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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함께 쓰기다 - 나를 발견하는, 글쓰기 모임 사용 설명서
김민영 외 지음 / 북바이북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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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의 약속보다는 타인과의 약속을 지킬 같다.”


글을 쓰고 싶다는 지인들과 달에 글을 써서 합평하자,라고 소박하게 글모임을 시작했다. 평생 처음 단편을 써보고, 서평이나 에세이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시도해 보았다. 쓰지 않으면 같아서 온몸이 근질거렸는데 막상 써놓고 보니 저런, 내가 써낼 있는 글이 고작 정도인가,라는 절망감에 빠졌다. 그래도 궁디 팡팡 서로 두들겨주면서, 때로 가슴 아프지만 정확하게 꽂히는 지적질도 감내하면서, 그렇게 꾸역꾸역 서로에 대한 약속을 지키려 애를 썼다. 물론 아주 대단한 노력을 들인 아니다. 달에 번이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반이나 달에 번씩 만나기도 했다. 그리고 어제, 강화도로 워크샵을 떠났다.


나는 쓰는가에서부터 시작해 지속적으로 쓰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이 제시되었다. 달랑 다섯 명이지만 안에서도 역학이 존재한다. 굴러가려면 입장 차에 대한 이해와 방향에 대한 조율은 필수다. 치유에서, 기록과 존재의 이유까지 쓰는 이유는 다양했다. 따라서 쓰는 것에 대한 절실함도 다를 수밖에 없다. ‘좋은 대한 시각 차도 분명 존재한다. 그럼에도 모임을 지속시키는 ? 결국 멤버에 대한 관심과 매력, 그리고재미.


<이젠, 함께 쓰기다>에서 인용한 <모멸감> 구절처럼,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신뢰의 공동체구축. 글은 명분일 , 중요한 그런관계 만들어내는 . 거창하게 인문학 공동체까지 것도 없다. 옆에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인간과 만들어내는 관계. 알고 지내는 사람들과 공동의 목표를 두고 만들어내는 관계에서 매순간 삶의 양식을 시도하고 재구성할 있다. 나는 그것이 민주주의를 훈련하는 것이라고 본다


무엇을 위해 읽고 쓰는가


오랜 화두이기도 하다. 앎의 욕구에 급급한 독서는 사유의 바다로 나가는 길을 쉽게 열어주지 않았다. 나를 증명하기 위해 안달하는 글쓰기는 성취도 만족도 모두 멀리 달아나게 만들었다. 별처럼 빛나는 사람들이 말하는엉덩이로 써야 한다 금과옥조는 엉덩이로 쓰지 못하는 현실을 진저리치게 했다. 기실 중요한 그냥 아니라어떤 어떻게써야하는 것이 아닌가. ‘써야한다 거대한 중압감에 스스로를 옥죄고, 쓰지 않음을 탓하고, 쓰지 못함을 한탄하는 과오를 오래 반복했다


우리는 숨을 쉬지만 의식하며 호흡하는 훈련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수행자가 아닌 다음에야  호흡을 의식하며 살진 않는다.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숨도 쉬고) 게눈 감추듯 먹어치우기도 하고, 목청껏 노래부를 때는 (호흡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호흡을 의식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어있는 모든 순간 호흡을 의식하면 삶을 깊게 알아차릴 있다. 내게 글쓰기는 호흡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삶을 살아있게 만드는


타고난 폐활량은 모두 다르다. 나에게 주어진 폐활량을 꾸준한 운동을 통해 건강하게 유지하는 중요하다. 하지만 매순간 또는 매일 호흡을 의식하고 호흡해야 한다는 의식은 버리기로 했다. <이젠, 함께 쓰기다>에서 글쓰기 습관을 들이기 위해 ‘100 쓰기 프로젝트 서로 격려하며 완수했다는 글쓰기 모임의 성과는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그것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음으로써 다른 자유를 맛보았다. 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지 않는 . 모든 욕심과 욕망을 내려놓는 . 그것이 어쩌면 글쓰기의 진정한 시작이 아닐지


