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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도 마틴을 그리워한다. 커피잔을 볼 때마다 멋진 추억을 떠올릴 수 있다. 마틴은 'e'가 두 개인 커피(coffee)를 하나의 'e'로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바로 L-O-V-E, 즉 사랑이었다.
- 루스 코 챔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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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밤 9시가 지났다.
그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올 시간이다. 가을이 온 뒤, 매주 월요일 밤 9시가 넘은 시간이면 늘 커피를 마시러 오는 남자다. 무슨 이유일까. 처음 들어온 순간부터 그 남자의 표정, 가을빛이었다.
가을빛? 그게 무슨 소리냐고? 글쎄, 그건 그 남자의 표정을 봐야 설명할 수 있다. 그 남자의 표정을 보면, 아 저기 가을이 내려앉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커피 마시고 싶어요."
그 남자의 첫 마디였다. 무슨무슨 커피를 달라는 것도 아니고, 커피를 마시고 싶다? 그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자니, 그 남자, 어떤 커피든 달라고 했다. 그리고 가을 어둠이 묵직하게 내려앉은 구석자리 창가에 앉았다.
그 가을빛 때문이었다. 그 표정,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한길 사람속, 심연을 알 수는 없지만, 때론 말보다 표정이 더 절실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더구나 어떤 커피가 아니라, 무턱대고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말을 던지는 남자라면.
졸졸졸, 커피를 내렸다. 커피를 섞었고, 고노를 택했다. 여러 구멍으로 새나가선 안 됐다. 하나의 구멍으로 가을을 내렸다. 가을빛이 따라내렸다.
그리곤 월요일 그 시간, 남자는 꼬박 문을 열었다. 가을빛이 내린 표정을 하고선, 커피 마시고 싶다는 한 마디. 자리를 차지한 다른 손님이 없으면 늘 같은 자리에 앉았고, 책을 보거나 드라마를 봤다. 나는 다른 말 없이 가을빛 흘러내린 커피를 내놨다. 그 남자 역시 아무말 없이 커피를 들이켰다. 아주 살짝 보이락말락한 미소를 띠고.
며칠 전 월요일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커피를 마시던 이 남자가 느닷없이 오더니, 이렇게 말한다.
"커피 마실까?"
눈을 땡그랗게 뜨고 바라봤더니, "아저씨, 이 말 참 슬퍼요, 그죠?"
역시 멍한 표정으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 곧 말을 잇는다.
"<천일의 약속>이라는 드라마 보세요? 음, 이 드라마, 기억을 잃어가는 한 여자와 그녈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긴데요..."
남자가 풀어놓은 드라마 이야기는 그랬다.
서연(수애)와 지형(김래원)의 사랑이 시작된 우연의 만남. 서연이 영화 같다고 말했다는 만남이었다. 사촌 오빠의 친구로, 친구의 사촌동생으로 처음 만났단다. 그리곤 미술관에서 우연히, 8년하고도 반년만에 마주친, 혹은 3년 전 여의도 63층에서 사촌오빠 혹은 친구를 끼고 식사를 했다는 두 사람.
"커피 마실까?"
"지형이 서연에게 그렇게 말해요. 잠시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서연이 지형의 말을 듣곤, 표정이 말해요. 오랫동안 기다려왔다고. 왜 이제야 그 말을 꺼내냐고. 그토록 환하게 바뀌는 서연의 표정이 참 많은 말을 해요."
나는 안다. '커피 마실까?'라는 말에 들어간 수많은 함의.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사람의 귀를 자극하고, 머리와 심장에 도달한 울림. 아울러, 그 남자가 말하는 서연과 지형의 관계를 재배치했을 커피. 오랜만이라는 시간을 한순간에 건너뛴 커피의 마성. 사랑의 시작을 창조하는 마성적 커피.
"서연이, 참 예뻐요." 잠시 뜸을 들이던 그 남자, 다시 말을 잇는다.
"해롭다고 그래서, 오래 살아야 한다며 설탕을 넣지 않는 서연이를 향해 지형이 눈을 못 떼요. 아저씨도 사랑에 빠진 남자의 표정, 알죠? 그 순간, 지형이의 눈이 딱 그래요. 오로지 한곳에 박혀선 다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런 눈, 있잖아요. 눈에는 온통 하트가 그려져 있는 게 빤히 보이는..."
