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넘어 혁명을 꾀한 사진 예술가, 티나 모도티

 

멕시코의 예술가 프리다 칼로를 다룬 영화, <프리다>. 섹시한 배우로 각인됐던 셀마 헤이엑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프리다 칼로를 표현함으로써 화제가 됐었다. 프리다에 가렸지만 또 하나의 인물이 있었다. 프리다의 연인, 디에고 리베라가 아니다. 극중에서 프리다와 춤을 췄던 여자. 자유분방하면서 혁명을 꿈꾸는 사진가로, 애슐리 주드가 연기했던 티나 모도티.

 

 

나는 <프리다>처럼 <티나>라는 영화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혁명가이자 사진작가, 그리고 사랑의 화신이었던 티나 모도티를 다룬. <프리다>가 프리다 칼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듯, 티나를 다룬 영화는 그녀를 되짚어보도록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이 시대를 되짚어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어쩌면, 혁명. 닥치고, 혁명! 


티나 모도티, 독립적이면서 사랑을 갈망했던 여인


에드워드, 부드럽게 당신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러봅니다. 오늘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당신을 느낄 수 있게. 여기 홀로 앉아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오. 에드워드, 당신이 내 삶에 얼마나 많은 아름다움을 더해주었는지! 아침까지 당신의 마지막 편지를 베고 누워 있었답니다.

그런데 날 깨운 게 그것의 희미한 향기였을까요? 아니면 거기서 발산되는 듯한 당신과 내 욕망의 혼? 그래요. 어떻게든 달성하고픈 욕망에 취하면서도 그걸 두려워하고 미루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높은 형태의 사랑이겠지요.

(《티나 모도티》, p.86, 티나 모도티가 에드워드 웨스턴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티나 모도티(Tina Modotti, 1896.8.16~1942.1.5)는 사진작가 에드워드 웨스턴을 만나 사진에 입문했다. 1919년이었다. 앞서 그녀는 시인이자 화가였던 로보와 사랑했었다. 로보를 통해 많은 예술가를 만나 예술과 사회, 인문을 습득했던 그녀였다. 멕시코 문화를 보길 원했던 로보가 현지에서 천연두로 사망하고, 그녀는 웨스턴의 모델이자 조수가 됐다. 이어, 그의 뮤즈이자 아내가 됐으며 티나의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있었다.


두 사람은 사진관을 운영했고, 멕시코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두 사람은 혁명 후기 멕시코 문화계의 유명 인사였다. 프리다와 디에고를 만나게 해준 이도 티나였다. 당시 프리다는 티나를 숭배했던 소녀였다. 문화계 모임에서 티나는 사랑의 가교 역할을 했다. 허나 웨스턴은 결국 그녀를 떠났다. 자신의 아들을 찾아 미국으로 떠난 것이다.


에드워드가 떠난 뒤, 멕시코에서 사진의 길을 걷고 있던 1928년. 그녀는 쿠바출신의 망명정치가 훌리오 안토니오 멜라를 만난다.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연인이 된다. 티나는 특히 멜라의 영향으로 본격적인 혁명가의 길을 걷는다. 그녀는 사랑이 인도한 길을 자연스레 따랐다. 로보가 알려준 예술, 에드워드가 보여준 사진, 안토니오가 제시한 혁명. 그 모든 것이 티나의 것이 됐다. 티나는 사랑 덕분에 존재했던 것일까. 티나를 사랑을 자기 것으로 흡수했던 것일까.  

 

그러나 이듬해, 안토니오는 정적들로부터 암살당했다. 티나를 둘러싼 무성한 소문도 악의적이었다. 화려하고 이지적인 미모를 지닌 여인을 향한 세상의 질투였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고정적인 이미지에 저항해서 싸우고 싶었다. 한 번은 “미국에선 美가 모든 것의 기준”이라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안토니오의 저격은 그녀에게 팜 파탈의 이미지를 덧씌웠다. 이미지의 저주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혁명을 향한 전진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사랑과 혁명은 그래서 통한다. 사랑이 혁명을 가능하게 한다.


