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티모르 커피로드]② 동티모르의 역사에 사소한 흔적이 되다

탐사가 진행될수록 사물들에 대한 더욱더 많은 새로운 사실들이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꽉 채울 것이다.  -에드워드 O. 윌슨,《바이오필리아》

차가 꿀렁거린다.  

수도 딜리의 풍경과 또 다르게, 산지는 어쩔 수 없이 역시 산지다. 꾸르릉꾸르릉. 차의 꿀렁거림은 당연한 것이다. 처음 만난 이방인을 등짝에 태우기까지 했으니, 차라고 오죽하겠나. 나도 꿀렁, 차도 꿀렁. 우리는 그렇게 꿀렁거리는 것으로 하나가 됐다.  

나의 꿀렁거림은 설렘이다. 커피는 평지에서 자라지 않는다. 산지형 생물이니까,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해 당연히 올라가야 한다. 평지형 인간이 산지형 생물을 만나러 가는 길, 평탄한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동티모르의 풍경은, 다른 동남아의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트럭이든 버스든, 사람을 꾸역꾸역 매달고 다닌다. 뒤뚱거리듯 왠지 불안해도 가기도 잘도 간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매달린다. 갖가지 자세와 표정으로 차와 합체한다.  

나도 군대에서 군트럭에 매달려봤지만, 저렇게까진 해보지 않았다. 꿀렁거려도 편하게 가는 내가 약간은 미안하다.  

달리 말하면, 동티모르는 아직 모터리제이션(Motorization) 사회가 아니다.  

자동차가 일상과 밀접하게 관련되고 광범위하게 보급돼 있지 않다. 다행이랄까. 모터리제이션이 본격 진전되면, 당신도 알다시피 자동차를 놓고, 사람을 가르는 일이 비일비재해진다. 차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부터, 어떤 차를 소유하고 있는가로 사람을 평가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저항 없는 일상이 된다.  

물론 동티모르에도 차는 꼭 필요하다. 나 같은 평지형 인간이 높은 커피 산지를 갈 수 있는 건, 차 덕분이다. 평지형 인간에게 아웃도어의 후원·협찬이 있을 턱이 없잖나. 커피를 만나고픈 마음에 자리한 것은 등정주의도 아니요, 등로주의도 아니다. 오로지, 날 받아아달라는 애원과 한 없는 겸손. 내 일상을 지배하는 커피를 키운 대지를 만난다는, 득템의 순간을 향한 종종걸음. 

다시 더 자세하게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커피는 모순의 시대를 뚫고 분출한 액체다. 커피를 본격적으로 들이키기 시작한 시민사회 형성기로 돌아가보자. 시민사회의 이념적 동력이 뭔가.  

자유, 평등, 박애!  

커피라는 검은 혈액의 투여 혹은 흡입. 근대적 시민의식의 형성은 커피를 일정부분 빚졌다. 커피하우스에서 이뤄진 작당모의. 커피는 지성을 깨우고(잠을 못자게 하고), 토론을 빚었다(수다를 이끌어냈다).  

그럼에도, 그 시민사회는 자국 울타리에만 머물렀다. 그것도 주로 남성들에게만! 물론 그 시민사회는 완성형이 아니었다. (내 부박한 지식으로, 한국은 언제고 시민사회를 제대로 열어젖힌 적이 없다. 지금까지도!) 울타리 밖으로 나갔을 때, 자유, 평등, 박애라는 시민사회의 이념은 탱자가 됐다. 인종주의나 쇼비니즘(배외주의)이 그것이다. 씁쓸하지 않나? 

지들 나라의 시민사회 완성을 위해 식민지를 두고, 커피를 마시려고 식민지에 커피나무를 심게 했다. 당시 많은 열강이 그랬다.   

