함과 쿨함을 아우르는, 열정과 냉정이 교차하는, 이것은 ‘역사’의 기록이다. 석유(자본)의 역사, 문명의 역사, 인류의 역사, 종교의 역사, 피의 역사, 그리고 한 인간의 역사. 그러니 당연하게도 뜨겁고, 차가운 기운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것의 실체는 검은 액체에서 비롯된다. ‘석유(Oil)’라 불리는 검은 액체. 인간은 석유를 발견했지만, 그것은 장대한 비극의 서곡이었다. 되레 인간을 지배한 것은 석유가 되고만 비극.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석유 제국’을 건설한 미국의 한 자본가를 다룬 영화다. 시대극이다. 석유로 인해 블랙러쉬가 이뤄지던 1900년 전후의 미국 캘리포니아. 석유는 인간에게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가. 자본가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불굴의 의지와 분별없는 열정 사이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속 시원히 결론부터 말하고 보자. 한마디로 ‘석유가 잉태한 분별없는 열정이 불러온 파국’. 영화는 석유와 인간(혹은 종교까지 곁들여)의 협잡이 얼마나 환멸을 불러일으키는지를 보여준다.
 
시작부터 그랬다. 산맥과 황야를 조망하면서 들려오는 기계음은 비극의 전조와도 같았다. 라디오헤드의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이 관객의 오감을 붙들었다면, 거의 10여분 이상을 거의 대사 없이 꿈틀대는 플레인뷰(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퍼포먼스가 뒤를 이었다. 단 한마디 대사, “드디어 찾았어”를 제외한다면, 은광을 채굴하는 그의 모질고 험한 분투가 이어진다. 그것은 어떤 경외심까지 불러일으켰다. 노동에 대한 단순하면서도 숭고한 경배 같은 것.
 
플레인뷰는 혼자 끊임없이 갱을 오르내리다가 사고를 당한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는다. 은광에 이어 석유까지 채굴에 나선다. 은광이 종잣돈이라면 그의 욕망은 검은 액체로 향해 있다. 그것만이 ‘성공’의 모든 것인양, 그는 앞으로만 달려나간다. DNA에 그렇게 각인돼 있는 것 같다. 왜 석유에, 돈에 집착하는지 끝까지 알 순 없지만, 그는 그런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저 자신이 자발적으로 뛰어든 게임에 몰두하는, 광기 그 자체. 

성공가도를 달리는 플레인뷰에게 하나둘 사람이 붙지만, 그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에게 유일신은 ‘석유’ 하나뿐이다. 석유사업을 위해 그는 포장과 기만도 서슴지 않는다. 그는 유정사업의 장소에서 해당 주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은 ‘패밀리맨’이며, 유정사업은 ‘패밀리 비즈니스’라고 선전한다. 양아들 H.W.를 사업설명회 등에 데리고 다니는 것도 그런 목적이다. 그러나 사실은 다 거짓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석유(혹은 돈)만이 그의 ‘유일신’이다. 그것은 ‘대운하’에 모든 것을 걸고자 하는, ‘지금-여기’의 누군가를 연상시킨다.
 
플레인뷰는 석유가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았던 사나이였다. 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시기, 일찍 그 속성을 간파한 플레인뷰가 사람들을 현혹할 기제를 찾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속임수라기보다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그는 ‘패밀리’라는 포장을 통해 ‘꼼수’를 부리긴 해도, ‘패밀리’라는 피붙이 앞엔 약한 모습을 보인다. 역시나 어떤 강력한 불도저도 ‘형님’앞에선 그저 작아지고 마는 현실과도 겹친다. 어찌 할리우드의 20세기 초반 시대극이 21세기에도 기시감처럼 나타나고 마는가.  


말이 잠시 다른 길로 흘렀다. 다시 돌아가자. 석유는 자본(주의)의 동력이었다. 결국 지금 석유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 플레인뷰는 지금의 자본가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그가 때론 감정적인 모습을 보였다손, 그것은 사업과 실용에 근거하고 있다. 검은 액체는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가 원래 검은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동색의 석유를 향해 애정을 발산한 것일까. 갑작스레 석유가 분출된 장소에서 청력을 잃은 아들이 플레인뷰를 향해 가지 말 것을 애원하지만, 그는 멈출 수가 없다. 석유 앞으로 달린다. 얼굴 찌푸리고 있는 동업자에게 말한다. 석유가 쏟아져 벼락부자가 될 텐데 왜 찌푸린 얼굴을 하고 있냐고.
 
그것이야말로 자본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동정 없는 자본의 가장 적나라한 광경. 플레인뷰의 표정에서 나는 자본을 향한 숭고함(!)을 엿본다. 석유가 인간을 집어삼킨 광경. 석유 없이 자본주의는 절대 가속을 붙이지 못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컴퓨터의 동력 또한 석유에서. 당신이 보고 있는 인터넷의 근간에도 석유는 있다. 가만 둘러보라.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은 석유와 관계를 맺고 있다. 기름값이 오른다고 걱정되는 것은 단지 차 때문이 아니다.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이 석유 없이 돌아갈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석유(자본)은 그것을 철저히 이용했다. 플레인뷰는 좋게 말하자면 한없이 똑똑한 친구다.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이른바 ‘막장’ 혹은 ‘끝장’의 영화다. 플레인뷰의 마지막 읊조림, “I'm finished”가 불러온 자폭의 느낌이 그렇다. ‘자본 불리기’에만 몰두하고 ‘신성 전하기’에만 매달리던 성공의 이면. 그 모든 ‘분별없는 열정’의 종국을 암시하는, 그 외침은 참으로 강렬하다. 석유를 캐냈으나, 결국 석유에 지배당하고만 작자의 처음이자 마지막 회한 섞인 피로감의 토로. 석유가 당신을 파멸케 하리라. 플레인뷰에게 미리 알려줄 걸 그랬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타임머신이 없는 세상이다. 안타깝다. 

한때 너무도 거침 없이 오름세를 거듭하던 석유를 기억하는가. 그게 불과 몇달 전이었다. 차츰 깨닫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제 분별없는 열정을 버릴 때라는 것을. 플레인뷰를 통해 그 파국을 경험했다면 말이다. 비약하자면, 석유 아닌 대체재가 필요하다. 혼자만의 열정으로 석유발굴에 나서던 초기 자본가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다.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유가폭등의 전후, 어쩌면 감독이 의도하지 않은, 대체 에너지의 개발을 촉구하는 영화로도 읽힐 수 있다. 그것은 영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 될 수 있겠다. 놀라운 일이다. 저 영화를 보는 일도 석유와 연관됐음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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