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이건, 어른이건, 교과서건,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전태일'을 맨처음,

알려줬던 어른, 조영래.

1992년 전태일 열사를 만났고, 인권 변호사 조영래를 처음 만났던 그때.

그러나 조영래 변호사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난 뒤였다. 1990년, 마흔 셋, 세상에 이른 죽음은 없다지만, 조영래 변호사는 이미 떠난 뒤였다.

1990년 12월 12일. 오늘은 22주기. 그러고 보면, 1212는 늘 춥다.

 

그러나 전태일을 낳는 시절은 아직 끝나지 않는구나.

대한문 '함께살자 농성촌'을 철거하겠다는 중구청의 행정집행 예고가 있었던 오늘.

다행히 파국은 면했다. 농성촌 대표단과 중구청이 대화를 갖고, 행정대집행(강제철거)은 취소됐다.

한편으로, 이재영 진보신당 전 정책위의장이 돌아가셨단다.

사실, 잘 모르는 분이지만,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정책통을 맡으시면서 노동 감수성이 짙은 분이셨다는 트친의 전언이 있다. 노동계는 한 분의 정책통을 잃었다. 아쉽고 또 아쉽다.

조영래 변호사 기일과 맞물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늘 지옥임을 실감하게 한다.

< 드라마의 제왕 > 앤서니(김명민)도 또박또박 말하더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가 지옥이야."

더 이상 전태일이 없길 바라는 것은,

완벽한 남자를 기둘리는 여자의 마음과 같지 않을까 하는, 어쩌면 다림질로도 결코 펴지지 않을 절망감.

최근 <남자의 종말>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찌질한 B급 마초로서 쪽팔리고 반성도 되고, MB시대 다시 강화된 '마초주의'를 사회적으로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도 고민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언뜻.

우석훈은 모든 정부 부처에 여성이라는 키워드를 가진 국이나 실을 하나씩 다 만들고, 사회적경제 등 여성성이 강조된 경제 정책부터 여성노동자, 여성 알바, 여성 농민 등 여성에 대한 세밀하면서도 디테일한 접근을 강조하는데. 마을에도 여성을 강조하는데, 여성성이 온누리에 퍼져 있다면 모를까, 마을여성실이라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모르겠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한국 특유의 마초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우선, 나부터. 고민이다.

오늘, 조영래 변호사를 추모한다. 이재영 노동자를 추모한다.

그나저나, 퍼펙트 가이는 없다!ㅋ

완벽한 남자 :
무릎 꿇고 청소하는 것쯤은 개의치 않는다.



완벽한 남자 :
일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중간에 쉬엄쉬엄 노는 짓은 하지 않는다.



완벽한 남자 :
옳지 않은 방향으로 비비지 않는다. 결코.



완벽한 남자 :
마트에 가서 장을 보는 것을 결코 꺼리지 않는다.



완벽한 남자 :
결코 수증기를 다 써버리지 않는다.
즉, 에너지나 열정을 결코 상실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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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완벽한 남자를 기다리는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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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의 발견은

환각의 영역을 확장하고,

희망의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 이시도르 부르돈 -

 

오늘 12월 8일,

우리 커피하우스에 오는 인민에게, 하나 같이 상상해보자고 강권(?)하고 있다. (내일까지 그럴 거다, 뭐. :-)) 커피하우스의 콘셉트는 '이매진(Imagine)'이요. 커피메뉴도 '이매진'이다. 뭐, 어쩔 수가 없다. 시국이 시국이고, 시절이 시절이다. 호우시절 아닌 호설시절? 좋은 눈은 때를 알고 내린다.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눈. 그런 것은 아니고. 호가배(咖啡)시절이다.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커피를 건넨다. 12월 8일의 커피 짓는 내 마음이다.

 

 

이 두 여성은,

종종 우리 커피하우스를 찾는다. 커피 취향은 제각각이다. 신맛만 찾거나 단 것만 마신다. 이들은, 마을 빈 공간을 찾고, 셰어하우스(share house)를 추진하는, 마을을 짓는 건축코디네이터라고나 할까.

 

셰어하우스. 아직 이 단어가 한국에선 낯선데, 실은 그렇지 않다. 지금 우리의 공동주택(아파트)이 좀 웃기는 거다. 집들만 모여 있다. 안에 사는 사람들은 별다른 관계를 맺지 않는다. 이웃, 없다. 그래서, 셰어하우스는 주거에 커뮤니티와 라이프가 결합한 형태다. 이웃이 산다.

 

중요한 것은 공유공간이다.

공동 주방, 공동 식당, 공동 체육실 등 그들은 공간뿐 아니라 삶을 공유한다. 어쨌든 이들, 추진하고 있는 셰어하우스에서 커피 교육을 해달라고 조르고 있다. 커뮤니티 키친에 커피 향이 잘 배이도록 커피 기구 등의 배치도 해 달란다.

