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운 이웃, 함께 사는 마을, 살고 싶은 서울

서울에 '마을'이라는 산들바람이 붑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서울에서 상상하기를 멈췄습니다. 상상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뉴타운'뿐이었죠. '섞여살기'보다 '따로 살기'를 원하는 주택 소비자들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은 공간과 장소를 공유해본 경험을 갖지 못한 채 자랐습니다. 왕따를 양산하고 구별 짓기에 익숙해졌습니다. 왕따로 고통 받고 폭력에 시달리는 지금 우리의 아이들, 공동체가 사라진 도시의 아픔입니다.

전우용 교수는 말했습니다. "연대의식이 사라진 도시는 대립의 현장일 뿐 통합의 공간은 아니다." 서울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서울을 내버려둘 순 없습니다. 서울은 우리 각자의 삶이 뿌리를 내린 공간이잖아요.

서울과 우리의 삶을 일치시키기 위한 움직임이 꿈틀대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의 DNA에서 희석된 '섞여살기'를 바라는 열망이 스멀스멀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 움직임과 열망이 '마을'이라는 산들바람으로 불어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에도 두근거릴 수 있고,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이 특별하게 느껴질 순간을 감식하는 기적. 그것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마을입니다. 곧 없어질지도 모르는 생각과 사소한 일이 갑자기 빛나 보이는 순간, 만나고 싶지 않으세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꽃 피는 봄, 서울에 산들바람이 붑니다. 그 산들바람의 이름은 '마을'입니다. 그 바람, 함께 맞지 않으실래요? 당신의 서울은 안녕하신가요? 서울을 유혹하는 마을만들기, 서유기(서울을 유혹하는 마을만들기)가 1주일에 한 번 당신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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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역보다 미용!

 

이발을 하다가, 헤어디자이너가 모발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다. 나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보니, 우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미용학과 출신인데, 그 정도는 대학에서 다 알려준다면서 싱긋 웃는다.  

 

순간, 부러웠다. 그런 지식은 누군가에 도움이 된다. 

 

아울러 부끄러웠다. 내 전공과 FTA가 자연스레 맞물리면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 나는 무역을 전공했다(고 하나, 그때 수집한 지식은 쓰레기에 가깝다!). FTA 체결의 장본인 무역을 전공한 사람인 것만은 아니나, 내가 무역과에 몸을 담그고 있을 때, 자유무역은 온통 선(善)이요, 미덕이었다. FTA는 자연 (강대국 혹은 선진국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무엇이었다. 쉬파. 그땐 진짜 그런 줄 알았다. 아마 시험에서도 나는 그렇게 주입받은 대로 지껄였을 것이다.

 

무역보다 미용이 낫다고 했다.

무역을 배운 자들은 FTA로 세상을 망가트리지만, 미용을 배운 당신 같은 디자이너는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니까. 누가 더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지 보라고.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디자이너, 무척 고마워한다.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 처음이라면서. 신분에 귀천이 없다고 배웠지만, 자신은 미용이 정말로 좋아서 선택했고, 지금도 하고 있는데, 대개의 사람들 시선은 헤어 디자이너를 천대하거나 우습게 본다면서. 

 

대부분 사람들이 쥐뿔도 몰라서, 그렇다고 해줬다.

FTA로 대다수 사람들을 수렁에 몰아넣는 것보다 자신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이 더 낫다.

무역은 사람을 피폐하고 황폐하게 만드나(돈에 눈 멀고, 돈에 쪼들리고),

미용은 사람을 아름답고 예쁘게 만든다.  

 

그리고 커피 만드는 노동자인 나를 생각했다.

무역을 버렸지만, 나는 타인을 기분좋게 만드는 커피향을 선사하는 사람이 됐다. 다행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무역을 완전히 버리진 않았구나. 공정무역!

 

아, 나는 헤어 디자이너 한 명을 마음으로 울리고야 말았으니, 나쁜 남자로다! 캬캬.  

 

 

2. 장하준

 

장하준 교수(+정승일 교수, 이종태 기자)의 기자간담회(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출간기념)를 정리하다가, 눈이 다시 멈춘 지점. 그는 그날, 젊은이들에게 사과를 했었다. 진심을 담아 미안하다고 했다.

