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기 물을 내리고 전등을 켜고, 깨끗한 물,
그리고 맛 좋은 커피 한 잔 마시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는 쉽다.
좀 더 어려운 것은 이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쇼펜하우어
아마도 십 수 년 만.
쏟아지는 비를 흠뻑 맞았다.
전혀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쏟아지는 비로 온몸을 감싸면서,
묘하게 희한하게도 은근 기분이 좋았다.
왜 그럴까, 속으로 궁금했다.
그리고, 파리를 갔다. 정확하게는 스크린을 통해.
<미드나잇 인 파리>.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파리.
길(오웬 윌슨)은 말했다. 파리는 비가 올 때 가장 아름답다고.
그는 그렇게 비를 맞았다.
십 수 년 만에 흠뻑 비를 맞은 날,
파리도 비에 젖었고, 내가 몰랐던 파리가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나도 비에 젖은 파리를, 그 빗방울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리라. 파리에 가야 할 이유.
우디 앨런이 그린 파리.
환상이겠지만, 비 오는 서울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말도 안 돼.
사람은 그렇게 갖다 붙이길 좋아하는 존재. 아니, 내가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직 이르지만, 만추(晩秋).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 호우시절.
류준형 팀장은 여전했고, 그는 나와 수다를 떨어서 모처럼 기분이 좋다고 했다.
그리고 박경민 대리가 4년 여 전 죽었다는 소식. 놀람과 슬픔이 범벅됐다.
그는 내가 만난 가장 샤이한 홍보맨이었다. 한참 늦었지만 명복을 빈다. 부디.
엘살바도르 커피, 깊진 않아도 깨끗하고 맛있었다.
어쩌면, 가을날의 선물. 고마운 당신이다.
밤9시의 커피.
밤 9시가 넘으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이 있는 곳. 그 커피 한 잔으로 생을 확인하고, 외로움을 위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커피 한 잔에 담긴 어떤 세계의 확장과 연결도 엿본다.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밤 9시가 되면, 낮에 만든 커피와는 또 다른 커피를 내린다. 그 커피는 오로지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다. 그리고, 당신과 나만 아는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