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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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마지막 날, 소셜벤처 경연대회, 커피 케이터링 지원을 나갔다. 
참고로, 소셜벤처는 이렇게 정의된다. 창의성과 혁신성을 바탕으로 하는 진취적 사회적기업 모델로 영업활동에서 발생한 수익으로 취약계층에게 사회서비스나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는 기업이다. 뭐, 말은 번지르르한데, 쉽게 말해 '돈벌이(혹은 돈놀이)에 영혼이 잠식되지 않은' 기업쯤 되겠다. (도둑과 도덕을 구분하지 못해,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 지칭한 이번 정권의 머리 빈(MB) 양반도 나름 심혈을 기울이는 일자리 자구책이 사회적기업과 소셜 벤처이기도 하다.)

3년 전부터, 매년 열리는 이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예전엔, 자신이 가진 재능과 기술, 의지로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의 모습으로 읽었었다. 물론 그들의 눈빛엔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패기와 함께 어떻게든 수상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커피를 건넸었다. 맛있게 마시라는 말 뒤에 생략했지만, 당신이 바꿀 세상을, 세상을 바꿀 당신을 지지한다는 내 마음의 말이 있었다. 내가 건네는 커피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자들에게 윤활유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 내 커피가 사회변혁 추동에 이바지했으면 좋겠다는 소원. 더구나 나는 커피가 혁명의 불쏘시개가 됐던 이야기에 혹한 자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오늘은 좀 다른 마음이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야만의 세상. 나는 어지간한 대사건(그건 아마도 침팬지의 혁명적 외침인 <혹성탈출:진화의 시작>과 같은)이 아니고서야, 이 야만은 꾸역꾸역 증식할 거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아프고 슬픈 지구를 위해 개인의 노력을 행하는 것. 공정무역 커피를 마시고, 차를 덜 몰거나, 식습관을 바꾸며, 윤리적소비에 나서는 것. 좋다. 암, 좋은 일이다.

허나, 그런 것들은 그저 자기 만족이다. 야만 박멸에 크게 기여하지 못하는 것 같다. 경제적으로 풍요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미친 빅딜이나 경제적 제국주의 국가들의 통렬한 자각과 대오각성에 의한 분배적 정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야만은 점점 더 뚱뚱해질 게다.

그러니까, 그들의 뚜벅이 걸음은 사소한 성공에 가깝다. 큰 실패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지는 드문 경우. 희뿌연 안개 속에서 그나마 어설프게 비치는 반짝이. 그러면 그것은 절망인가? 아니. 사소한 성공은, 결국 내가 바뀌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다. 세상을 바꾸기 보다는 야만의 세상이 강요해서 바뀌는 인간 본성을 놓치지 않기. 

오늘 내가 그들에게 건넨 커피는 그런 의미였다. 부디, 바뀌지 않기를. 야만이 당신을 덮쳐도 당신은 스스로를 지켜나갈 수 있기를. 최소한 괴물은 되지 않기를. 이미 많은 인간이 괴물과 좀비로 바뀐 도가니가 된 세상이니까. 내가 건넨 커피가 당신이 바뀌지 않을 수 있는데 작은 자극이라도 되길 바랐다. 

한편으로, 그것은 분노의 다른 표현이었다. 
나는 그들이 소셜 벤처를 꿈꾸고, 사회적기업을 지향하는 것이 지금의 야만에 분노하는 것이라고 봤다. 내가 바뀌지 않기 위해 야만에 대해 분노함으로써 그들은 사회적인 뭔가를 끄집어낸 것이다. 개인의 분노가 내면을 향하면 우울이 되지만, 사회성과 관련한 사고를 관장하는 전두엽은 분노가 밖으로 표출되도록 돕는다. 사회적 인간의 본성이 그렇다. 왜 사회가 이 모양인가, 에서 우리는 본디 고민을 하도록 태어났다. 고민하다 보니, 답이 딱! 이리 살면 안 되겠다.

이 노친네, 스테판 에셀은 그래서 '밖으로' 분노할 것을 권한다. 분노하라고 대놓고 분탕질(?)을 한다. 분노할 거리를 내놓고는 야만에 진상짓(!) 좀 하라고 일갈한다. 지금 이대로 살아도 진짜 좋냐고 묻는다. 전체의 이익보다 특정인의 이익이 옹호되고, 부가 정당하게 분배되지 않고 금권을 지닌 누군가에게 편향되며, 국가 금권 외세에게 종속된 언론이 판을 치며, 인권을 겁박하는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 야만 혹은 도가니가 버젓이 똥폼 잡고 유세 부리는 세상에서 말이다.
    


여기 이 말을 보자.

"이른바 '불법체류자'들을 차별하는 사회, 이민자들을 의심하고 추방하는 사회, 퇴직연금제도와 사회보장제도의 기존 성과를 새삼 문제 삼는 사회, 언론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된 사회, 결코 이런 사회가 되지 않도록." 

꼭 지금의 한국 사회를 말하는 것 같다. 93세의 레지스탕스 노투사의 이 말은, 프랑스 사회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렇다면 프랑스 사회나 한국 사회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다는 말일까? 일정 부분은 그렇다. 여러 제반 여건을 비롯해 정치, 문화, 사회적인 상황이 다름에도, 전 지구적인 현상에서 비롯되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이른바 '세계화'라는 표현에 맞게끔, 전 지구의 연결망이 과거에 비해 확실히 촘촘해졌다. 거기에는 자본의 무한증식 포섭력(?)이 가장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이권을 향한 무한도전이 빚어낸 자본의 자기증식은 국가나 국경을 가리지 않았고, 어디든 돈 될만한 곳이라면 손을 뻗쳤다. 자본의 세계화는 세계의 많은 풍경을 획일화시키고 일찍이 없었던 일을 보여주고 있다.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가 이렇게 큰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돈을 좇아 질주하는 경쟁을 사람들이 이토록 부추긴 적도 일찍이 없었다."(p.15)

세상은 어떻게든 상호연결돼 있다.
자본이 그것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어어~ 하다가 사람도 자본이 원하는 야만에 휩쓸리게 됐다. 덕분에 세상을 바꾸는 것만큼이나 내가 변하지 않으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시대가 됐다. 광활한 세계를 상대로 그렇게 해야 한다.

짧게는 30~40년, 더 길게는 산업혁명 이후 200년 이상을 참아왔다. 그런데, 이젠 참을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하고 있다. 그렇지 않나? 언제부터 우리가 다른 사람을 짓밟고 자연을 무시하고 살았나. 왜 같은 일을 하면서도 정규, 비정규로 가르고, 친구를 사치로 여기게끔 만들었나. 청년들이 이렇게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아이들이 사육기계로 전락당하는데, 속수무책이어도 되나. 

세계의 상호연결성이 나쁜 방향으로만 작동하다보니, 그 폐해가 엄청나다. 노투사의 물음은 그래서 지금-여기에도 그대도 적용된다.
  
"잘 되어가는 사회란 무엇입니까? 모든 시민에게 생존의 방편이 보장되는 사회, 특정 개인의 이익보다 일반의 이익이 우선하는 사회, 금권에 휘둘리지 않고 부가 정의롭게 분배되는 사회입니다."(p.62)

이를 세 단어로 줄이면, 자유, 평등, 박애. 

야만이 세상을 삼키면서 함께 소멸되고 있는 단어였다. 그런 형편에서 우리의 분노는 안으로 향했고, 자존감을 잃은 개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스테판 에셀이 무관심을 최악의 태도로 꼽은 것은, 끊임없이 인정투쟁을 원하는 인간의 본성을 꿰뚫은 까닭이리라. 분노는 그래서 무관심의 반대말이다. 노장은 권한다. 자꾸 '삑살이'를 내면서 세계를 공황의 수렁으로 몰아넣는 화폐권력에 분노하라고. 아무렴, 지금 필요한 건, 그것!

"전에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쉽게 체념해버리던 일들을 이제 그냥 당하고 있지만 않고 이에 맞서 일어설 때가 온 것입니다. 특히 점점 더해만 가는 경제권력, 금융권력의 압제에 맞서 싸울 때가 온 것입니다."(p.64)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좋다.
내가 변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에서 나는 작은 숭고함을 봤다. 자기 나름의 분노의 동기를 갖고 그들은 하나둘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인정을 받고, 사회에 자연스레 스며들면 더욱 좋겠지만, 그 노력만으로도 나는 충분해 보였다. 스테판 에셀이 나치즘에 분노하였듯, 그들은 청년들이 실업의 고통에 시달리고, 돈 없다고 무시당하며, 장애가 있다고 일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현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투사였다. 스테판 에셀의 말("서양인들의 '생산 위주의 사고방식'은 세계를 위기로 이끌었으며, 그 위기로부터 탈출하려면 '항상 더 많이'라고 외치며 앞으로만 질주하는 태도와 과감히 결별해야 한다.")을 봤든 아니든, 그들은 야만과 주류의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분노할 줄 아는 투사였다.

나는, 투사들의 각성을 돕는 도우미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건넨 커피가 그들의 분노를 제대로 촉발하는 각성제가 되고, 나의 커피하우스는 제대로 된 분노를 깨칠 수 있는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 그렇게, 나는 오늘 또 하나의 꿈을 꿨다. 9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가을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고, 분노도 익어가고 있었다. 노장, 스테판 에셀의 덕분이었다.

헌데, 책을 보면서 그의 분노에 공감하는 한편, 이성적 분노의 기원 또한 흥미진진했다.  
사실 '93세의 레지스탕스 노투사'라는 수식이 주는 후광이 너무 강한 것 같았다. 존경할만한 노장의 일갈은 분명 강력한 것이지만, 그런 식의 수식보다 더욱 놀랐던 것은, 집안 분위기였다. 프랑수와 트뤼포의 1961년작 <쥴 앤 짐(Jules And Jim)>이 관련된!  