 

현장에서도 그것이 가장 인상 깊었는데, 정리하면서도 그랬다. 

 

그의 주장에 대한 찬반여부를 떠나, 장 교수는 '염치'를 아는 '진짜'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기성세대의 가장 큰 문제는 염치는 없고, 위로랍시고 멘토질만 해댄다는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이, 아직 니 시계는 아침 7시 몇 분에 불과하니까, 휘휘 에둘러 죽도록 노력하라는 멘토질 같은 것.

 

공허하다.

멘토질보다 더 앞서 필요한 것은 다음 세대를 향한 사과여야 한다. 

이따구 세상을 만든 세대로서 이런 세상에서 악전고투하도록 헛발질을 해서 미안하다고 진정한 사과가 우선이어야 했다.  

 

장하준 교수는 미안함 때문에라도 복지국가를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짜 어른은 저런 염치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구나.

 

그런데, 나는 네 가지 없는 놈이니까, 어른이 되긴 글렀다. 허허. (나는 사과 안 해!ㅎㅎ)

주야장천, 염치 모르는 꼰대들을 향해 비수나 휘휘 날려야겠다. 

이런 허~접 같은 것들.(역시 김꽃두레 톤으로~)   

 

문제는 사과야, 이 바보야!

 

참고로,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장 교수의 답변은 이런 것이었다.

"미안하지. 40~50대의 많은 사람들은 잘한 것도 없는데, 좋은 시절에 태어나 적당히 공부하고 직장 얻어서 잘 사는데, 지금은 온갖 것을 다해도 취직이 어렵다. 어른들은 꿈이 없어서라고, 노력을 안 한다고 타박만 하고. 젊은 세대에게 참으로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온갖 노력을 해도 보상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우리 세대는 노력하면 100%는 아니지만 많은 보상을 받았다. 그래서 그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복지 이야기도 하는 거다. 그 문제에 대해선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 문제는 청년당은 계속 당원들이 탈당을 해야 하는데, 그런 당이 가능할까.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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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니쉬 아파트먼트 - 할인행사
세드릭 클라피쉬 감독, 로맹 뒤리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맞이했던 설날, 생각해보자. (싫다고? 동의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 ‘명절’을 명분삼아 ‘고향’ 가는 길. 찾아갈 고향이 있건, 그렇지 않건 온 나라가 들썩들썩. 솔직히 고향 가는 길이 때론 ‘고역’이라는 사실, 가본 사람은 안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럼에도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잠시 떠나 ‘고향’을 갈구한다. 어떤 ‘이끌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의무감’이 아닐까도 생각한다. 안식처보다 전쟁터가 되는 고향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 고향, 지긋지긋하다. 가느니 안 가느니만 못하다. 고향이 때론 지옥이 되는 풍경. 안식처 아닌 전쟁터가 되는 풍경. 뭐, 누군가에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얘기다.

  

“일년에 두 번 있는 민족대이동으로 사람들은 삶의 에너지를 얻는다”는 TV뉴스 앵커의 멘트,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 그냥 듣기 좋으라는 덕담이다. 물론, 내가 ‘시티 키드’로 살아와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에이, 솔직하게 말하자. 설날은 내게 그냥 ‘긴 휴일’일 뿐이다. 그것이 다다. 다른 건 없다. 물론 ‘고향을 다녀왔기 때문’에 ‘에너지’를 충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나와 달라서 그렇지, 인정한다. 


좀 더 외연을 넓혀보자. 고향에서 조국으로. “대~한민국”. 익숙하고 입이 기억하는 외침. 그건 일종의 이벤트다. 조국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나 애국심의 발로? 천만에. 그건 그저 (응원)구호다. 굳이 그 안에서 조국을 찾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란 말이 아직 유효하다지만(나는 아니라서 뭐!), 요즘은 “이민가고 싶다”는 쪽이 대세가 아닌가 싶다.((박)그네가 이리저리 설치는 것 보면 짱나는 사람 참 많더라.)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국적이기에 안고 살아갈 뿐, 전통적 의미의 ‘국가’(nation)는 구닥다리다.

