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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이다. 詩月.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詩적인 책 읽기다. 

쉽게 흔들리고 짧기만 한 이 계절, 그냥 흘려보내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삶을 詩로 만들 수 있는 방법, 이런 책을 읽으면 된다! 


 엄기호다. 망가진 학교에 대한 한탄 한 자락 더 보태려는 게 아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 학교 현장을 두려워해야 하는 교사의 존재라니, 우리는 왜 이런 지경에까지 도달했을까. 

우선 그들의 두려움을 알아야 한다. 절망과 망함, 명확한 현실 인식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거짓 희망이나 미화가 없는 시선이 필요하다. 그러니 교육에 대한 가치와 가능성을 믿고 선생이 된 교사들의 생생한 목소리에 먼저 귀를 기울이는 것, 그러면서 절망의 끝을 확인하는 것. 엄기호는 교사들이 '타자'를 만나라고 권하는데, 그것, 참 문학적이다. 시적이다. 시인 프르날두 페소아는 말하지 않았던가. 

"산다는 것은 타인이 되는 일이다."      



더 좋은 삶, 더 좋은 세계란 무엇일까. 

자신의 삶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의당 만나야 할 질문이다. 그리고 답은 없다. 스스로 내야하는 문제지만, 다른 누군가의 통찰과 지성이 필요하다. 하워드 진, 노엄 촘스키, 우르바시 바이드, 피터 퀑, 위노나 라듀크, 벨 훅스, 바버라 에런라이크, 매닝 매러블, 마이클 앨버트. 귀를 기울여보자. 우리는, 나는 더 나아질 수 있다. 지금-여기의 혁명이 무엇인지 고민해보자. 이 세계는 절망의 구덩이지만, 절망에서도 삶은 지속돼야 한다.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혁명은 詩적 정의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궁극적으로 건축이 그 최강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예술이자 자본의 최첨단이 건축이다. 건축주와 건축가 사이의 긴장과 자본과 예술 사이의 대립이 건축을 사유할 수밖에 없는 오브제로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 로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현대 건축의 3대 거장 가운데 라이트와 로에 두 사람을 다룬 책이라니 어찌 동하지 않을쏜가.  

잘 된 건축은 詩라고 감히 말하겠다. 현대 건축의 두 거장을 읽는 일은 한 편의 詩를 만나는 일이다. 詩월이어서 가능한 일이다. 



그래, 또 혁명이다. 

어쩔 수 없다. 詩월은 그렇다. 으스러진 혁명의 아이콘이 유령처럼 배회한다. 10월 9일의 체 게바라. 올해 46주기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혁명가 체 게바라가 왜 등장하게 됐는지를 사유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프랑스 혁명과 1948년의 혁명,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 등을 통해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당연히 혁명 이후의 삶과 세계가 장밋빛이었던 것은 아니다. 혁명의 쟁취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혁명 이후다. 프랑스 혁명과 볼셰비키 혁명은 그것을 잘 대변해준다. 그러니 쓰러진 혁명 체 게바라를 그리는 일은 詩적 상상력이 필요한 일이다. 끊임없이 권력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했던 20세기 가장 완벽한 사람, 체 게바라를 위해 쿠바 커피를 내리고 싶다. 체 게바라는 그 자체로 詩였다. 



'그린'이라는 말에 섬뜩해할 필요는 없겠다. 그놈의 녹색성장 때문이다. 자연과 지구를 초토화하는 일에 '녹색'이라는 레떼르를 붙였던 전 정권의 개념 없음이 불러온 재앙 때문이다. 

그린 어바니즘, 생소한 타이틀인데, 도시와 환경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고민하기 위한 개념이란다. 그것은 삶, 그것도 지속가능한 삶과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도시의 역할과 책임을 다룬다. 도시와 시민은 서로 삼투압한다. 장소, 공동체, 생활양식 등을 형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사유이자 실천이다. 궁금하다. 그린 어바니즘을 통해 우리는 도시에서의 삶을 詩로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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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 진화생물학의 눈으로 본 속임수와 자기기만의 메커니즘
로버트 트리버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살림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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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사람이라는 존재는 그렇다(물론 나도 포함된다). 스무 살이 넘으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아주 드물게 예외적인 인간이 있을 뿐이다. ‘사실’ 여부가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도 그때그때 편의적으로 받아들인다. 나에게 유리하면 사실은 중요한 근거가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사실 따위는 개에게나 줄 먹이거리다.