 

구름과 안개가 산을 에워싸고 있다. 저것이 커피가 자라는 풍경이다. 열대의 어딘가에 나는 있는 것 같았다. <아비정전>의 시작과 끝을 장식했던 필리핀의 열대우림이 떠올랐다. <아비정전>의 슬픔 띤 정조와는 달랐으나, 동티모르라고 왜 슬픔이 없겠나. 커피나무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차는 오르고 또 오르고 넘고 또 넘는다. 조디와 하 대표님의 말은 통하지 않으나 말이 되는 대화는 계속 되고 있다.  

어디에도 같은 풍경이 없으니, 심심하지 않다. 중간중간 쉬면서 나는 나무를 바라봤다. 나무가 품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물론 내 공력으론 어림도 없다. 아쉽고 슬픈 일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달렸다. 어스름도 지나갔다. 어둠이 깊다. 마우베시(Maubisse)란다. 딜리에서 약 70km 거리라지만, 척박하고 험준한 산지를 오르내리다보니 시간은 꽤나 걸렸다. 해발 1400m에 위치한 산간 마을.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밤하늘이 훌쩍 내려앉아 있다.  

우리가 묵은 곳은 과거 식민시대 포르투갈 성주의 거처였던 곳이다. 현재는 게스트하우스 비슷하게 운영되는데, 객실이 6개, 레스토랑이라고 말하기 힘든 식당이 있다. 겉으로 보아, 나름 운치가 있다. 물론 동티모르는 관광시설이나 편의시설을 거의 기대할 수 없다. 편안하고 안락한 여행? 그런 건, 동티모르에서 저 멀리 안드로메다의 얘기다.   

대신, 깊고 깨끗하다. 그 깨끗함, 우리가 길들여진 청결함과는 또 다른 것이지만.   

기분이 약간 묘했다. 포르투갈 성주의 관사라. 저 아래 동네가 보였고, 성주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통치를 했던 것 같다. 모든 것이 오래되고 낡았다. 시간이 멈춘 것 같다.  

포르투갈은 시민사회의 형성이 부실했었다. 동티모르를 식민지로 삼았을 무렵인 16세기, 포르투갈은 해양왕국으로 자리매김할 시점이었다. 동티모르도 포르투갈의 식민지 경영의 희생자였다. 포르투갈은 식민지를 통해 노예 획득은 물론 주요 농산물을 거둬들였다. 커피도 나중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곳의 성주도 본국에 가져갈 커피를 관리하는 것이 가장 큰 임무였을지 모른다. 해발 1400m의 깊고 깨끗한 아라비카 커피를 찾는 포르투갈 왕조와 귀족들의 명령 혹은 앙탈 때문에.  

덕분에 동티모르 사람들은 노예처럼 일을 했을 것이다.  

성주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마지못해 임무를 완수했지만 동티모르 사람들에게 관대했을까, 아니면 채찍을 들고 노동을 착취했을까. 

해상왕국 포르투갈에는 막대한 부가 쌓였으나 국부 유출 등으로 부르주아 계급이 형성되지 못했다. 즉, 시민계급이 만들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18세기 후반 개혁 시도 등이 있었으나 봉건세력의 반발로 무위가 됐고, 프랑스혁명 등의 영향이 파급된 19세기에도 중산층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  

동티모르가 포르투갈의 식민에서 벗어난 것은 20세기 포르투갈 내부의 혼란에 힘입었다. 20세기 초 국왕 왕살과 공화파의 혁명으로 공화제가 성립했으나 거듭된 쿠데타와 제1차 세계대전 참전에 따른 경제위기 등으로 혼란 그 자체였다.  

마우베시의 성주도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본국에 돌아가지 않기로 마음먹고 이곳 사람들에 동화한 시간이 많은, 널찍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동티모르의 자연과 커피에 취해 그는 그냥 눌러앉기로 했을지 모른다. 그곳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곳이다.  

저녁을 먹어야 했다. 배가 고팠고, 동티모르에서의 첫 식사. 좋았다. 그 이상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쌀이 있었고, 고기가 있었으며, 감자가 자리하고 채소가 함께 했다. 멋진 저녁식사다. 허나 이 모든 것은 커피 한 잔을 하기 위한 성찬! 