 

 

 

<스페니쉬 아파트먼트>는, ‘국가’라는 개념이 새로운 시험대에 들어선 유럽의 풍경을 다룬다. ‘어느 나라의 나’보다 ‘개인으로서의 나’에 비중을 두는 시대. 유럽은 또 하나의 시대적 징후를 온 몸으로 표현하는 화두다. 과연 유럽인들에게 국적은 무엇이며 ‘유럽’이라는 한 몸뚱이는 개인의 삶과 어떻게 조화될 것인가.  


멀리서 바라본 유럽은 ‘국적’이라는 개념을 다시 정립했다. 물론 아직도 과거의 국적 개념도 살아 있다. 1953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의 6개 나라에서 시작된 유럽통합체의 시발은 1999년 유로화라는 통화통합을 거쳐 2004년 5월 1일, 25개국 4억5000만명의 ‘한’ 유럽으로 확대됐다. 유럽연합, EU의 탄생. 철강과 석탄 시장의 통합을 근간으로 한 경제통합체는 어느덧 국경을 없애고 사회와 문화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물론 문제, 많다. 통화만 통합하고 국경 개념만 희석시켜서! 유럽의 재정위기가 이를 방증한다.) 


어쨌든, <스페니쉬 아파트먼트>는 이런 시대를 포착한다. 제목은 프랑스 속어다. 여러 문화가 섞인 채 모든 법은 무시되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장소. 그 뜻에 맞춰 한 공간에 동거하는 이들의 국적, 하나같이 다르다. 각 나라의 스테레오 타입이 그대로 드러난 등장인물은 국제 정세의 메타포 역할을 하기도 한다.


프랑스인 자비에가 유럽대학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실행되는 ‘에라스무스’를 통해 스페인에서 6명의 (다른 국적의) 학생들과 ‘동거’하는 것, 유럽의 현 상황과 다르지 않다. 키 높이가 다른 여러 사람들이 한 우산에 들어간 모습이라고 할까. 그 모습, 생각해봐라. 좀 우습지 않나? 냉장고에 각자의 구획을 나누고, 전화기 앞에는 각국의 언어로 “지금 학교 가고 없다”는 말이 붙어있다. 각자의 방도 마찬가지다. 스테레오 타입화된 형태의 정리정돈과 방식이 좁은 숙소에 함께 둥지를 틀고 있다.

 

 

 

자비에는 이런 동거 숙소를 ‘문화의 용광로’라 부르지만 실상 ‘샐러드’에 가깝다. 녹아서 하나로 융합되는 용광로보다 각자의 모습대로 뒤섞이면서 맛을 내는 샐러드가 더 어울린다는 말이다. 그들은 억지로 ‘하나’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때론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지만 샐러드 맛이 변질되도록 수수방관하지 않는다.

 

그건 일종의 ‘지혜’다. 그곳이 공동체 공간임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단결보다는 느슨한 연대를 택하는 이들의 행동양식이다. 그들에게는 ‘단일민족’이라는 허황된 구호가 없다. 그들의 공간이나 구성원이 위험에 처할 찰나, 머리를 짜내고 함께 움직인다. 집 주인이 월세를 올리자 그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방이 없음에도 룸메이트를 뽑는다. 그리고 방이 아닌 침대를 나눠 쓰는 놀라운(!) 생활력을 발휘한다.

 

또 이런 예도 있다. 영국인 깍쟁이 웬디가 미국인 악사와 사랑을 나누고 있을 때 웬디의 남자 친구가 예고 없이 찾아온다. 파국을 막기 위해 똘똘 뭉치는 나머지 하우스 메이트들. 예기치 못한 해결책은 폭소를 유발하는 한편 빗나간 엇박자들도 앙상블을 이룬다. 흥미롭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하우스 메이트, 국적은 달라도 마음은 통한다.  


자신의 경험과 여동생의 유학생활을 잠시 엿본 기억을 버무려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세드릭 클라피쉬 감독, 유럽의 정체성을 굳이 한마디로 정의하려 하지 않는다. ‘유럽화’라는 이름으로 어느 하나의 방식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모든 혼란을 방치한 채 그들이 자연스럽게 조화되는 모습을 솎아낸다. (물론, 지금의 유럽은 경제 위기 앞에 조화를 이루지 않고, 형제국의 위기를 나 몰라라, 외면한다!)