이번 워크샵의 가장 소득은 글쓰기의 강박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매일 써야 한다는,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놓여나는 . 나는 에베레스트를 등정하겠다는 열망도, 42.195km 완주하겠다는 목표도 없다. 언젠가 허락된다면 뮤어 트레일을 걷고 싶다는 희망조차 없는 아니지만. 힘을 빼고 천천히 걷는 산책이야말로 내가 바라는 가장 지극한 기쁨이 아니겠는가. 산책에 관한 김영민 글이 힘이 된다.


삶의 출발점과 종착점을 임의로 확정하고 고집하는 모든 독단주의자들은 걷지 못한다. 산책은 상처입은 미로의 삶이 기억, 혹은 의도의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외출이며, 오연한 의도의 체계, 앓을 수밖에 없는 기억의 체계와 창의적으로 불화하려는 생활정치다. 산책, 그것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선 자본제적 체계와 생산적으로 불화하는 삶이다. 출구는 체계의 곳곳에 하리가 들어 강제력이 어긋나거나 뒤틀리게 만들 있도록 하는 다른 삶의 양식이며, 양식을 이드거니 유지할 있는 연대와 실천적 현명함이다.” <동무론> 김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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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10-09 17: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합평 모임을 해보았지만 오래 가긴 힘들던데,

부럽습니다. ^^

나뭇잎처럼 2016-10-10 16:07   좋아요 0 | URL
글을 쓰는 것 못지 않게 사람 사이의 간격과 태도를 세심하게 돌보는 것이 수반되어야 하는 일인 것 같더라구요. 사람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없으면 글을 보여준다는 행위 자체가 성립하기 어려운 일이니까요. 글보다 공이 더 들어가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뿌듯함도 있는 것 같고요. 이제 겨우 일 년이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임을 가꾸고 돌보는 사람들에게 달려있는 것이겠죠? ㅎㅎ

Lomain 2016-10-09 1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군을 제대한 뒤 휴학을 하며 작가 선생님 밑에서 글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배우는 중에 학교에서 복학 통지서가 날라왔고, 복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다니며 혼자서 글 공부도 하고 글도 써내려갔습니다. 그런데 합평을 하던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서 그런지 얼마 안 지나 소모임을 찾아 가입했습니다. 어느새 지금은 그 소모임이 동아리가 되어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오고갔지만 그래도 꾸준히 합평에 참여하는 친구들 몇 명이 있으니 모임이 지속되더군요. 중요한 건 `의욕`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나뭇잎처럼님이 하신 말씀처럼 저에게도 그렇고 그들에게도 글쓰기는 호흡일 테죠. 그리고 서로의 호흡법을 봐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뛸 때도 저마다의 호흡법 다르듯이요..ㅎㅎ 그리고 서로의 호흡을 듣다보면 의욕에 탄력을 받을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나뭇잎처럼 2016-10-10 16:14   좋아요 0 | URL
아, 어쩐지. 그래서 글이 그렇게 탄탄했군요! 하고 싶은 말을 참 잘 정리해서 얘기한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는데. 공부와 합평을 통해 쌓인 내공이 리뷰글을 통해서도 드러나는 것 같아요. Lomain님 말씀을 들으니 고등학교때 장거리 달리기를 함께 뛰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숨이 턱까지 차서 대열에서 낙오하는 친구가 있으면 둘 셋이 붙어서 같이 구령을 붙이며 함께 완주했었죠. 함께 뛰는 것은 혼자 뛰는 것보다 확실히 힘이 되는 것 같구요. 저마다의 목소리가 다르듯, 저마다의 호흡이 다르고, 그 다른 호흡과 목소리를 가까이서 느끼고 듣는 것도 큰 공부와 재미가 되는 것 같아요. 단, 서로 진심으로 이야기하고 들을 수 있을 때. 자신의 호흡을 주의깊게 관찰하는 것 못지 않게 함께 뛰는 사람들의 호흡을 세심하게 듣는 것이 결국은 글 공부이자 삶 공부란 생각이 드네요.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한정판 더블 커버 에디션)
알랭 드 보통 지음, 김한영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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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생일을 하루 앞두고 투견판에서 사슬 풀린 개처럼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 무엇 때문에 목청을 돋웠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질 않는다. 생일날 아침, 나는 알랭 보통의 책에서 발췌한 문구로 시작하는 손글씨 편지를 휘갈겼다. 생일을 축하하는 건지, 똑바로 하라는 건지, 경계가 모호한 문구를 적어내려갔다. 결혼 8년차 남편의 생일은 그렇게 비수 아닌 비수를 꽂으며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무릎을 치며 보통의 글을 읽었다. 반백이 모자란 나이가 보통은 이십 중반 똘똘이 스머프 같은 명석함으로 사랑을 프레임씩 끊어 찍은 듯한 데뷔작에서 어느덧 인생의 지혜나 깨달음 같은 느끼게 만큼 연륜이 묻어나는 글을 써냈다. 그의 책을 완독한 주가 지난 지금, 주옥과 같은 문장들은 모두 휘발되어 흔적없이 사라졌다. 인생이 그렇다. 마음 먹은 대로 되는 법이 없다. 읽고 쓰는 부지런히 해보자고 시작한 서재질도 회사에 긴급 프로젝트가 떨어지면 모든 올스톱이다. 괜시리 쉬지 않고 읽고 쓰면서 살아온 보통에 대한 질투심만 화르르 불타오른다.


