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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모든 것은 모든 것의 방식이 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무엇. 옳고 틀리고,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냥 자신만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김훈은 《공무도하》를 통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강경감의 말처럼, 해망은 해망의 방식대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p.320) 균열이 있었다손, 그것은 다시 제 방식대로 간다.
김훈에게도, 김훈만의 방식이 있다. 그의 글을 읽노라면 어쩔 수없이 감내해야 할 무엇이다. 싫으면 안 보면 그만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읽을 수밖에 없는 무엇도 있다. 때론 그(가 쓴 글)에게 베일 때가 있다. 피가 흐른다. 그 피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다. 닦아내봐야 소용없는 짓임을 알기 때문이다. 피를 닦는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그저 피가 응고되기를 기다려야 하는 시간. 《공무도하》가 그랬다.
그곳에는 어쩔 수 없는 것들, 인력으로는 바꿀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다. 살인이나 치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토록 무덤덤한 일상 혹은 서사가 있을 뿐인데도, 나는 그 속에서 내 빨간 피를 봐야했다. (할 수)없는 것은 (할 수)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일까.
《공무도하》는,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성립되지 않는 질문에는, 당연히 답하지도 않았다. 언론이, 미디어가 세상을 담는 그릇이라지만, 세상에는 신문에 쓸 수 없는 것들, 담아지지 않는 것들, 써지지 않는 것들, 말로써 전할 수 없고, 그물로 건질 수 없으며, 육하의 틀에 가두어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다가갈 수 없고, 긍정할 수 없는 죽음도 있으며, 해석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죽음도 있었다.
온통 없는 것 투성이였다. 혹은 없는 것을 붙잡기 위한 발버둥도 가끔 있었지만, 그것은 허사였다. 왜 그랬을까를 묻지는 마라. 그래야만 하는 것도 있으니까. 바다사자의 모습이 그랬다. 인간의 세계에 어쩔 수없이 발을 디딘 녀석은,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고 허우적거렸고, 일어설 수 없는 몸을 일으키려는 몸부림을 쳤다. 그래야만 했던 것이다. 존재증명을 위한 것도 아니었고, 그것은 그만의 방식이다.
사람이라고 다르냐. 아니. 저 멀리 떠나있던 아들의 개죽음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오금자가 있었다. 어처구니 없는 딸의 개죽음에도 목소리 제대로 내지 못한 채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방천석도 있었다. 그 한편에는 그들을 취재할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결국 포기한, 추적할 수 없고 전할 수도 없는 세상을 말할 수밖에 없는 문정수도 있었고,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노목희도 있었다.
《공무도하》는 애초에 포기하고, 아니 그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이해를 바라지도 않고, 억지로 설명을 하려 하지도 않았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폭력적이 되곤 하는데, 김훈도 늘 말하지 않았던가. 세상을 이루는 근간은 폭력과 악이라고. 그는 일찌감치 이해되기를 바라지 않는 투다. 그것을 폭력(적)이라고 여겨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김훈이 덕지덕지 묻은 글 속에서 나는 자꾸만, 버티고 견뎌야 하는 우리네 일상이 중첩됐다. 가감없이 그대로 드러난 어떤 일상의 벌거벗은 몸.
노목희는 말한다. “그래도 기사는 쓰지 마. 치사해. 막막한 쪽이 치사한 쪽보다는 견딜 만할 거야.”(p.129) 하지만, 나는 쓴다. 그것이 나만의 방식이니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애초 기대하진 않았지만, 《공무도하》는 여느 그의 (역사)소설보다 더 깊게 서걱거렸다. 희망도 절망도 아닌 끝에서, 나는 어떤 일상적 풍경과 마주대했고, 너무 오염돼서 괜히 입에 올리기가 민망한 '희망'을 거들먹거리는 것은 실례인 것처럼 느껴졌다.