 

대표적인 경우가 지금-여기의 ‘종북’이라는 딱지다. 종북(從北)이 말 그대로, ‘조선노동당과 그 지도자의 외교 방침을 추종하는 경향’을 뜻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냥 자신(의 정치적 견해)과 다르면 종북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이 ‘유행’이 됐다. 다른 이유는 없다. 종북의 근거나 이유를 발견해서가 아니다. 그냥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종북이라는 유행어를 갖다 붙인다. ‘듣보잡’ 변희재는 그래서 낸시 랭에게 ‘종북’이라는 레떼르를 부여했다.   

 

밑도 끝도 없는 종북놀이를 보면서 지젝의 말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우리는 믿어야 할 충분한 이유를 발견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미 믿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을 입증해줄 이유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념이라고 보긴 어렵겠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이 품고 있는 확고부동한 무언가가 있다. 삶의 맥락에서 다져온 생각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에 충돌하는 사실을 제시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대부분 사람은 신념을 바꾸기보다 그 신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크다. 종북이 그런 것이다. 미국의 사회운동가 파커 J. 파머가 쓴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경제적으로 상층으로 올라서려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수입의 불평등을 드러내는 도표를 제시하면 어떻게 될까.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기보다 당신을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라고 부를 가능성이 크단다. 한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아마도 종북과 같은 딱지가 붙을 것이다. 그렇게라도 자신을 지키고 싶은 것이다. 자기를 기만해서라도.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도 그것을 설명한다. 긴장이나 불안 상태로서 경험하는 심리적 모순을 가리키는 ‘인지 해리’를 통해서다.

“인지 해리를 줄이려는 욕구는 우리가 새 정보에 반응하는 양상에도 강하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자신의 편향을 확인받고 싶어 하며, 행복한 상태에 이르기 위해 들어오는 정보를 기꺼이 조작하고 무시한다. 이런 일이 너무나 일상적이고 강하게 일어나기에 이름까지 붙여졌다. 바로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라는 것이다.… 합리화하는 성향이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증거는 종종 즉각 비판, 왜곡, 배제와 맞닥뜨리고는 한다. 더 많은 해리를 겪을 필요가 없도록 하거나 견해를 바꿀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p.246) 

 

이 책은 흥미로운 주제를 다룬다. 인간뿐 아니라 생명이 기만과 자기기만을 통해 진화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왜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것이 나쁜 것임을 알면서도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지를 로버트 트리버스 저자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도 들먹이면서 언급한다. 거칠게 말해서 인간은 속여야만 산다. 불편부당하고 이해하기 어렵고, 힘든 것을 피하려는 노력이 다양한 기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이해하기 힘드니까, 종북이라고 레떼르만 붙이면 되는 것이다. 그게 인간이고, 생명일지도 모른다. 

 

로버트는 부모-자식 갈등 문제를 연구할 때 자기기만의 단초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 책에도 그것을 일부 언급했는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혼내거나 매를 들면서, 혹은 사교육 등으로 내몰면서 부모들은 하나같이 외친다. “이게 다 네가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내가 잘 되려고 이러는 거니? 다 널 사랑하니까 이런 거야.” 

 

진심 묻고 싶다. 정말로? 부모도 알 것이다. 깊은 자신의 내면에선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진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용기나 준비가 안 돼 있을 뿐.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을 위해 기만과 자기기만을 이용해 아이의 정체성을 형성하려는 권력을 쥔 자의 횡포다. 그러니 권력은 자기기만의 중요한 지점이 된다. 권력은 자연 사람을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사람이 달라졌다느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느니,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이 아니다. 권력은 ‘타인’에 대한 감수성을 약화시킨다. 로버트는 권력이 자기기만에 작동하는 메커니즘도 언급했다.