트뤼포가 묘사한 그 놀라운 삼각관계는 바로 스테판 에셀의 부모의 이야기였다. 그가 세 살 때 어머니는 아버지의 절친과 사랑에 빠지고, 두 남자는 한 여자를 공유했다. 헌데, 이 놀라운 일은 영화 이전의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를 비도덕적인 일로 여기기 않았고, 세 사람은 세간의 윤리가 아닌 그들만의 윤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을 바라본 소년, 스테판 에셀이 있었다. 그 역시 남달랐다. 아니, 그다웠다. 무엇보다 그는 이런 관계에 흔들리기보다 자신만의 중심을 잡았다. 어머니 덕분이었다. 그는 충분히 자존감을 지닌 인격체로 자랄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 어머니의 동거남, 그리고 자신 가운데 어머니 엘렌의 사랑을 가장 많은 받은 사람은 자신이었다는 확신. 행복해지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행복해지려고 노력했던 사람. 어머니의 사랑과 행복이 그를 제대로 분노할 줄 아는 사람으로, 지금까지 그를 지지해왔던 것이다. 분노할 줄 아는 노장의 탄생이 놀랍고 즐거웠다. 

문득 궁금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또 다른 사랑이 나타난다면, 나는 어떡할 것인가. 스테판 에셀의 아버지, 프란츠 에셀과 같은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글루미 선데이>의 선율이 뒤따른다.

한국판으로 별도 삽입된 스테판 에셀의 인터뷰가 없었다면, 《분노하라》의 재미는 분명 떨어졌을 것이다. '스테판 에셀 비긴즈'를 엿볼 수 없었을 테니까.


나는 이 말을 믿는다.

노장에 대한 존경이 없는 사회의 노장은 불행하고,
존경의 대상을 갖지 못한 젊은이들은 더 불행하다.

《분노하라》가 프랑스 출간 7개월 만에 200만부를 돌파한 것은, 노장에 대한 존경의 의미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젊은이들은, 모르긴 몰라도 존경의 대상이 있어서 마냥 불행하지만은 않으리라. 물론 진짜 필요한 것은 분노할 줄 아는 젊은이들이다.

프랑스 문필가, 앙드레 모루아는 나이를 먹는 기술에 대해, "뒤를 잇는 세대의 눈에 장애가 아니라 도움을 주는 존재로 비치게 하는 기술, 경쟁상대가 아니라 상담상대라고 생각하게 하는 기술"이라고 말했다. 스테판 에셀은 도움을 주는 존재, 상담상대로 생각하게 하는 걸 보니, 제대로 나이가 든 사람으로 여겨진다.  
 

나도 나이듦이 그러했으면 좋겠다. '꼰대'가 아니될 순 없겠지만, 이를 가능한 한 늦추면서 '노장'이 될 수 있으면 빙고~! 커피로 제대로 된 분노를 추동할 수 있는 기쁨. 그것을 바란다. 내가 오늘 건넨 커피가 그들이 가진 분노의 또 다른 엔진으로 작동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있을라고. 그래서 (세상의 야만에) 분노하는 젊은이들이 세상의 야만에 굴복해, 세상에 맞춘다는 명목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내 커피는 할 일을 다했다. 중요한 건, 소셜 벤처 혹은 사회적기업을 대표하는 것보다 지키기로 마음 먹은 것을 지속적으로 지켜나가는 것. 그것이 또한 제대로 분노하는 길이다.

그런데 사실,
오늘 커피를 건네면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지난해 노조를 만든 이화여대 미화노동 여사님께 커피를 건넨 일! 소셜 벤처 참여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묵묵히 그 뒤에서 미화 노동을 하고 계신 여사님께 커피 한 잔을 권했고, 쭈삣쭈삣 먹어도 되느냐고 수줍어 하시는 여사님께, 나는 호탕하게 그럼요~라고 답했다. 부디, 그 커피가 여사님의 하루를 잠시라도 빛나게 해줬던 순간이길. 커피 한 잔은 가끔 그렇게 마술을 부리기도 하니까. 마음이 필요할 때는 커피!    
 
"삶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남에게 베풀고 싶은 마음과 베푸는 기쁨을, 남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책임을 감수하는 것. 어떤 경우에도 남에게 베풀고 싶다는 마음, 이 마음을 북돋워야 합니다. 사람을 책임 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성과 감성을 키워주는 것이 바로 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교육을 통해 계발해야 하며, 마음 교육을 위해서는 상상력의 힘을 빌려야 합니다."(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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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이야기 - April Story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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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짓.
4월이 간다. 봄 같지 않은 봄이다. 맞다. 오늘도 천둥번개를 동반한 억수 같은 봄비가 주룩주룩. 헌데, 봄은 모름지기 변덕대마왕. 수시로 변덕을 부리는 아이의 몸짓 같아도, 봄이니까. 그래, 봄짓이다. 봄짓, 4월.

벚꽃.
벚꽃이 거진 떨어졌다. 이번 비에 후두둑 끝장을 냈다. 봄비, 벚꽃 종결자.  벚꽃은 피는 순간부터 '벚꽃비'를 잉태한다. 나는, 벚꽃의 몸짓으로 4월을 읽는다. 매일, 벚꽃의 상태를 보면서 하루를 읽는다. 벚꽃은 주목 받는 시기가 무척 짧다. 그럼에도 벚꽃은 충분히 존재감을 발휘한다. 벚꽃 축제. 전국 각지에서 벚꽃은 축제라는 이름으로 소비된다. 그것으로 끝? 벚꽃은 비가 되면서, 어쩌면 슬프다. 봄꽃, 벚꽃.



 

4월 이야기.
그래. 4월이니까. 내 4월에 빠져선 안 될, 연례행사. 마지막 날에서야 틀었다. 역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벚꽃비가 내렸다. 마츠 다카코는 여전히 대학 신입생이다. 좋아하는 선배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대학1학년의 여학생.

그 서툶이, 어리바리함이 더욱 사랑스러웠던 영화. 이와이 슌지 감독. 이 미친 감성의 소유자. 마츠 다카코. 더 없이 그 감성에 어울리는 여자. <4월 이야기>는 훌쩍 지나가는 4월의 봄날처럼 러닝타임이 짧다. 어떤 사랑이 그러하듯.

봄날, 사랑.




 

 

시작.
화려한 벚꽃 사잇길로 이사차량이 들어서는 것으로 <4월 이야기>는 시작한다. 우즈키(마츠 다카코)의 도쿄 입성이다. 춥디 추운 훗카이도에 살던 그녀로선 이 봄, 이 벚꽃이 그리 좋을 수 없다. 좋아하는, 아니 고등학교 시절부터 짝사랑했던 야마자키 선배가 있는 도시니, 그가 있는 서점까지 사랑스럽다. 봄빛, 반짝.




미소.
저 미소를 보라. 4월의 여신이 짓는 저 미소. 딴 건 다 필요없다. 이런 미소를 날리는 여자만 옆에 있다면. 세상은 저 미소 하나로도 충분하다. 존재의 이유? 그 따위, 저 미소 앞에서 삭제! 고로, <4월 이야기>를 보고 나면, 세상엔 딱 두 여자로 나뉜다. 저 4월의 미소를 짓는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 눈에 콩깍지가 씌인 놈에겐 그녀의 어리바리도 서툶의 미학처럼 느껴질 뿐이다. 때론 아무 것도 아닌 일이 기억에 깊이 각인될 수 있는 것처럼. 나는 4월이면, 저 미소 하나면 충분하다. 4월을 버틸 수 있는 이유. 봄눈, 미소.





흠칫.
놀라면서 전율이 일었다. 저렇게 서늘한 아우라. 저 사진을 처음 보는 순간, 한마디로 '돋았다'. 저 4월의 미소 소유자가 저런 아우라를 뿜어낼 수 있다니. <고백>. 내용이나 그녀의 역할을 알고는 있었지만, 저 사진 하나에 나는 완전 압도당했다. 4월에 볼 엄두, 나지 않았다. <4월 이야기>에 나는 복층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손. 봄밤, 오싹.



기사.
풋풋한 여대상에서 창백한 복수의 화신까지. 기사의 제목이다. 국내 개봉일자로 따지면, 11년, 제작년도로 따져도 그 정도는 될 터. 뭐,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발목 치마를 펄럭이며 하얀 자전거를 타고 캠퍼스를 누비던 소녀가 표정이 없는 말투로 슬픔과 분노를 표출하면서 복수를 하는 엄마로 바뀌었다. 대변신. 기사 표현대로 잔인하다. 추억을 지워버린다는 점에서. 살짝 그런 점도 있었다. 아직 <고백>을 보지 않은 건. 지금은 어쨌든 4월이니까. 봄날, 추억.

마츠상.

과거, 그녀를 소개한 적도 있다.( ☞ 당신은, 내 4월의 여신...) 사실, 4월에만 거의 떠올리다시피 한 그녀였는데, 기사를 보고 더 좋아졌다. 야망 없음에 대한 '고백' 때문이었달까. "배우라면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 게 옳지만, 나는 변신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고백>의 내가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면, 그건 감독이 끌어낸 것이다. 나는 온힘을 다해 노력했을 뿐이다. 더 나은 경지에 도달하려는 야망이 없는 게 내 문제라면 문제다. (웃음)." 야망 없음을 토로하는 이 무서운 배우. 참고로, <고백>은 지난 2월, 일본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해 4개 부문을 수상했다. 봄신, 여신.

마츠상2.

하나 더 있다. 더 좋아하게 된 계기. 그 시상식에서 사회를 보고 있던 그녀, 눈물을 흘리며 "살아 있다는 건 참 좋은 것 같다"고 소감을 말했다. 그녀는 삶이라는 선물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며, 배우로서 자신의 역할과 위치에 대해 각인하고 있는, 보기 드문 배우다. 일본 동북부 지진에 대해 그녀가 남긴 말. "지금은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아갈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원하고, 내가 필요한 것들을 진심을 다해 판단하고 선택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내게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아무렴, 아무나 여신이 되는 건 아니다. 마츠상, 당신은 여전히 제 여신입니다.^.^ 봄밤, '4월의 고백'. 


 

 

봄비.