감독은 은근히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를 비꼰다.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하나의 규범을 강조한 미국의 세계화는 곳곳에서 파국을 불러왔다. 주주 자본주의와 금융 자본주의로 전세계적인 금융위기를 불렀다. 자본주의의 위기. 결과는? 반세계화의 움직임! 극중, 카탈루냐어로 수업하는 교수에게 불평하는 동료에게 한 학생, 이렇게 말한다. “세계화는 공동의 정체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정체성이 공존하는 거야.” 이것은 감독이 말하고 싶은, 유럽이 지향하는 한 우산 속의 공동체를 묘사하는 것이리라.

 

글로벌 스탠더드를 지극 정성으로 조잘거린 한국 사회, 반성해야 한다. 세계화랍시고 뭘 했나 봐라. 고작 영어 잘 하는 것이 세계화? 미국식 아니 월 스트리트의 표준을 전세계의 표준인양 강조하는 사대주의!

  

 

2명 이상의 조직(혹은 사회), 아니 한 개인 안에서도 혼란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1년 동안의 ‘에라스무스’ 프로그램과 동거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자비에, 파리의 거리를 거닐며 자신을 성찰한다. “내 모습은 어디에도 없고, 모든 것을 합한 것이 바로 나이다. 나는 혼란에 빠진 유럽인일 뿐이다.” 그는 한 뼘 성장했다. (물론 자비에가 은행을 그만두고 소설을 쓰는 모습은 작위적이고 끼워 맞춘 혐의가 짙다! 그 정도는 충분히 눈감아 줄 수 있지만.)


나는 혼란이라는 단어를 억지춘향식으로 갖다붙여 대동단결을 외치는 일련의 구호를 이해할 수 없다. 때론 역겹다. 토할 것 같다. ‘국가’의 이름으로 ‘개인’을 짓누르거나 통합하려는 의도에도 동의할 수 없다. ‘국론 분열’이니 ‘국민 혼란’이니 하는 레토릭으로 하나의 노선만이 살 길 인양 호도하는 세력들, 에라이 침도 뱉아주마. 퉷. 개인의 지향성이나 신념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내 나라 맞아?


국적에서 좀 더 거리를 둘 수 있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각자의 정체성을 간직하면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새로운 통합 혹은 연대를 경험할 수 있는 그런 날. ‘한국인’보다 ‘세계인’이라는 단어가 더욱 자연스러운 그런 날. 국적을 묻는 질문에 세계 시민이라고 말해도 어색하지 않은 그런 날. 스페니쉬 아파트먼트에 묵고 싶은 그런 날. 여러 문화가 섞인 채 모든 법은 무시되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장소에서 사는 그런 날. 나는 그런 날들의 세계에 사는 자취생. 

 

나는 다른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 

아니. 나는 대한민국민 아닌 세계시민으로 살고 싶다!

내가 공정무역 커피를 다루는 것은 그런 세계시민으로서의 활동의 일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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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우리의 첫사랑임을 알아채지 못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어야 한다.

 

잘 있나요? 내 첫사랑들.

 

                                봄밤을 함께 맞이했던 내 첫사랑들.

                                그리고 봄밤이 봄꿈이 되고 말았던 내 첫사랑들.

 

               우리 모두는 그렇게,

               누군가의 첫사랑 덕분에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닥치고 사랑.

얼렁뚱땅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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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의 세계사 - 수렵채집부터 GMO까지, 문명을 읽는 새로운 코드
톰 스탠디지 지음, 박중서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나는 공정무역 커피하우스를 운영한다. 하고 많은 커피 가운데, 나는 공정무역 (유기농 혹은 자연산)커피를 택했다. 동티모르 사메 사람들(과 자연)이 만든 커피, 멕시코 치아파스 사람들(과 자연)이 만든 커피, 에티오피아 시다모 사람들(과 자연)이 만든 커피가 그것이다. 설탕(시럽) 또한 파라과이의 공정무역 유기농 비정제 설탕을 쓴다.