저녁만찬을 마친 우리는 깊고 깨끗한 마우베시의 커피를 손에 들고 입을 적셨다. 동티모르가 내 속을 파고 들었다. 이것은 탐사요, 탐험이다. 동티모르에서의 첫밤이 익어가고 있었다. 커피가 마음을 흘렀고, 이야기가 새어나왔다. 아마도 이곳의 마지막 포르투갈 성주의 유령도 귀를 쫑긋 세워 우리와 함께 였을 것이다. 그의 희미한 웃음소리를 나는 들었다! 

양동화 간사의 동티모르 이야기는 그만큼 흥미진진했다. 특히 애정편력사. 그러니까, 다음 이야기는, 그녀는 어떻게 세계 각국의 남자들을 울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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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혜, 엄미숙, 이지연, 이효정, 이훈, 진형근 님.

허술한 나의 커피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고, 잘 따라준,  
당신(들) 각자의 커피, 참 고마웠어요. :)  

그리고, 기대할게요. 

당신 각자의 체온과 이야기를 품은, 
베스트가 아닌 온리의 커피. 저는 그것을 기대합니다. ^^

당신이 찾아내고 깨운 생의 감각이 흘러내린 그 커피를 말이죠! 

 

그 누구도 친구들이 등을 돌릴 때 투덜거리지 말게 하라.
그들은 첫 산들바람에 팔랑이는 나뭇잎처럼 행동할 것이다.
어쨌든 문제가 생기면 커피하우스에 가서 커피 한 잔을 더 마셔라.
 
- 바이런 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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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참 아프다.

1. 노동
11월13일, '노동'을 더 유심히 봤다. 버스를 타고 버스노동자를, 커피하우스에선 커피노동자를, 영화관에선 극장노동자를, 서점에선 책노동자를. 구체적인 존재들의 노동을 봤다. 광화문에선 노동자대회가 열렸고, 노동자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경찰도시 서울의 볼품 없는 풍경이지만,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을 경찰노동자들의 노고까지도 오늘, 그냥 품었다.

11월13일, 전태일 열사의 41주기. 

오늘, 나는 쉬는 날을 맞은 커피노동자지만, 어머니 아버지를 위해 커피를 졸졸졸 내렸다. 어머니의 가사노동은 일요일이라고 쉬지 않는다. 나의 커피는 그런 어머니를 위한 사소한 마음. 노동을 위한 나의 마음. 나는 오늘 하루, 어머니 단 한 사람, 한 노동자만을 위한 바리스타!


2. 김진숙 이후
한 원고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김진숙, 내려오다. 이 말은 아마 2011년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열쇳말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309일 동안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의 복직 등을 위해 고공농성을 해야 했던 김진숙 위원이었다. 돈과 권력에, 1%에 일방적으로 밀려 번번이 실패만 거듭하던 99%가 일군 아주 드물고 사소한 성공의 사례.

11월13일, 41주기를 맞이한 전태일 열사와 지난 9월3일 소천하신 이소선 어머니도 천국에서 미소를 지어주셨으리라. 그렇게 전태일을 떠올리는 시간,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소식이 퍼지고 김진숙 위원이 땅을 밟은 날, 쌍용자동차에선 19번째 죽음소식이 날아왔으니까. “해고가 살인”임을 알면서도 자본은 스스럼없이 살인을 자행한다.

세계 7대 자연경관으로 선정된 제주, 그곳의 아름다움과 평화를 담당하는 강정마을을 파괴하고자 하는 국가(군대)와 자본의 협잡과 침탈은 또 어떻고. 우리는 구럼비의 울음을 감당할 수 있을까. 99%의 일상을 흔들어놓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그냥 놔둬도 좋을까. 희망버스가 향할 곳은 아직 많음을 보여준다. 사소한 성공을 이어야 할 이유까지."

