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팅 그녀
어디선가 본 냄새가 난다. 흠, 스멜~ 이름도 왠지 들은 듯하다. 역시나 틀리지 않았다. 몇 년 전이었지? 5년? 6년? 7년? 그래, 소개팅했던 여인이다. 얼마 전 모 문학상을 타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소개팅을 주선했던 친구가 확인시켜준다.

녀석 왈. "마, 니 그거 아나? 그 소개팅, 내 회심의 소개팅이었다 아이가. 등신, 와 놓치가꼬. 지금이라도 전화해 보등가." 녀석의 말에 푸헐, 웃음을 터트렸다. 나, 등신인가봐~ 아놔~~


나도 속물인지라, 어? 그때 잘 됐으면 어떻게 됐을까? 아주 잠깐 상상해 봤다. 그 당시 녀석이 계속 잘해보라고 푸쉬했던 기억도 난다. 아니, 그때로 돌아가도 변할 건 없다. 그게 인생이다.

역시, 인생은 살고 봐야 해. 재밌다. 소개팅 그녀, 계속 좋은 작가로 세상에 남길. 
나, 이래봬도 베스트셀러 작가에게 밥 얻어먹은 남자!!! (물론 나, '베스트셀링 男' 아님!) 



2. 기다림
노떼 자얀츠, 플레이오프 2차전 이겨주시다. 포스트시즌 홈구장(부산) 12연패 안녕~. 무려, 4378일, 즉 11년11월24일 만이란다. (마지막으로 이긴 것이 딱 12년 전, 1999년 10월17일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사직5차전, 6-5로 승리했다.) 

그렇게 오래 기다렸다니. 나도 참 오래 기다릴 줄 아는 남자로구나. 대체 그 승리가 뭐라고. 기다릴 줄 알았던 노떼팬들이여, 그대들은 이미 챔피언이요. 올해 우승 못해도 좋아! (말이 씨 될라...ㅠ.ㅠ)

신은 부산에 최고의 팬을 주셨으되, 최악의 팀도 함께 주셨도다.
그래도 좋아! 꺄아아아아아앙앙~ 가을은 가을야구와 함께다!



3. 잔반 청년
잔반으로 뭉뚱그려 지칭되기 전, 반찬 각각은 이름을 갖고 있었다. 잔반으로 전락하기 전, 해당 끼니는 생존과 식사의 즐거움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잔반이 지금의 청년들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사회는 청년에게 미래의 희망이니, 국가의 대들보라며 잘도 붙여대지만, 결국 그들은 잔반처럼 소모되고 있다. 잔반은 곧 잉여. 뭉뚱그리고, 버려진다. 청년, 잔반의 다른 이름. 

그래서, 나는 잔반을 거의 남기지 않는다! 


4. 스테파네트
알퐁스 도데는 아마 계급적 질서에 의한 차별을 내면화한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그래, 순결한 스테파네트 아가씨, 굿바이. 나는 그만 미끄러진 이름 없는 목동이다. 목동아, 스테파네트 아가씨 그만 지키고, 그 계급적 질서에 반항하거나 저항하거나.

나, 목동의 진짜 이름을 알고 싶어! 넌, 아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늘, '세계 식량의 날'이다.

누군가는 요즘 누가 못 먹는 사람 있어?, 하고 쉽게 말한다. 먹을 것, 정확하게는 못 먹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시대라지만, 그건 수사이거나 거짓말이다.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인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기아에 시달리는 사람들, 차고 넘친다. 

  

 

세계 식량의 날 올해의 주제는 '식량가격- 위기에서 안정으로'인데, 식량'가격'의 위기만 있는 게 아니다. 식품 값이 오른다고 아우성 치는 것, 기아의 골이 깊어진 것을 놓고 표면적으로는 기상이변과 자연재해를 이유로 든다. 이밖에 중국, 인도 등의 경제개발·성장에 따른 농지 소멸과 육류소비 증가, 허울  좋은 바이오연료 생산 등이 거론된다.

그러나 더 크고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식량을 투기의 대상으로 보는 다국적 농식품기업들과 자본의 패악질이다. 농식품복합업체들은 농수산물 생산부터 유통까지 지배함으로써 식량독점을 꾀하고, 투기자본은 국제곡물시장에 적극 개입해 가격을 폭등시켰다. 거기엔 북반구 정부와 세계기구의 정치적 무능함 혹은 협잡도 함께 한다.

한마디로 먹는 것 갖고 각자의 이권을 챙기고자 장난 치는 '신성동맹'의 탐욕이 위기의 골을 더욱 깊어지게 만들고 있다. 허구헌 날, 기아를 줄이자고 외치면서도 사태를 악화시키는 꼴이 그것을 방증한다. 1996년 세계식량정상회의는 '전 세계 기아인구를 2015년까지 절반으로 줄이기'로 결의한 바 있으나, 지난 2007년~2008년, 2010년의 식량위기로 기아인구는 8억5000만 명에서 10억2500만 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식량의 위기는 결국 체제의 위기에 다름 아니다. '점령하라(Occupy)'는 구호의 확대와 우리네 99%를 위한 행동은 식량 위기와도 관련을 맺는다. 한 사회의 유지와 개별적인 인간의 실존은, 배를 곪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과거, 나의 인디커피하우스에서 한 예술팀이 알려준 이 말.
"MOST IMPORTANT THING IN THE UNIVERSE IS -> FULL STOMACH" 