우리는 그렇게 가능하면 공정무역과 유기농을 쓰고자 노력한다. 이리 한다고, 나를 윤리적 인간이나 착한 사람으로 오해하지는 말라. (나는 공정무역 제품 소비를 ‘착한 소비’라고 일컫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나는 그저, 정치적 선택을 한 것이다. 공정무역 제품을 택했다는 것. 유기농 재료를 사용한다는 것. 또한 그것들을 소비자들에게 연결시켜준다는 것. 왜 정치적 선택일까?


공정무역은 기존 자유무역 체계가 지닌 극심한 불평등과 불공정, 거대 자본의 횡포에 소극적이나마 저항한다. 즉, 나는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주(자본)와 거대 커피회사(와 유통업체)의 뱃대지를 불리는 일에 더 이상 동참하기 싫다. 그런 의미도 품고 있다. 저임금 (커피)노동자와 그 가족의 지속가능한 삶과 우리가 하나의 연결된 세계임을 인식하는 것 또한 내가 공정무역 커피를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멕시코 치아파스 커피는 특히 멕시코 혁명군 사파티스타에 대한 지지를 표현한 것이다.  


유기농도 그렇다. 그것은 환경에 대한 우려이자 무차별적 생산을 위한 땅과 식물에 대한 자본의 학대에 반대하는 의미다. 유기농이 몸에 좋다고 선택했다기보다는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것도 생각해보자. 대형 마트의 확장이나 이용을 보이콧하는 행위. 거대 커피체인을 이용하지 않는 행위. 이는 거대 식품복합체 중심의 시스템에 반대 혹은 저항하는 ‘정치적’ 행위다. 나는 이들의 확장이 인간과 사회를 획일화 시킨다고 본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을 앗는다. 그들은 싸고 질 좋은 상품을 제공한다는 명분을 내걸지만 새빨간 거짓말이다. 소비자들의 선택과 사유를 앗아가는 교묘한 정치적 행위다.   


식량 선택의 정치학이다. 《한국음식문화박물지》의 황교익 선생은 “정치는 먹는 것을 나누는 행위”라고 했다. 나는 완전 동의한다. 왜? 어렵지 않다. 누가 더 먹고 누가 덜 먹을 것인지, 누가 좋은 것을 먹고 누가 나쁜 것을 먹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정치다. 그것이 무엇이든 먹는 것을 놓고 핑퐁하는 것이 또한 정치다. 그러나 한국인, 오랫동안 속았고 여전히 속고 있다. 먹는 것이 정치와 상관없다는 세뇌(!) 때문이다.


그런 족속들이 있다. 먹을거리 선택이 비정치나 탈정치로 여겨지길 바라는 족속들. 지금의 먹을거리 유통과 판매를 통해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정치적으로 비춰지길 바라지 않는다. 왜 먹는 것 갖고 그러냐고 되레 반격한다. 식량의 정치학에 우리가 제대로 눈을 떠야 할 이유가 그것에 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먹는 것이니까!


《식량의 세계사》는 식량이, 먹는다는 것이 왜 정치적인지 오랜 역사를 통해 증명한다. 식량이라는 창을 통해 역사를 바라보고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이 책이 지닌 미덕이다. 책에 의하면, 식량은 사회 변모, 사회적 조직, 지정학적 경쟁, 산업 발전, 군사적 충돌, 경제적 팽창 등에 촉매 작용을 했다. 즉, 문명의 기반이자 권력의 시초였다. 이 말을 보자.

 

“화폐가 발명되기 오래전에 고대사회 전체를 통틀어 식량은 곧 부였고, 식량의 지배는 곧 권력이었다.”(p.5)

 

먹는 것 갖고 장난치는 법, 아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였었다. 먹을 것을 지배하는 자가 곧 권력인 것은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다. 지난해 아랍권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혁명.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으로 곧잘 표현됐지만, 그 궁극은 먹을 것을 달라는 요구였다. 민주주의는 곧 먹을 것과 통한다. 우리의 1980년대도 그랬다. 1998년 노벨 경제학상을 탄 인도의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의 말도 그것을 표현한다. “비교적 언론 자유가 보장된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국가에서 심각한 기근이 발생한 적은 없었다.” 