 

나는 얼른 셰어하우스나 지으라고 빙그레 웃는다. 실은 나도 기대하고 있다. 금호동의 'Y-House'정도만 돼도 좋겠다. 나는 이 하우스의 평상을 좋아한다. 마을사람들이 쉬고 논다. 이야기도 나눈다. 커피도 마신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간 같다.

 

그녀들, 둘이서 뭔가 쑥덕이더니, 내게 묻는다.

 

"아저씨, 오늘 뭔 날이죠? 왜 오늘 '이매진'이에요?"

 

"노래!"

 

 

"노래?"

 

"아~ 이매진! 존 레논?"

 

"맞아, 맞아, 존 레논이 죽은 게 이즈음인데. 그쵸? 아저씨?"

 

"빙고~! 1980년 오늘, 뉴욕 맨해튼에서 오노 요코가 보는 앞에서 총탄을 맞았었죠. 그리곤 더 이상 노랠 부를 수가 없었어요. 그때가 마흔인데, 거의 내 나이. ㅠㅠ"

 

Imagine there's no Heaven(천국이 없다고 상상해 봐).

It's easy if you try(하려고만 하면 쉬운 일이야).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우리 아래 지옥도 없고 위에는 오직 하늘만 있는)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for today(모든 인민이 오늘을 위해 나누며 사는 모습을 상상해 봐).

 

"아저씨, 오늘 되게 슬픈 소식 있었던 거 알아요? 부산에 어떤 여자가 굶어 죽었는데, 7개월 만에 발견됐대요. ㅠㅠ"

 

"에? 7개월? 주변에 친구도, 이웃도 없었대요?"

 

"3년을 사회적 외톨이로 지냈대요. 지병도 있었고, 히키코모리(외톨이)처럼 지내다가 생활고로 그만..."

 

무연사회, 무관심 사회. 우리도 점점 일본 사회처럼 돼가고 있다. 오늘을 서로 나누며 사는 것에서 멀어졌다. 얼마 전, 경기도 한 창고에서 할아버지와 장애를 가진 손자가 나무에 목을 매고 숨진 기사도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딸이 무직 상태에서 자신과 손자를 돌보느라 너무 고생하고 있는 것을 비관했다고 한다. 우리는 정말 나누며 살 수 있는 이웃이 없는 것일까?

 

 

Imagine there's no countries(나라가 없다고 상상해 봐).

It isn't hard to do(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야).

Nothing to kill or die for And no religion too(누군가를 죽여야 할 일도, 무언가를 위해 죽어야 할 이유도 없으며, 종교도 없는).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사는 모습을 상상해 봐).

 

"얼마 전에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후속편인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을 봤는데, 정말 화나는 거 있죠. 어휴. 이스라엘이 신을 모시는 나라 맞아요? 아저씨, 왜 이스라엘 권력자들은 아무 죄 없는 아이와 민간인을 왜 끊임없이 공격할까요"

 

"휴, 그러게요. 평화. 이스라엘, 참 할 말이 없어요. 신의 이름으로 학살을 정당화하는 그런 태도가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

 

"우리 모두, 나라도 없고, 종교도 없으면... 아저씨, 우린 평화롭겠죠? 정말 그럴 거 같애. 다 나라 걱정하고, 종교 강요하는 거 땜에 전쟁 나고 사람 죽는 거 같애."

 

존 레논과 오노 요코는 1973년 4월 1일 만우절, 유토피아에서 따 온 뉴토피아(Nutopia)를 세웠다. 어디에도 없는 나라. 모든 사람이 싸우지도 않고 아무 근심없이 사는 나라. 이들은 건국선언문에서 이렇게 외친다.

 

"땅도 없고, 국경도 없으며, 여권도 없고, 오로지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뉴토피아에는 우주의 법칙 외에는 아무런 법규도 없다. 뉴토피아 인민은 모든 나라를 대표하는 대사다. 뉴토피아를 안다고 인정하는 인민은 누구나 뉴토피아 시민이 될 수 있다."

 

 

 

물론, 당연히 뉴토피아는 이매진(1971년 발표)을 기반으로 선언한 것이다. 이매진은 두 사람이 만들었다. 존 레논이 작사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노래의 바탕과 가사는 오노의 생각이 밑거름이 됐다. 나라 없는 세상. 나라를 뺏긴 것이 아니라, 아예 어디에도 없는 나라. 존 레논이 40년도 더 된 시절에 했던 상상을, 지금 우리는 왜 하지 못할까? 이유가 뭘까? 나라조차 우리 인민의 것으로 제대로 가져본 적이 없어서?