티나 모도티, 운명과 싸워 혁명을 꾀했던 여인

 


티나는 언제나 주어진 운명에 싸워야했다. 그녀의 외모에서 덧씌워진 부당한 이미지도 그랬지만, 태어나면서부터 그랬다. 이탈리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열여섯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재봉부터 시작했다. 연극·영화에도 몸을 담았고, 사랑을 통해 예술가?작가들과 교류했다. 주어진 대로만 있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녀는 예술이 혁명을 도울 수 있다고 봤다. 그래서 티나의 예술세계에 혁명은 중요한 오브제였다. 미국으로 이민 와서 가난한 노동자로 살 수밖에 없었던 경험은, 멕시코에서 그녀의 예술세계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멕시코의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공감이었다. 그들의 처지에 공감하는 능력이 티나의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한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동고(同苦)를 도덕적 감정의 핵심으로 꼽았는데, 티나의 작품은 그런 도덕적 감정을 동반한다. 다큐멘터리적 요소 없이도 클로즈업해서 찍은 ‘손’시리즈. 그것은 예술과 혁명을 동시에 담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녀의 작품은, 멕시코에 거주한 1923~1930년에 찍은 250여 컷에 잘 형상화돼 있다. 멕시코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예술이 어우러진 시기, 그녀는 그런 시대를 온몸으로 흡수하면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에 1929년 12월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첫 개인전. 노동자들을 위한 관람시간을 특별 배려했고, 마지막에는 ‘멕시코 최초의 혁명적 사진전’이라는 연설을 진행했다.


그러나 그녀의 혁명이 계속 꽃피진 못했다. 전시회를 마치고 6주 후 돌아온 것은 멕시코 정부의 추방 명령이었다. 그녀가 속한 사회주의 단체에서 대통령 암살을 꾀했다는 혐의였다. 다행히 혐의를 벗었지만 그녀는 멕시코를 떠났다.

 

사진에 우호적이었던 독일이 다음 행선지였다. 케테 콜비츠, 게오르그 그로츠 등과 교류했고, 그들 모임의 회원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나치가 있는 독일은 그녀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뭣보다 그녀가 사용하는 그라플렉스 카메라의 필름을 구하기 힘들었다. 독일에선 라이카 카메라가 대세였기 때문이다.  


이어 그녀가 찾은 곳은 모스크바였다. 그녀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로버트 카파, 헤밍웨이 등과 예술적 교류를 나눴다. 이탈리아 공산주의자 비토리오 비달의 혁명동지로 활동했다. 러시아의 콜론타이,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 등과 정치적 혁명 동지애도 나눴다.

 

혁명은 여전히 그녀의 오브제였다. 스탈린의 비밀경찰로도 활동했지만, 권력투쟁과 스탈린의 편집증에 질린 그녀는 소련을 떠나 스페인 내전 지원을 나섰다. 1939년 스페인 내전이 끝난 뒤 다시 멕시코로 돌아왔으나 그녀는 사진을 접었다. 자신의 혁명적 이상과 배치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번역과 공산주의자 활동에 전념하다가, 1942년 택시 안에서 숨을 거뒀다. 심장마비였다. 마흔 다섯. 이른 죽음이었다.

 


티나 모도티. 재단사에서 배우로, 배우에서 사진작가의 모델로, 모델에서 사진가로, 사진으로 혁명을 담는 투사로, 공산주의 혁명을 전파하는 혁명가로 끊임없이 변신하며 세상을 누빈 여인. 그녀에게 사진은 시대를 기록하는 도구였다. 사회주의의 이상과 시대정신을 내용으로 간결하고 아름다운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그녀의 작품은 사후 더욱 큰 미학적 평가를 받고 있다. 1991년의 소더비 경매. 그녀의 작품 <장미>는 16만5000달러에 팔렸다.


시절은 점점 더 노동자에게 각박해진다. 99%의 피눈물이 세상을 채우고 있다. 예술과 혁명의 접점을 본 티나 모도티를 다시 꺼내는 이유다. 예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20세기가 평가절하한 대표적 작가 가운데 한 명’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그녀에게서, 혁명을 되짚어보자. 행동하자. 점령하자.


사랑과 혁명은, 각자의 다른 이름이다.


(※참고자료 : 《티나 모도티》(마거릿 훅스 지음/윤길순 옮김|해냄 펴냄), 위키백과, 한겨레, 티나 모도티 팬사이트(http://cinemarx.cafe24.com/tina), 위민넷)

 

 

[문화예술잡지 뷰즈 21호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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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책을품은삶 > 뜨겁게 안녕, 좋거나 혹은 슬프거나...