그래. 방사능이니, 최악의 황사니, 봄비 앞을 가로막는 이들은 날려버려~ 그냥, 봄비. 첫사랑을 만나 그에게 빌린 빨간 우산을 들고 쏟아지는 빗속으로 나가면서 환하게 미소 짓던 우즈키. 얼굴 가득 미소. 봄비는 그런 것이야. 봄비가 품고 있는 낭만을 쏟아지게 하는 것. 4월의 봄비 오는 날,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빨간 우산이 되고 싶다. 봄비, 낭만.


 

4월.  

오늘도 다시 한 번 다짐해본다. 그 어느해 4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우즈키의 흔적을 좇아 벚꽃비 혹은 벚꽃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도쿄를 누비리라. 빨간 우산도 하나 챙기고, 자전거도 기왕이면 빌려서. 도란도란 <4월 이야기>를 나누면서. 4월이 지나는 봄, 나는 그런 4월을 다시 기다린다. 봄달, 당신.
 
오늘이 지나면,
나는 이제 <고백>을 보러갈 수 있다. 마츠상, 만나러 갑니다~
  

 


P.S... 벚꽃, 고백이 함께 맞물린 오늘의 드라마.


 

반짝반짝 빛나는.
송편(김석훈) 이 오늘, 마침내 정원(김현주)에게 고백을 했다. 담백한 고백. "내 여자 합시다." 내가 왜 좋았는지 몰라.ㅋ 정원의 눈이 초롱초롱. 그 돋는 고백을, 정말이지, 그만의 스타일로 해댄다. 그런 닭살 고백을 그렇게 담백하게 할 수 있다니. 중요한 건, 벚꽃 아래에서였다. 나는 벚꽃이 그 고백을 부추겼다고, 벚꽃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운다.

벚꽃 고백.

"누군가한테 내 마음을 주고, 슬픔을 주고, 내 시간을 준다는 게 나한테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서 오래 망설였어요... 나보다 내 눈이 먼저 당신을 보고 있고, 나보다 내 마음이 먼저 당신을 담고 있어요. 좀 더 버텨보려 했는데 더이상은 무리에요. 늘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방. "내 여자 합시다. 친구 때려치우고 남자, 여자로 만나 봅시다, 우리." 하악하악. 내가 송편이 된 줄 알았다. 왜 그리 좋아서 바둥댔는지. 흥, 벚꽃 때문이다. 나도 벚꽃 아래서 고백하리라! 송편과 정원, 건투를 빈다. 진심이다. ^_^

근데, 정원이 나는 좋아 죽겠다. 이런 캐릭터를 좋아한 적은 처음이다. 꺄아아.

내일이 다시 기다려진다. <반짝반짝 빛나는>, 짱이다. 4월의 고백, 반짝반짝 빛나는.
 
엉뚱하게도, 김수영 시인의 [봄밤]이 생각나는구나. 그래, 4월의 도쿄, 벚꽃눈이 내리는 봄밤, 나는 [봄밤]을 읊조리며 고백한다. 그 고백의 당사자, 당신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그날엔 이 노래를 연주해도 좋겠지.
'봄날, 벚꽃, 그리고 너'(에피톤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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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먹는 게 삼대를 간다 - SBS 스페셜 생명의 선택
신동화.이은정 지음 / 민음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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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스페셜 <생명의 선택> 3부작을 다 보진 못했다. 한 편만 봤는데, 그 한 편이 인상 깊었다. 특히 미 버지니아 주 폴리페이스 농장 조엘 농부의 가치관과 인식이 참 좋았다. 그랬던 차, 이 다큐가 책으로 묶였다. 이 어찌 반갑지 아니할쏜가! 책을 만났다. <<당신이 먹는 게 삼대를 간다>> . 이어 신동화 PD의 강연에도 참석했다. 푸근한 인상의 그는, 조곤조곤 다정하게 먹을거리의 중요성에 대해 말을 건넸다.  

공정무역 커피를 제공하고, 입과 몸에 좋고 즐거운 먹을거리 다루고자 노력하는 카페를 운영하는 나로선, 반가운 자리다. 책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가장 몰입했던 분야는 3부였다. '페어푸드, 도시에 실현되다'. 페어 트레이드(공정무역)와 함께 시작된 나의 커피(푸드)노동자의 삶과 꿈은, 커피(푸드) 민주주의였다. 1등만 좋은 것 먹는 더러운 세상, 먹을거리도 계급간 차등을 받아야 하는 현실이 나는 불편하고 짜증이 났다.

나는 그 새벽을 기억한다. 새벽 첫 지하철 무렵에서 만났던, 피곤함과 찌들림이 가득한 얼굴로 고단한 몸을 누이고 있던 노동자들. 아마도 그들은 대부분 블루칼라였으리라. 청소노동자나 화이트칼라보다 일찍 세상을 깨운 사람들. 그 고단함에, 나는 커피를 건네고 싶다는 생각했다. 고단함에서 살짝 미소를 띄우고 싶었다. 내 커피가 그들에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아주 자그마한 힘이라도 줬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커피로 시작한 나의 여정은 먹을거리에도 관심을 쏟으면서, 푸드 저스티스(Food Justice), 음식 정의에도 조금씩 시선을 주고 있다. 당장 도시를 떠나진 못하지만, 도시에서 행할 수 있는 농업적 실천을 해보고 싶다. 즉, 도시 농부로서 첫 발을 올해에는 내딛고 싶은 바람이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용기를 주고, 내 바람을 부추긴다. 내 몸을 움직여 다른 생물과 함께 호흡하는 일. 세상을 살아가는 재미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신PD가 강연에서 언급했다. 사람 아닌 동식물에도 '의식'이 있다고. 의식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릴 것인지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모든 것은 모든 것의 방식이 있고, 사람의 잣대만으로 다른 생물을, 자연을 재단해선 안 된다. 모든 생물에는 (하물며 무생물에도) 영혼이 있으며, 그 영혼의 교감이 먹는 행위를 통해 나타날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른 생물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음식 비슷한 것, 고기 비슷한 것, 채소 비슷한 것 따위의 화학물질이나 첨가물 덩어리, 가공 식품은 생명이 없다. 지금의 도시 문명에서 늘 생명만 있는 것만 먹을 순 없다. 나쁜 것도 불가피할 때가 많다. 허나 가급적 피할 수 있다면, 산업화된 먹을거리 시스템의 자장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커피는 농약을 많이 치는 농작물이다. 플랜테이션 농업에서 대규모 수확을 해서 이윤을 많이 남기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다.(물론 그것도 커피 노동자들의 의지가 아닌 농장을 소유하거나 중간 소비처인 거대 커피 체인들의 욕망에 의한 것이다.) 나는 그것에 발 담그고 싶질 않아서, 자연농(동티모르 사메 사람들의 커피) 유기농(멕시코 치아파스 사람들, 에티오피아 시다모 사람들의 커피) 공정무역 커피를 다루고 있다. 

무언가를 대표하기보다 지키기로 마음 먹은 것을 지킬 수 있길, 음식 정의와 함께 나의 꿈이 자라나길. 좋은 다큐, 좋은 책 내 준 신동화 PD가 고맙다. 나도 그처럼 세상에 쓸모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커피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책을 읽은, 두서 없는 거친 소감을 긁적이자면,  

#1. 우리집 셰프인 어머니는, 옥수수 앞에 사족을 못 쓰는 날 보고, 말씀하셨도다. “너, 전생에 옥수수 농부였냐?” 어머니가 농담처럼 던진 그 단어, 농부. 거지발싸개 도시적 가치에 길들여진 내가, 농부라는 말을 들어도 되는 것일까. 비록 전생이라지만! 행여나 전생이라는 것이 있다면, 나는 정말 농부였으면 좋겠단 생각을 한다. 대통령 따윈 비교도 되지 않는, 더 큰 세상과 우주를 다루는 진짜 생명의 존재, 농부.
 
그런데, 다시 돌아가서 옥수수. 참 좋아하는데, 올해 옥수수 시즌이 오면 약간은 옥수수를 달리 보게 될 것 같다. 《당신이 먹는 게 삼대를 간다》에 언급된 옥수수 때문이다. 잠깐, 그 언급을 엿보자.

옥수수, 지금 거대해진 농산업 체제의 영웅이란다. 능력이 출중하기 때문이라는데, 얼핏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것을 확인 사살했다. 옥수수만큼 많은 유기물과 칼로리를 생산할 수 있는 식물은 없단다. 보관과 비축이 용이해 많이 키우면 키울수록 더 많은 돈이 굴러들어오는 지점도 있다.

따라서 산업 농업은 옥수수에 집중했다. 다양한 품종의 옥수수를 다뤘다는 게 아니다.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단일 품종을 재배했다. 미국 아이오와 주에는 콩나물처럼 빽빽하게 자라는 옥수수를 볼 수 있다. 조밀하게 심어서 엄청난 수확을 한단다.

그렇다면 땅은? 이 오밀조밀 빡빡한 옥수수를 견뎌낼 땅은 없다. 산업 농업은 또 다른 돌파구를 만들어냈다. 비료. 많은 양의 화학 비료를 투입, 옥수수의 영양분 부족을 해결했다. 단종 재배를 통해 무조건 많은 양의 옥수수를 거둬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좋지 않다. 위대한 식량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참조)가 농업생물다양성을 주창했듯, 단종 재배는 생물학적 다양성을 줄인다. 이는 해충과 질병을 확대시키고 잡초에도 취약하게 만든다. 이는 곧 농약을 부른다. 악순환의 시작이다. 제초제, 농약 등이 뿌려진 생물이 먹을거리가 돼서 인간의 몸속으로 투입된다.

옥수수는 더불어 ‘석유 먹는 하마로 변’했다. 옥수수용 비료를 만들기 위해 열, 압력, 수소를 발생시켜야 하는데, 이는 화석 연료를 필요로 한다. 책은 1칼로리의 음식을 생산하는데 1칼로리 이상의 화학 연료 에너지를 써야한다고 말한다. 기가 찰 노릇이다.