 

Imagine no possessions(소유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 봐).

I wonder if you can(당신이 그럴 수 있을지 궁금하지만).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욕심을 부릴 일도, 배고플 이유도 없는 한 형제처럼).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모든 인민이 함께 나누며 사는 세상을 상상해 봐).

 

"아저씨, 우리들이 하고 싶은 셰어하우스가 많이 퍼졌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소유가 목적이 아니잖아요. 대신 모두가 사용할 수 있으니까. 존 레논이 말한 것과도 통하지 않아요?"

 

"하하, 그러네요. 그러니까, 나도 껴줘요."

 

"아저씨 함께하는 거 대찬성. 커피 향, 얼마나 좋을까?~ 우리 모두의 것이니까, 자기 것처럼 아끼고, 그러면서 우리 모두의 것이 아니니까, 욕심을 부릴 일도 없고요. 회사도 그런 식으로 하면 얼마나 좋아요! 노동자 모두의 것이 되는 거, 노동자가 주체로 되는 거, 그게 경제민주화 아니에요?"

 

"커피노동자 입장에서 봐도, 경제민주화! 공허해. 대통령이 특정 직업군이나 처지를 대변한다고 하는 건 민주화가 아니잖아요. 김순자 후보가 그랬어요. "당신이 당신의 처지를 스스로 말할 때 세상은 바뀐다""

 

"이재용은 부회장 승진했던데? 대체 무슨 근거로 그 자리에 올랐는지 몰라. 그 집안은 쪽 팔리지도 않을까요? 검증도 안 되고, 회장 아들이라고 덜컥 황태자가 되고. 그네 타는 그 여자도 마찬가지죠. 지가 무슨 진짜 공주인줄 안다니까요. 재수 없어! 오늘 낮에도 광화문에서 또 빨간 옷 입고 설쳤다매?"

 

 

"그네 타듯 스트롱맨(strongman) 아버지한테 자신을 밀어달라고 보채는, 황상민 교수의 표현에 의하면 '생식기만 여자'도 그렇고, 정권 교체와 새 정치만 공허하게 말하는 문안도 그렇고. 상상을 못하는 상상결핍증 환자들 같애요."

 

"아저씨는 누구의 국민이 되고 싶어요?"

 

질문을 받은 나는 섣불리 답을 할 수 없다. 나는 누구의 국민이 아닌, 이 땅의 시민이 되고 싶을 뿐이니까. 커피노동자로서의 시민. 노동자들이 자기 목소리 내기 위해 크레인에 오르고, 철탑, 송전탑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여야만 하는 나라. 나는 그런 나라의 국민이고 싶지 않다. 죽음을 각오하고 높은 곳에 올라도, 어거지를 쓴다고 땡깡을 부린다고 말하는 곳이 한국이라는 사회다.

 

"진짜 국가고 나라라면 말이죠. 모두가 부자가 되고 잘 살고, 선진국민이 되게 해 주겠다고 공갈 치는 게 아니고, 배 곪는 사람, 먹지 못해 죽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없게 하는 게 국가의 의무이자, 존재의 이유죠. 난 가난해도, 단 한 사람도 굶어죽는 사람이 없는 국가에서 노동자로, 시민으로 살고 싶어요."

 

 

You may say that I'm a dreamer(당신은 내가 꿈꾸는 사람일 뿐이라고 말할 지 모르지만).

But I'm not the only one(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 혼자 만은 아냐).

I hope someday you'll join us(언제가 당신도 우리와 동참하길 바라).

And the world will be as one(그리고 세상은 하나가 될 거야).

 

국민대통합의 아이콘은, 이런 상상을 하는 사람들까지 하나로 만들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의 구호는 개뻥이다.

 

이로써, 오늘 밤9시의 커피 메뉴가 '이매진'으로 하나 된 이유를 알겠지? 함께 상상하고, 드리머가 되자는 거. 천국도, 나라도, 소유도 없는 세상. 상상만 해도 짜릿하지 않나? 1000원에 이런 세상을 꿈꾸게 만드는 커피가 있다는 거, 그것도 참 멋지지 않아?

 

자, 내일까지 밤9시의 커피는 '이매진'으로 하나되는 걸로~

I hope today you'll join us!

 

 
 

밤9시의 커피.