잊어버릴까봐 사진 찍어 남겨둔 페이지에서 휘발되지 않고 남은 문장을 찾아냈다

새벽 3, 그는 이상하리만치 냉철한 기분으로 자신의 잘못을 나열해본다. 상사들의 불신을 유발하는 괴팍한 , 너무 쉽게 화를 내는 , 거절이 두려워 조심하는 ….. 그는 자신 있게 어떤 일에 매달려본 적이 없다. 그의 나이에 다른 사람들은 요청이 들어오길 기다리고 절실히 요청하지 않는다며 세상을 비난하는 대신, 팔을 걷어붙이고 그들 손으로 건축 회사를 세웠다. 그의 이름이 새겨진 건물은 하나, 하트퍼드셔의 어느 자료 보관 시설밖에 없다. 그는 샤워를 하거나 혼자 고속도로를 달릴 머릿 속에 떠오르는 순간적인 영감으로만 남았을 , 대부분 발휘되지 못한 재능과 함께 죽어가고 있다.

순간 그는 자기 연민, 그에게 일어난 일이 드물거나 부당하다는 얄팍한 믿음을 벗어났다. 자신이 순수하고 유일무이하다는 믿음도 어느새 잃어버렸다. 이건 중년의 위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마침내 30 년이나 늦게 사춘기를 벗어난 것이다.”


마흔이 넘어 시작된 질풍노도의 시기가 사춘기냐 오춘기냐를 두고 설왕설래 했는데, . 사춘기 막바지 진통이었다니! 허를 찔린 기분이랄까. 자신이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이 아니라 많고 많은 조약돌 하나라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이 어른이 되는 것인가. 어른이 된다는 그렇게 슬픈 일일까.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어른이 되지 못해 밤마다 신열에 들뜨고 마는 어린 중생은 무슨 수로 구원을 얻을 있을 것인가. 난감하다.