지금의 식량 위기가 인간이 자행한 짓이라면, 이것을 극복하는 일 또한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이자, 의무다. 결자해지! 그리하여, 먹을거리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고, 푸드정의(Food Justice)에도 좀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이 일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나는 커피라는 창을 통해 혹은 먹을거리로 이것에 대한 사유를 푸는 한편으로, 커피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풀겠다. 《미국의 송어낚시》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이 말처럼.  “때때로 인생은 단지 커피 한 잔의 문제, 혹은 커피 한 잔이 가능케 해주는 친밀감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갑자기 어디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인지 궁금한 이 계절, 당신에게 커피 한 잔 권한다. 프롤로그부터 그에 이어지는 몇 편의 이야기는 동티모르 공정무역 커피산지를 탐방한 [동티모르 커피로드] 되겠다. (참고로, 프롤로그는 '윤리적 소비'공모전에 응모했으나 떨어진 글이다.) 

어느 밤 문득 외롭거든, 삶의 미각에 쓸쓸함이 묻어나거든, 문을 두드리시라. 당신을 위해, 밤9시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 건네겠다. 그래서, 밤9시의 커피다. 커피 한 잔 나눌 당신이 있어서 다행이다. 고맙다. :) 
  

[프롤로그] 나는 너무 많이 먹고, 너무 적게 움직인다! 
동티모르 공정무역 커피산지를 가다  


 

 

하얀 커피꽃이 피었다. 빨간색 커피체리가 익었다. 체리의 외피·과육을 벗기고 건조를 위한 사람들의 몸짓도 분주하다. 커피 한 잔을 위해 자연이 내려앉고 인간의 노고가 투입되는 현장이다. 내가 만들고 마시는 커피 한 잔이 잉태되는 터전이다. 나는 동티모르 로뚜뚜 마을에 와있다. 공정무역 커피산지다. 비행기를 갈아타고, 동티모르 딜리공항에서도 꼬박 십여 시간 이상 험한 산을 타고서야 도달할 수 있는 산촌의 커피마을.

동티모르의 7월, 커피가 익어가는 계절에 ‘만남’을 가졌다. 놀랍고 신기한 일이다. 우연에 우연이 빚은 산물. 그래,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1927)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사물과 동물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여전히 당신이 휘말릴 수 있는 우연한 일로 가득하다.”

그래, 사실 모든 것이 우연이었다.

제도교육권에서 가장 보통의 신자유주의적 인간으로 사육됐던 나는, 신자유주의적 사이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직장 생활을 꾸역꾸역 감당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디서 불어온 바람이었을까. 커피를 만드는 사람이 됐다. 아니, 커피라는 창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됐다. 커피를 만들고, 공정무역 커피하우스를 꾸리며, 사회적기업을 공부하면서, 공정무역 커피산지에 발을 디뎠다. 그 모두가 우연이었다.  

많이 궁금했다. 내가 지지고 볶고 추출하는 커피의 근원이.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보고, 상상했을 뿐이었으니까. 태고의 산악이 품은 동티모르에서 내 커피의 근원과 세계의 잇닿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운이 좋았다. 그곳에 왔다. 숨을 깊이 들이쉰 순간, 느꼈다. 아, 우리는 연결된 존재구나. 동티모르 로뚜뚜에 도달한 순간, 실감했다. 눈 앞에 펼쳐진 모든 것은 커피 한 잔에 담긴 자연이었다. 땅, 햇빛, 바람, 비, 안개, 별 등 대자연을 머금고 자란 커피열매와 그것을 따고 다듬는 사람들. 자연과 땀의 결정이었다.

커피가 어떻게 나오는지 알고 있는가? 나는 이제 확실하게 안다. 하얀 마음과 빨간 열정이 어우러져 갈색의 음료가 나온다. 이방인을 위해 내려준 커피에서 온유한 맛을 느낀 건 그런 이유였나 보다. 커피를 내리는 내 마음이 그 자연을 제대로 담을 수 있을까,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시간이다.


다만 안타까운 일이라면, 기상이변의 비극은 한국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동티모르에도 기상이변이 덮쳤다. 하늘이 뚫린 마냥 10년 만에 최악의 폭우가 닥쳤단다. 아무도 그런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하긴 미국과 유럽, 일본, 중국 등에는 눈을 돌려도 누가 동티모르의 비극에 관심이 있을까.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관심이 없다면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것을 알게 된, 운 좋은 한국 사람인 셈이다.

문제는 커피 농사가 흉년이었다. 매년 25~30톤가량 이뤄지던 커피 생산은 1톤으로 팍 줄었다. 자연의 분노는 수시로 인간의 삶을 위협한다. 커피로 생계를 유지하는 자들에게 커피열매가 맺지 못하는 현실은 삶 또한 영글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의 생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후 벌어졌다. 굳이 말을 붙이자면, 공정무역이 지닌 회복탄력성이라고 할까. 공정무역이 단순히 생산자에게 시장가보다 돈 몇 푼 더 쥐어줌으로써 끝나는 체제가 아님은 알고 있었다. 커뮤니티의 유지와 생산자조합(혹은 그룹)의 결성 등 그들이 그들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나누는 것. 전국YMCA연맹에서 파견된 양동화 간사는 5년 여 동안 커피로 동고동락한 사람들의 좌절과 절망을 이해했다. 