밤 9시가 넘으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이 있는 곳. 그 커피 한 잔으로 생을 확인하고, 외로움을 위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커피 한 잔에 담긴 어떤 세계의 확장과 연결도 엿본다.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밤 9시가 되면, 낮에 만든 커피와는 또 다른 커피를 내린다. 그 커피는 오로지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다. 그리고, 당신과 나만 아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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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는 가라 - 정의구현사제단 함세웅 신부와의 대화 이슈북 1
함세웅.손석춘 지음 / 알마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함세웅 신부의 증언을 듣자니, 분노를 넘어 슬픔이 뚝뚝 묻어난다. 여전히 껍데기는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아니, 한층 더 두터워진 껍데기가 세상을 에워싼 느낌으로 인해. 도저한 절망의 시절을 ‘여전히’ 우리는 관통하고 있구나. 껍데기는 왜 이다지도 견고한가. 변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금의 풍경이구나. 그러니까, 이것은 분노의 기록이라기보다 슬픔의 기록이다.


“껍데기는 가라”고 읊조린 신동엽 시인의 시절을 생각했다. 내가 겪지 못한 그때. 시인이 “가라”고 외친 덕이었으리라. 독재와 군사적 긴장이 야기한 거짓과 위선, 불의 등은 꼬리를 내렸다. 詩의 힘은 그렇게 세다. 詩에 공명하고 행동할 줄 아는 사람들도 있었던 덕분이리라. 인민들이 기어코 바라던 것이 이뤄졌다(고 착각했다). 평화와 민주주의, 화합을 열망하는 1960년대 인민들의 바람을 신동엽 시인이 대필(!)한 셈이다.


허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삼성’으로 대표되는 자본이 야금야금 그 자리를 삼켰다. 영악했다. 앞선 독재가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일념(!). 몰염치한 자본은 껍데기를 몇 겹이나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인민들은 독재보다 센, 아니 흉악무도한 적을 만났다. 껍데기의 전성시대가 펼쳐졌다. 나쁜놈들 전성시대.


‘정의구현사제단’의 등장은 필연적이었던 것 같다. 사제들이 이 땅에 있는 본디 임무. 함 신부의 증언은 그래서 더욱 생생하다. 사제들마저도 나쁜놈들의 유혹(?)에 직간접으로 넘어갔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 아프다. ‘가톨릭 마피아’라는 레떼르가 그저 웃자고 하는 소리가 아님을 확인하게 한다. 고 김수환 추기경마저도 그 손아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은 비통함과 슬픔을 동반한다. 물론, 사제들도 ‘인간’임을 감안하면, 못내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로마 가톨릭이야말로 바티칸에서 2,000년 동안 지배한 국제 마피아의 원조인 셈입니다.… 많은 이들이 바티칸을 마피아라고 꾸짖는 것은 하느님나라의 본질을 잊고 권력과 돈과 명예의 노예가 된 부끄러운 점을 고백한 겁니다.”(pp.43~44)


함 신부가 손석춘 교수와 함께 다시 “껍데기는 가라”고 외친 이유, 충분히 짐작이 간다. 더구나 지금은 하 수상한 시절. 독재의 아이콘이 딸의 몸과 마음을 빌어 복권을 꾀하고 한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인데도, 이 사회는 병들었다. 껍데기의 무차별한 공습에 정신줄을 놓은 상태다. ‘멘붕(멘탈 붕괴)’이라는 유행어, 지금-여기의 상태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이 사회의 멘탈 붕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정의구현사제단이 김용철 변호사의 증언을 빌어 발표했던 ‘삼성의 차명계좌 비자금 조성 실태’. 그러나 이 사회는 입을 닫았다. 귀도 막았다. 마음을 상실했다. 함 신부는 책을 통해 덤덤하게 증언하고 있지만, 얼마나 많은 절망과 슬픔이 있었을까. 행간을 통해 나는 그렇게 상상했다. 교회공동체마저도 물질, 재물, 황금 앞에 무릎을 꿇고 마는 현상이 ‘삼성’이라는 기표를 통해 드러났다고 했다. 우리는 왜 그래야만 했을까, 슬픔이 왈칵 밀려왔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일까. 권력-자본-언론의 신성삼각동맹이 왜 우리를 지배하도록 놔뒀을까. 궁금하고 궁금했다.


함 신부와 손 교수가 합창한 《껍데기는 가라》는 그런 문제의식을 자극한다. 그것이 더욱 와 닿는 것은 그들이 독재와 경제권력에 맞서 현재진행형의 싸움을 계속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키기로 마음먹은 것을 일관되게 지키는 사람들의 외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1967년에 처음 터져 나온 “껍데기는 가라”는 외침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개를 끄덕인다. 수구와 비열한 기득권 세력의 창궐에 일침을 가하는 이 대화집이 고마운 이유다.


올해는 유신정변 40년이 된 해이자, 연말 즈음 대통령 선거라는 큰 국가적 행사를 앞두고 있다. 아버지에게 효녀이고 싶은 딸의 심정은 인정하나, 독재의 복권은 용납이 힘들다. 함 신부가 언급한 박근혜의 정체는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녀는 유신시대 2인자로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다. 아버지와 함께 독재자로서 권력을 누렸다. “독재자와 공범자”라는 함 신부의 말씀, 고개를 끄덕인다. 책이 드러낸 박근혜의 실체는 여전히 함 신부가 독재와 싸우고 있음을 보여준다. 