남편 , 결혼은끊임없이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고, 상대를 인정하는 법을 배우며, 이해의 폭을 넓히며 동지가 되어가는 이란다. 보통이 정의한 결혼 -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가하는 대단히 기이하고 궁극적으로 불친절한 행위 - 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괜찮은 남자와 살고 있는 거다. 종종 불타는 적개심을 돋게 만드는 남자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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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벌고 잘 살기 - 나와 그들의 새로운 일하기 실험
김진선 지음 / 슬로비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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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2014년 4월 16일 이후다.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그동안 개인주의적 삶을 반성하고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시작한 것이 독서토론 모임들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꼭 세월호가 아니었더라도 마흔이라는 나이, 직장에서 점차 줄어드는 나의 입지, 미래에 대한 불투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욕심내지 말자고 다짐하며 하나씩 시작했지만 타고난 열정을 주체하지 못해 독서토론 모임은 너덧 개까지 늘어났다. 친구들과 하는 문학독토, 회사 직원들과 하는 UX독토, 선배들과 시작한 생태/교육 독토, 참여연대 강의에 다중지성의 정원 세미나까지. 그 와중에 100북스 같은 데서 강연이 있으면 쫓아가기도 하고, 조중걸 선생의 미학강의에도 덜컥 가겠다고 손을 들어버렸다. 지금은 다리를 다쳐 모든 걸 스톱한 상태이지만 친구들과 하는 글쓰기 모임과 앞으로 나의 활동의 기초가 되어줄 생태/교육 독토(현 우리미래)는 계속 이어갈 생각이다.


시작은 모두 그럴듯했다. 다들 그냥 이렇게 사는 것에 대해서 목마름이 있던 터라 조금만 건드려주어도 쉽게 넘어왔다. 함께 고민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를 힘이 되었다. 하지만 지속에는 다른 공력이 필요했다. 가령 나와 생각이 맞지 않을 경우,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 경우, 그 낯선 것에 대한 반응이 결국 다음 모임의 지속을 가늠하는 기초가 되었다. 무엇을 읽느냐도 중요했다. 아무리 생각이 비슷하다 하더라도 어려운 책을 꾸역꾸역 읽는 것은 그다지 남지 않았다. 쉽더라도 서로 공명할 수 있는 책이 더 효과적이었다. 혼자 읽을 엄두가 안 나는 것들을 독토를 핑계 삼아 읽으려 했던 욕심은 결국 자신에게 '완독'이라는 허무한 메달만 안겨줄 뿐, 승리의 기쁨도 함께 나눌 사람도 저만치 달아나게 했다. '어려운 책을 소화하는 데 급급해 삶과 연결시키지 못했다.'고 자성하는 저자의 독백이 내심 반가웠던 것은 나의 시행착오가 나만의 것은 아니라는 안도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부는 왜 하는가

사실 '공부 = 책 읽기'라는 등식은 맞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하면 우선 책부터 떠올리는 오랜 습관이 있다. 많은 것들을 책으로 먼저 배웠던 경험 때문인 것 같다. 잡지를 만들면서 기획회의를 준비할 때면 가장 먼저 향하는 곳이 서점과 도서관이었다. 그 주제에 대한 현재 트렌드를 파악하기에는 서점이, 역사적 흐름과 전반적인 배경, 맥락을 파악하기에는 도서관이 알맞았다. 그렇게 일단 세상에 나온 생각들을 한번 일갈해야 좀 알 것 같은 안도감이 들고,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운 같은 것이 솟구쳤다. 서점과 도서관에만 가면 맥박이 뛰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 삶의 에너지에 강력한 전원을 공급받은 양 짜릿했다. 어쩌면 가장 쉽고 안전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말처럼 공감하는 말도 없다. 머리로만 하는 공부를 권장하고, 그에 익숙하게 키워진 착실한 모범생으로서 다른 방법과 다른 답을 찾고자 하는 내면적 욕구를 무던히 죽이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게 가장 편하고 익숙한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익숙한 습관은 또 다른 욕망을 낳는다. 그 분야를 꿰뚫고 통달하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 정통인 사람의 책을 찾아 읽으며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 마치 영어문장 1200개를 외우면 영어를 잘할 수 있게 되고, 정석을 통째로 외워버리면 수학을 잘하게 된다는 생각이 다른 학문 분야에도 확장되는 것이다.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그래서 한국 학생들의 초중고 학업 능력은 높은 편이다. 하지만 원리를 깨우치지 못하고, 무엇보다 학문을 파고들어 가며 느낄 수 있는 희열을 거세한 학습법이기 때문에 후반전에서 거의 낙오한다. 평생 공부인데, 일단 그런 낮은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더 나아갈 힘을 모두 소진하고 마는 것이다. 여전히 과학, 인문 분야에서도 암기와 반복을 강조하는 학습법이 있다. 마찬가지로 일리가 있다. 눈으로 읽고 마치 제 것인 양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체화시켜 자신의 언어로 구술할 수 있는 능력이 진정한 독서라는 주장에 공감한다. 그들이 주창하는 구술과 암송은 '무조건'이라는 단서를 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암송의 목적이 남들에게 잘난 척하고, 그것을 '안다'라는 사실로 자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반복적으로 사색하고, 곱씹으며, 그렇게 정말 내 것으로 만들어내는 일. 천천히 시간을 들여 나의 삶에 적용하고 연결하려는 노력에 더 가까울 것이라 믿는다.