김현진

건재하도다. 이 씩씩한 언니.

어디선가 사회적 약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언니.

나, 김현진 팬! 새로 출간한 《뜨겁게 안녕》 독자만남. 응모했고 뽑혔다.

홍대의 커피하우스, 살롱드팩토리. 사실, 이곳의 커피는 내겐 별로지만. 

 

그녀, 여전히 멋있고, 아름답다.

알코올 의존은 여전한 듯하며, 수줍고 여리고 참 약하면서도, 그래서 강한 여성.

 

뭣보다 김현진은 김현진이다. 다른 어떤 설명도, 사실 필요없다.

그녀는 그녀로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자신으로.

그래서 스스로를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포장도 않는다. 거듭, 멋있다.

 

10여 년 전부터 기사나 글을 통해 보아온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산다. 온전하게.

당연, 인간적인 결함 있(을 것이)다. 변덕도 죽 끓으며, 우울도 달고 산다.

그래서 술은 그녀에게 좋은 친구다. 그게 뭐 어쨌다고!

입방아 찧기 좋아하는 사람들, 그녀를 향해 수근거린다. 구설수에 휘말리기도 했다.

김현진, 상처 입었고, 상처 입는다고 솔직히 말한다.

 

그녀는 '자기마음주의자'.

많은 우리는 남들이 하는 뒷담화나 수근거림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사나.

그래서 끊임없이 포장하고 분장하고 변장하기 바쁘다. 마음도 성형을 하는 세상.

그녀는 자신의 본질을 숨기지 않는다. 가리지 않는다. 포장하지 않는다. 그냥 직구.

자신의 두 발로 또박또박 앞으로 나간다. 덤벼라, 세상아.

 

그녀(의 글)를 보면,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나는 온전하게 나로서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타인 아닌 내 인생을 누리고 있는가.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고 있는 많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 '진짜' 삶을 살고 있니?"

 

물론, 그녀는 그런 것, 의도하지 않는다.

김현진은 그저 자신으로서 살아가고, 마음 가는 대로 발걸음을 옮길 뿐이니까.

 

아마도 그녀, 헤밍웨이의 이 말을 체화하고 있다.

"내가 아닌 것으로 사랑받느니, 나 자신으로 미움받겠다."

우리는 얼마나 내가 아닌 것으로 사랑받고자 원하는가 말이다. 미친 듯이.

 

우산도 없이 빗속에 뛰어드는 마냥, '진짜' 삶으로 뛰어드는 그녀, 김현진 스타일.

쩐다! 간디작살. 아름다운 '김꽃두레'양 표현을 빌자면, 마~돈나 섹시해.

 

소설을 쓰고 싶은 그녀, 언제고 소설을 낼 것이고, 꼭 그러길 바란다.

그 소설, 대중을 자극하든 아니든, 나는 그것이 한 인간의 기록임을 기억할 것이다.

'한 인간'을 벗어나 대중이 된, 지금의 인간에게 그녀는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왜? 김현진이니까!

 

김갑수 선생님이 피아니스트 리히터(리흐테르)를 경배하며 하신 말씀 인용하자면,

"대중의 사랑과 선망으로 높낮이가 구분되는 '인기'와는 다른 영역"에 김현진은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녀는 '비주류'가 아니라, 대중 아닌 '한 인간'으로 존재한다.

다시 김갑수 선생님의 표현을 빌자면, '인간의 깊이, 인간의 크기'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녀의 애정, 서울과 술. 그것과 함께 영원하길.

2009년 내가 그녀에게 했던 말, 여전히 유효하다.

 

이 자리가 더 좋았던 이유.
내 이십대 민무늬 정신에 주름을 남긴 고종석 선생님이 오셨고,

(나는 고샘 팬클럽 멤버다! 고샘은 김현진의 아버지다. 문화적 DNA를 물려준 아버지. 부럽다!)

내 사랑하는 <씨네21>의 초대편집장이자 소설가 조선희 선생님도 오셨다.

(씨네21에 싸인을 받았다. 소설이 완성됐다고 들었다. 기대한다고 말씀드렸다.^^)

 

이 훈훈한 공기하곤.