그것뿐이랴. 옥수수는 바이오 에너지를 만드는 데도 사용된다. 대체 에너지 만든답시고, 되레 석유 에너지를 쏟아 붓는 모순. 옥수수는 가공식품에 들어가는 구연산, 포도당, 과당, 엿당 등의 성분들을 만드는데도 쓰일뿐더러, 청량음료, 맥주, 케첩, 사탕, 핫도그 등등 패스트푸드나 편의점에 진열된 상품 곳곳에 암약(?)해 있다.

들으면 놀랄만한 것도 있는데, 치약, 일회용 기저귀, 쓰레기봉투, 표백제, 성냥, 배터리, 식물성 왁스, 살충제, 잡지 광택제, 건물 벽판, 이음재, 유리 섬유, 접착제 등에 옥수수는 투입된다. 책은 “인간도 옥수수”라고 말하면서, 옥수수는 ‘거대 농산업 체제의 슈퍼스타’라고 덧붙여준다. 그야말로 지금 옥수수는, 세상을 지배하는 작물이다. 전생이었기에 다행이지, 지금 옥수수를 재배한다면 나는 더 이상 농부가 아닐 것이다. 그저 옥수수 공장의 하수인에 불과했을 것이다.

#2. 가끔, 패스트푸드점에서 아이에게 먹을 것을 먹이는 어른을 보면 섬뜩하다. 아마 선의(아이에게 맛있는 것을 먹이고 싶은, 혹은 배고픈 아이의 배를 채워주겠다는)에 의한 것이겠지만, 결과적으론 그건 아이들의 건강, 몸에 대한 학대이며 아이들에게 자연과 세상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패스트푸드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감각이 둔화된다. 소금과 지방이 많은 패스트푸드의 맛은 사람의 섬세한 미각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대부분 모르고 그런다지만, 아이가 크면서 몸과 마음에 문제가 생기면, 부모를 원망할 텐데… 아니, 어쩌면 소송을 거는 일도 생기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혼자 염려하는, 오지라퍼(공연히 오지랖이 넓은 사람)가 된다. 아이에게 음식도 아닌 음식 비슷한 것을 먹이는 어른. 화학 물질과 첨가물이 범벅된 공장형 음식 시스템에 의해 공산품처럼 뽑아져 나온 음식 비슷한 것으로 아이와 후손의 삶에 악영향을 미치다니, 불끈. 괜히 아이까지 불쌍해 뵈는, 나는 지질한 오지라퍼. 아이를 진짜 생각한다면, 더 낫고 좋은 음식을 고민할 지어다. 

책은 말한다. “특히 아이들의 미각 교육에 힘을 쏟고 있다. 어려서부터 좋은 음식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아이들이 신선한 채소와 과일의 맛을 접할 수 있게 늘 시식회를 연다. 입맛이야말로 조기 교육이 중요하다.”(p.197)

영어? 수학? 조기 교육 말짱 필요 없는 것 갖고 힘 빼고 돈 처바르지 말고, 진짜 조기 교육을 해라. 미각 교육. 아이가 행복하길 바랐던, 처음을 기억하라. 지금은 나쁜 음식, 나쁜 먹을거리 천국이다. 정크 푸드니 패스트푸드니, 나쁜 음식이 창궐한다. 헌데, 이건 과거에는 떠올리지도, 생각하지도 못한 것이다. 음식을 향해 누가 ‘나쁘다’고 말한단 말인가. 생명과 영양의 원천인 숭고한 먹을거리를 향해 감히!

인간을 지탱시켜주는 고마운 존재이자 늘 좋은 것일 수밖에 없던 음식을 변질시킨 건 인간이었고, 인간은 먹을거리에 의해 위협을 받는 처지에 취했다. 부메랑 효과. 음식도 아닌 음식 비슷한 것들이 사람을, 세계를 좀먹고 있다.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인 마이클 폴란의 말을 인용하자. “음식 비슷한 물질 대신 음식을 먹어라.”
 




“가공식품은 식품의 다양성, 음식의 맛과 향미를 몰아냈다. 가공식품의 원재료인 옥수수와 대두가 엄청난 물량 공세로 밀어닥치면서 다른 식물들은 식탁에서 쫓겨났다. 가공식품은 가공 단계에서 본래 원료에 포함된 영양소가 없어지거나 감소된다. 또 다량의 식품 첨가물이 들어간다. 대부분 짜고 매콤하고 달콤한 맛이 난다.”(p.221)

#3. 《당신이 먹는 게 삼대를 간다》는 동물 공장 시스템에 대한 비판과 우려도 함께 전한다. 지금 대학살 당하고 있는 소, 돼지, 닭 등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밖에 없다. 인간은 참으로 가혹한 존재다. 가령, 수평아리의 계생(鷄生)을 보자. 그는 달걀은 생산하지 못하고 사료만 축낸다는 이유로 태어나자마자 분쇄기로 향한다. 다시 강조하자. 태.어.나.자.마.자. 어떤 가능성도 차단당한 채 죽어가는 존재. 좀 더 근본적인 이유도 간단하다. 돈을 버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미친 짓이다.

협소하게 건강만 놓고 따져도, 책은 이것은 좋지 않다고 말한다. “음식 속의 스트레스가 먹는 사람의 몸에도 전달이 된다”는 주장을 알려준다. 

책의 물음은 그래서 독자의 사유를 자극한다. 당연한 것임에도, 당연하게 떠올리지 못했던 것들.

“왜 우리는 사육과 도축 과정에서 불필요한 고통에 시달리는 동물들의 불행한 처지를 보고도 눈감는가?
왜 수천 년 동안 농약과 제초제 없이 먹을거리를 길러 왔는데 이제는 아닌가?
왜 우리는 가족이 살아갈 안전하고 건강한 환경을 기업에 헐값으로 내주는가?
왜 사람이 먹는 생명을 기르는 일을 단지 돈벌이 수단으로 보는 자들에게 맡기는가?
왜 우리는 소중한 우리의 어린것들을 살리는 생명의 밥상을 정체불명의 화학 밥상으로 바꾸려 하는가?”(pp.126~127)

다른 생물을 먹어야만 버티고 견딜 수 있는 인간은 참 후안무치에, 안하무인하고 몰염치한 존재가 됐다. 다른 생명에 대한, 자연에 대한 예의를 잊은 것이다. 다시 자신들에게 돌아올 것인데도, 사람들의 시야는 참으로 좁아졌다. 소를 먹든, 돼지를 먹든,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들이 구제역에 걸렸다고 무조건 학살을 시켜야한다는 주장 이전에, ‘돼지를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만들까’와 같은 생각을 먼저 해야 했었다. 고작 한다는 게, ‘어떻게 하면 돼지를 빠르게, 더 살이 많게, 더 크게, 더 싸게 키울 수 있을까’만 생각하니, 자본이 인간을 삼킨 것, 맞다.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방목 농장인 폴리페이스(polyface)의 ‘풀을 농사하는 사람’ 조엘 샐러틴의 말도 귀담을 필요가 있다. “미래에는 닭의 부리를 아예 없애는 유전자를 사용하거나 돼지의 스트레스 유전자를 제거한 뒤 더 좁은 우리에 돼지를 가둬 두는 일도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식물과 동물을 불경스럽게 보는 문화는 사람도 마음대로 조정하려 듭니다. 우리가 닭을 존중하는 것이 우리가 사람들의 사람다움을 인정하는 철학적, 윤리적, 도덕적 근간이 된다고 봅니다.”(p.159)

#4. 자, 우리의 지금 밥상을 보자. “출처를 알 수 없는 원재료에 식품 첨가물이 뒤엉킨 가공식품, 안전성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유전자 조작 식품(GMO), 공장과 같은 대단위 시설에서 길러지는 가축과 그로부터 나온 육류, 농약과 화학 비료로 범벅이 된 과일과 채소 등이 우리 밥상을 점령했다. 그마저도 귀찮을 때는 전자레인지에 데운 인스턴트 음식으로 그저 한 끼를 때우는 데 그친다.”(pp.8~9)

고로 밥상은, 이미 시장이 됐다. 자고로 밥상은 하나의 세계요, 우주였다. 칼로리 이상의 정보와 언어가 있는. 산업 시스템은 그것을 지웠다. 이윤을 최대화하려는 목적에 생명과 음식은 외면했다. 저자이자 다큐PD인 신동화 PD는, 우리는 음식을 완성체가 아닌 원료로 보는 편견에 물들었다고 지적했다. 완전 동의한다.

“음식은 단지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과 같은 영양소의 기계적인 조합이 아니라 그밖에 아직 과학이 밝혀내지 못한 수많은 요소가 역동적인 상호 작용을 통해 협업하는 진화의 완성품으로 봐야 마땅하다.”(p.230)

음식을, 생명을 바라보는 시각을 다시 예전의 것으로 되돌려야 한다. 너무 멀리 와서 잊어버린 것을, 다시 머리와 몸에서 끄집어내야 한다. 나는 책에서도 언급된, 무척이나 유명한 이 문구를 믿는 편이다. 당신이 먹는 게 당신을 만든다.(You are what you eat.) 먹을거리가 발휘하는 힘에 대한 믿음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그것을 옳다고만 주장하는 건 아니다.

먹을거리와 음식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으면 좋겠다. 도시는 물론 농촌까지 산업화된 먹을거리 시스템이 장악한 지금, 그 공고한 시스템을 깨기 위한 시도에 나는 관심을 갖고 있다. 화학 물질에 대한 둔감증을 야기하고, 유전자 조작에 기를 쓰는 자본의 폭주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자본의 침이 고인 먹을거리가 화학물질과 GMO에 우리는 농락당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음식은 ‘생명의 양분을 공급해 주는 성찬(聖餐)’이 아니다. 음식은 제품으로 자리를 굳히면서 우리의 몸 자체도 시장이 됐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몸은 이미 자본의 식민지다.”(p.154)

#5. 책에서 가장 인상 깊고, 관심 있게 펼쳐본 테마가 ‘페어푸드’였다. 공정무역 커피를 다루는 나는, 생산자도 생산자지만,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계층에 대한 고민도 함께 하고 있다. 억지로 말을 붙이자면, 커피 민주주의. 또한 어떤 커피를 마시는가가 정치적인 행동이 될 수 있다. 거기에는 사회와 경제 구조, 정치의 방향을 결정하는 지점이 있다.