나는 더 알고 싶은 욕망으로 허우적거렸다. 하나를 읽으면 더 읽어야 할 책이 한보따리가 늘었다. 늘 조금만 빌려오자 마음 먹고 도서관을 가지만, 나올 때는 남편 대출증까지 탈탈 털어 한보따리씩 지고 왔다. 그 중에는 필사하며 심독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목차를 보고 주요 내용만 발췌해서 읽는 책도 있고, 결국 반납할 때까지 손을 대지 못하는 책도 있다. 뭐든 하나에 꽂히면 지뢰찾기게임처럼 한쪽 영역을 모두 다 짚어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이 크다. 하지만 그것이 또한 나의 생김이고, 그 노력을 통해 진주를 발견하는 보람도 있으니 잘못된 악습이라고만 치부할 것은 아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욕심을 덜어내고 마음을 다스리는 성찰의 기회로 삼으면 되니까. 점차 빌려오는 양도 조금씩 줄고, 빌려온 책을 완독하는 비율도 높아지고 있으니 경과는 나쁘지 않다. 공부를 할 때, 책에만 의존하는 경향도 스스로 경계하고 있으니 그 또한 매우 바람직하다. 


독서는 결국 공부의 한 방법이다. 이때 독서는 '통독'과 '완독'에 더 가까운 의미이다. 독서가 진짜 공부가 되려면 ‘숙독(熟讀)'과 ‘지독(遲讀)',’완독(緩讀)',’미독(味讀)'이어야 한다. 그리고 진짜 공부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다. 사람 사이가 가장 치열한 '수행처'이고, '실험장'이며, '학습장'인 것이다. 아는 것은 공부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아는 것을 행할 때 그것이 진짜 공부가 된다. 공부란 결국 내가 살면서 겪는 의문과 시행착오,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보다 나은 삶, 가치 있는 삶을 위한 '우보(牛步)'인 것이다. 남들 앞에서 아는 것을 자랑하고, 위에 서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본래적 자아를 깨닫고, 그만큼이나 중요한 타인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것이어야 한다. 호기심을 적절히 주체하고, 무엇보다 끈기 있게 지속해야 한다. 공부는 삶의 다름 아니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생 지속해야 할 일이다. 내일 당장 시험을 앞둔 공부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이 공부라고 생각하면, 이 불같은 욕망이 좀 수그러들 수 있을까.


