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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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마지막 날, 소셜벤처 경연대회, 커피 케이터링 지원을 나갔다. 
참고로, 소셜벤처는 이렇게 정의된다. 창의성과 혁신성을 바탕으로 하는 진취적 사회적기업 모델로 영업활동에서 발생한 수익으로 취약계층에게 사회서비스나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는 기업이다. 뭐, 말은 번지르르한데, 쉽게 말해 '돈벌이(혹은 돈놀이)에 영혼이 잠식되지 않은' 기업쯤 되겠다. (도둑과 도덕을 구분하지 못해,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 지칭한 이번 정권의 머리 빈(MB) 양반도 나름 심혈을 기울이는 일자리 자구책이 사회적기업과 소셜 벤처이기도 하다.)

3년 전부터, 매년 열리는 이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예전엔, 자신이 가진 재능과 기술, 의지로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의 모습으로 읽었었다. 물론 그들의 눈빛엔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패기와 함께 어떻게든 수상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커피를 건넸었다. 맛있게 마시라는 말 뒤에 생략했지만, 당신이 바꿀 세상을, 세상을 바꿀 당신을 지지한다는 내 마음의 말이 있었다. 내가 건네는 커피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자들에게 윤활유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 내 커피가 사회변혁 추동에 이바지했으면 좋겠다는 소원. 더구나 나는 커피가 혁명의 불쏘시개가 됐던 이야기에 혹한 자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오늘은 좀 다른 마음이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야만의 세상. 나는 어지간한 대사건(그건 아마도 침팬지의 혁명적 외침인 <혹성탈출:진화의 시작>과 같은)이 아니고서야, 이 야만은 꾸역꾸역 증식할 거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아프고 슬픈 지구를 위해 개인의 노력을 행하는 것. 공정무역 커피를 마시고, 차를 덜 몰거나, 식습관을 바꾸며, 윤리적소비에 나서는 것. 좋다. 암, 좋은 일이다.

허나, 그런 것들은 그저 자기 만족이다. 야만 박멸에 크게 기여하지 못하는 것 같다. 경제적으로 풍요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미친 빅딜이나 경제적 제국주의 국가들의 통렬한 자각과 대오각성에 의한 분배적 정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야만은 점점 더 뚱뚱해질 게다.

그러니까, 그들의 뚜벅이 걸음은 사소한 성공에 가깝다. 큰 실패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지는 드문 경우. 희뿌연 안개 속에서 그나마 어설프게 비치는 반짝이. 그러면 그것은 절망인가? 아니. 사소한 성공은, 결국 내가 바뀌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다. 세상을 바꾸기 보다는 야만의 세상이 강요해서 바뀌는 인간 본성을 놓치지 않기. 

오늘 내가 그들에게 건넨 커피는 그런 의미였다. 부디, 바뀌지 않기를. 야만이 당신을 덮쳐도 당신은 스스로를 지켜나갈 수 있기를. 최소한 괴물은 되지 않기를. 이미 많은 인간이 괴물과 좀비로 바뀐 도가니가 된 세상이니까. 내가 건넨 커피가 당신이 바뀌지 않을 수 있는데 작은 자극이라도 되길 바랐다. 

한편으로, 그것은 분노의 다른 표현이었다. 
나는 그들이 소셜 벤처를 꿈꾸고, 사회적기업을 지향하는 것이 지금의 야만에 분노하는 것이라고 봤다. 내가 바뀌지 않기 위해 야만에 대해 분노함으로써 그들은 사회적인 뭔가를 끄집어낸 것이다. 개인의 분노가 내면을 향하면 우울이 되지만, 사회성과 관련한 사고를 관장하는 전두엽은 분노가 밖으로 표출되도록 돕는다. 사회적 인간의 본성이 그렇다. 왜 사회가 이 모양인가, 에서 우리는 본디 고민을 하도록 태어났다. 고민하다 보니, 답이 딱! 이리 살면 안 되겠다.

이 노친네, 스테판 에셀은 그래서 '밖으로' 분노할 것을 권한다. 분노하라고 대놓고 분탕질(?)을 한다. 분노할 거리를 내놓고는 야만에 진상짓(!) 좀 하라고 일갈한다. 지금 이대로 살아도 진짜 좋냐고 묻는다. 전체의 이익보다 특정인의 이익이 옹호되고, 부가 정당하게 분배되지 않고 금권을 지닌 누군가에게 편향되며, 국가 금권 외세에게 종속된 언론이 판을 치며, 인권을 겁박하는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 야만 혹은 도가니가 버젓이 똥폼 잡고 유세 부리는 세상에서 말이다.
    


여기 이 말을 보자.

"이른바 '불법체류자'들을 차별하는 사회, 이민자들을 의심하고 추방하는 사회, 퇴직연금제도와 사회보장제도의 기존 성과를 새삼 문제 삼는 사회, 언론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된 사회, 결코 이런 사회가 되지 않도록." 