의무(무상)급식 논쟁도 넓게 보면 포함이 될 텐데, 음식을 놓고서도 벌어지는 계급 간의 마찰계수는 꽤나 높다. 무슨 말인고 하니, 소득불균형에 의해 나타난 먹을거리의 질적 차이가 결국 건강의 불균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경제적 하위 계층은 값싸고 질 낮은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는, 국가의 개념 상실 혹은 정신줄 놓기가 계속 이어지는 실정이다.

“한 사회의 시스템과 문화가 약해지고 무너질 때는 가장 약한 곳부터 영향을 받는다. 음식의 생산과 공급 시스템이 변하면서 생기는 부작용도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부터 공격한다.”(p.190)

내가 눈 번쩍 뜨인 장면은 이것이다. 저소득층이 많이 거주하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웨스트 오클랜드 지역에서 펼쳐진 굿거리 장단! 몇몇 청년들이 한적한 주택가 한쪽 공터 앞에 사무실 탁자 두 개를 잇대어 만든 채소 가판대를 연다. 이 가판대에선 신선한 유기농 제철 채소와 과일을 공급한다. 이들은 ‘피플즈 그로서리(people's grocery)’의 멤버들이다.

인근의 놀고 있는 땅을 빌려 도시 농업을 시작한 이들은, 좋은 음식은 단순한 먹을거리와 영양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정의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피플즈 그로서리의 설립자인 브라함 아마디는 소외받는 사람들의 식생활이 새로운 사회 운동의 의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야말로, 푸드 저스티스, 음식 정의!

“음식은 건강으로 이어지고 건강은 행복한 삶과 직결된다. 이것이 바로 음식이 인간의 기본적인 인권이자 정의의 문제가 되는 이유라고 아마디는 역설했다. "음식 정의 운동은 인권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식품에 대한 동등한 접근권에 관한 운동이지요. 생활 방식과 문화는 환경과 인간 모두의 존엄성을 지켜 주는 땅의 이용, 음식을 생산하는 방식과 직결됩니다."”(pp.197~198)

음식을 통해 우리는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나도 그런 운동에 동참하고 싶다. 내가 만드는 커피가, 내가 손 댄 음식이 세상을 아주 조금이라도 덜 슬프게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

“음식은 사람들의 건강만이 아니라 세상을 치유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운동은 음식을 맛있고, 순수하게 만드는 활동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우리가 구매하는 음식과 연결된 정의의 시스템을 되살리는 일이다. 먹을거리를 둘러싼 온갖 문제를 밥상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문제로 인식하는 일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소득과 관계없이 건강한 음식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찾아 줄 수 있다. 음식은 인권이다. 현재의 음식 시스템은 저소득층이 살아갈 수 있게 건강한 음식을 공급하는 데 실패했다.”(p.198)

아마 공정무역 커피는 음식 정의를 완성하는 두 번째 기둥에 해당할 터인데, 농민에게 정당한 몫을 찾아주는 것에서 시작되는. 아울러 내 봄은 도시 텃밭, 베란다 텃밭과도 같은 생물과 함께 호흡하는 것에도 중점을 두고 싶다. 나의 카페, 우리의 카페 Soul 36.6 앞에 나는 녹색 생물이 자랄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마련해서, 그 생물과 이야기를 나누고 세계를 향해 페달을 함께 밟고 싶다.

책을 통해 거듭 다짐한다. 함부로 내 입과 몸을 학대하지 않도록 노력하자! 마음껏 먹고 마시자가 아니라, 삼대가 함께 먹고 있다, 라는 생각도 아주 가끔은 할 수 있기를. 생명을 위한 선택이다. 푸드 저스티스를 향한 작은 걸음이고. 그거 아니? 먹으면, 시를 짓고, 노래가 나오는 음식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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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간 VS 6시간 - 켈로그의 6시간 노동제 1930~1985
벤저민 클라인 허니컷 지음, 김승진 옮김 / 이후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에단 호크. 내가 좋아하는 이 배우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매일 세 시간은 책을 읽고, 세 시간은 일하는 것이 목표다.” 아마 이 말을 하면서 싱긋 웃었을 이 남자, 그 멋지고 뭉클했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통해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세상에 퍼뜨린 당사자답다. 아무렴, 지금, 현재를 즐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최소한의 일, 아니겠나. 

정말이지, 나도 그러고 싶었고, 싶다. 세 시간 일하는 것. 그건 에단 호크가 배우라서, 가능한 얘기라고? 글쎄, 지금의 ‘일돼지’를 양산하는 구조, (풀타임) 일자리 창출 논리에 젖었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IMF’라는 말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때,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분위기, 안 봐도 비디오잖나. ‘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라‘는 국가적 지령이 하달됐고, 다른 생각 따위 사치였다. 오로지, 일, 일, 일. 어디 감히, 떽. 일하라, 일이 너를 구원할 것이다. 오죽하면 ‘직업한국’(잡코리아?)라는 사이트도 생겼겠나.

군대 행정병 시절, 죽도록 행정업무 하는 것에 시달렸다. 다짐했다. 사회 나가면 절대 야근 따위 하지 않겠다! 그 다짐, 꺾어야 했다. 엄한 분위기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어리바리다웠던 거지. 죽도록 일했다. 오죽하면 ‘회사인간’이라는 소리 들었겠나. 오직, 회사와 일(집이 아녔다!). 당시 겪었던 개인적인 아픔을 잊기 위함이라는 명목까지 덧붙여, 일에 몰두했다. 간간이 일 잘한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그건 미끼였다. “자발적인 노예가 돼라”는 시대적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었다.

어쩌다 그리 했냐고? 핑계를 대자면, 베짱이(놀이)를 배격하고 개미(일)를 추앙하는 제도 교육의 병폐가 스며든 것 아니겠나.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고, 호모 파베르(만드는 인간)로 살아갈 것을 강요했던 어른들 가르침에 충실했던 것? 호모 파베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일해야 했다. 놀 줄 모르는 병든 현대인의 자화상. 대부분 그렇게 살지 않느냐고? 그러니, 문제다. 호모 파베르 천국, 호모 루덴스 지옥. 아, 대한민국, 일하다 죽을 지어다. (‘2008 OECD백서’에 의하면, 한국 직장인의 연간 근무 시간은 2357시간으로 OECD회원국 중 최고. OECD평균은 1777시간, 무려 600여 시간 오버다!)

미안하다. 잠깐 옆길로 샌다. 아트 축구의 대명사, 지단은 이런 말을 했다. “세상에는 축구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다.” 그에겐 축구가 ‘일’이었을 텐데, 거칠게 그 말을 바꿔 말하면, “세상에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다”가 아니겠나. 《8시간 vs 6시간》은 이렇게 말한다. “내 삶에는 회사에서 하는 일 말고 다른 더 좋은 일들이 있어요.” 아니, 일 하는 인간이 미덕인 지금, 대체 무슨 일하다 하루아침에 잘리는 소리냐!  

호모 루덴스, 여가의 인간들

여기, “인간의 본성은 놀이”며, “일은 결코 내 삶에서 중심도, 가장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고 말하고 실천했던 사람들이 있다. 일 아닌 여가(혹은 놀이)가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호모 루덴스. 1930년 12월, 대공황의 초입, 미국 배틀크리크 켈로그의 노동자들과 경영자였던 W.K.켈로그와 루이스 브라운 사장이었다. 놀이와 여가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것을 위해 운명과 목숨을 걸고, 명예와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사람들.

《8시간 vs 6시간》은 그 이야기를 다뤘다. “필요와 불가피성을 넘어선 실질적 자유와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위해 싸운 투쟁의 기념비”이자, “‘점진적인 노동시간의 단축’이 직업상의 합리적인 혜택이라고 보는 노동계 전통의 후예들”을 다룬. 책은 그들을 매버릭(mavericks)이라고 지칭한다. 즉, 주류에 거스르는 사람, 이단자. 8시간제(노동)가 대세가 된 후에도 6시간제를 고수한 소수의 노동자들. 일로부터의 자유를 꿈꾸고, 일보다 삶을 우선으로 삼던 사람들이다.   

책은 한편으로 먼 나라, 아주 머나먼 시대의 이야기 같다. 읽다 보면, 이런 한탄이 든다. 어쩌자고, 우린 일이 최우선인 시대에, 노예처럼 일에 굴종하며 살고 있을까. 대공황기, 고작 80년가량이 흘렀건만, 인류는 어쩌다 더 진보하지 못하고 퇴행했을까. 현대의 ‘과다 노동’이라는 전염병이 창궐하도록 내버려뒀을까.

물론, 한국은 그런 시대 겪지 않았다. 바로 조국 근대화를 위한 노동 착취의 시간을 관통했다. 어쩌면 노동 단축의 시대를 맞이해야 할 필연성이 부여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 “‘현대 세계에서는 과다 노동이 당연하다’는 통념에 반박하는 증거를 자신의 삶으로 보여 준, “추가적인 두 시간”을 가졌던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말이다.”(p.18)  

켈로그 노동자들은 대공황기를 시작으로 2차 대전 등을 거쳐 1984년까지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투쟁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노동을 단순히 적게 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삶에서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견해에 맞서 왔던 것이다. ‘(경제적) 불가피성’의 논리가 세를 키워 가는 와중에도, 그들은 쉬이 꺾이지 않았다. 산업화된 노동의 ‘외부’에서 보내는 시간(여가)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고 널리 알렸다. 즉, “일이 삶의 전부가 아니다.” 