 

“사람들에게 권력을 쥐었다는 느낌을 갖게 하면, 그들은 남의 관점을 취할 가능성이 줄어들고 자신의 생각을 중심에 놓을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그 결과 남들이 어떻게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이해할 능력이 줄어든다. 무엇보다도 권력은 남에게 무신경하게 만든다.”(p.47)

 

권력을 쥐기 전까지는 그렇지 않던 사람이 남의 관점이나 감정을 헤아리려는 노력이 줄어드는 경우를 우리는 수도 없이 목격하고 있다. 선거 전후의 정치인이 달라지는 모습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이 없을 때래야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공정성 원리를 고수하고, 남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더 쉽다는 사실은 참 아픈 현실이기도 하다. 

 

기만과 자기기만이 스스로를 기분을 좋게 만들기 위한 행위라는 것은 그만큼 인간에게 요구되는 성찰의 지점이 있음을 방증한다. 성찰하거나 자기기만을 제어하지 못할 때, 자기기만이 야기하는 엄청난 파급에 대해서도 책은 언급한다. 전쟁이나 학살 등이 그것이다. 개인 생활에서야 경우에 따라 귀여운 행위가 될 수도 있겠지만, 집단이나 조직, 국가적인 자기기만이 이뤄지면 인류 전체에 큰 위협이 되는 사건이 된다. 인류 문명의 발생 이후 벌어진 모든 전쟁이나 학살이 그러했고, 최근 우리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전쟁이 아니다!)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등 인류의 대비극은 집단적인 자기기만을 토대로 한다.

 

“9/11 사건이라는 가짜 구실을 내세운 그 전쟁은 석유 및 관련된 경제적 자산의 통제권을 확보하는 동시에 주둔 기지를 건설하고 맹방인 이스라엘을 지원하기 위해 고안된, 의도적인 선택에 따른 전쟁이자 공격전이었다. 물론 뻔한 거짓 핑계를 내세웠다. 훗날 이 전쟁은 기만과 자기기만을 수반한 어마어마한 군사적 실책의 교과서적인 사례라고 학교에서 가르치게 될 것이 확실하다.”(p.406) 

 

저자는 특히 ‘종교’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자기기만의 위험성을 경고했다.(“많은 종교가 지난 한 가지 결정적인 능력이 있다, 바로 독선이다.”(p.470)) 이것은 현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을뿐더러, 종교나 신의 이름으로 포장된 자기기만이 우리를 점점 옥죄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불러온다. ‘예수천국, 불신지옥’과 같은 기만의 언어가 예수의 가르침을 전파하지 않는다. 되레 실제 가르침을 소홀하게 만든다. 신성에 대한 믿음 여부가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로버트는 기만이 불러올 부정적인 영향이나 파국을 염려한다. 그러면서 자기기만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또한 개인적이다.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란다. 기만이 늘어나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란다. 그는 자기기만으로 일련의 작은 편익들을 맛보다가 큰 코를 다친 경험을 종종 했다고 토로한다. 착각을 즐기다가 급격한 반전에 이른 경험들이다. 자기 과신에 취해 눈이 멀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크게 대가를 치르기 전에 되돌아보고 성찰할 것. 명상, 기도, 친구와 상담자 등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무리 자기기만을 통해 진화해왔다곤 하나 우리는 그것을 제어할 수 있다고 로버트는 믿는 것 같다. 그 믿음 또한 자기기만이 아니길 나도 바란다.  