쉿. 가카께 비밀이지만, 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이 있다. 가카껜 절대 비밀이어야 한다. 심기를 불편하게 해 드려선 안 되잖나. 백성의 도리!


3. 조제, 봉빈, 오드리 헵번
7년 만에 조제와 츠네오를 스크린에서 만났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스폰지하우스 광화문. 7년 전과 눈물을 흘렸던 지점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때와 약간 달라보였다. 나이를 들면서 시각이 약간 변한 걸까? 뽀송뽀송한 츠마부키 사토시, 우에노 주리, 이케와키 치즈루. 사랑스러운 그(녀)들.

며칠 전, <채홍> 김별아 작가와 저녁을 함께 했다. 다른 독자들과 함께였는데, '봉빈' 덕분이었다. 봉빈이 누구냐고? '세종대왕의 며느리이자, 조선왕조 동성애 사건의 장본인'으로 기록되지 않은, 그러나 기억돼야 할 어떤 사랑의 주체. 즉, <채홍>의 주인공이다.
 
그전에,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봤었는데, 조제, 봉빈, 할리 골라이틀리(오드리 헵번)이 나란히 줄을 섰다. 공통점? 조제(다나베 세이코의 단편)와 할리(트루먼 카포티의 단편) 모두 원작소설의 주인공이니,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자신의 삶에 주체적인 여성들이다.

특히, 골라이틀리(<티파니에서 아침을>). 싱글걸에 대한 세속적 편견을 바꾼 여자. 빌리 와일더의 표현에 의하면, "혼자 힘으로 풍만과 육감의 시대를 바꾼" 여자. 대개의 경우, 시대가 여성상을 만들지만, 어떤 여성들은 반대다. 등장만으로 새 시대를 열어젖힌다. 오드리 헵번의 골라이틀리가 그랬다. 조제도, 봉빈도 어떤 편견과 틀을 깨는 여자들이다. 

그러니, 울면서 풀썩 주저앉은 츠네오는 이 시대 수컷들의 다가올 미래일지도 모른다. 

'노동'과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함께 지저귀는 이 묘한 풍경, 재밌군. 
 



4. 저런 사랑
<천일의 약속> 재방송. 지형(김래원)이 알츠하이머로 바보가 되어가는 서연(수애)을 향한 사랑(글쎄, 동정은 아니겠지!)때문에 향기(정유미)와 결혼을 취소했고, 두 집안에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지형의 시선은 오로지 서연을 향해 있다.  
 
이것을 보고 있던 어머니, 내게 이런 말씀 툭 던진다.

"아들아~, 너도 저런 사랑을 하거라." 

어머니의 근엄한 명령. 네, 어무니, 그럴게요, 하면서도 나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나도 아버지에게 쫓겨나면, 아버지가 빌려준 돈, 어무니가 대신 주나요? 그러니까, 지형, 넌 참 팔자 좋은 아들이다.ㅋ 하지만, 그 (동정 아니어야 할) 사랑, 인정!
 
나는 그 사랑이 아프다. 나는 그 사랑이 슬프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이거늘, 도리 없이 사랑과 기억을 잃어야 할 사랑이라니.
궁금하다. 알츠하이머는, 가슴도 그 사랑을 잃어야 하는 것일까.

먹먹한 내 가슴이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천일의 약속> 8회 마지막에 삽입된 박인환의 詩 '세월이 가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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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4 10: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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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4 22: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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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레이지 - Outrag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인정하기 싫지만, 세상의 근간은 폭력이다.

자, 스크린을 지켜보자. 주먹을 휘두른다. 손가락을 자른다. 칼로 얼굴을 긋는다. 치과용 드릴로 입 안을 휘젓는다. 젓가락으로 귀를 쑤신다. 몸에 칼을 넣는다. 총을 쏜다. 좀 더 나가볼까? 머리에 보자기를 씌우고 길가의 기둥에 줄을 매달아 달리는 차에서 떨어져 죽게 한다. 
 