 

 

궁즉통이라고 했다. 공감한다면, 방법이 보인다. 마침, 도서관과 학교 등의 건립이 추진되고 있었고, 이들을 그곳의 자원으로 돌렸다. 공정무역의 진짜 힘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자연의 분노 앞에서도 인간은 겸허해야 한다. 로뚜뚜의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늘을 쉬이 원망하지는 않았다. 기다리고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한 해 동안, 로뚜뚜 마을 커피향은 약해지겠지만, 몇 년 뒤 책향기가 덧붙여져 로뚜뚜 커피는 더 좋은 품질과 향미로 다가설 것임을, 나는 확신했다. 

 
뭣보다, 커피생산자와 함께 밥을 나눠먹고 커피를 마신 시간을 잊을 수 없다. 그들과 마주한, 해발 1004m에 자리한 마을사무실(겸 숙소)은 고도 덕분에 ‘천사의 집’이라고 불렸다. 천사가 있다면, 지상에 내려와 커피 한 잔 마시는 휴식처로 쓸 법한 곳에서, 지상의 천사들과 마주 한 시간이었다. 나는 손에 힘주어 그들과 악수를 했으며, 또박또박 이름을 부르며 눈을 보았다. 개별의 인간에게 새겨진 구체적인 존엄이 거기 있었다. 내 커피의 실존과 마주대했다. 감격스러웠다. 

 
 
 

물론 그 삶의 실체는 내가 알 수 없는 또 다른 심연이겠지만, 나는 그 구체적 존엄 앞에 겸손해야 했다. 그들은 자연의 일부였고, 나는 그들이 얼마나 대단하고 소중한 일을 하고 있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그 커피 덕에 저 멀리 한국의 누군가는 행복함을 느낄 수 있다고.

그래, 누군가를 행복하게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가 말이다. 나는 그들 몇몇에게 커피란 당신에게 무엇인지를 물었다. 누군가는 커피는 행복이라면서 웃었고, 다른 누군가는 생각을 더 많이 할 수 있는 존재라고 답했다. 어떤 이는 여자 친구 같다고 했다. 다들 하나 같이 다른 답변, 그래, 그것이 커피다.

나는 당신들이 채집한 커피가 ‘디아’(좋다)하고 ‘가빠쓰’(맛있다)라고 말해줄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곳은 커피나무를 경작하지 않는다. 플랜테이션 농장 등에서 가꾸는 농사가 아닌 채집이다. 자연이 키워준 것을 때가 되면 채취할 뿐이다. 유기농 그 이상이다. 생두는 튼실하며 빛깔도 좋다. 맛도 뛰어나다. 자연에 대한 고마움과 경이로움을 품은 야생 커피가 지닌 장점이다.

하얀 커피꽃과 빨간 커피체리, 녹색 생두를 잉태하는 자연과 생산자를 만나면서 커피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다짐했다. 감사한 마음으로 커피를 더 정성스레 만들어야겠다. 커피는 곧 마음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그들은 그것을 확인해줬다. 대자연과 생산자의 마음에 커피를 내리고 마시는 사람의 마음이 합쳐진다면, 커피가 그보다 맛있을 수 있을라고! 공정무역 커피는 그런 ‘만남’과 ‘관계’속에서 빛을 발한다. 



 

윤리적소비는 별다른 게 아니다. 내가 먹는 것이 어디에서 어떻게 온 것인지 아는 것. 그래서 세계가 연결돼 있음을 깨닫고, 고마움을 가지는 것. 협동조합운동이 양이나 이물질 포함여부를 속이지 않음에서 시작한 것은, 마음을 담았다는 말이다. 좋은 커피에 가급적 화학첨가물을 섞지 않고, 유기농을 고집하는 우리 커피하우스의 노력은 당연한 의무다.

그들의 노동과 실존을 마주하면서 지금 내 생존의 윤리를 생각했다. 아, 나는 너무 많이 먹고, 너무 적게 움직이는구나. 조금 덜 먹고, 더 움직이자. (물론 커피는 많이 마셔도 된다!) 요즘 내가 만든 커피 한 잔에 담긴 윤리다. 로뚜뚜를 통한 깨달음이다. 우리는 그렇게 연결된, 세계의 점들이다. 세계는 지금을 살아가는 무수한 점들에 의해서 돌아간다. 로뚜뚜의 속삭임이다. (공정무역)커피를 마신다는 것, 세계와 관계를 맺고 연결됨을 확인하는 행위다.   

우리, 커피 한 잔, 할래요?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0월16일이 '세계 식량의 날'인 것은 재밌고도 아이러니하다.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가 창설(1945)된 것을 기념해 1979년부터 지정된 이날은, 짐작하다시피, '세계 식량문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일깨우고 기아와 영양실조, 가난에 함께 맞서 퇴치하기 위'함이 목적이다. 

올해의 주제는 '식량가격 - 위기에서 안정으로'다. 기후변화와 잇단 자연재해로 식량수급에 차질이 생겼고, 그 때문에 계속 상승하는 식량가격과 각국의 민주주의 위기와 경제위기로 필요한 사람들에게 식량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음에 대한 상기이자, 결의다. 월급 빼고 다 올라가는 현실이 그것을 방증한다. (물론 청와대에 서식하는 가카는 이 와중에도 내곡동 사저를 헐값에 사들이고, 사저에 정부예산까지 충당했다는 의혹까지 받는, 능력자(?)다운 모습을 보이신다.)

