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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여자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시몬 드 보부아르는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했다. 

사적 고백록으로 그칠 수 있었던 질문을 보편적 여성 조건을 탐구하는 것으로 전환시켰던 질문. 

집필 당시 그는 심지어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다고 한다. 

여성 문제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며 그의 의식이 깨어난 것. 


What is femininity?

오랫동안 이 문제에 천착해왔다. 과연 여성성이란 무엇인가?

여성성은 존재하는가? 여성성은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The female is female by virtue of a certain lack of qualities. We should regard women’s nature as suffering from natural defectiveness.” Aristotle said. 


아리스토텔레스의 얼척없는 이 말은 아마 길이 회자될 인간 의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가 아닌가 싶다.


He grasps his body as a direct and normal link with the world that he believes he apprehends in all objectivity, whereas he considers woman’s body an obstacle, a prison, burdened by everything that particularizes it. 


인간의 의식은 발달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1938년까지 프랑스 여성은 법적으로 신분증과 여권을 소지할 수 없었고, 1944년에 참정권이 허용되었으며, 1975년까지 낙태죄는 사형에 처했다.) 여성이라는 정상적인 인간의 범주에 들지 않았던 존재가 아리스토텔레스 시절에는 “어떤 자질의 결여”로 생긴 존재이자 “자연적 결함 때문에 고통받는 것이” 여자들의 본질이라는 관점은 심장을 덥게 만든다. 


70년대 이후에나 여성이 법적으로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인정받게 되었으니 2021년 현재 우리가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해 끝나지 않는 논쟁을 이어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 백 년이 흐른 후 지금의 논쟁을 들여다본다면 마치 백 년 전 여성의 참정권을 두고 설전을 벌이던 때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한 심정이 들겠지?


중요한 건, 나 자신 또한 여성을 바라볼 때 뭔가 불완전한 존재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어딘가에 고립된 채 문제를 해결하는 여자들이나 격한 신체 운동을 하는 여성들을 보면 생리나 생리통을 떠올린다거나, 내가 어떤 판단을 하거나 결정을 내릴 때 후견인 같은 남자들의 권위와 식견을 보이지 않게 의지한다는 것. 


스스로 독립적인 주체로 생각하지 못하고 좀 더 완전한 존재에게 의지하고자 하는 보이지 않는 관성은 나 또한 시대와 문화, 관습과 습관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미국 여자들의 경직되고 도전적인 태도는 그녀들이 여성성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했는데, 나는 거기게 덧붙여 여성성이 무엇인지, 여성성을 자신있게 입어도 되는 것인지 혼란스런 상태에서 취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태도가 아닌가 한다. 나 스스로가 여성성에 얽매이기 싫어 반대편으로 질주했던 경험을 돌이켜보면. 여성성에 사로잡혔다기 보다는 여성성을 온전히 들여다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가깝지 않을까. 


Why do women not contest male sovereignty?

In order for the Other not to turn tinto the One, the Other has to submit to this foreign point of view. Where does this submission in woman come from? There are as many women as men on the earth.


소수가 아닌, 인류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이 왜 그토록 오랫동안 남자의 관점에 복종했던 것일까? 좋건 싫건 상호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관계에서 여자들은 왜 그토록 오랫동안 타자화되었던 것일까?


Even when her rights are recognized abstractly, long-standing habit keeps them from being concretely manifested in customs.


개념적으로 여성이 남성과 동일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실제 남녀관계나 가족관계, 직장에서 남녀 임금격차, 그리고 내재화된 관습적 사고는 lag time이 걸린다. 머리에서 몸으로 가는 데 걸리는 시간. 

무엇보다 재생산, 아이의 교육에 남성적 사고가 절대적으로 작용함으로써 남성 중심의 사회는 굳건하게 유지된다. 


The present incorporates the past, and in the past all history was made by males.


현재는 과거의 그늘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과거는 모두 남자들에 의해 씌여졌다. 


Refusing to be the Other, refusing complicity with man, would mean renouncing all the advantages an alliance with the superior caste confers on them.