상상할 필요는 없다. 세상엔 이보다 더한 폭력(의 기술)이 난무하니까.

악(惡)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냐고? 저건 조직폭력배(갱, 야쿠자)의 것이 아니냐고? 그렇게 믿고 싶을 수도 있겠다. 지금-여기를 보라. 가카의 통치 아래 세상이 얼마나 평화롭고 안온하냔 말이다. 뭔 일이 터지든, 가카는 그러실 분이 아니다! 광화문에 산성을 쌓고, 용산에 불을 지르며, 쌍용차나 부산 영도(한진중공업)에 경찰폭력배들을 투입하는 일 따위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분이 하실 일이 아니다.

강력한 위계에 따른 명령과 복종으로 유지되는 조직이 있다. 조직폭력배를 생각할 수도 있겠고, 군대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어디든, 겉으론 그렇다. 허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물리적 행위만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도 그런 곳엔 '의리'가 있지 않냐고? 왜 이러시나. 그건 이미 박물관에 박제된 유적이다. 의리 대신 탐욕과 배신, 협박이 난무한다. 이권 때문이다. 그것이 폭력과 악을 때론 혹은 수시로 추동한다.

김훈은 악과 폭력의 바탕 위에 세계가 세워졌다고 말한다. 그것에 나는 '이권' 하나 덧붙이고 싶다. 아니, 지금은 이권 때문에 악과 폭력이 발생하는 것 아닐까? 국가마저도 '국익'으로 포장한 '이권'에 몰두하는 세상. 돈이든 권력이든 있는 놈들은 더 많은 이권을 삼키지 못해 안달이다.  

장담컨대, 지금 세상에 순수한 악이나 온전한 폭력은 거의 없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아웃레이지>는 그것을 증명한다. 혹은 선언한다. 악의 순정한 결정체로서, 마초적 폭력의 완성체는 없다!

그래서 이 영화, 여느 갱스터 영화와 다르다. 멋있게 죽는 법이 없다. 하나같이 동정 없이 죽어간다. 죽음과 죽음 사이엔 냉혹함만 흐른다.


참, 많이도 죽는다. 영화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죽임과 죽음을 보여준다. 감정을 동반하지도 않는다. 건조하다. 더구나 죽임과 죽음 사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협박을 밥 먹듯 하고 폭력은 몸에 배인 행위다. 배신은 일상다반사다. 이권을 향한 생존본능만 번뜩이는 수컷들 앞에 다른 명분이나 정서의 흔들림은 사치다. 

그 모든 것은 이권 때문이다. 서열 파괴, 의리 박멸, 양심 증발, 모두가 이권이 추동한다.
     

<아웃레이지>의 원제(일본)는 ‘全員惡人(전원악인)’이란다. 글쎄, 순정한 악인조차 될 수없는 이들에게 그런 타이틀, 한편으로 사치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그저 장삼이사 아닌가? 어쩌면 내가 너무 비관적인가? 정서적으로 피폐한 건가?

모르겠다. 일상에서 나는 늘 폭력(물리적이진 않아도)을 목격하고, 협잡을 목도한다. 분칠한 협박은 표백제를 뒤집어 쓸 정도고, 악의 평범성은 이제 식상하다. 나라고 거기서 자유롭진 않다.

기타노 다케시의 세계는 여전하면서도 더 촘촘하고 냉정한 유머를 발산한다.  

<아웃레이지>의 결말은 그래서 섬뜩하면서도 지독하게 현실적이다. 이권을 향한 대물림. 사람이 바뀔 뿐, 세상의 근간은 뿌리 깊다. 어디서부터 잘라내야 할지 당최 알 수 없는 견고한 시스템. 우리는 이권과 폭력과 악을 패션처럼 입고 있다. 