각국의 정치적 무능함 혹은 의도적 방치, 자본의 탐욕이 야합하면서 위기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특히, 지금 동아프리카에는 60년 만의 기근과 가뭄이 덮쳤으나, 구호만으로 해결할 수 없음에도, 세계(의 권력과 화폐)는 손을 놓고 있다.
 
그래, 재밌고 아이러니한 이유를 대자. 이날은 먹을거리(빵)을 요구하는 백성들에게, “빵이 없으면 고기(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라고 말했다고 오해 받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날(1793년)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녀는 “빵이 없으면 고기(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라고 철없는 소리, 지껄이지 않았다. 그녀를 향한 악성 루머이자 악성 댓글!!!

지금, 식량을 둘러싼 거짓말과 위선이 99%의 평화와 생존을 강력하게 위협하고 있다. 최근 뉴욕에서 시작된 "월가를 점령하라"도 결국, "니들만 쳐먹는 거 더 이상 못 보겠다"는 뜻이다. 일자리 요구는 결국 먹을거리에 대한 요구다. 이집트, 카메룬, 멕시코 등에서의 식량부족으로 인한 폭동과 시위도 마찬가지다. 

'Occupytogether'(http://occupytogether.org)의 오늘의 구호는, "우리가 뭉칠 때다. 그들이 들을 때다. 세계 민중들아 일어나라"다. 한국은 물론, 전세계 82개 나라 951개 도시에서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의 탐욕에 저항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당신도 물론 심적으로든 몸으로든 동참했으리라 믿는다. 우리는 99%니까.

점령하라는 이렇게 말한다. "지난 30년 동안 1%의 사람들은 신자유주의라는 세계 경제 시스템을 창조해 우리의 인권을 공격하고 환경을 파괴했다. 이것이 당신과 일과 건강과 교육 등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이유였다. 신자유주의는 멈춰야 하고 우리는 민주주의와 경제정의로 나아가야 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신자유주의 반대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컬럼비아대)는 "손실은 사회화하고 이익은 개인화하는 시스템은 자본주의도 시장경제도 아니"라고 했다. 이 땅이 더욱 가관인 것이, 대통령마저도 퇴임 후 사저를 사들이면서 이익을 개인화한다. 그러니 대한민국 1%는 오죽하겠는가. 

당신과 내 주머니에서 꺼낸 공적자금을 '인 마이 포켓(In my pocket)'하고 번번이 보너스 잔치를 벌인다. 그럼에도 모든 부실과 실패의 책임은 지지 않는다. 그러면서 '고통분담'을 외친다. 99%의 굶주림은 안중에도 없다. 지 뱃대지만 채우면 그만이다. 1%의 DNA는 그렇다.

자, 이만하면 1%에 대한 저항은 필연적이고 반드시 일어나야 할 사건이다!
아큐파이. Occupy. 점령하라.
스테이 헝그리, 스테이 풀리시. Stay Hungry, Stay Foolish. 늘 갈망하고 우직하게.

마리 앙투아네트(가 하지도 않은 말)에 대한 악성 댓글이 프랑스대혁명의 불씨를 지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문제가 아닌 부르봉 왕가의 사치와 부패가 곪고 곪아서 터졌다. 1%의 문제.

식량의 문제는 곧 생존이며, 이것은 당면한 현실의 문제로서 저항의 불씨를 지피고 있다.
1%만 배부른, 99%가 굶주리는 신자유주의·금융자본의 탐욕의 도가니가 민중들의 봉기를 돋는다.   

 

세계 식량의 날, 마리 앙투아네트의 기일이 맞물린 아이러니 뒤에는,
'점령의 날(10월15일)'이 일으킨 '세계적 변화를 위한 연대(United for global change)'가 있다. 혁명의 수순이 되어야 한다. 프랑스가 아닌 세계 민중이 일어날 것을 요구하는 혁명.  

다만, 주의할 점.
점령할 것은, 신자유주의 우산에 안주하는 탐욕의 1%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오해까지 점령하진 말자. 앙투아네트를 위한 나의 변호이자, 옹호다. 아래, 잡지 뷰즈에 기고한 글이다. 
  

[People View] 마리 앙투아네트를 악녀라 부르지 말라!
우리는 얼마나 마리 앙투아네트를 알고 있는가?

사실로 밝혀지지 않은 루머나 이야기가 빚어내는 비극을 우리는 잘 안다. 이른바 ‘악플’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허구’가 한 사람의 영혼을 잠식하게 되는 경우, 그 파장은 예기치 못한 곳으로 튀기도 한다. 허나 우리는 알면서도 잘못을 쉬이 저지른다. 알고 싶은 것만 알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습성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정면으로 대면하지 못해서, 대면할 용기가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 혹은 진실과의 대면이다. 검증되지 않은 사실을, 진실에서 먼 사실을 함부로 내뱉지 말 것. 주홍글씨를 새기고, 마녀사냥에 나서는 군중 심리에 휩쓸리지 말 것. 좀 더 알아보고 판단할 것. 많은 사람들이 그런 늪에 희생됐는데, 여기 한 사람도 그런 경우다.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d'Autriche, 1755.11.2~1793.10.16). 그녀에겐 어떤 오래된 오명과 악플이 덧씌워져 있을까. 진짜 앙투아네트를 대면해보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된장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명문 합스부르크가의 황녀로 태어나 프랑스의 왕비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에 대한 세간의 이미지는 뚜렷하다. 엄청난 허영과 사치의 대명사. 한마디로 ‘된장녀’였다. 더불어 부당한 정치 간섭을 일삼고, 욕정·욕망의 화신으로 각인된 팜므 파탈 혹은 연인들을 두고 성적 방종을 일삼은 암캐였다.