 

“자기기만은 쓰라린 결말로 이어질 때가 종종 있다. 이것은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만이 아니라 잘못 판단한 전쟁과 경제 정책 같은 거대 사건들에도 들어맞는다. 우리는 남과 자신을 기만함으로써 일시적인 혜택을 누릴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대가를 치른다. 나는 이것, 즉 무지의 비용은 나중에 치르는 반면, 자기기만의 혜택은 즉시 볼 수 있다는 것이 삶의 일반 법칙이라고 믿는다.”(p.506)

 

다만, 이 책을 누구에게나 쉬이 권하지는 못하겠다. 띄엄띄엄 관심사에 따라 챕터별로 읽는 것은 나쁘지 않겠으나 가독성이 좋은 편은 아니다. 번역이 마냥 매끄러운 느낌도 아니다. 내가 지닌 과학적 상식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겠으나, 중간중간 턱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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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 2014-03-01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파를 친일과 부유층 프레임에 가둬 깍아내리는 좌파도 다를꺼 없지요
 
[폭력의 자유]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폭력의 자유 -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
김종철 지음 / 시사IN북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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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 제목부터 명확하게 의도를 밝힌다. 그렇다. 언론을 다뤘지만, ‘언론의 자유가 아니다. 폭력의 자유다! 언론이 아닌 왜 폭력으로 제목을 잡았는지, 잡았어야 했는지, 책은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것, 한편으로 오욕이다. 명예를 더럽히고 욕되게 함. 근대화를 자주적으로 이끌지 못한, 일제강점기가 36년이나 지속된 것에는 언론도 한몫했다. 아니, 언론의 역할이 아주 컸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우리의 발목을 잡는 한 요소인지도 모르겠다. 민주주의가 망가지고, 양극화사회 혹은 격차사회로 진행된 것에 언론은 지대한 역할을 했다.

 

언론이 사회의 공기라거나 목탁이라는 말, 당연해야 할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을 보자니, 언론은 사회의 폭력이다. 권력(지배세력)에 빌붙어 주구 노릇을 하는데, 이게 전형적인 용역깡패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용역깡패 짓거리를 하면서 욕심이 생긴 거다. 명령 받아 움직이는 것도 신물이 난 것일까. 권력을 조정하는 권력 그 자체가 됐다. 정치권력의 비위를 맞추거나 주구로 존재하면서 특혜를 누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 권력이 된 경우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언론 아닌 찌라시 깡패들이 그것을 대변한다.

 

세상은 본디 폭력과 이권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내게, 하긴 언론이라고 다를까마는 문제는 그들이 반성도 성찰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론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언론이 맞는가. 좋은 언론이란 무엇일까. 그들은 질문하지 않는다. 매일 바삐 기사를 쓴다는 명목으로 정당화할 뿐. 스스로에 대한 감시나 성찰은 없다. 그렇다고 그들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주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권력으로 육화한 언론은 무소불위의 존재가 됐다. 독자들이 감시하고 견제하지 않느냐고? 에이, 농담하지 말자. 독자의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독자의 신뢰를 잃으면 끝이라고 말하지만, 입 발린 소리요, 아주 늦게나 씨가 먹힐 소리다. 진짜 그렇다면 조중동은 이미 망하고도 남을 역사 속에서만 존재하는 신문이었어야지.

 

책에 의하면, 권력과 언론, 불가근불가원이었어야 할 존재들이 밀착했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 직전 생겨났던 언론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언론의 길을 확립하기 전에 권력에 굴종하는 법부터 배웠다. 동아일보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역사가 있다. 일장기 말소 사진.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했을 때, 그의 옷에 걸린 일장기를 지운 사건인데, 김종철 저자는 이것의 속살을 알려준다. 이것은 동아일보가 의도한 것도 아니요, 처음 했던 것도 아니었다. 한 편집기자의 의해 돌발적으로 발생한 것이었는데, 동아일보는 이 기자를 파면했고, 당국에 백배사죄했다. 비굴했던 오욕의 역사인데도, 동아일보는 그것을 지운 채 현상만 놓고 자가발전하고 있다. 쪽 팔리지도 않은가?