<아웃레이지>의 폭력이 잔인하다고? 나는 아니었다. 조직폭력배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세상의 단면을 본 것 같았다. 영화가 폭력을 전시했다고 느끼지 않았던 이유다. 그래서 잔인했다. 세상의 잔인함을 스크린을 통해 새삼 확인해서. 내가 너무, 이권에 예민하고 폭력이 일상화됐으며, 악을 내면화한 인간이어서 그런 걸까? 나는 글러먹었다. 된장. 조심해라. Outrage할지도 모른다. 

물론, 절대 해치진 않아요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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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츠하이머를 앓는 여자가 아메리칸 커피를 시킨 이유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먼저 인생을 바꿔야 한다.
                                                 -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

 
   

오늘, 특별히 이 커피콩을 볶는다. 에티오피아 하라르 지역 사람들이 만든 커피. 그 남자가 오기 때문이다. 그 남자, 오늘 밤 9시부터 詩를 낭송할 계획이다.

시즌이다. 10월20일부터 시즌에 돌입하긴 했다. 한 20일에 걸쳐 있는데, 오늘 11월10일이 정점이자 마지막 날이다. 커피 이름은 쉽다. 

랭보. 

오늘, "랭보 한 잔이요~"라고 주문하면 나는 하라르 커피를 내놓는다. 그래, 오늘 120주기라서 그렇다. 1891년 11월10일, 서른 일곱의 나이였다. 요절이었던 거지. 죽기 몇 달 전, 병 때문에 다리를 자른 뒤, 그는 특유의 시니컬함을 거침없이 내질렀다.  

"우리 인생은 불행이다. 끝없는 불행의 연속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존재하는 것일까?"

빌어먹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말이다. 그의 말마따나, 우리는 번번이 실패하고 불행한데, 버티고 견딘다. 아주 사소하고 엉뚱한 성공에 감읍해서. 

열 다섯에 데뷔, 빅토르 위고로부터 "어린 셰익스피어"라는 극찬을 받았던 랭보는, 스무 살, 詩를 덜컥 놓았다. 그 얘긴 예전에 했던 블라블라를 참조하시고.
 
11월에 생각하는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 랭보



詩에 작별을 고하고, '스무 살 이후'를 살게 된 랭보는 커피 상인(무역상)으로서도 살았다. 당시 백인으로서 커피무역상에 고용된 것은 랭보가 처음이었단다. 그는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로 향했다. 아프리카에 가고 싶었했단다. 태양과 가장 가까운 곳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는 하라르로 갔다. 해발 1850m의 이슬람 도시. 이슬람 4대 성지 중 하나다. 하라르(의 커피)에 대해선 이런 유언비어(?)가 있었다.
'인도네시아 만델링 지역의 커피가 커피의 왕이고, 에티오피아 하라르 지역 커피가 커피의 여왕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또한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바디가 풍부하고 중간 정도의 산미에 초콜릿 향미가 있지만, 그렇다고 '여왕'의 타이틀을 달 만큼은 아니다. 내 코와 혀는 그리 말한다. 

개성이 다소 약하다는 지적도 있다. 랭보는 "지저분하고 커피도 맛이 없는 곳"이라고 하라르를 평했다. 하지만 하라르 커피는 랭보의 간택을 못 받았을 뿐, 그리 최악은 아니었다. 하라르 커피의 미묘한 밸런스는 예멘으로 전파됐고, 그 유명한 '예멘 모카'를 잉태했다.

그러니 하라르 커피는 랭보나 예멘 커피에 얽힌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할 수도 있겠다. 오늘의 특별한 커피, '랭보'는 그래서 나온다. 누구에게나 있을법한 '중2병(중학교 2학년 나이 또래 청소년들이 겪는 허세적 착각)'을 앓았을 무렵의 랭보를 추억해도 좋고, 더 이상 랭보에 빠질 수 없음을 아는 속물적 현실을 자각할 수도 있다.