아마도 가장 부당한 타이틀이 있다면, 프랑스혁명의 원인으로 지목된 ‘마녀’가 아닐까.

대부분 그것은 오해였다. 우선, 하나의 오해부터 풀자. 그녀가 빵을 요구하는 시민들에게 했다는, 철딱서니 없는 유명한 말이 있다. “빵이 없으면 고기(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는 이런 말, 하지 않았다. 과격한 혁명분자들이 목적을 추동하려고 만든 악성 댓글(루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여행≫ 저자인 안토니아 프레이저를 비롯한, 역사학자들 대부분이 그것이 유언비어였음을 강하게 신뢰한다. 

실제의 앙투아네트는 백성을 생각하고 정치에 관심 많은 왕비였다고 전해진다. 프랑스 왕가 중 소작인의 옥수수 밭을 마차로 짓밟고 지나가기를 거부한 유일한 사람이었고, 루이16세의 사냥 중에 오발로 부상을 당한 농부를 농부의 집에서 3일 동안 간호하기도 했다. 왕비였던 그녀가 백성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녀가 남긴 기록을 보자.

“자신들의 불행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매우 잘 대해주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그들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사실이 매우 분명해집니다. 왕은 이 진실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대관식 날을 평생(제가 100년을 산다 하더라도) 잊지 못할 겁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거처였던 베르사유 궁전. 루이 14세가 1682년 파리에서 거처를 옮기면서, 권력의 중심지가 됐다. 바로크 건축을 대표하면서 호화로운 건물과 광대하고 아름다운 정원, 뭣보다 궁전 깊이 위치한 ‘마리 앙투아네트 영토’로 유명하다. 소박함과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 이 영토에서 앙투아네트는 세간의 시선과 다른 모습이었다. 소, 말 등을 길렀고, 가끔은 직접 우유를 짜면서 전원생활을 꿈꿨다.

그러고 보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주어진 ‘된장녀’라는 타이틀은 부당해 뵌다. 되레 진짜 좋은 된장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매주녀’는 어떨까. 백성을 생각하고, 소박한 전원생할을 꿈꾼 그녀는 좋은 매주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물론 진짜 비극은,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라는 유언비어가 앙투아네트를 영영 떠날 리 없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마녀다?
  

앙투아네트는 통설과 달리 날라리 왕비가 아니었다. 기품과 우아함을 갖추고, 아름다운 프랑스 언어를 구사했다. 덕분에 당대의 귀족 부인들이 닮고 싶어 하던 왕비였다고 전해진다.  

4명의 아이들에게도 각별하여, 특히 셋째 아들이 천식으로 고생하자 지극정성으로 이를 보살핀 좋은 어머니였다. 

그녀의 낭비벽을 지적하는 것도 당대의 맥락을 읽지 못한 처사다. 당시 프랑스 왕실의 사치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다만 루이16세가 유독 검소해서 ‘적자부인(赤字夫人)’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1785년 발생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이 사건과 무관한 그녀에게 타격을 입혔다. 실은 라 모트 백작부인이 목걸이를 입수하려 한 음모였으나, 앙투아네트로 변장한 창녀로 인해 그녀는 추문에 휩싸였다.

세계는 때론 엉뚱한 곳에 힘을 발휘한다. 악성루머(허구)를 통해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공력을 집중한다. 루머가 대중에게 사실이나 진실처럼 오도되는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세계에 발붙일 수가 없다. 그녀와 무관한 사건이었음에도, 그녀를 조롱·비방하는 글, 노래, 인쇄물 등은 허구를 사실로 바꿨다. 꼼짝 마라. 그녀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절대왕정에 대해 서서히 차오르던 대중의 분노에 맞는, 먹기 좋은 먹잇감이었다.  

대중은 결국 1789년 프랑스대혁명으로 이를 발화시켰다. 대혁명은 시민의식의 성장과 구제도의 모순이 결합된 필연적인 사건임에 분명하지만, 그 과정에서 앙투아네트는 필요 이상의 모함과 오해를 받은 것이 아닐까?

그것이 혁명의 추동을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을 순 있지만, 그건 승자와 역사의 관점이다. 앙투아네트라는 개인에게 그 비극은 정당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더 나아가 후세에까지 잘못된 이미지로 낙인 찍혀 폄하된 비극은 아직까지 그녀를 휘감고 있다. 잘못된 사실과 진실 때문에 무덤에서까지 억울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녀를 프랑스 대혁명의 희생양으로 보는 시선이 일정부분 힘을 얻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녀는 1793년 10월16일, 기요틴(단두대)에서 꺾일 때까지 오해로 점철된 삶을 연명해야 했다. 그녀의 비호를 받던 귀족들은 일찌감치 그녀를 버리고 망명을 갔다. 혁명군의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던 그녀는, 적군에게 프랑스군의 작전을 몰래 알려주고 있다는 루머에까지 휩싸였다. 그녀를 단두대에 세운 명분은 국고 낭비와 오스트리아와 공모한 반혁명의 시도였다. 베르사유의 장미는 그렇게 사라졌다.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역사는 얼마나 무거웠을까.