 

먹지 못하면 인류는, 아니 어떤 인간도 삶을 유지할 수 없다. 먹는 것 자체에 대한 근심이 비교적 덜 한 지금의 한국, 식량에 대한 논의나 사유가 건강 측면에 치우친 것은 심히 유감스럽다. 식량이 인류의 역사와 문명을 어떤 식으로 바꿨고, 우리 역사에서도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사유가 없으니, 많은 우리는 먹을 것을 너무 우습게 본다.

 

그런 면에서 산업혁명이 증기기관의 발명에만 기댄 것이 아니라, 설탕과 감자가 산업시대의 동력으로 역할을 했다는 이 책의 관점은 신선하고 타당해 뵌다. 즉, 노동자들에게 설탕과 감자라는 저렴한 먹을거리를 제공함으로써 산업혁명은 쭉쭉 뻗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노동자 없이 산업혁명은 완수되지 못했을 것이므로.

 

아울러, 식량 무역 경로가 ‘세계화’의 단초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식량만 바다를 건넌 것이 아니었다. 문화와 종교도 바다를 건넜다. 특히 특히 향신료를 둘러싼 이전투구는 흥미진진하다. 아랍의 향신료 무역 독점을 깨트리려는 유럽의 열망이 신세계의 발견을 가져온 것이다. 이는 곧 유럽-아메리카-아시아를 잇는 해상무역이 이뤄진 한편 식민시대를 열었다.

 

“유럽 국가들이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경쟁하면서 식량은 인류 역사에서 그다음의 거대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영향을 미쳤다.”(p.6)

 

물론 그전에 농사가 있었다. 농사는 결국 땅을 착취하는 일이라는 내 생각에 이 책은 좀 더 깊은 역사를 들려준다. 주2일 노동(?)이면 충분했던 수렵채집민의 생활을 주7일 노동으로 바꾼 것이 농업이었다. 생활방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수렵채집이 다채롭고 여유 있는 삶을 만들었다면 농사는 정착을 빌미로 단조롭고 고된 삶으로 인류를 몰아넣었다. 

 

그렇다. 농사는 자연적인 일이 아니었다. 세계를 변화시켰고, 환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삶의 방식은 또 어떻고. 《식량의 세계사》는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가 먹는 식량에서 자연산은 거의 없다고 단언한다. 대부분 식량은 선택적 품종 개량을 거친 결과물이다. 식물이나 동물 모두 마찬가지다. 당근이 원래 지금의 주황색이 아닌 흰색이나 보라색이었다면, 쉽게 믿어지는가? 옥수수도 자연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란다. 허허. 내가 그리 좋아하는 옥수수가 품종 개량을 한 변태라니, 놀랍다. 참고로 세계 최초의 문명을 부양한 세 가지 식량은 밀, 쌀, 옥수수란다.

 

저자는 이렇게도 단언한다. “만약 농업이 오늘날에 발명된다면, 사람들은 이 새로운 기술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럼에도 농업은 문명의 근거다. 길들여진 식물과 동물이 현대 세계의 기반 자체를 만들었다. 문명적 인식의 기반을 농업에 두는 것이 당연한 이유다.

 

새삼 재밌는 건, 농업이 계층을 분리했다는 주장이다. 농업이 집중화되면서 부자와 빈자, 지배자와 농민으로 나눠졌다. 오늘날 누가 누구보다 재산을 더 많이 가진 것이 일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인류가 존재한 이래 대부분 기간 이런 일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농업의 확산으로 식량으로 부와 권력을 나누는 것은 자연스러워졌다.

 

하긴 음식점을 놓고서도 우리는 이미 계층적 분화의 모습을 본다. 아주 값비싼 음식점과 싸구려 분식점. 식량은 분리하고 구분하는 역할을 오래 전부터 해왔던 것이다. 식량이 곧 부였고, 식량을 지배하는 것이 곧 권력이었으니까.

 

“식량에 대한 지배가 곧 권력이었던 까닭은, 사람과 동물을 먹여 살리는 식량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p.57)

 

헌데, 이 책이 내놓은 역사적 사실 하나는 지금의 풍경과 너무도 다르다. 거물. 이른바 권력층이자 (오피니언) 리더였을 텐데, 당시의 거물은 남보다 더 일찍, 더 늦게까지 열심히 일하고(이건 기본이요), 남에게 부를 나눠줄 때에야 존재감을 빛내고, 반드시 큰 잔치를 베풀고 신용을 쌓아야 했다. 그래야 지도자가 될 수 있었고, 집단을 부양하고 재분배를 통제하는 능력으로 지위를 평가받았다.