사람 사이 관계 맺기

친구들과 하는 문학독토에서 가치관이 다른 언니와 미묘한 신경전이 있었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내면서 서로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있어 그저 만나면 반가운 사람이었는데 책을 통해 삶의 가치를 꺼내놓다 보니 막연하게 느껴졌던 거리감이 실체를 띠고 나타났다. 중산층, 가정주부, 특별한 문제의식 없이 안온한 삶을 지속하고 있는 그녀에게 나의 도발적인 생각과 말은 부담이 되었고, 그 부담에서 나오는 반작용이 나 또한 편하지 않았다. 어차피 인간은 잘 변하지 않는다, 아닌 사람에게 너무 애쓰지 말자, 나와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은 제한적이다,라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참여연대 수업에서는 나름 진보라고 생각하는 역사교사의 터무니없는 성차별 의식을 듣고 피가 더워지는 걸 느꼈다. 정의당에서 일하는 활동가가 과시하는 부르주아적 삶에 대해서는 갸우뚱하다가 다소 폭력적인 발언에 씁쓸해하며 수강을 접었다. 직원들과 하는 독토에서는 맥락없이 부유하는 생각들로 가득 찬 상대에게 귀 기울이는 것이 몹시도 피곤하게 여겨졌다.


독토는 책을 통해 사람을 만나는 자리다. 하나의 텍스트를 각기 다른 시선으로 읽은 것을 확인하며 이해와 공감의 폭을 넓히고 보다 깊이 있는 독서를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중심을 책에 두느냐, 사람에 두느냐는 각각의 독토에 따라 성격을 달리한다. 배움에 비중을 두는 경우에는 각자의 개성을 죽이고 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노력을 들인다. 풍부한 토론을 목적에 두는 경우에는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밝히고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견이 있을 때 서둘러 합의하기보다는 각자의 입장에 대해서 충분히 서술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그런 원칙들이 머릿속에 있었지만 실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사람의 배경과 조건으로 그 사람의 이야기를 얕잡아 본다거나 무시하는 우를 종종 범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와 다르다라는 생각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같지 않은 방식과 태도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에 종종 분개했다. 


"차이를 보이는 게 당연한 일인데 그때는 왜 그것을 문제라고 여겼는지 모르겠다. 같아서 함께하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생각을 나누고 맞추는 과정이 즐거운 것 아닐까. 서로의 차이를 좁혀가며 조금씩 '함께'를 경험하는 것이 바로 협동조합의 일하기 방식일 테니 말이다." - P.87


어쩌면 나는 아직도 그 차이에 익숙하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남편이라는 동반자를 만나 7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살아오면서도 늘 나와 다른 그에게 종종 놀란다. 다시 말하면 그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하는 것이 훈련이 덜 되었다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다름과 차이가 창조의 근본이라는 책들은 두루 읽어 아름답게 이야기하지만 정작 내 삶에서 그 다름과 차이를 얼마나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돌아보면 적어도 아는 만큼은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커뮤니케이션은 나와 다른 남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그 성패가 달려있다. 셰어하우스에서 같이 살기로 한 사람들이, 공동체를 지향하며 함께 마을을 꾸려 정착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가장 극심하게 겪는 어려움도 바로 그 차이에 대한 태도이다. 어디선가 공동체 운동이 실패로 끝날 때마다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나와 코드가 달라서'란 이야기를 듣고 웃었던 적이 있다. 오죽하면 마을운동의 성패는 각자의 ‘영성’(주1)을 키우는 것이라고 할까. 회사에서 흔하게 경험하는 커뮤니케이션 미스, 혹은 부재는 당췌 나와 다른 것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모르는 대한민국 교육의 희생자들의 지옥구덩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사적인 친밀감이 있는 관계는 아니지만, 가치관이 공명한다고 느껴질 때 관계에서 신뢰가 생기는 것 같아요." - P.45