그녀도 어쩌면 사랑을 갈구하고, 전원에서 자연을 가꾸며 행복한 삶을 살고 싶었던 평범한 사람이지 않았을까? 근거 부족하게 그녀를 욕망의 화신이자 팜므 파탈, 무뇌아적인 여인으로 여기고 싶진 않다. 역사의 거대한 물결 앞에서 비극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던 여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실과 진실에 대면하기. 이번 가을,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씻어주는 건 당신의 몫이다.


(※ 참고자료 : 위민넷, 위키백과, 두산대백과사전,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Marie Antoinette, the portrait of an average woman》(슈테판 츠바이크 지음|박광자 외 번역/ 청미래 펴냄), 씨네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0월11일. 커피 향 가득한 매장에선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가 울려퍼졌다.
무슨 노래가 저렇냐는 타박도 있었으나, 피아프는 굴하지 않았다. 그녀의 생이 그러했듯.   

 

에디트 피아프의 선율엔, 뭔가 퇴폐적인 커피가 어울린다.
그 퇴폐 커피에는 '빠담빠담'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참고로, 빠담빠담(padam padam)은 '두근두근'이라는 뜻이다.
커피를 마시면 심장은 두근두근댄다. 생을 사는 순간도 두근두근이었으면 좋겠다.
커피 같은 사랑의 순간들이 두근두근.

피아프는 계속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던 것이고, 계속 잘 할 수 있는 유일했던 것.

타인의 이해를 굳이 구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 같다.
타인에게 구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는 건 잘 알았을 테니까.
가벼운 위로가 때론 슬픔을 더 돋우는 법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누구나 고통을 경험하고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얻는다. 타인들은 그걸 극복하라고 격려하지만 사실 그게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모른다. 어제까지 울던 친구가 오늘 웃는다고 상처가 사라질 리 없기 때문이다. 다만 삶이 지속된다는 건 사실이다. 삶은, 어쨌든 지속된다. 그게 삶의 긍정적인 면이자 끔찍한 면이다. 삶의, 빌어먹을 속성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어쨌든, 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던 걸 계속 한다. 상처와 슬픔은, 그냥 내버려둔 채 끌어안고 간다. 우리는 코린 베일리 래의 슬픔을 헤아리지 못한다. 다만 그녀가 하던 걸 계속, 잘하고 있다는 것만 안다. 타인의 이해란, 겨우 그 정도다.  - 차우진 -

2008년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떠나보낸 뒤 슬픔을 품고서도 여전히 노래를 부르고 깊어진 코린 베일리 래에 대한, 대중문화평론가 차우진의 글귀다. 차우진(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다.  

 피아프가 그랬고, 코린이 그랬다.
피아프의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여전히 커피를 뽑고 있었다.

하던 걸 계속 하는 것이다. 무람하게 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나도 그랬고, 그럴 것이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이해도 겨우 그 정도.
그럼에도 나는 누군가 그 슬픔과 상처를 끌어안고 간다는 사실에 공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빠담빠담. 두근두근. 공감의 다른 이름.
10월11일, 오늘의 커피는 빠담빠담. 피아프의 48주기다.  
 


사랑하고 노래했으므로, 에디트 피아프


(* 김진숙 위원이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타워크레인에 오른 지 279일째다.
그를 지키는 정흥영, 박영제, 박성호 씨가 오른 지 107일째 되는 날.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11-10-12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삐아프의 삶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아요.
이 글 읽으니 여러 가지 욕구가 동시에 드는걸요. 우선 커피를 진하게 타 마시고 싶고,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를 반복 재생해서 듣고 싶고, 내 속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어요. 타인의 공감은 그 정도이겠지만, 그래서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었으면 하는 희망이 생긴달까요. 야밤에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책을품은삶 2011-10-14 12:03   좋아요 0 | URL
진한 커피 한 잔을 듣고,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를 털어놓고,
이야기를 마시는 시간에 저도 동참하겠슴다~ㅎㅎ

저도 동감합니다.
타인의 사소한 공감이 위로가 될 수 있는 희망.
공감이 힘든 시대라서 더 없이 슬픈 지금-여기잖아요.

잘 읽어줘서 고맙슴다~
 
독학 파스타 - 남자, 면으로 요리를 깨치다
권은중 지음 / 바다출판사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작년 2010년, 내가 가장 사랑한 드라마는 <파스타>였다. 아니, 넌 라임과 주원의 <시크릿 가든>에 열광했던 거 아녀? 하고 되물으면, 아니, 난 <파스타>의 손을 주저함 없이 들어준다. <시크릿 가든>, 좋았지만 <파스타>의 폭풍 매력을 넘어설 순 없다.

<파스타>가 끝나고서도, 후유증은 한동안 갔다. 건널목을 건너기 위해 신호를 기다릴 때마다, 나는 중간에 멈춰섰다, 아니 그것을 꿈꿨다. 붕셰커플의 짠한 키스가 있었던 건널목 키스 때문이었다. 건너편에서 나의 붕어(극중 서유경(즉 공효진)의 별명이었다)가 건너오고, 중간에 멈춰선 나는, 그녀의 입술을 훔친다. *^^*  

아, 부끄러버랑~ 그래, <파스타> 후유증!