행여나 박근혜가 가엾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미친 생각이리라. 조선일보는 박근혜가 아버지의 죽음이후 국회의원으로 당선될 때까지를 ‘잃어버린 18년’이라고 표현했다. 그 기간, 젊은 나이에 대학 이사장을 하고, 엄청난 재력을 가진 육영재단과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지냈다. 최고 권력이 아니었을 뿐, 기득권을 여전히 지키고 있던 박근혜가 무엇을 잃었던 것일까.


자연히 이 책은 12월 대선을 향하게 만든다. 자본이 인간을 노예로 전락시킨 시대, 경제민주화가 시대적 요청이자 정의임을 자각하게 만들고 있다. 마음에도 없고 무엇인지도 모르는 ‘경제민주화’를 자신의 공약인양 포장하는 거짓된 자는 가라. 함 신부는 거짓된 자는 “악마”라고 했다. 거짓의 표상. 그리하여, 함 신부와 손 교수의 “껍데기는 가라”는 외침은 묻는다. 지금-여기의 정치란 무엇인가. 올 겨울,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이 책, 그 선택에 충분한 도움을 준다.


지난 10월 1일, 세상을 떠난 명민한 혁명주의자 에릭 홉스봄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미완의 시대》) 우린 여전히 미완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미완이라고 좌절할 이유는 없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가슴에 꾸욱 담는다. 그리하여 함 신부의 증언, 홉스봄의 것과 통하는 측면이 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잊고 있던 화두를 꺼낸다. “자유와 정의라는 이상 없이 인류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아직 늦지 않았다. 


그래, 우리는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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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편인가 묻는 당신에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허허실실한 나는, 굳이 따지자면,

 

요즘 읽을 게 없으면 버버벅대는 바그네 추종자들이 싼티나게 남발하는, 

심하게 오염된 그 말 아닌, 정통적인 의미의 '보수 우파'에 더 가깝다 할 수 있겠다.

(어설픈 자유주의자 성향이 있으나, 생을 걸고 지킬 신념 같은 게 없으니, '주의자'라는 직함을 붙일 순 없겠고~)

 

그러다, 우연히 접한 이 구호에 훅~ 갔다. 하악하악. 할할.

 

세상에, 세상에, 이렇게 섹시한 구호가 있단 말인가. 침이 고이고, 입이 떠억.

약간의 뻥을 덧붙이자면, 태어나서 이렇게 섹시한 선언을 본 적이 없다.

 

좌파의 시대! 좌파의 시대!! 좌파의 시대!!!

 

와, 대체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저렇게 솔직대담한 돌직구에 나는 그만 훌러덩 넘어갔다. 비록 좌파는 아니지만,

 

과감히 베팅했다! 

 

후원금을 내도록 당기는 저 강력한 유혹의 돌직구. 꼴려서 방망이를 휘둘렀다!   

http://www.soonja.net/xe/supporting  

 

나는, 근래 저렇게 멋진 구호를 본 적이 없다. 당신은 어떤가. 

꼴리면 당신도 베팅하자. 


비록, 내 사는 동안 우리 사는 동안, 

저 구호가 실현되거나 빛을 보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저것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얼마나 벅찬 일인가.    

 

청소노동자 김순자는 말한다.

"대통령 바뀐다고 사회가 바뀌진 않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처지를 스스로 말하기 시작할 때, 사회는 바뀝니다."

 

청소노동자 김순자, 백 번 타당한 말씀이다. 

나는 커피노동자다. 시어질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커피노동자이고 싶다.

오직 단 한 사람만을 만족시키기 위한 커피노동자, 그것이 나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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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종말 - 여성의 지배가 시작된다
해나 로진 지음, 배현 외 옮김 / 민음인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소설가 김훈뼛속깊이 마초인 남자이렇게 말했다

먹고사는 일보다 더 숭고한 남자의 길은 없다.”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마초수컷에게 주어진 신성한 의무임을 강조한 것이리라아무렴그것은 여전히대한민국 남자의 목을 죈다가족을 제대로 부양하지 못한다면수컷의 자격은 없다그래서 외친다남자는 괴로워한국뿐이랴일본에도 동명의 영화가 있다그래서 가부장제는 유효했다괴로운 수컷의 입지가부장제라도 주어져야지수컷들일자리를 더 많이 가져야지그래야먹여 살리지. 숭고한 길인데, 아무렴. 