여성이 억압자와 공모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에서 출발하면 자연스럽게 이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타자화되는 것을 거부하는 건 그 공모에서 얻는 이익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 


Lord-man will materially protect liege-woman and will be in charge of justifying her existence: along with the economic risk, she eludes the metaphysical risk of a freedom that must invent its goals without help.


억압자에게 종속됨으로써 독립적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자유로움을 잃게 된다.


“Blessed be the Lord our God, and the Lord of all worlds that has not made me a woman,” Jews say in their morning prayers; meanwhile, their wives resignedly murmur: “Blessed be the Lord for creating me according to his will.”

아침마다 유대인들이 드리는 기도. 이 무슨 엿같은 일상화가 있는가?


Among the blessings Plato thanked the gods for was, first, being born free and not a slave and, second, a man and not a woman.

플라톤은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어서, 여자가 아닌 남자여서 신께 감사했다.


Males could not have enjoyed this privilege so fully had they not considered it as founded in the absolute and in eternity.

They sought to make the fact of their supremacy a right.

남자들의 착각, 여성들의 공모로 이루어진 고착화. 



Lawmakers, priests, philosophers, writers, and scholars have gone to great lengths to prove that women’s subordinate condition was willed in heaven and profitable on earth.

Those who made and compiled the laws, being men, favored their own sex, and the jurisconsults have turned the laws into principles.



Yes, women in general are today inferior to men; that is, their situation provides them with fewer possibilities: the question is whether this state of affairs must be perpetuated.

종교, 철학, 신학, 생물학,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을 통해 남성들은 여성들의 열등함을 증명하려고 노력해왔다. 실제로 지금 여성들은 열악하다. 열악한 기회에 놓여있다. 그들은 남성과 똑같이 일하고 임금을 적게 받고, 자신들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도 한다. 여성들은 더 많은 기회를 차단당하고 그것을 감수한다. 과연 지금의 상태는 계속되어야 하는가?





여성, 시몬 드 보부아르,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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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10-04 2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나뭇잎처럼 님의 이 글 읽고 영어본 사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저도 영어본 살래요! 글도 잘 읽었지만 무엇보다 영어본에 대한 뽐뿌 감사합니다. 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앞으로 계속 펼쳐질 나뭇잎처럼 님의 글이 너무나 기대되네요! >.<

공쟝쟝 2021-10-04 21:12   좋아요 1 | URL
저두 같이 기대하며 영어에서 입딱 벌리기 ㅋㅋㅋ 😫 우리들 너무 똑똑한거야 😩

나뭇잎처럼 2021-10-04 22:01   좋아요 0 | URL
너무 벅찬 기분으로 휘갈겨 쓰는 바람에 오타가 작열이네요. 영어본 + 오더블 오디오북.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영어문장을 낭독하면 시몬 드 보부아르가 빙의한 느낌이 들어요. ㅎㅎㅎ 같이 가요. 그 길 ㅎㅎㅎ

단발머리 2021-10-06 1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은 페이퍼 잘 읽고 갑니다.
이번달에 여러분들이랑 같이 읽으니 정말 각별한 마음이 드네요. 나뭇잎처럼님의 다음 글도 기대할께요.

나뭇잎처럼 2021-10-08 17:09   좋아요 0 | URL
저두 좋은 글 감사합니다. ^^ 같이 읽는 건 처음인데 왠지 더 의지가 솟는 기분입니다. 요런 재미가 있네요. 한 번 지대로 읽어볼라구요. ㅎㅎ 으쌰!
 

서문을 읽다가 전율이 오는 경우는 

최근 나오미 클레인의 <자본주의는 어떻게 재난을 먹고 괴물이 되는가> 이후에 처음이다.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영어로 된 한 문장을 읽고 감전된 것처럼 무릎을 치다가,

의미가 좀 모호할 때는 번역된 문장을 보고,

번역된 문장으로 몇 줄 읽다가 다시 영어로 된 문장을 찾아보고,

한 단락이나 한 페이지가 끝날 즈음에는 

다시 오더블(audible)을 켜고 기개 넘치는 내레이터와 입을 맞춰

큰 소리로 낭독을 한다.