 

하다못해 멜라네시아에서는 집단을 부양하지 못하거나 너무 많은 몫을 차지하는 지도자는 쫓겨나거나 피살될 가능성까지 있었단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를 보라. 지도층의 위치에서 부패하고 사적인 부를 뒷주머니에 축적한 이명박(으로 대변되는)을 '거물'로 둔 우리들. 쫓겨나거나 피살될 가능성, 있나?

 

다시 식량 선택의 정치학으로 돌아가서. 왜 식량이 정치인가. 문명의 시작부터 식량의 정치적 위치를 조목조목 알려준 책은 1791년을 일단 주목한다. 식량을 이용해 폭넓은 정치적 쟁점을 드러내는 방법이 본격 등장했기 때문이다. 당시 노예제를 반대한 사람들은 설탕을 보이콧했다.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노예를 부리며 생산된 설탕. 그 설탕을 보이콧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노예무역의 지지자가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한 것은 아니나 노예제를 조장한 데 일조했다는 것에 죄의식을 느끼고 반성의 의미로 행동에 나선 것이다. 설탕 불매!

 

나는 이 정치의 시즌에, 다시 정치를 생각한다. 먹을거리를 재차 생각한다. 아, 역시 식량은 독특한 정치적 위력을 지니고 있구나! 어떤 먹을거리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는, 톰 스탠디지(《식량의 세계사》저자)의 말마따나, 사회적 신호 표시의 유력한 유력한 수단이다.

 

우리는 먹어야 산다. 살기 위해 먹고 먹기 위해 산다. 그러기 위해선 끊임없이 매일 매주 매달 매년 엄청나게 많은 먹을거리 선택의 기로에 선다. 이는 선거보다 훨씬 만흔 저치적 표현의 기회를 가진다는 말과 동의어다.

 

먹을거리를 선택한다는 것. 투표를 대체할 수는 없겠다. 그럼에도 먹을거리 선택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정치적 선택임을 알 때, 우리는 좀 더 좋고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또한 우리가 살고 싶은 세계를 향한 발걸음임을 자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 것이나 먹겠다는 생각, 이제는 버릴 때가 됐다. 개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무턱 대고 거대 자본의 프랜차이즈에 가선 안 되겠다. 무조건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자는 뜻이다.

 

단순해 보이는 식량의 선택이 거대자본이 돌리는 착취구조에 협력하는 것일 수도 있다. 기존 질서에 의해 피 흘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질서에 순응하는 것은, 비록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는 것이라도 작금의 질서와 체제가 행하는 살인에 동참하거나 방조하는 일이다.

 

《식량의 세계사》는 그런 의미에서, 일상의 정치적인 선택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에 담긴 정치적 인문학적 성찰이다.  

       

“식량 선택의 결과와 정치학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나아가 더 넓은 사회적 우려에 대한 피뢰침으로 작동하는 소비재라는 식량의 이례적인 지위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즉, 여러분이 어떤 정치적 견해를 지니고 있건 간에, 그 정치적 견해에 따라 여러분이 꼭 구입하거나 또는 절대 구입하지 않는 종류의 식료품이 있게 마련이다.”(p.272)

 

18세기 프랑스의 미식가,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의 말로 끝맺자.

“국가의 운명은 어떤 식량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는 멘붕(멘탈 붕괴)된 작자들의 미친 짓이고, 해서는 안 될 더러운 작태였다. 그 FTA를 몰아붙인 이들에게 '거물'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줄 순 없다. 그들은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99%의 시민들의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 식량 선택만큼 또 하나 중요한 시즌이 온다.

 

4월11일, 우리가 4년 동안 먹을 식량(?)을 선택하는 날이다. 강정마을과 구럼비 바위도 그렇고, FTA도 그렇고, 보편적 복지도 그렇고. 잘 선택하고 볼 일이다. 단순히 권력의 주체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세상과 시스템을 바꾸는 일이 돼야 한다. 먹을 것 고르듯이!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작성됐다. 그러나 그런 사실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내가 느끼는 바 그대로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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