 

그러나 그것, 균열이 왔다증거는 곳곳에서 나온다요즘 한 법무부도 가세한다지난 2154회 사법시험 최종 합격자 506명 가운데 여성 합격자 비율이 41.7%에 달했다고 발표했다사상 최고치여성 합격자 비율이 40%를 넘어선 것은 2010(41.5%) 이후 역대 두 번째손쉬운 말로 여풍(女風)’. ‘월드컵 저주라는 남자들의 변명이 따라붙는다. 6월 말사시 2차 시험이 월드컵 기간과 겹쳐 남자 고시생들의 집중력을 떨어뜨린단다비겁한 변명얼마나 못났으면 월드컵에 책임을 돌리나.

 

여자들의 득세그것은 당연한 일이다똑똑하니까나는 그것을 눈으로 목격하고 몸으로 체험한다각종 강연을 가면여자들이 훨씬 많다모든 공부의 장여성들 숫자가 압도적이다남자희귀동물이다과거지성의 영역은 남자의 몫이었다그러나 언제부터인가여성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본디 지성의 영역은 여성의 몫이었던 양상대적으로 수컷공부를 멀리 했다고전평론가 고미숙은 디지털문명이 여성의 음기를 사회적으로 순환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나는 남자들의 뻣뻣함이 사회의 유동성을 감당하지 못하고 여성의 유연함에 밀려서라고 해석한다수컷은 점점 사회적으로 도태되고 있다.

 

미국 통계에서도 그것은 확인할 수 있다. 2009노동력의 추가 여성 쪽으로 기울었다역사상 처음 그렇게 여성 노동력이 남성을 능가한 뒤여성은 계속 5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남자의 종말은 그것을 조목조목 확인해준다저널리스트답게 통계와 취재를 바탕으로 남자들이 왜 종말의 상황에 도달했는지를 증명해준다사실현실에서도 느낄 것이다남자다움의 낡은 구조는 설 곳을 잃고 있다거기서 수컷의 딜레마가 생긴다그것을 대체할만한 새롭고 명확한 구조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남자들설 곳이 없다그러니이런 말고개를 끄덕인다. “남은 것은 액세서리뿐말하자면 맨세서리(mancessory)’들뿐이다.”(p.19)

 

고개를 끄덕인다이 책일리가 있다새로운 남자의 정의가 필요한 시대가 왔음도 자각할 수 있다명백하다. ‘남자다움이라는 말로 표현했던 마초적 위상은 점점 약발이 딸린다요즘 남자들특히 젊은 남자들과도기에 놓일 만하다더 이상 아버지처럼 살지 못하는 것은 명백한데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른다배운 적이 없다그렇다고 유연하지 않은 남자들어찌하오리까저자 해나 로진은 남자의 종말이라는 자극적인 수사를 쓰면서 남자들 분발을 촉구하고 있다.

 

그녀의 처방전은 이렇다. “새로운 역할새로운 국면으로 이행하려면 일정한 자질이 필요하다유연성재빠름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폭넓은 감각 등이 그것이다.” (p.27)

 

그러니까, '남자의 종말'은 '남자의 몰락'을 얘기하는 것아니다. (누군가에겐 그것이 몰락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 관성과 관습에 얽매여 어떻게든 거부해 온 여성성을 온 몸과 오감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갖추자는 것이다남성 우월주의의 틀인 가부장제를 주장하는 것능사가 아니라는 것해나 로진은 그것을 가모장제라는 표현으로도 대신한다.

 

이 책은 달라진 섹스의 주도권부터 언급함으로써 충분한 주의를 끈다여성 스스로 원하지 않는다면 누구와도 섹스하지 않을 수 있고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영향력을 위해 남자를 배경으로 하지 않아도 좋은 시절이 왔다. (미국과 우리나라는 아직 시차가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바람직한 변화다. ‘성 혁명으로 명명된 이것은 여성의 태도와 행동을 근본적으로 바꾸고세상의 공고한 질서를 흔들었다문제는 남자들의 자세다그것은 성 혁명이 남성을 바꿔놓는 데 기여하지 못했다기보다 남자들이 저항을 한 것이다뭔가 뺏긴 것 같고 탐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 아무리 잘난 남자도 대세를 거스를 순 없다원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여자들은 전통적인 부양자’ 역할에 발을 들이고 있으며고개 숙인 남자들이 할 수 있는 건복종이다남자들의 의기양양함을 부추겼던 신자유주의적 성장주의 엔진은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그건 남자다움으로 돌파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이미 전 지구적 경제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성공하는 곳이 되었”(p.167)으며, “장기적 관점에서 본다면현대의 경제는 여성이 규칙을 만들고 남성이 따라잡는 흐름이 되어 가고 있다.”(p.170) 대학을 장악한 여성의 수도 그렇고온갖 시험에서 수석이나 다수를 차지하고야 마는 여성들도 그렇다.