 

동아일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 신문이 일제강점기에 식민지배자들에게 강력히 저항한 대표적 사건으로 일장기 말소를 내세웠다. 조선중앙일보가 훨씬 먼저 거사를 실행에 옮겼다는 사실은 물론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사주 김성수와 사장 송진우가 총독부의 압력에 굴복해서, ‘일장기 말소를 주동한 젊은 언론인들을 강제 해직한 것은 덮어둔 채 동아일보사가 주도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자랑했다.”(p.34)

 

문제는 뻔뻔함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의 독재정권들에 이르러 권력 지향적 야합을 일삼던 언론의 DNA에는 분명 뻔뻔함이 자리 잡고 있음이 분명하다. 현장성 넘치는 저자의 이야기에선 그것이 잘 드러난다. 그래서 아프다. 권력에 대한 부역을 일삼은 언론인에 대한 청산을 제대로 못한 역사 때문이다. 반민특위의 해체는 이 사회 전체를 지금에까지 왜곡에 이르게 한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일 텐데, 언론계라고 다르지 않다. 저자도 그 지점을 아쉽게 토로한다. 혹은 비통하게.

 

반민특위의 강제 해체는 결국 부일 혹은 친일 세력의 영속적인 세습을 불러왔다. 조중동 같은 족벌언론에서는 지금도 친일파의 후손들이 경영권과 인사권을 장악한 채 입맛에 맞는 정권과 결탁해서 온갖 특혜를 누리고,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저자는 다른 책을 인용해 프랑스의 경우를 드는데, 우리의 역사가 왜 여전히 왜곡을 일삼고 권력의 입맛에 맞춰 흔들리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성찰과 반성을 못하는 사람, 조직에겐 청산이라도 필요했던 것인데, 우리의 역사는 그것조차 하지 못했다.

 

드골의 나치 협력자 대숙청은 단순히 민족정기를 바로 세운다는 도덕적 차원의 해석보다는 반역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후세에 중대한 교훈을 남겨준 사실에서도 큰 의미를 찾는다. “과거를 망각하는 민족은 자유를 향유할 자격이 없다는 역사의 교훈을 드골의 나치 협력자 숙청은 잘 반영하고 있다.”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주섭일, 사회와연대)


물론, 일부 언론인들의 바람직하고 당연한 저항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언론자유수호를 위한 결의문을 발표하거나, ‘언론의 정도를 지키지 못한 것’을 반성하는 뜻으로 사표를 냈으며, 제작에 불참했다. 정보기관에 연행돼 모진 고문을 당할 것이 뻔한 데도 자유언론실천의 깃발을 들고 ‘기관원’의 언론사 출입을 정면으로 거부하기도 했다. 결기가 있었고, 정신이 있었으며, 실천할 줄 아는 행동력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 때도,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도 언론에는 그런 낭만이 있었다. 패할 것을 알면서도, 산산이 부서질 것을 알면서도 그래야만 했던 비장미 섞인 낭만.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변곡점은 IMF 직후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판단해보는데, 이제 기자는 기자가 아니다. 그냥 회사의 직원이자, 더 심하게 말하면 노예다. 세상에 대한 단독자였던 기자는 이제 한갓 회사 입장을 대변하는 타이피스트로 전락했다. 한 기자 친구가 내게 토로했었던 말이 생생하다. “말만 기자지, 왜 이렇게 비루한 걸까.” 비루한 기자. 이 어울리지 않는, 형용 모순이 지금의 기자를 대변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1970년대 겪은 바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근무환경일지도 모르겠는데, 그래도 그때는 기자들에게 단독자 정신, 기자 정신이 살아있었지만, 지금 대부분 기자들, 모르긴 몰라도 먹고사니즘의 노예다.

 

근무조건이 제일 낫다는 동아일보사 기자들이 가장 불만을 품고 있던 것은 사주와 경영진이 사원들을 마름이나 가속(家屬)처럼 다룬다는 사실이었다.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사용자와 노동자가 아니라 봉건적인 상하관계가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pp.190~191)

 

이제 언론은 정치권력보다 자본의 노예다. 독립 언론을 선언한 몇몇 언론은 늘 자금압박에 시달린다. 독자들의 호응도 예전 같지 않다. 언론 전체의 신뢰가 떨어진 까닭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것이 있다면, 저자의 말마따나 자유롭고 독립된 언론의 길을 가는 사람에겐 박해와 탄압이 가해진다는 것. 참으로 슬픈 일이다. 비통한 일이다.