“일이 하루 중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부분이 아니게 되면, 일은 진정으로 있어야 할 자리에 돌아갈 수 있었다. 곧, 일이 삶에 더 중요한 것을 제공하는 척 하지 않고 부차적인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이었다.”(p.269)

일이 모든 것을 삼키고, 일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끓는 사람들이 도처에서 발생하는 이 시대. 과연 우리에게 직업과 일은 무엇인지,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아니, 삶에서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성찰해볼 것을 권한다. 그들에겐 하루 2시간의 시간이 그것을 만들었다. 8시간이 아닌 6시간 노동제. 8시간 노동이 붙박이처럼 고정관념이 된 우리에게 2시간의 차이가 삶의 어떤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이 책은 보여준다.

다만, 좀 약하다. 6시간제를 경험한 켈로그 노동자들이 2시간의 추가 시간 덕분에 할 수 있었던 일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풀어놨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아카데믹하게 접근했다. 연구와 설문, 설명 등 학자적 태도로 일관한 것이 가독성을 해친다. 따옴표도 지나치게 많고, 괄호도 너무 많다. 

추가 2시간, 삶을 탐구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일은, 직업은 다른 더 좋은 일들을 위한 수단이었다. 추가적인 두 시간 덕에 그들은 회사 일과 집안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의무와 갈등과 통제의 바깥에 있는 시간을 가졌다. 자기 자신을 위해 다른 일들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었다.  

그러니, 그들은 삶을 좀 더 깊고 의미 있게 탐구한 사람들이다. 적어도 대공황 시절, 배틀크리크의 켈로그에는 이런 노동자들이 다수였나 보다. 그들은 6시간제 반대자를 ‘일돼지’, ‘야근 돼지’, ‘이기적’, ‘돈벌레’ 등으로 묘사하며, ‘고립된 집단’이나 ‘부적합자’로 생각했다니 말이다. 일이 삶의 최우선으로 저당 잡힌 지금, 일을 안 하면 ‘게으름뱅이’, ‘낙오자’ 등으로 묘사하는 것과 정반대의 것이다. 

그들에겐 여가가 그랬다. ‘삶에서 가장 진지하고 풍성한 활동이 벌어지는 시간이자 자유와 통제력을 누리는 시간.’ ‘하찮고 무의미하고 공허하고 낭비적인 시간’이 아니었다. 어떻게 삶을 가꾸어야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지금과 분명 다른 시대적인 여건과 환경이 있었겠지만, 그들은 선구자적인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새로이 알게 된 것이라면, 산업화의 병폐에 대해 노동계급이 제시해 왔던 치유책이 ‘노동시간의 점진적인 단축’이었다는 것이다. 켈로그의 6시간제 노동자들은 그것을 이어받은, 삶에서 진짜 자유의 의미를 찾고자 한 탐구자들이었다. 하긴, 지금의 우리는 잊고 있다. 아니, 생각하고 성찰하지 않는다. 살기 위해 일하지, 일하기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

“배틀크리크에서 이들은 힘든 노동과 산업 진보의 보상이 더 많은 일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필요한 것들”이 충분히 충족되면 노동은 더 나은 것들에 자리를 넘겨주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노동계급의 비전을 재확인한 마지막 노동자들이었다. “오로지 풀타임만”이라는 경영진과 노조의 새 수사법에 맞서, “살기 위해 일하지, 일하기 위해 살지 않는다”는 상식적인 말을 하고 “불가피성/필요성”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이야기함으로써 그에 도전했다.”(p.324)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죽을 때까지 개처럼 일할 자유’다. ‘영원히 더 많은 일’을 하면서 삶을 좀먹는다면 그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직업은 세속의 종교가 됐다. 일자리, 생존을 위해 중요한 것은 맞지만, 과연 풀타임 이상으로 매일 그것에 목을 매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유를 아는 인간으로서 맞는 것일까.

“직업은 사람들에게 정체성, 구원, 삶의 목적과 방향성, 공동체의 소속감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고된 노동”을 진심으로 믿는 자에게 삶의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마고 약속한다.”(p.32)

매버릭들은 문화적 굴종이 줄고, 문화적 부흥, 즉 속박되지 않은 자유로운 부흥을 꾀할 수 있었다. 여가가 게으름을 피우는 시간이라는, 조국 근대화의 논리는 틀렸다. 6시간 노동자들은 말했다. “일터를 떠나면 그게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이죠. 내 자신의 일을 하고 내 삶을 사는 시간이에요.”(p.284) 내 삶을 사는 시간. 이 말은 뭔가, 짜릿하다. 인간이니까. 

조지 버나드쇼와 줄리언 헉슬리는 20세기 말이면 노동시간이 최대 2시간으로까지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물론, 그 예측은 맞아 떨어지지 못했다. 허나 그것을 마냥 ‘틀렸다’고만 할 수 없다. 그들도 이렇게 급격하게 자본주의가 암세포처럼 창궐할 줄은 몰랐을 테니까. 당시, 이처럼 소비주의의 발흥, 자본주의의 구조적 속성, 노동이 차지하는 지위의 변화 등이 일어날 줄은 몰랐을 테니까.

자유, 호모 루덴스의 언어!

자유. 내가 책에서 가장 짜릿하게 받아들인 것은 이 단어였다. 8시간제와 6시간제를 비교해 보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이야기한 것도 ‘자유’ 혹은 자유와 관련된 어휘였다고 한다. ‘자유’, ‘자유 시간’, ‘자유로운 저녁’, ‘무엇 무엇을 할 자유로운 시간’, ‘무엇 무엇을 할 수 있음’, ‘무엇 무엇을 할 기회를 가짐’과 같은 말들. ‘자유의 언어’가 지배적인 화법이었다. 즉, “매버릭들은 추가적인 두 시간이 문화적 자원이며, 기존의 문화를 확장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데 쓰일 수 있는 시간임을 인식하고 있었다.”(p.296)

아마도 그들은 자유의 가치에 대해 알고 있거나, 본능적으로 따랐던 듯싶다. ‘단지 돈만이 아닌 가치들’, ‘재미’, ‘세상을 탐험하는 것’, ‘필요한 사람들에게 일자리 주는 것’ 등 호모 루덴스로서의 성정이 온전하게 발휘될 수 있었나 보다. 돈만이 최고의 가치가 아닌, 다른 가치를 찾을 수 있었던 시대와 정신. 잘 짜인 놀이 세계가 아닌 스스로 여가와 놀이를 통해 자유를 구현할 수 있었던 사람들. 시장지배와 교환관계로부터 자유로웠기에 가능했던 것 아닐까.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일상적으로 하던 활동들이, 자유의 언어를 통해 아름답고, 즐겁고, 더불어 즐길 수 있고, 아낌없이 나눌 수 있고, 다른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 활동으로 변모했다. 자유의 언어는 이러한 활동에 의미를 부여했듯이 그런 활동으로 만들어진 물건과 서비스에도 의미를 부여했다.”(p.128)

지금 대부분의 우리는 더 많이 일하지만 더 적게 받는다. 기술적으로는 발달했는데, 왜 사람들은 시간에 쫓기고 있을까, 고민해본 적 없는가. 컴퓨터를 쓰면서 과연 일이 더 줄었는가, 생각해보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하는 시간이 더 늘지 않았는가.

그때와 지금, 자유시간과 돈의 비중도 바뀌었다. 지금은 이른바 ‘시간 궁핍’이다. 돈은 있더라도 시간이 나지 않는 상황. 예전에는 돈은 없어도 풍요로울 수 있었다. 시간이 많으니 여가나 전통적인 활동은 DIY로 이뤄졌다. 돈 처들인 ‘잘 짜인 놀이 세계’에 돈 들여 서비스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미래를 향한 진보, 삶에서 어떻게 노동을 줄일 것인가

켈로그의 6시간 노동제는, 여가가 강력한 동기 부여 기제가 된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 같다. 국내에도 유한킴벌리, 포스코 등의 사례가 속속 생기고 있는데, 좀 더 담론이 많이 이뤄졌으면 좋겠고.

뭣보다 켈로그의 경우, 경영자들도 현명하고 개념이 박힌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브라운 사장은 노동 강도 강화, 장인 정신의 상실, 지루함, 단조로운 반복 등 노동자들이 느끼는 불만에 6시간제가 답이 되어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했다. 즉,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자들의 불만을 흡수해서 흩어 없애고 노동자들에게 활력도 주는 피뢰침이었다.”(p.62)  

그러니, 이런 말이 나오는 건 대수였겠지. “(6시간제 덕분에) 사람들이 덜 피로해졌고 일도 더 잘할 수 있었어요. (일에) 흥미도 더 가질 수 있었고요.”(p.141)

당대에도 켈로그의 6시간제는 국가적으로도 큰 호응을 얻었다. “대공황기에 벌어진 노동시간 단축 법제화 운동 내내(이 운동은 결국 실패했다), 노동계는 <켈로그>의 6시간제 실험을 일자리 나누기의 실제 사례로, 기업에게는 이윤을, 노동자에게는 자유 시간을, 실업자에게는 일자리를 주는 모범사례로 들었다.”(p.107)

모두에게 좋은 제도였고, 좋은 예로 자리를 잡는 듯했다. ‘일’이 아니라 ‘자유시간’이 삶의 중심이 될, 미래로의, 진보로의 길을 닦는 것처럼 보였다. 회사는 임금 총액 지출을 확대해 일자리를 늘렸고, 노동자들은 자유 시간을 더 많이 갖게 된 점을 반겼다.

당시 <인콰이어러> 기사의 결론은 이랬단다. “처음으로 노동자들은 진짜 여가를 가졌다.” 노동자들은 6시간제로 날마다의 일상이 바뀌었다. 일과 의무에서 자유가 중심인 삶으로 바뀌었다. 물론, 자유는 새로운 두려움들도 수반했다. 그것은 제도 교육의 탓도 있다. 여가에 대한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제도 교육도 그렇지 않은가. 오로지, 좋은 직업, 좋은 일, 그 ‘좋은’에 들어간 뜻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혹은 번듯한, 보수가 많은, 혹은 삶에서 최대한의 시간을 쏟아야 하는, 그런 뜻이지만 말이다.