문장 하나에 소환된 나의 옛 기억들은

다시 또 다른 글쓰기의 소재로 공책 한 바닥을 메우고,

스크리브너(Scrivener) 도큐먼트에 쌓이고,

오늘 아침 골목길에서 광속으로 질주하며

길을 건너는 내게 쌍욕을 퍼부은 낯선 남자에 대한 단상에 주석을 추가한다.


끝을 내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나의 역사, 나의 경험을 온전히 들여다보는 것이야말로

이 책을 통해 내가 가닿을 지점인 것 같다.


옮긴이 이정순은 보부아르가 ‘나에게 여자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했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사적 고백록’에 그치지 않고 보편적 ‘여성 조건’의 연구하는 것으로 전환된 것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그녀의 엄청난 노작에 감사하면서도

보부아르의 사적 고백도 이 정도의 깊이라면 문학사에 길이 남을 역작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보부아르는 말한다. 어떤 편견 없이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건 불가능하다고.

그래서 자신이 택한 관점을 먼저 밝힌다. 실존주의 윤리관.

이를 통해 여자라는 사실이 우리의 삶의 어떤 면에 영향을 미쳤는지, 어떤 가능성이 부여되었고, 어떤 가능성이 거부되었는지, 우리 다음 세대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고 우리는 어떤 방향을 가리켜야 하는지.


How will the fact of being women have affected our lives? What precise opportunities have been given us, and which ones have been denied? What destiny awaits our younger sisters, and in which direction should we point them? But it is no doubt impossible to approach any human problem without partiality.


The perspective we have adopted is one of existentialist morality.

Every subject posits itself as a transcendence concretely, through projects; it accomplishes its freedom only by perpetual surpassing toward other freedoms; there is no other justification for present existence than its expansion toward an indefinitely open future.


Every time transcendence lapses into immanence, there is degradation of existence into “in-itself,” of freedom into facticity; this fall is a moral fault if the subject consents to it; if this fall is inflicted on the subject, it takes the form of frustration and oppression; in both cases it is an absolute evil. Every individual concerned with justifying his existence experience his existence as an indefinite need to transcend himself.


Woman’s drama lies in this conflict between the fundamental claim of every subject, which always posit itself as essential, and the demands of a situation that constitutes her as inessential.


그간 남성들이 쓴 과거에 기반해 여성들이 열등하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해 온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유대인이나 흑인처럼 소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이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착취 당했는지, 

어떻게 그런 ‘공모’가 가능했는지 남은 900여 페이지에서 밝힐 것이다.


그녀는 하나의 질문에서 출발했다.

What is a woman?


그리고 다음과 같이 질문을 쪼갰다.

How, in the feminine condition, can a human being accomplish herself? 

What path are open to her? Which ones lead to dead ends? 

How can she find independence within dependence? 

What circumstances limit women’s freedom and can she overcome them?


위대한 질문은 위대한 여정을 출발시킨다. 

얼마나 걸릴지 모를 출항을 시작한다.



여성, 시몬 드 보부아르, 페미니스트,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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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1-10-04 2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항해가 될 것입니다. 즐기소서!

나뭇잎처럼 2021-10-04 20:52   좋아요 1 | URL
멋진 항해에 즐거운 벗이 되어 주시길 ^^ 공쟝쟝님 리뷰 읽고 벌써 반했지만요. ㅎㅎ

다락방 2021-10-04 2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영어본과 함께 하시는군요!!! >.<

막시무스 2021-10-04 2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출발부터 파도가 만만치 않은것 같지만 끝까지 함께 완독하시죠!ㅎ 응원할께요!ㅎ

나뭇잎처럼 2021-10-04 22:0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느낌이 드니까 좀 힘이 납니다. 다 다락방님 덕분이죠 ㅎㅎ 저도 막시무스님 응원할게요. 서문에서부터 뭔가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죠? 막시무스님 글에서 딱 느꼈어요. 그거, 바로 그거! 하면서요. ㅎㅎㅎ

막시무스 2021-10-04 22:07   좋아요 0 | URL
한글로 한번, 영어로 한번! 두번이나 맞았죠!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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