랭보는 詩에 작별을 고한 뒤, 철저히 돈 밝히는 속물로 살았다. 극과 극의 체험을 겪은 천재가 택할 수 있는 건 결국 분열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라르 커피에 섞인 랭보적 자취는 그래서 찐~하다. 터키의 속담, '커피는 지옥만큼 어둡고, 죽음만큼 강하고, 사랑만큼 달콤하다'는 하라르 커피를 지칭한 것인데, 랭보의 질척한 방랑이 섞여서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오늘 랭보를 읊을 남자의 이니셜은 L.D.다. 아마, 당신도 본 적 있을지도 모른다. 천하의 꽃미남! 꽃랭보가 그러했듯. 나는 그 남자에게 이걸 부탁하려고. 아님, 내가 읊던가. 「가장 높은 탑의 노래」.

300일이 넘은 310일째, 김진숙 위원을 위해. 어제 노사 잠정합의안이 나오면서 김진숙 위원이 내려올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경찰이 삑살이를 놨다. 병력을 투입하는 과잉반응이 결국 김진숙의 귀환을 막았다. 개새끼들. 하는 꼬라지하곤. 

아, 김진숙 위원님이 내려와서 건강이 회복되면, 커피 한 잔 대접하고 싶다. 
  

속박되어 꼼짝 못하는
한가로운 청춘
자질구레한 걱정탓으로
내 인생을 망쳐버렸네

아아, 내 마음이 열중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오게 해다오
나는 생각한다, 좋아
그대와 만나지 않을지라도,
그대와 얘기하는 덧없는 기쁨의
약속따윈 이제 아무래도 좋아
당당한 은퇴를 그대가
멈추게하여 주기를 바라네

언제까지나 내가 꾸었던 헛된꿈을
그토록 참고 견디었다
공포도 고통도 하늘높이 날아가버렸고
그런데 불쾌한 갈증이 내 혈관을 어둡게 하는구나   

평원이 버려진 채로 커지고 
향과 갈라지색 꽃을 피우는 것처럼
수많은 불결한 파리떼가
잔인한 소리를 내는도다

아아, 그토록 가여운 영혼
말할 수 없는 홀아비 생활
그것은 오직 노트르담 교히의
모습이구나
성모마리아에게
간구하는 것인가?

속박되어 꼼짝 못하는
한가로운 청춘
자질구레한 걱정탓으로
내 인생을 망쳐버렸네
아아, 내 마음이 열중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오게 해다오

  

그러니까, 굳이 밤 9시의 커피가 읊는 시 낭송회에 오지 않아도 좋다.
그저 오늘, 랭보 한 잔 마시며 시를 만나도 좋은 시간. 김진숙 위원의 귀환을 기다리며. 한때 랭보의 격정적인 연인이었던 베를렌이 랭보를 일컫길, 나의 가장 빛나는 죄악. 당신에게도 '가장 빛나는 죄악' 하나쯤. 오늘만큼은. 

 
 

밤9시의 커피. 밤 9시가 넘으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이 있는 곳. 그 커피 한 잔으로 생을 확인하고, 외로움을 위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커피 한 잔에 담긴 어떤 세계의 확장과 연결도 엿본다.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밤 9시가 되면, 낮에 만든 커피와는 또 다른 커피를 내린다. 그 커피는 오로지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다. 그리고, 당신과 나만 아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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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밤9시의 커피]'하쿠나 마타타'로 떠올리는 프레디 머큐리
    from 맺고,따고,볶고,내리고,느끼고,사랑하라! 2011-11-24 03:04 
    친구들이여, 이것은 하루 중 가장 유쾌하면서도 위험한 시간이다. 새날이 밝고 카페인이 퍼지면서 이 스파이스 걸(Spice Girl)에게는 스파이스, 즉 흥취를 돋울 시간이 아닌가. 아, 오늘 나는 또얼마나 많은 것들을 성취할 것인가!- 샤나 맥린 무어 콩콩콩콩...세상에서 가장 향긋한 콩 볶기, 로스
 
 
2011-11-11 10: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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