나는, 남의 시선에 포박당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을 참 좋아한다. 오늘, 그것을 확실히 느꼈다.

고종석 선생님도, 조선희 선생님도 그래서 좋아한다. 동시대를 살아가니 다행이다.

 

언젠가는, '뜨겁게 안녕'할지라도. 

 

 

슬픔

그 어느 해의 마지막 날.

나는 한 커플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했다.

그들은 이별을 택하기로 했고, 12월31일을 거사일로 택했다.

 

헌데, 그들은 증언자(?)로 나를 택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실을 내게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그날부로 헤어지기로 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당시 애인이 한국 아닌 먼 곳에 있던 나.

함께하자는 제안에 고맙다며 굽신굽신, 종각에서 폭죽을 함께 즐기고 쏘다녔다.

뉴이어는 그렇게 밝아왔건만.

 

그리고 그들, 헤어졌다.

내 대학시절 참 좋은 파트너였던 녀석은 다음날에야 그것을 실토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고. 글쎄, 정확한 이유는 생각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단 하나의 이유도 아닐 것이다.

다만, 내 어설픈 기억으로 당시 녀석의 집안형편이 큰 걸림돌이 됐다.

그렇게 죽자사자 붙어다니던 그들이었다. 나는 그것이 늘 보기 좋았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놈, 그렇게 허술한 것일까? 아니, 사랑이 아니었던 걸까?

 

녀석은 상처가 깊었다.

녀석은 오랫동안 그녈 잊지 못했고, 그 사이 여자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그런 한편으로 녀석의 여자에 대한 불신도 깊었다.

일반화 하지 말라고 했지만, 녀석의 상처는 오래 갔고,

다른 여자와의 관계는 서툴기만 했다.

 

그런 녀석이 한 달 뒤 결혼(식)날짜를 잡았다고 연락을 했다.

갑자기 그렇게 됐다고. 어어어~ 하다가 얼렁뚱땅 결혼하게 됐다고.

 

글쎄, 지금 여자와 녀석의 관계. 잘은 모른다.

다만 녀석의 말이 슬펐다.

"형, 결혼한 친구들 말 들어보니, 다 그렇게 어어~하다가 결혼하는 거라더라. 다 그리 한다 하더라. 뭐, 나도 그리 됐네. 하하."

 

내가 알던 녀석은 자신만의 생각과 삶을 살았던, '비주류'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녀석은 '주류'가 됐다.

축복해야 하는데, 축하를 하면서도 나는 한켠으로 슬펐다. 녀석이 아팠다.

결혼이 아프고 슬픈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에 자신을 대입시킨 녀석이 슬프고 아팠다.

 

그래, 오해겠지만,

녀석은, 아직 그 상처에 휘둘리는 것 같아서, 그것이 나는 슬프다.

부디, 잘 살아라. SJ야. 그래도 나는 늘 네가 고마우니까.

너와 함께 꿈꾸던 그 시절을 나는 잊지 못하니까. 그건 내게 아직 유효한 꿈이니까.

 

그래, 뜨겁게 안녕.

너와 나, 우리의 뜨거웠던 청춘 1막은 그렇게 접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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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마을 공동체'(서울에 핀 마을이라는 꽃)를 향하면서,

내가 바라는 마을의 한 풍경, 그리고 내 마음의 한 풍경.

이런 풍경이 마을 한켠에서 펼쳐진다면 참 좋겠다. 

스마트폰 대신 책이라면 더 좋겠고.  

 

아마도, 행복. 셋은 행복해 보인다.

특히, 여자의 다리에 기댄 개의 절묘한 모습.

그것은 어쩌면 행복의 또 다른 모습 혹은 이름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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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없는 이야기 - 최규석 우화 사계절 만화가 열전 2
최규석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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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없는 이야기》는 보고 읽는 순간보다, 책을 덮고 난 뒤 일상을 영위하면서 툭툭 떠오르는, 사유를 하게끔 만드는 작품이다. 우화가 지닌 속성일 수도 있겠으나, 이땅에서 펼쳐지는 사건사고, 현상을 접할라치면 자연스레 그의 짧은 우화가 툭툭 떠오른다.  