맞다. 애초 희망은 위정자들의 언어일지 모른다. 그저 일상을 즐기고 거기서 충분히 행복을 느끼며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돈과 집, 자동차를 들먹이며 안락함을 미끼로 그것을 '희망'이라는 단어로 한데 묶었던 것은 아닐까. 돈, 집, 자동차를 갖춰도, '더 많은, 더 큰, 더 좋은'을 수식어로 붙여 사람들을 현혹한 것이다. 그것을 역시 '희망'이라는 말로 포장한.
《공무도하》에는 그래서 서툰 희망 따윈 없다. 재미있는 건,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된 지금, 돈을 희망으로 등가시킨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하물며, 화재현장에서 귀금속을 턴 뒤, 소방서에서 퇴직하고 고철인양업체의 전무가 된 박옥출도 돈돈돈하지 않는다. 어쩌면 딸의 억울한 죽음을 돈으로라도 보상 받으려는 심리가 발동할만한 방천석도 그러지 않는다. 그들은 강은 건너지 않고, 아니 건너려고조차 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저 이 더러운 세상에서 자포자기하듯 발을 디딜 뿐이다.
따져보면 노목희도 그렇고 문정수도 그렇다. 그들에겐 어떤 야심도 찾아보기 힘들다. 다른 등장인물들에 비해 좀 더 먹물을 먹은 그들이지만, 그저 자신 앞에 놓인 일만을 처리할 뿐이다. 특히 노목희는 늘 문정수를 먹이고 재운다. 그의 어리광을 거의 받아들여주고 다독여주기까지 한다. 즉, 늦은 밤, 갈 곳을 찾는 어린 양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하사한다. 먹일 목(牧)에, 계집 희(姬). 짐승을 거두어 먹이는 목희라니. 그 이름 한번 절묘하다.
하지만, 그게 다다. 그들은 놀지도 않는지, 《공무도하》는 퍽퍽한 스트레이트 행보로 모든 것을 종결 짓는다. 좋고 나쁘고를 얘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책을 덮고 나는 스산했다. 아무리 퍽퍽한 일상이라도 찰나의 즐거움과 행복이 있을진데, 그들에게선 그것을 찾기 어려웠다. 그나마 베트남의 산간에서 이국 땅으로 팔려(!)왔으나, 꿋꿋하게 버티고 견디는 후에가 가장 인간적이었달까. 강을 건너지 못하고 약육강식의 갯벌에서 발을 빠뜨린 채, 그 나름의 환경에 적응만 하는 등장인물의 면모가 질척거렸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들이 작은 것이라도, 사소한 것이라도 부둥켜안는 것을 봤으면 하는 바람.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진 않아도, 꾸역꾸역 살고 있어도, 찰나일지라도 삶의 하중을 덜 느끼면서 지내는 모습도 봤으면 했다. 노을이 지는 강변에서 노을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그 찰나의 행복감 같은 것 말이다.
《공무도하》는 무엇보다 삶을, 일상을,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내 삶의 이유는 이것'이라고 못박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자신을 위한 넉살이다. 누구에게도 삶이 지속돼야 할 이유가 굳이 따로 있진 않은 것 같다. 그렇다고 삶을 절단내야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우리는 그냥 사는 것 아닐까.
장철수는 그 옛날, 노목희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난 아무래도 이 세상을 단념할 수가 없어.” 또 다른 이말도. “세상을 긍정하니까 단념할 수 없는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이런 세상은 아니야.” 단념할 수가 없음에도, 살아있음이 고통스러운. 그래서일까. 장철수의 이 말은 김훈을 대변하는 것 같다. “…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던적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시급한 현안문제다…”(p.35)
《공무도하》로 나는 얼마나 바뀌었을까. 나는 제대로 책을 읽은 것일까. 지금 나는 어디를 건너고 있을까. 그저 나는 일상과 샅바를 움켜쥐고 씨름을 하고 있는 중이다. 강을 건널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아직 나는 제대로 삶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누구도 나의 설명을 바라진 않겠지만. 하나 더 분명한 것이 있다. 나도 나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 나의 방식대로 자리를 잡을 것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