꼭 지금의 한국 사회를 말하는 것 같다. 93세의 레지스탕스 노투사의 이 말은, 프랑스 사회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렇다면 프랑스 사회나 한국 사회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다는 말일까? 일정 부분은 그렇다. 여러 제반 여건을 비롯해 정치, 문화, 사회적인 상황이 다름에도, 전 지구적인 현상에서 비롯되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이른바 '세계화'라는 표현에 맞게끔, 전 지구의 연결망이 과거에 비해 확실히 촘촘해졌다. 거기에는 자본의 무한증식 포섭력(?)이 가장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이권을 향한 무한도전이 빚어낸 자본의 자기증식은 국가나 국경을 가리지 않았고, 어디든 돈 될만한 곳이라면 손을 뻗쳤다. 자본의 세계화는 세계의 많은 풍경을 획일화시키고 일찍이 없었던 일을 보여주고 있다.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가 이렇게 큰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돈을 좇아 질주하는 경쟁을 사람들이 이토록 부추긴 적도 일찍이 없었다."(p.15)

세상은 어떻게든 상호연결돼 있다.
자본이 그것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어어~ 하다가 사람도 자본이 원하는 야만에 휩쓸리게 됐다. 덕분에 세상을 바꾸는 것만큼이나 내가 변하지 않으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시대가 됐다. 광활한 세계를 상대로 그렇게 해야 한다.

짧게는 30~40년, 더 길게는 산업혁명 이후 200년 이상을 참아왔다. 그런데, 이젠 참을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하고 있다. 그렇지 않나? 언제부터 우리가 다른 사람을 짓밟고 자연을 무시하고 살았나. 왜 같은 일을 하면서도 정규, 비정규로 가르고, 친구를 사치로 여기게끔 만들었나. 청년들이 이렇게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아이들이 사육기계로 전락당하는데, 속수무책이어도 되나. 

세계의 상호연결성이 나쁜 방향으로만 작동하다보니, 그 폐해가 엄청나다. 노투사의 물음은 그래서 지금-여기에도 그대도 적용된다.
  
"잘 되어가는 사회란 무엇입니까? 모든 시민에게 생존의 방편이 보장되는 사회, 특정 개인의 이익보다 일반의 이익이 우선하는 사회, 금권에 휘둘리지 않고 부가 정의롭게 분배되는 사회입니다."(p.62)

이를 세 단어로 줄이면, 자유, 평등, 박애. 

야만이 세상을 삼키면서 함께 소멸되고 있는 단어였다. 그런 형편에서 우리의 분노는 안으로 향했고, 자존감을 잃은 개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스테판 에셀이 무관심을 최악의 태도로 꼽은 것은, 끊임없이 인정투쟁을 원하는 인간의 본성을 꿰뚫은 까닭이리라. 분노는 그래서 무관심의 반대말이다. 노장은 권한다. 자꾸 '삑살이'를 내면서 세계를 공황의 수렁으로 몰아넣는 화폐권력에 분노하라고. 아무렴, 지금 필요한 건, 그것!

"전에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쉽게 체념해버리던 일들을 이제 그냥 당하고 있지만 않고 이에 맞서 일어설 때가 온 것입니다. 특히 점점 더해만 가는 경제권력, 금융권력의 압제에 맞서 싸울 때가 온 것입니다."(p.64)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좋다.
내가 변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에서 나는 작은 숭고함을 봤다. 자기 나름의 분노의 동기를 갖고 그들은 하나둘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인정을 받고, 사회에 자연스레 스며들면 더욱 좋겠지만, 그 노력만으로도 나는 충분해 보였다. 스테판 에셀이 나치즘에 분노하였듯, 그들은 청년들이 실업의 고통에 시달리고, 돈 없다고 무시당하며, 장애가 있다고 일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현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투사였다. 스테판 에셀의 말("서양인들의 '생산 위주의 사고방식'은 세계를 위기로 이끌었으며, 그 위기로부터 탈출하려면 '항상 더 많이'라고 외치며 앞으로만 질주하는 태도와 과감히 결별해야 한다.")을 봤든 아니든, 그들은 야만과 주류의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분노할 줄 아는 투사였다.

나는, 투사들의 각성을 돕는 도우미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건넨 커피가 그들의 분노를 제대로 촉발하는 각성제가 되고, 나의 커피하우스는 제대로 된 분노를 깨칠 수 있는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 그렇게, 나는 오늘 또 하나의 꿈을 꿨다. 9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가을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고, 분노도 익어가고 있었다. 노장, 스테판 에셀의 덕분이었다.