6시간제의 쇠퇴와 몰락에는 결국 현실 정치의 힘이 개입했다. 그건, 결국 돈으로 시장 지배를 꾀한 자본주의자들의 모략이었던 것 같다. 루스벨트가 일자리 ‘창출’을 적극 내밀었고, 일자리 나누기, 노동시간 단축과 같은 개념이 밀리면서 해방적 자본주의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노동시간 단축을 앞장 서 추진했던 기업들은 비판을 받았고, 돈 앞에 무력했다.

결국, “일돼지들이 이겼다.” 2차 대전 뒤 노사 합의로 일자리를 줄이고, 입지가 확고한 소수의 노동자에게 풀타임 노동시간을 유지해주기로 한 결정에 대한 한 노동자의 회상이었다. 노동계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다. 일을 적게 하는 것이 더 많이 받는 것이라며 시간과 임금을 연결하던 노동계의 언어는, 시간과 임금 가운데 하나를 택일하도록 만든 ‘단절의 화법’으로 바뀌었다.

“어빙 번스타인은 복지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에게 주는 여러 혜택에도 결국에 허물어진 이유는 작업장에서의 통제력과 [경영에의] 민주적 참여라는 노동자들의 근본 열망을 해소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p.151)

이 책, 6시간 노동제에 대한 피상적인 나의 인식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누구에게나 일이 목적은 아닐 것이다. 수단일 텐데, 그 수단에 거의 모든 것을 뺏기다시피 많은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그 일에서 벗어나고자 택한 지금의 일에서, 나는 어떻게 자유와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들 것인가.

또 “나는 일해야 돼”라는 말이 가족이나 공동체에 대한 다른 책임보다 도덕적으로 우선하는 화법이 아닌지, 되씹어본다. 그렇다. 이런 말이 창궐한 것은, 채 100년이 되지 않았다. 책은 2차 대전 즈음 이런 말이 생겼고, 1950년대에 광범위하게 유통된 것으로 본다. 이 말은 가족이나 지역사회에서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거부하는 데에도 충분한 이유로 작용했다. ““나는 일해야 돼”는 도적적인 언명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한 세대의 <켈로그> 남성들에게 후퇴의 외침이었다.”(p.247)

내가 하는 일이, 우리가 함께 하는 일이, 나는 W.K.의 좋은 예처럼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회사를 일궈 나가면서 W.K.는 돈을 가치 있게 쓰는 방법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됐고, 공장 사람들과 지역사회와 미시건 주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p.80)

노동시간 단축은 그런 것의 일환이었다. 그는 공공 레크리에이션 시설들을 지었고, 레저 서비스도 제공했다. W.K.는 공공 영역이 확장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복지와 공공의 건강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유에 미래가 있으려면 공공 영역이 확장돼야 했다. ‘자유롭고 공공적인 생활’에 대한 지원, W.K.의 전설과 희망. 나는 나와 몇 명이 함께 할 일이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공공성을 지닌, 즐거운 먹을거리가 있는 곳.

조직을 위해 개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이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그런 회사. 회사가 개인의 삶보다 결코 중요하지 않은. 자유를 찾을 수 있는 수단으로 존재하는 회사. 자유에 대한 비전이 다시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우리들.

과연 나는 나아갈 수 있을까. 스스로도 치를 떨었던 ‘회사인간’에서 나는 물론, 함께 하는 노동자들도 제대로 벗어나야 한다. 브라운과 W.K.처럼. 일을 다른 더 중요한 목적을 위한 수단이자, 더 짧은 노동시간, 확장된 임금 지급액을 진보로 여긴 그들처럼.

곧, ‘유쾌한 6시간제’ 씨의 26주기가 다가온다. 1985년 2월8일 사망했거든. 실은, 난 6시간도 많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다. 에단 호크처럼 3시간만 일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도 4일제로. 난 참, 구제불능인가 보다. 그러니, 노조나 만들고, 상사나 경영진 들이 싫어하지.  

올해, 노동자 사장이 될 내게 그 2시간의 여가가 주어진다면 우쿨렐레가 최우선이다. 그리곤 매장에서 콘서트를 열 테다. 소식 듣거든, 오시라. 공정무역 커피와 유기농 디저트가 무료다. 물론, 6시간제를 찬성하는 매버릭들만 입장 가능하다! 일돼지는 오지 마시라. 구제역, 옮길지 모르니까. 지금 이 나라는, 소, 돼지를 ‘살처분’(이 말, 나는 반댈세!)하고 있는데, 진짜 살처분 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일 하라’고 무조건 다그치기만 하는 시장만능 사회지도층 자본가들의 대가리에 든 똥들.

잘 가세요, 내 좋은 친구여 - “옛 친구 6시간제에게

너에게 정이 무척 많이 들었구나. 

슬프지만 정말이야.

너는 우리 가족들이 더 가까워지게 해 줬지.

하지만 8시간제 씨가 말하기를, “나가서 일해!”

그가 이겼지.

하지만 우리는 웃지 않았어.

이제 너는 떠나고 우리는 너무 슬프구나.

너와 함께 우리 친구들도 떠나가니까!

“너” 없이는 “그만 두겠다”는 의리 있는 친구들 말이야.

이렇게 너는 우리를 떠나 우리의 설립자인 “K씨” 곁으로 가는구나.

우리의 몸은 “너”를 결코 잊지 않을 거야.

너는 우리 몸에도 너무 잘 해 줬으니까.

그리고 이제 침묵의 시간. 눈물을 흘리자.

우리는 두려움을 없애려고 노력할거야.

그리고 이제 비타민을 꺼내고, 의사에게 전화를 하자.

8시간이 우리 “모두”를 잡았으니까.

- 슬픔에 잠겨서, 이나 사이즈 Ina Sides가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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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의 선물 - 커피향보다 더 진한 사람의 향기를 담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이야기
히말라야 커피로드 제작진 지음 / 김영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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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마신다. 세상에서 가장 향긋한 내음이 코를 자극하더니, 입에서 퍼지는 향미가 뇌를 깨움과 동시에, 목구멍을 타고 마음을 적신다. 몸과 마음, 커피는 곳곳에 박힌다. 커피가 주는 선물이다. 아, 행복하다. 커피야, 고마워.

그와 함께 때론, 나는 울컥한다. 방금 마신 커피 때문만은 아니다. 선물 같은 이 커피가 어디서, 어떻게 온 것인지를 생각하면 그렇다. 커피 한 잔이 내게 오기까지 거쳐 온 수고를 생각하면 그렇다. 커피농사를 짓는 사람부터, 방금 커피를 따라 준 사람까지. 물론, 커피라는 농작물이 자랄 수 있게 해 준 흙, 안개, 햇빛, 바람, 비, 나무 등 모든 자연에 대해서도. 내게 행복을 주기 위해, 지구의 모든 것이 한데 모여 있다. 이 커피 한 잔에 말이다. 참으로 고맙다.

나는 커피를 만드는 사람이다. 멋으로 맛을 내는 사람이고자, 오늘도 커피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나는 커피라는 창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이다. 누구나 자신의 직업이나 관심을 통해 세계를 읽고 해석하듯, 나도 그렇다. 커피 그 자체와 함께, 커피를 둘러싼 다양한 세계에 나는 촉각을 세우고, 사유하고자 노력한다. 아마 그 덕분일 것이다. 내가 다루고 만지는 커피는, 공정무역 커피다.

말하자면, 커피노동자인 나는, 내가 만드는 커피가 누군가의 하루를, 순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커피가 어떻게 세계를 연결시켜주고, 어떻게 온 것인지 알았으면 하는 바람도.

커피 강의를 할 때마다 언급하고, 이전 글을 통해서도 언급한 적도 있지만,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이 말.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탁자에 앉아 남아메리카 사람들이 수확한 커피를 마시거나,
중국 사람들이 재배한 차를 마시거나 서아프리카 사람들이 재배한 코코아를 마신다.
우리는 일터로 나가기 전에 벌써 세계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
 

나는, 그리고 커피를 마시는 당신은 그렇게 이미 신세를 지고 있다. 커피 한 잔을 마실 때 세계의 누군가에게 신세지고 있음을 생각하면, 커피 향미가 더욱 짙게 다가온다. 사실, 이건 생소한 개념이 아니다. 우린 어릴 때, 부모로부터 학교에서 늘 이런 말을 들었다. 밥을 먹을 때마다, “니가 먹는 이 밥을 만든, 벼농사를 지은 농부의 노고를 생각해 봐라.” 나도 그랬고, 많은 이들이 대수롭지 않게 들었겠지만, 같은 맥락이다.

참농부가 여기 있었네

《히말라야의 선물》을 보고, 그래, ‘농부’의 뜻을 재차 다졌다. 누구보다 땅님의 힘을 믿고, 바람님, 해님, 물님, 별님, 안개님 등 자연이라는 큰 선생님의 뜻을 받들고 합일점을 찾는 분, 농부님. 네팔에 있다고 다르랴, 커피를 다룬다고 다르랴. 더구나, 그들은 잔머리 굴리지 않는다. 편하고 손쉬운 방법을 구하지 않는다. 그저 몸으로 밀어붙인다. 몸에서 우러난 철학이랄까. 교과서나 책을 통해 배운 것이 아니다. 땅을 일구고, 커피나무를 기르며, 유기농법을 하는 그들의 모습이 그렇다.

책의 저자이자 EBS다큐프라임 <히말라야 커피 로드>를 찍은 이들의 이야기다. “마을 사람들은 유기농법이야말로 자연이 그들에게 허락한 농사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을 거스르는 일은 해본 적도, 하고 싶지도 않다는 말레 마을 농부들. 이런 고집 속에서 단순히 커피 수확량을 늘리기보다는 깨끗한 커피, 건강한 커피를 키워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p.141)

거참, 돈독 든 화폐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뻘짓하고 자빠졌다. 많이 팔아서 많이 남겨야 미덕이지, 뭔 깨끗한 커피, 건강한 커피란 말인가. 화학 농약 화끈하게 뿌려줘서, 수확 빠방하게 하고 봐야지. 뭐어, 천연 비료? 천여언 비료오~ 그럼 소는 누가 키워? 소는? 하고 버럭할 일이다.