허나, <파스타>의 주인공은 '파스타'가 아녔다. 파스타 배틀이 펼쳐지고, 파스타 블라블라 했지만, 파스타는 그저 거들 뿐. 파스타에 마음을 뺏기진 않았다. 사실, 그리 파스타가 맛있게 보이지도 않더라. 파스타를 뒤켠으로 밀어낸 로맨스와 주방의 정치가 돋보일 뿐. 

그래서, 그땐 몰랐다. 파스타가 향으로 승부하는 음식일줄이야. 그 다음이 맛이고, 온기란다. 그러니, 파스타에 반드시 허브가 들어가야 한다는 것도 알 턱이 있나. 오래된 기억이지만, 파스타를 좋아했던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늘 까르보나라만 시켰고, 나는 한때 까르보나라에 중독됐다. 크림이 달달하기만 했던 그때.

알다시피, 파스타는 이탈리아의 라면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는 대신, 탱자가 회수를 건너면 귤이 되는 경우라고나 할까. 한국에선 파스타가 라면급이 아닌 엘레강스한 요리 비슷하게 세팅됐다. 약간의 허영과 사치가 가미된 것도 사실이고. '이탈리아'가 주는 에스프리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표준화된 조리과정과 재료를 덕분에 전 세계에 쉽게 퍼졌고, 그 때문에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이 파스타다.

안동의 양반 가문인 듯한데, 권씨 성을 지닌 저자(권은중)의 파스타는 좀 다르다. 표준화된 조리과정과 재료를 존중하지만, 존중이 고집에 머물지 않는다. 좀 더 창조적으로 나아간다. 말하자면, 권은중이라는 진짜배기 재료를 넣는다. 먹는다는 것에 대한, 그의 철학을 보자.    
 
"똑같은 요리라도 먹는 환경과 사람이 달라지면 당연히 그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 음식이 가진 고유한 특성도 현지에 맞게 적용할 때 빛을 발하는 법이다."(p.249)

알 덴테(al dente). 파스타 쫌 안다는 사람들이 거들먹거리는, 알 덴테. 즉, 너무 부드럽지도 않고 과다하게 조리되어 물컹거리지도 않아 약간의 저항력을 가지고 있어 씹는 촉감이 느껴지는 정도로 파스타의 최적 상태로 일컬어진다. 중간 정도로 설 익혀 꼬들꼬들하고, 치아에 씹히는 맛이 있는, 파스타의 헌법(?)이다. 꼬들꼬들한 라면을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할 만한 상태다. (커피도 꼭 그런 게 있다. 자신만의 미각이나 후각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을 가져와서 들이대는 거들먹들이 꼭 있다.)

그런데, 이 안동 남자는 알 덴테를 좋아하지 않는다. 퍼진 라면을 좋아하는 자신의 입맛따라 스파게티도 약간 퍼져야 제맛이라고, 파스타 헌법에 반기를 든다. 한 마디 더 붙인다. "퍼진 면발에 양념이 좀 더 잘 묻어난다."

오호~ 자신의 입맛을 알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면의 상태를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파악하고 있다. 파스타를 하면서 이 안동 남자는 좀 더 자신을 잘 알게 되고, 변했단다. 파스타가 삶에 틈입하면서 생긴 긍정적 변화. 파스타가 사람을 바꾼다.

파스타는 한 세계도 바꾼다. 생활 패턴뿐 아니라 사고방식도 변했다. 파스타는 거들뿐, 이 아니라, 파스타가 바꿨다! 이 남자, 주말에 골프를 끊은 대신 신선한 해산물을 사러 시장이나 마트로 향한단다. 유명 파스타집을 기웃거리지도 않는다. 거기보다 10배(자칭) 맛있는 파스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20여년 만에 청바지를 다시 입었다. 요리하는 사람은 위대한 창조자라는 경외심까지 갖게 됐다. 멋진 변화다. 

커피 덕분에 바뀐 나로선 이런 변화가 남의 일 같지 않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고개를 끄덕인다. 임상실험으로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먹는 것을 다룬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멋진 일인지도 안다. 저자의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재료를 고르고 요리를 만들고 사람들과 나눠 먹는 과정은 예술을 창작하고 발표하는 감흥과 다를 게 없었다."(p.7)

이탈리아 요리사들은 이렇게 말한단다. "복잡하면 이탈리아 요리가 아니다." 복잡하지 않은데서 창조가 나온다. 그래서, 이탈리아 요리의 가장 큰 특징은 창조성이다. 독학으로 다룬 파스타는 그래서 느끼하지도 않고, 거들먹거림이라곤 없다. 좀 안다고 젠체했다면, 이 책은 목에 걸렸겠으나 그런 게 없다. 안초비 대신 멸치젓을 쓰고, 간고등어로도 파스타를 만들 수 있음을 알려준다. 표준화됐다고 그대로 따라야 할 이유는 없는 법이다. 

자신만의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요리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다. 창조는 곧 자신만의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것 아니겠나. 그래서, 나는 지금-여기의 어떤 트렌드를 당최 이해할 수 없고, 불편하고 불만이다. 하나 같이 똑같은 먹을거리를 내놓는 이 땅의 거대 체인들 말이다. 표준화된 재료와 조리 방법, 하나같이 똑같은 사무적인 접대 태도로 그들은 어딜가나 비슷한 것만 내놓는다. 먹을거리뿐 아니라 인테리어까지 대동소이한 그곳에서 우리는 획일화된다. 거대 자본이 원하는 바다. 비약해서 그들은 파시즘이다. 질서정연함과 반듯반듯함으로 효율 자체가 목적인. 개성이나 창조성은 당최 찾을 수가 없다.     