헌데, 책을 보면서 그의 분노에 공감하는 한편, 이성적 분노의 기원 또한 흥미진진했다.  
사실 '93세의 레지스탕스 노투사'라는 수식이 주는 후광이 너무 강한 것 같았다. 존경할만한 노장의 일갈은 분명 강력한 것이지만, 그런 식의 수식보다 더욱 놀랐던 것은, 집안 분위기였다. 프랑수와 트뤼포의 1961년작 <쥴 앤 짐(Jules And Jim)>이 관련된!  



트뤼포가 묘사한 그 놀라운 삼각관계는 바로 스테판 에셀의 부모의 이야기였다. 그가 세 살 때 어머니는 아버지의 절친과 사랑에 빠지고, 두 남자는 한 여자를 공유했다. 헌데, 이 놀라운 일은 영화 이전의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를 비도덕적인 일로 여기기 않았고, 세 사람은 세간의 윤리가 아닌 그들만의 윤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을 바라본 소년, 스테판 에셀이 있었다. 그 역시 남달랐다. 아니, 그다웠다. 무엇보다 그는 이런 관계에 흔들리기보다 자신만의 중심을 잡았다. 어머니 덕분이었다. 그는 충분히 자존감을 지닌 인격체로 자랄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 어머니의 동거남, 그리고 자신 가운데 어머니 엘렌의 사랑을 가장 많은 받은 사람은 자신이었다는 확신. 행복해지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행복해지려고 노력했던 사람. 어머니의 사랑과 행복이 그를 제대로 분노할 줄 아는 사람으로, 지금까지 그를 지지해왔던 것이다. 분노할 줄 아는 노장의 탄생이 놀랍고 즐거웠다. 

문득 궁금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또 다른 사랑이 나타난다면, 나는 어떡할 것인가. 스테판 에셀의 아버지, 프란츠 에셀과 같은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글루미 선데이>의 선율이 뒤따른다.

한국판으로 별도 삽입된 스테판 에셀의 인터뷰가 없었다면, 《분노하라》의 재미는 분명 떨어졌을 것이다. '스테판 에셀 비긴즈'를 엿볼 수 없었을 테니까.


나는 이 말을 믿는다.

노장에 대한 존경이 없는 사회의 노장은 불행하고,
존경의 대상을 갖지 못한 젊은이들은 더 불행하다.

《분노하라》가 프랑스 출간 7개월 만에 200만부를 돌파한 것은, 노장에 대한 존경의 의미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젊은이들은, 모르긴 몰라도 존경의 대상이 있어서 마냥 불행하지만은 않으리라. 물론 진짜 필요한 것은 분노할 줄 아는 젊은이들이다.

프랑스 문필가, 앙드레 모루아는 나이를 먹는 기술에 대해, "뒤를 잇는 세대의 눈에 장애가 아니라 도움을 주는 존재로 비치게 하는 기술, 경쟁상대가 아니라 상담상대라고 생각하게 하는 기술"이라고 말했다. 스테판 에셀은 도움을 주는 존재, 상담상대로 생각하게 하는 걸 보니, 제대로 나이가 든 사람으로 여겨진다.  
 

나도 나이듦이 그러했으면 좋겠다. '꼰대'가 아니될 순 없겠지만, 이를 가능한 한 늦추면서 '노장'이 될 수 있으면 빙고~! 커피로 제대로 된 분노를 추동할 수 있는 기쁨. 그것을 바란다. 내가 오늘 건넨 커피가 그들이 가진 분노의 또 다른 엔진으로 작동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있을라고. 그래서 (세상의 야만에) 분노하는 젊은이들이 세상의 야만에 굴복해, 세상에 맞춘다는 명목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내 커피는 할 일을 다했다. 중요한 건, 소셜 벤처 혹은 사회적기업을 대표하는 것보다 지키기로 마음 먹은 것을 지속적으로 지켜나가는 것. 그것이 또한 제대로 분노하는 길이다.

그런데 사실,
오늘 커피를 건네면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지난해 노조를 만든 이화여대 미화노동 여사님께 커피를 건넨 일! 소셜 벤처 참여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묵묵히 그 뒤에서 미화 노동을 하고 계신 여사님께 커피 한 잔을 권했고, 쭈삣쭈삣 먹어도 되느냐고 수줍어 하시는 여사님께, 나는 호탕하게 그럼요~라고 답했다. 부디, 그 커피가 여사님의 하루를 잠시라도 빛나게 해줬던 순간이길. 커피 한 잔은 가끔 그렇게 마술을 부리기도 하니까. 마음이 필요할 때는 커피!    
 
"삶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남에게 베풀고 싶은 마음과 베푸는 기쁨을, 남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책임을 감수하는 것. 어떤 경우에도 남에게 베풀고 싶다는 마음, 이 마음을 북돋워야 합니다. 사람을 책임 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성과 감성을 키워주는 것이 바로 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교육을 통해 계발해야 하며, 마음 교육을 위해서는 상상력의 힘을 빌려야 합니다."(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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