 


폭력의 자유는 현대 언론의 역사와 권력의 역사를 일제강점기부터 이명박 정권까지 짚어보는 여정이다. 한때 언론인이었으나 재능과 능력도 딸리는데다, 자본과 권력에 예속돼 움직여야 하는 현실에 더 이상 자신을 끼워 맞추기 싫었던 나는 새삼 이 책을 읽고서 저자의 말에 절실하게 공감했다. “언론은 권력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며, 언론 자체가 권력이 되어서도 안 된다.”(p.595)

 

 

며칠 전 책을 덮은 뒤, 정독도서관에 갈 일이 있었는데, ‘동아일보 창간사옥 터라는 표지가 있었다. 정독도서관 앞이 동아일보 창간사옥 터라는 것을 처음 알았는데, 그만 침을 뱉었다. 누군들 이 책을 읽고 그러지 않을까. 그럼 어떻게 그들로 하여금 제대로 언론의 길을 걷게 만들 수 있을까. 동아일보가 부당한 광고탄압을 받던 시절, 저자가 겪은 한 에피소드가 그것의 한 가지 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격려 광고를 내려는 시민들의 소리를 기사화하기 위해 일요일에 회사에 나간 저자. 어느 날 저녁, 허름한 차림의 중년 남자가 머뭇거리며 사무실을 찾아왔다. 천 원짜리 두 장을 꺼내며 독재정권과 싸우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무작정 서울에 상경해 하루 종일 시내를 걸어 다니며 행상을 하는 사람이었다. 저자는 가슴이 막혀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을 떨어뜨리며 생각했다고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렇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은 언제 올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단언컨대, 그것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언론은 그것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 그리고 질문하고 문제제기 해야 한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저렇게 죽음의 길로 내모는 나라와 권력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런 이웃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언론은 또 무엇인가? 돌아보고 성찰하며 되짚어 봐야 한다.

 

1967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저자의 삶을 바꾼 것은 한 권의 책이라고 했다. 친일문학론(임종국, 평화출판사, 1966). 그에게 가장 큰 충격은 동아일보 사주이자 민족운동 지도자로 알고 있던 인촌 김성수의 적극적인 친일행각이었다. 위인으로만 알고 있던 자신의 직장 사주가 친일을 넘어 부일을 했다는 사실이 그를 황망하게 만들었고, 그는 진짜 언론인을 고민하며 이후 자신의 삶을 거기에 맞춰 살아온 것 같다. 이 책도 어느 누군가의 삶을 바꿀지도 모르겠다. 진짜 언론인을 고민하는 사람이나, 고민하지 않았으나 고민하게 된 사람이나.

 

언론의 악행의 평전과도 같은 이 책을 보면서, 지금 찌라시 깡패들의 소멸을 생각해 봤다. 이들이 없어지면 시민들이 좋아할까? 어쩌면! 그때 그 시절처럼 말이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1940812일부터 1945815일까지 민족지가 없는 언론의 암흑시대가 계속되었지만, 두 신문이 부르짖던 언론 보국천황 폐하 만세를 더 이상 듣지 않게 된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긴 조선인들이 많았을 것이다.”(p.40)

 

아, 조중동이 문을 닫아도 분명히 새로운 포스트 조중동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 나도 안다. 그땐 그때 가서 또 생각해 보자. 폭력(과 이권)은 세상을 움직이는 근간이니까. 새로운 폭력은 당연히 나온다. 독재정권(전두환)에 부역했었던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지닌 김훈의 말이 맞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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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기다리고 있다.
계절의 흔들림에 종지부를 찍고 짧게나마 정착하게 해 줄,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 호우시절. 그 비가 오신단다. 

비를 기다리던 소년과 여인의 마음이 스크린을 뚫고 고스란히 전달됐던,
올해 가장 감성 돋게 만든 어느 여름날의 감성우화, <언어의 정원>. 