 

이 사회에서도 피부로 느낄 만큼 극적인 것이 있다바로 에 대한 선호불과 십 수 년 전만 해도 남아선호는 쉬이 바뀌지 않을 단단한 현상이었다그러나 지금다르다아들은과격하게 말해서 별로 쓸모없는 애물단지처럼 낙인 찍혔다반면 딸은 가정의 중요한 자산이다딸딸이 부모라고 구박 당하지 않는 집도 상당히 늘었다아들 더 낳겠다며 용을 쓰는 집도 보기 힘들어졌다. (물론아이를 가진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된 시대이기도 하다!)

 

남성성참으로 버거운 것이었다남자들에게도 그랬다강한 척센 척용감한 척삼척으로 겹겹이 둘러싸야 존재감을 인정받는 것으로 착각했던 현실울고 싶어도 울지 못했던 남자들(최소한 이 사회에서 말이다). 그러나 이것허장성세요자존감 없는 자의 비애였다.

 

이론가들이 오랫동안 주장한 바에 따르면남성성이란 전적으로 사회적 구성물로서여러 세대를 거쳐 남자들이 착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전투용 가면이나 갑옷의 일종이다이는 가면이나 갑옷이 벗겨지면 자신의 부드러움이 발각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p.354)

 

그래서 이 책은 결혼이라는 제도가 여성보다 남성에게 훨씬 더 필요하다는 불편한 진실을 폭로(?)한다생존하기 위해 남성은 결혼이 필요하단다주변을 둘러봐도 그건 타당한 주장 같다남자들은 홀로 서는데 익숙하지 않다. 취약하다. 유연하지도 않다. 가부장제의 관습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물론저자가 지적한대로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인 듯한데요즘 혼인 시장의 문제는 여성의 약함이 아닌 여성의 새로운 지배 때문에 초래되는 것 같다여자가 남자보다 교육을 잘 받고똑똑하여 결혼은 복잡한 방정식이 된다높은 지적 수준의 여성이 이른바 골드 미스로 남는 경우다.

 

여성의 위치 상향이 마냥 긍정적인 것으로만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성 역할의 반전은 이전과 또 다른 현상도 야기함을 책은 지적한다여성의 폭력성이나 공격성에 대한 사례가 그것이다저자는 영악하고 잔인한 여성 살인자 등을 예로 든다그녀가 인터뷰한 베스트셀러 범죄 소설 작가 패트리샤 콘웰은 그것에 대해 이리 분석한다. “여성이 적절한 힘을 가질수록 여성의 행동은 다른 힘 있는 사람들을 더 많이 닮아 갈 겁니다.”

 

저자가 남자의 종말여자의 부상에 대해 다각도로 조사했음을 증명하는 건여성 지배가 마냥 유토피아만은 아니며여성의 부상엔 자본의 요구와 같은 요인이 있었음을 밝힌 대목이다여성이 지배하면 우리의 미래는 장밋빛일까그렇지 않다그런 환상은 외려 위험할 수 있다.

 

여성적 유토피아의 상상 뒤에는 늘 우월감이 숨어 있었다더 친절하거나 부드럽다거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하는 것이 반드시 여성의 가장 큰 특성은 아니다트웬지 교수가 알게 되었듯이여성은 사회적 신호에 반응하여 시대의 허용치에 맞추기 위해서 인성을 바꾸는 성향이 있다.”(p.258)

 

더구나 우리는 지금물론 예단할 필요는 없겠으나, ‘최초의 여성 대통령’ 운운하며 언어유희를 펼치는 대선후보를 알고 있다. 저자도 이에 긍정적이다.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점만 인지할뿐,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모르는 것 같다. 박근혜, 여성이라는 타이틀을 대표할 수 있는 정치인이 아니다더구나 그는 지금까지의 정치적 행보에서 여성으로서의 장점과 역할을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다외려남성적이거나 퇴행에 가까웠다정상의 위치에 여성이 올라가야 하는 명제에는 동의하나, ‘어떤’ 여성인가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울러십 수 년 전부터 유리천장 운운하며 여성 임원에 대한 관심이 적극적으로 표현된 것에 대한 분석경제학자 조던 시겔을 필두로 한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 연구팀이 한국의 사례를 살펴본 뒤이리 종결 짓는다. “여성 임원에 대한 갑작스런 관심의 원동력은 공평성이나 형평성의 추구가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경쟁력을 찾는 예리한 시각이었다.”(p.331)

 

이렇게 또한 연결된다.