"내가 생각하는 파스타 문화의 정수는 재료 자체의 고유성과는 관계가 없다. 그것은 오히려 다양한 재료를 써서 즉흥적으로 요리하는 창조성에서 우러나온다."(p.166)
 
그것은 조미료와 같다. 저자의 말마따나, 조미료는 모든 음식의 맛을 평등하게 만든다. 기계적인 평등. 사람들은 그것에 중독되고, 그것이 진짜 맛인양 착각한다. 생의 감각을 하나씩 잃고 있는 셈이다. 오호 통재라~

감칠맛 제대로 나는 된장찌개를 끓이기 위해선 조미료가 아닌 계절 나물과 해산물 등을 넣어야 하듯, 파스타도 그렇고 모든 음식이 그래야 한다. 커피 역시 마찬가지다. 재료 고유의 맛이 가장 중요하다. 먹을 것을 다루는 사람은 그래서 달라야 한다. 창조성의 근간에는 이런 핵심적인 요소가 있다. 무엇보다 음식을 다루는 태도와 자세가 중요한 이유다. 

 "좀 더 건강한 식재료로 파스타의 원형질을 잘 살릴 방법은 없을까? 나는 이런 고민이야말로 요리하는 사람의 기본자세라고 생각한다."(p.119)

독학으로 했다지만, 저자의 파스타는, 비록 맛을 보진 못했지만, 그 핵심을 꿰뚫는 심미안과 요리를 대하는 태도 덕분에 맛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커피를 만드는 나는, 커피를 통해 그것을 깨달았으니까. 더구나 미슐랭 가이드의 별을 받고 싶은 사람도 아닌 그는 주변 사람들과 함께 요리를 나누는 소소한 즐거움을 안다. 

그래서, 나는 이 심정 또한 충분히 안다. 이해한다. 나 역시 그랬고, 그러하니까.  

"요리를 하다 보면 막연하게라도 이런 생각이 든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꼭 요리해 줘야지, 라고. 오감을 최대한 동원하는 창조적 작업인 동시에 혼자 해내야 하는 고독감 때문인지 요리에 빠지다 보면 누군가에는 인정받고 싶은 바람이 자연스럽게 찾아온다."(p.142)

내가 커피를 하는 이유, 커피가 혁명을 추동했니, 커피가 소통과 관계의 매개가 됐니, 커피가 세계의 불공정함을 보여주니, 세계의 점들을 연결해주니, 벌어먹고 살기 위해서니, 블라블라해도, 닥치고 커피 한 잔! 그 한 잔은 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 내려주고픈 것이다. 곧 내 마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꼭 내려주고픈 것이 내 커피다. 미안하지만, 그 커피를 위해 다른 사람들은 임상실험을 하고 있는 셈이라고나 할까.ㅋ  

아주 재밌고 흥미진진한 책은 아니지만,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을 알려주는 책이다. 맞아, 맞아 고개를 끄덕인 부분도 많았다. ‘서로 다른 세상이 만나 +α가 되는 세상을 만든다’ 는 의미의 알파라이징(alpharising). 커피 만드는 남자가 파스타 만나는 남자(책)을 만나 +α가 되는 되는 세상을 꿈꾼다는 의미에서, 이 책을 나는 '파스타 알파라이징'이라고 명명한다.

나는 기대한다. 저자가 꿈꾸는,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조용한, 물가 근처라서 창밖 멀리 바다가 강이 굽어보이는 동네에 있는 작은 파스타집. 저자가 이 파스타집을 찾아오면 달달한 커피 서비스를 약속한다는데, 어찌 가지 않을쏜가. 기왕이면 그 집에 갓 볶은 좋은 커피를 들고 찾아가서 (권은중) 주인장에게도 권해주리라. 파스타향과 커피향을 맡고 예쁜 여자들이 몰려들겠지? 아, 기분 좋다.

p.s.

1. 오타가 있다. 67페이지의 붇지(->붓지), 안팍(->안팎)이다. 2쇄에는 고치겠지?

2. 저자는 종종 '촌스럽다'는 표현을 쓰는데, 영 걸리고 좋지 않다.
저자가 적을 둔 신문사(한겨레)에서 이봉수 시민편집인(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이 한 번 지적한 적도 있었다. 촌스럽다는 표현은 대체로 '세련되지 못하고 어수룩하다'는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는데, 그것은 '촌'을 부정적인 곳으로 인식하는 도시내기들의 오만이자 거들먹거림이다.

실상 '촌'이란 말 자체는 그렇지 않은데도 '촌스럽다'는 말이 맥락에 따라 부정적 의미로 자주 쓰이는 것이다. 이봉수 시민편집인은 '촌스럽다'는 단어를 남발하는 것에 대해 언어의 공공성에 대한 경각심이 부족한 탓이 아닐까?라고 지적했다. 신문기자인 저자는 그래서 더욱 주의했어야 했다. 2쇄를 찍을 땐, 다른 표현으로 고쳐졌으면 좋겠다.

(* 출판사에서 책을 받아서 쓴 리뷰이나, 
그것과는 무관하게 리뷰어가 자기 꼴리는 대로, 즉 소신대로 쓴 글임을 알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