구두를 만드는 소년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미각 장애로 맥주와 초콜릿 맛만 느끼던 여인의 감각을 깨워주던, 레인.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 호우시절. 그리고 가을이 오면.
당신도 꼭 인사를 해 줘. 안녕, 나의 가을~  
이 비가 가을을 호출하면 널 만나러 갈게. 비처럼 가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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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협동조합토크콘서트는 시청이 아닌 불광역에 위치한 사회적경제지원센터에서 진행됩니다.

 

 

[협동조합콘서트]9회 우리는 협동을 먹고 자란다! : 먹을거리 협동조합(9/26)

(참가신청 : 위즈돔 http://www.wisdo.me/3158)

 

인류는 오래전부터 함께 먹는 문화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이른바 ‘커뮤니티’를 이뤄 밥을 함께 먹었습니다. “밥 한 끼 같이 하자”는 말만큼 사람살이에 흔한 말이 있을까요. 요즘 흔히 말하는 ‘소셜다이닝’은 고대 그리스의 ‘심포지온(Symposion, 향연)’을 어원으로 합니다. 오늘날, 강연회로 여겨지는 심포지엄(심포지온)은 원래 함께 식사와 술을 나누며 이야기하는 문화를 지칭한 거죠.

 

그러나 산업화 시대와 20세기를 통과하며 생활 형태에 큰 변화가 생기면서 우리는 먹을거리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생산과 유통, 소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에서 변화를 겪었고, 먹을거리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를 상실했습니다. 함께 가꾸고 생산하는 재미, 함께 밥을 먹는 재미 등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하는 재미를 알고 있습니다. 먹을거리를 기반으로 두고 사회적 관계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협동조합들도 꾸려지고 있습니다. 먹을거리의 맛뿐만 아니라 삶의 맛까지 생각하는 이들을 통해 느낌의 협동체를 만나보는 건 어떠세요?

 

- 카페오공 (협동조합형 카페)
- 씨앗들협동조합 (도시농업)
- 삶과먹을거리 협동조합 끼니 (먹을거리 의제)

 

 

조정훈 카페오공 대표

카페오공은 42명의 출자자들로 만든 협동조합 형태 카페입니다. 카페오공의 조합원 조건은 백만원의 출자금과 함께 돌보미 활동이 있습니다.

 

씨앗들협동조합씨앗들협동조합 로고

씨앗들협동조합은 대학교 안 버려진 땅에서 텃밭을 가꾸고자 학생들이 모였습니다.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은 2010년부터 대학텃밭 보급, 레알텃밭학교 개최와 같은 다양한 활동들을 해왔습니다. 3년동안 꾸준히 도시농업을 실천해오던 씨앗들은 이제 협동조합이 되었습니다.

황교익 끼니 이사장

삶과먹을거리협동조합 끼니는 "우리는 지금 제대로 먹고 있으며 먹거리에 대해 잘 알고 있을까"를 묻습니다. 다양한 현장에서 먹거리를 고민한 사람들이 모여 그간 얻은 성과를 공유하고 다듬어 많은 이들과 함께하면서 기존의 한국음식문화에 '균열'을 내려는 이들이 모인 협동조합입니다. 끼니는 그래서 누구나 건강하고 맛있는 먹거리를 먹을 권리가 있으며, 이를 정의롭게 먹기를 희망합니다. 

 

 

9월 26일(목), 협동을 먹고 자라는 먹을거리를 다루는 협동조합들이 가을의 풍성함을 예고합니다. ‘협동조합콘서트 : 협동조합 도시 서울을 그리다’의 아홉 번째 시간. 협동조합 간 협동을 꾀하는 기회도 마련할 수 있고요. 이날 저녁, 서울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로 오셔서 먹을거리 협동조합이 조리하는 협동조합콘서트를 만나보세요. 단 한 끼라도 누군가에겐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 될지도 모릅니다.

 

※ 사정상 협동조합 등 일부 변경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참가신청 : 위즈돔 http://www.wisdo.me/3158)  현장 접수도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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