커피에서 시작한 지형의 수작(?)은 "점심 먹을까?"로 이어지고, "저녁 먹을까?"로 이어진다고 했다. 커피 한 잔이 새끼를 친 셈이다. 얘길 들으니, 서연이라고 다르지 않았나보다. 커피에서 저녁으로 이어지는 논스톱 약속잡기 행렬에, 스스로 싸구려라면서 가두행진에 기꺼이 동참한다니.
"커피로 시작한 만남이 하루를 몽땅 그들만의 것으로 만들어요. 손도 잡고요. 천년 전부터 기다렸다는 느낌이라며,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나요."
데자뷰니, 전생의 기억이니, 오글거리는 이야기의 드라마 같은데, 이 남자, 태연하게 얘기한다. 꼭 자기 이야기처럼. 볼이 살짝 상기된 것을 보니, 뭔가 사연이 있구나 싶다. 그럴 땐, 굳이 물어보는 게 아니다. 커피 한 잔 더, 졸졸졸 흘러내려준다. 옛소, 기분이오.
"똑같이 말했었어요. '커피 마실까?' 커피, 참 좋아하던 사람이었거든요. 그게 우리의 사랑이 시작된 말이기도 했죠. 저들처럼이요. 그때 알았어요. 커피 마시자는 말이 얼마나 많은 뜻을 품을 수 있는지. 그 말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는지."
3년을 사귀었다고 했다.
천일이 넘은 시간. 약속했던 것을 지키지 못한 것이 있어서 가슴 아프다고 했다. <천일의 약속>이 아픈 이유라고 했다. 월요일마다 아이패드로 뭔가 보는가 싶더니, 그게 <천일의 약속>이었던 거다.
"음, 얼마 전 헤어졌어요. 그녀때문에 이젠 커피중독자가 됐는데... 제가 월요일마다 오는 것, 아시죠? 월요일이 그녀가 쉬는 날이어서 커피 참 많이 마셨거든요. 커피순례 다니고 그랬어요. 전 지금, 월요커피병 환자에요."
그녀 때문에 커피까지 배웠다고 했다. 내가 내려주는 커피가 뭔가 독특하다고 했다. 밤 9시가 넘으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게 마음에 들었고, 처음왔을 때, 어떤 커피인지 말하지 않은 건, 어떤 커피가 나오는지 궁금했다고 했다. 다음에도 같은 커피가 나올지 궁금해서 말을 않았고, 계속 같은 커피가 나와서 참 좋았단다.
커피 한 잔을 더 따랐다.
환자에겐 계속 주는 수밖에 없다. 내가 줄 수 있는 처방약이자 위로니까. 한동안 이 남자, <천일의 약속> 때문에 마음으로 앓고 눈물로 말할 것 같다. 가을빛을 띤 이유가 있었구만. 커피로 시작한 사랑과 이별, 커피로 씻어야지.
이 가을빛 남자에게 내가 처방한 커피는, 알싸한 신맛과 장점인 에티오피아 리무와 멕시코 치아파스, 도미니카 바라오나를 블렌딩했다. 이 남자의 가을빛이 알려준 레시피였다.
월요일, <천일의 약속>이 방영되는 날이다. 이 남자, 또 오겠군. 커피를 준비해야겠다. 나는, 이 남자의 커피가 아프다. 가을이 아픈 이유가 있었구먼. 이 남자의 커피를 볶는데, 소리가 난다. 파파, 아파. 아... 파파, 팍.
나도 기억을 잃어가는 여자와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고 싶어졌다. 뭐, 딴 이유가 있을 이유가 있나. 수애. 그 이름 하나만으로 충분한 거지. 아, 수애 같은 여자가 오면, 참 예쁜 커피를 내려줄텐데...
나도 수애씨한테 이 말부터. "커피 마실까?" ㅎ
허허, 커피 만드는 노총각이 별 깜찍한 상상을 다 한다.
밤9시의 커피. 밤 9시가 넘으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이 있는 곳. 그 커피 한 잔으로 생을 확인하고, 외로움을 위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커피 한 잔에 담긴 어떤 세계의 확장과 연결도 엿본다.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밤 9시가 되면, 낮에 만든 커피와는 또 다른 커피를 내린다. 그 커피는 오로지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다. 그리고, 당신과 나만 아는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