뭐, 그런다고 여기 말레 마을 사람들, 끄떡할 사람들도 아니다. “사람 몸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은 화학 농약입니다. 우리는 화학 농약은 전혀 쓰지 않아요. 우리는 약초로 천연 비료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도 식물에게도 절대로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커피를 정말 깨끗하게 만듭니다.”(p.141)

그러니까, 배운 놈들이 더하다는 말, ‘틀린’ 말이 아니다. 말레 마을표 유기농 비료를 만드는 이쏘리의 경우처럼, 여기의 커피 농부들은 편하고 빠른 방법 대신 느리지만 자연과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땅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그 땅이 건강한 커피나무를 길러낸다는 것을 몸으로 알고, 땅에서 배운 현자들.

하다못해, 열네 살 커피 농부 수커바르도 이리 말한다. “만약에 제가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건강에 해를 끼칠 거예요. 그래서 좋은 유기농법을 이용해 커피 농사를 짓고 싶어요.”(p.254)


아, 이런 커피, 당신이라면 마시지 않을 텐가? 내 알기로 많은 공정무역 커피가 그렇다. 내가 다루고 만드는 공정무역 커피 역시. 나도 그래서, 종국엔 농부하고 싶다는 거고. 어린 커피나무를 쓰다듬으며 두 손 모아 “커피가 이 땅에서 잘 자라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커피 농부의 모습을 지녔던 이쏘리처럼.

커피, 말레 마을의 모든 것

열한 가구가 사는 말레 마을. 어쩌다 커피나무를 재배하게 됐지만, 마을 인민들은 저자들이 마을에 발 딛기 전까지, 커피가 어떤 맛인지, 어떻게 먹는 것인지,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도 몰랐다. 처음엔 커피를 환영하지도 않았고, 그저 생계에 도움이 될까, 아이를 학교에 보낼 수 있을까, 하나둘 시작한 것이 커피나무 재배였다.

허나, 이젠 커피가 그들의 삶에 깊이 삼투했다. 그들에게 커피가 어떤 존재이냐면, 희망의 다른 이름이요, 최고의 치유약이며, 돈이었다. 또 행복을 가져다주고, 공부를 할 수 있게 한다. 친구 같은 존재요, 더 나은 방향으로 삶을 이끈다. 가족이자, 미래며, 약속이다. 인생의 전부이자, 의무요, 아름다움이다. 슬픔과 상처를 이기는 방법이다.

우리가 무심하게 마시는 커피 한 잔에 담긴 마음과 삶이다. 커피 한 잔 마실 때마다, 이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허나, 이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크나큰 차이다. 세계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달라진다. 그것은 곧 행동과 실천이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히말라야의 햇빛과 안개, 그리고 농부들의 정성 어린 손길을 머금고 마침내 말레 마을 올해의 첫 커피가 완성되었다. 한국에서 무심히 마시던 한 잔의 커피. 그 안에 말레 마을 사람들의 정성이 이렇게나 깃들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p.304)

특히나, 책이 술술 읽히는 것은, ‘이야기’가 잔뜩 묻어있기 때문이다. 열한 가구, 모든 가구마다 커피에 얽힌 사연과 이야기가 읽는 이를 툭툭 건드린다. 모든 이야기는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며, 다큐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주인공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 다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지만 말레 마을이 좀 더 특별했던 이유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커피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다는 것이다.”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스물다섯 미나 판데의 이야기가 가장 아릿했다. 남편을 사별하고, 다섯 살에서 아홉 살까지의 모두, 만주, 마야, 머니스 등 먹성 좋은 네 아이를 키우는, 말레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가족. 황무지와 사투를 벌여, 맨손으로 커피 밭을 일군 스물다섯 억척여인의 분투가 말이다.


 

그 미나가 이파리 하나 달려 있지 않은 막대기, 즉 죽은 커피나무에 물을 주는 이야기와 사진에서, 나는 커피의 쓴맛을 알싸하게 느껴야 했다. 물 준다고 살아날리 없는 커피나무에 물을 줄 수밖에 없는 그 마음 때문에. 가족에게 유일한 희망의 끈인 커피를 놓치지 않으려는 그 마음 때문에 말이다.

말레 마을의 가장 어린 커피 농부이자, 가장 좋은 커피를 재배한 수커바르, 가진 것 없이 가난하나, 식구들이 헤어지지 않고 모여 사는 게 가장 큰 소망인 다슈람, 산사태로 육십 그루의 커피나무가 죽고, 단 한 그루에서 희망을 바라본 이쏘리, 커피와 가족을 위해 열 살짜리 아들을 스승으로 글을 공부하는 서른여덟의 문맹 아빠, 로크나트 등. 모두가 그렇게 커피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투영하고 있었다.

커피 한 잔으로 맺는 관계

아, 다시 묻겠다. 이런 커피, 당신이라면 마시지 않을 텐가? 커피가 그냥 커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커피에 묻은 이야기, 삶, 세계가 커피 향을 더욱 북돋지 않는가 말이다. 책은 굳이 공정무역임을 내세우진 않는다. 자연스레 공정무역이 왜 필요한가를 말레 마을 인민들을 통해 스며들게 한다. 그게 최선이다.

공정무역이 최선이냐고 묻는다면, 확실하냐고 되묻는다면, 물론 뜸을 들일 수밖에 없다. “공정무역(Fair Trade)은 저개발국 생산자에게 정당한 몫, 공정한 대가가 돌아가도록 한다는 목적 아래 펼쳐지고 있는 운동”(p.226)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좀 더 근본적인 대책은 아니다. 기존의 시장질서체제 내에서 작동 가능한 모델이기 때문이다. 공정무역이 당장 이들의 경제적 가난을 타파할 수는 없다. 세상의 빈곳을 약간 메우면서, 더 나은 체제를 고민하는 단계라고나 할까.

허나, 이것마저도 외면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커피는 세계(교역과 경제시스템)의 불공정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품 중 하나다. 그건 좀 더 깊이 들어갈 필요가 있지만, 이 책은 그것까진 다루지 않는다. 물론 그것이 흠은 결코 아니다. 우선은, 이런 이야기가 널리 퍼져야 한다. 선물을 함께 나눠야 한다.

누구든 꿈꾸는 유기농 삶. 말레 마을의 커피 농부들을 통해 그것을 살짝 엿볼 수 있다. 덕분에 우리 마음도 은근 유기농이 된다. 더 질 좋은 커피, 더 깨끗한 커피를 키워내겠다는 말레 마을 인민들의 꿈이 있기에, 우리는 더 질 좋은 커피, 더 깨끗한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커피를 골라야 하는지 좀 더 자명해지지 않는가. 다른 커피가 불공정하다는 건 아니지만, 커피 한 잔이 어떤 세계를 품을 수 있는지, 나와 당신의 커피 한 잔이 어디에서 어떻게 온 것인지 안다면, 커피가 더 맛있게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당신은 자부심까지 살 수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공정무역에 대한 오해 중의 하나라면, 비싸지 않느냐는 건데, 모르고 하는 소리다. 좀 더 알아봐라.

유기농 커피는 제각각 익는다. 인위적인 처방이 아닌 자연 법칙 그대로 따르다보니 한 나무 안에서도 열매가 익어가는 속도가 다르다. 한 배에서 태어난 자식이라고 다 똑같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러니, 공정무역 커피도, 익어가는 속도가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처음부터 와 닿아서 실천하는가 하면, 다른 이는 와 닿아도 실천이 느릴 수 있고, 혹자는 와 닿지도 않고 실천하지도 않을 것이다.

커피 열매가 익기까지 기다림의 미덕이 있듯, 커피 한 잔의 여유가 일상에서 필요하듯, 우리는 지난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는 수밖에 없다. 공정무역이 빈곤을 단박에 벨 수는 없으며, 세상을 뒤집을 수는 없다. 허나, 이 책을 읽는다면, 내가 만드는 커피를 마신다면, 앞으로 커피는 댁들이 평소 알던 그런 커피가 아냐. 커피 장인(농부)이 한 알 한 알 정성스레 심은 커피콩으로, 바리스타가 그 노력과 마음에 자신의 마음과 노동까지 담아 빚어낸 선물인 거다. 그게 바로 내가 아는 커피의 관계(학)이다.

“혼자서는 갈 수 없기 때문에 모두가 힘을 합쳐 준비해야 하는 것이 커피로드”(p.307)라고 했다. ‘커피 한 잔 마시기까지의 길’(커피로드)에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연관돼 있고, 신세를 져야 하는지 알겠지? 대문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그랬다. “모든 것은 모든 것에 잇닿아 있다.” 커피 한 잔으로 우리는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커피의 역사》의 저자인 하인리히 E.야콥의 말도 하나 인용하자면, “한 잔의 커피는 경이롭고 놀라운 관계의 집합체이다.”

커피 한 잔 마시자는데 왜 그렇게 까다롭냐고. 그러니까, 세상 너무 띄엄띄엄 보지 마라. 확~ 수틀리면, 카푸치노(거품) 키스해 줄 테니까. 언제든 말만 해라. 참, 카푸치노가 마냥 좋은 건 아니다. <시크릿 가든>에서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겠지만, 사회지도층과 가난한 계층이 카푸치노 키스로 하나가 됐다고 착각하지 마라. 그렇게 계층, 인종 등으로 분리된 사회를 카푸치노 사회라고 부른다.  

지금, 우리의 사회가 그런 셈이겠지. 돈 있는 놈과 돈 없는 분으로 나뉜, 거품 가득 낀 사회. 기회가 된다면, 좀 더 자세한 카푸치노 이야기도 들려주마. 오늘은 이만하고, 그래, 커피 한 잔 하자. 널 위해 만들어주마. ‘준수의 선물’이다. 너와 난, 그렇게 관계를 맺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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