 

1월20일, 3주기를 맞는 용산참사를 자연 연상케하는 '가위바위보' '새'는 시기적으로 맞물려 그런 잔상을 드리운다. '갑옷도시' '용을 잡는 사냥꾼' '농장의 일꾼들' '원숭이 두마리' 등에선, 자본이 모든 것을 삼켜버린 이 세계의 잔인함과 그 농간에 넘어가 자유를 자본에 넘겨준 인간들의 무력함을 엿본다.

 

끊임없이 긍정(의 힘)을 설파하며 개인의 노력만 강조하는 시대의 간교함은 또 어떻고. 천사를 찌부러트리는 '불행한 소년'은, 일말의 논쟁이 있었다지만, 여러 메타포(은유)가 있지만 나는 천사로 위장한 지금 시대의 자기계발(기만)서에 대한 은유로도 읽었다. 

 

기득권은 반성이나 성찰 따윈 않는다. 문제가 생겨도 시스템을 거론하지도 않는다. 처벌하고 즉자적인 대응이나 반응을 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여긴다. 그러니 가난이나 불행, 고통을 온전히 개인의 책임으로만 떠넘긴다. 자신들이 가진 권력, 힘만큼의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건, 그게 크나 적으나 비슷하다.  

 

《지금은 없는 이야기》에는 동물이 주인공인 작품이 많다. 그걸 보고 있자니, 우린 역시 동물의 왕국이다. 동물의 세계나 인간의 세계나 다를 바가 없다. 아니, 모르긴 몰라도 인간의 세계가 더 야만적일 것이다. 우리는, 곧 짐승의 시간을 버티고 있음을 절감한다. '괴물'은 우리가 지금 괴물이 돼 있음을, '괴물의 시간'에 살고 있음을 거의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어쨌거나 지금의 내게 가장 큰 위로와 힘을 준 것은 '스스로 줄을 자른 연'이었다. '하늘이 그립지 않니?'라고 묻는다. 연은 답한다. 아니. 스스로 줄을 자른 연은 하늘을 그리워하지 않아. 며칠 전, 제안이 왔다. 거대 커피체인점 홍보실장 어떠냐고. 자암시 고민하다 거절했다. 잘했다고 스스로 생각했는데, 곧 이 책의 '스스로 줄을 자른 연'이 들어왔다. 최규석이 내게 준 위로였고, 힘이었다. 고마웠다. 감사합니다, 영어로 땡큐, 중국어 쉐쉐, 일본어로 아리가또라고 하지요. ^^

 

책의 미덕은 곧 그것이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가?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것. 그런데도 최규석은 짧은 우화의 힘을 빌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최규석. 본인이야 어떻게 받아들이든, 나는 그를 (사유형) 천재라고 생각한다. 매번 그의 작품을 볼 때마다 놀란다. 재미는 기본으로 그는 나를 돌아보게 만들고 세계를 생각하게 만든다. 아무나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의 책을 볼 때마다 기분 좋은 이유다. 더구나 잘 생기기까지 했으니, 보통 잘 생긴 것이 아니고 완전 쩔게 잘 생겼다. 하늘이 공평하다는 말은 틀렸다. 하늘은 드물게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준다. 최규석이 한국의 그 예다. 외국엔 조지 클루니가 있듯.  

 

감히 말하건대, 최규석은 우리 시대의 보물이자 축복이다. 만화계뿐 아니라, 지금 모두의 우리에게.

 

아울러, 다시 한 번. 용산을, 추모한다. 떠올린다. 기억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억하고 추모하는 일뿐이지만, 그것이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그들의 무덤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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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을 접하면.

"나는 어떤 왕도 섬기지 않는 세계 시민으로서 글을 쓰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실러, 1784년 11월, 문예지 <라이니센 탈리아>.

 

나는 언제고, 저런 선언을 하면서 글을 쓰고 커피를 내릴 수 있을까? 

 

가령, 이렇게?

나는 어떤 자본도 섬기지 않는 세계 시민으로서 커피를 만드는 것이다.

 

허수경 시인의 말씀을 약간 바꿔서,

 

앞으로의 소망이 있다면 젊은 시인들과 젊은 노점상들과 젊은 노동자들에게 커피를 만들어주면서 아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아, 나는 실러의 저 명징하고 육중한 선언처럼 할 자신이 없다... 저 짧은 글에는 실러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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