 

세상은 여성이 강력한 힘을 갖출 태세가 되어 있다는 것은 마지못해 의식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지 않은 전환점에 서 있다시겔의 분석에 따르면여성 임원을 채용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기업들은 결실을 누린다시겔은 기업이 여성 관리자들을 늘리면 시간이 흐르면서 수익성이 개선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p.332)

 

물론 그것나쁘다는 것은 아니다여성의 가능성과 역량을 발굴한 것이 기업(자본)이었다는 점은, 좋은 말로 기업의 센스가 돋보였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성장에 매달렸던 까닭이었겠지. 그것이 또한 다른 주체와 사회를 추동한 원동력이 됐을 수도 있다. 여성 임원의 탄생과 고위직 진출이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사례는 이 책을 읽는 여성들의 자존감을 높여줌과 동시에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이건 뭐랄까이른바 잘난 여자들의 경우에 국한된 한계가 있다그렇지 못한 여성들의 경우는 여전히 가부장제와 남성 우월주의의 울타리에서 신음하고 있다계급의 문제가 소홀하게 다뤄지고 있다. 이 책의 한계다. 다국적 기업 등의 여성 경영자나 임원은 여성 중에서도 소수다. 숱하게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여성의 지배'와는 먼 세계에 살고 있다. 계급적 이해관계에서 소외돼 있다. 육체노동의 약화가 여성 노동력의 증대를 가져왔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으나,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상대적으로 임금이 높은 남성 대신 여성을 택한 자본의 꼼수도 있다. 똑똑한 여성의 도약과는 명백히 다른 지점이다.


특히, 여성이 왜 주부양자가 되는지 심층 있는 고찰은 부족해 뵌다. 단순히 여성 노동력이 지배적이 됐고, 그 증가를 확인하는 것에 끝날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적 현상과 요인이 자리잡고 있는지 좀 더 파고들었어야 했다. 여성이 노동시장에 나가는 다양한 이유를 캐고, 잘 나가면 결혼을 왜 하지 않으려 하는지, 좀 더 알고 싶다. 자아성취가 아닌 맞벌이를 할 수밖에 없는 그닥 달갑지 않은 상황도 분명 있을 테니까. 성과 함께 계급적 이해관계를 더 풍성하게 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어쨌든, 세상은 하룻밤 새 뒤집어지지 않으나물방울 하나하나가 바위를 갈라지게 한다. 4만 년의 남성 지배에 금이 가게 한 여성들의 도약은 불과 40년 전부터다여전히 지뢰밭이요장애물이 포진해 있다이 책은 여성들의 보다 굳건한 지배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그렇다고 남자의 몰락을 당연한 것으로 조롱하는 책도 아니다변화의 양상지배 질서의 흔들림을 잘 보면서 여남(女男)이 서로에게 삼투할 것을 권한다바람직한 변화를 위한 두 성()의 깨달음과 성찰그리고 현상에 대한 직시와 이해를 돕는다.

 

한국 엄마의 이야기는 특히 인상적이다저자의 저널리스트적 자세가 돋보이는 대목이기도 한데아들에게 조용히 말하라고 가르치고분홍색 봉제인형을 사 주고태권도 대신에 요리와 발레 학원에 보내는 엄마의 이 말. “저는 새로운 시대에는 마초가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그리고 아들이 잘 살기를 바란다면아들에게도 여성적인 면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성은 자신의 변화뿐 아니라후대까지 내다보는 혜안을 지녔구나여성은 유연하고 민첩하게 자신을 바꿀 수 있음을 증명했다그것뻣뻣한 남성에게 필요한 덕목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야할 것인지에 대한 힌트다.

 

처음으로 돌아가소설가 김훈이 정한 남자의 정의. “먹고사는 일보다 더 숭고한 남자의 길은 없다.” 뼛속 깊이 보수임을 자처한 김훈의 삶과 생활에서 우러나온 보수성을 타파할 수는 없다다만보다 젊은 남자에게 필요한 새로운 남자의 정의는 이런 것아닐까.

 

남자는 여자처럼 생각할 줄 알아야 남자라고 했는데이 말은 민감하고동정적이며자기 기분을 잘 아는그러니까 언제 웃고 울 지를 아는 사람이 남자라는 것이다.”(p.357)

 

나라는 수컷, 이런 남자가 돼야 할텐데. 관념과 생각으로 그칠 게 아니라, 감수성을 좀 더 연마하고 닦아서 몸과 삶에서 이런 기운이 퍼져나와야 할 일이다. 쉽진 않겠지만, 인생에서 꼭 해봄직한 것이 아닐까. 진짜 남자라는 것. 


참고로, 여자들이 수컷들을 만날 때 꼭 챙겨봐야 할 것이 있다. 삶의 미시성이다. 겉으로 진보나 보수를 언명하는 것, 그건 별로 믿을 게 못 된다. 더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부엌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부엌에서의 행태, 진짜 남자와 수컷을 구분하는 중요한 경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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