인문학 독서모임에서 시작해 전자책출판협동조합까지 예기치 않았던 삶의 반전과 확장을 지속하고 있는 제현주 대표는 카이스트, 맥킨지 컨설팅 출신의 재원이다. 딱 봐도 이성과 감성의 비율이 90:10으로 보이는 그녀는 명석함에 비해 살가움은 부족한 스타일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가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오랫동안 관계를 지속하고 또 그들과 함께 일을 도모하는 것을 결행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책의 실험'이라는 지속가능한 출판을 모색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나로서는 흥미롭기만 하다. 무조건 일을 같이하려면 뜨겁게 심장이 맞부딪혀야 하고, 술이라는 윤활유로 끈끈하게 엮여야 하고, 인생의 크고 작은 일들을 살갑게 나누며 친밀감을 형성해야 한다는 익숙한 고정관념에서 좀 떨어져 있다. 대신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자신이 정확히 알고, 그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들을 알아보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부담 주지 않고 지속하는 관계. 어쩌면 그 느슨하고 은근한 관계가 장수의 비결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와 다르다고 보채거나 짜증 내지 않고, 어차피 다 다른 거니까 라며 냉소적으로 외면하지 않고, 주의 깊게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공명을 일으키는 신뢰야말로 시간을 통해 얻어낸 값진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름에 대한 인정 못지않게 관계의 온도를 미세하게 조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관계의 지속은 물론 건강까지 책임지는 척도가 아닐까 싶다.


우리에게 일이란

저자 김진선은 첫 직장 아름다운 가게를 시작으로 포털 사이트 네이버까지 10년간의 직장 생활을 접고, 2년 동안 새로운 일하기 모델을 탐색하면서 든 질문에 대한 실험을 이 책 <적당히 벌어 잘 살기>에 담아 출간했다. 스스로 '일과 삶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한 탐색과 실험'이라는 주제로 명명한 그녀의 보고서는 몇 가지의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그녀가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예를 들어 1. 밥이 되는 공부가 가능할까란 '질문'을 세우고, '그래서 만났다' : 남산강학원, 롤링다이스, 이런 식으로 보고서를 정리했다. 2. 친구들과 꾸린 재미있는 일이 밥벌이가 될까? 3.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기업이 어떻게 오래 지속할 수 있을까? 4. 적게 일하고 잘 살기 위해 어떤 활동을 모색할까? 등이 그녀가 설정한 질문이다. 질문을 세우고 답을 찾아가기 위한 과정이 남다르지 않아 뜻하지 않게 전율하며 읽었다. 회사에서 작게 독서모임을 시작하고, 여기 저기 학습공동체를 기웃거리고, 친구들과 작당하여 새로운 일을 도모해보고, 그 와중에 필연적인 갈등도 겪으며, 조금씩 성장해갔던 그녀의 여정이 마치 내 얘기처럼 들려 반가웠다. 어쩌면 나의 고민은 나만의 고민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미생들의 고민이구나, 공감하며 위안이 되었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논리는 이 시대의 요구와 맞닿아 있고, 그것을 성찰해볼 기회없이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인양 착각하며 살아온 시간들을 돌이켜보게 되었다.


"<3만엔 비즈니스, 적게 일하고 더 행복하기>의 저자는 우리의 삶이 진정 행복한지 묻는다. 야근과 잔업을 밥 먹듯이 하고 있진 않은지, 주5일 동안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하며 업무에 허덕이진 않은지, 일에 대한 보상으로 주말에 취미 활동을 몰아서 하느라 더 바쁘게 보내고 있는 건 아닌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주말 활동에 더 많은 돈을 쓰게 되고 그러다 보면 결국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악순환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 P.217


가슴이 뜨끔했다. 소비를 통해 욕구를 해소하고, 더 많은 소비를 위해 스스로 노예적 삶을 승인하고 있는 나에 대한 뼈아픈 일침이었다. 적게 벌어서 적게 쓰면 되는데, 조금이라도 많이 쓸 생각에 자신을 함부로 내돌린 것은 아닌지. "모든 낭비 가운데 당신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낭비는 노동의 낭비다."라고 했던 존 러스킨의 말이, "돈과 지위에 대한 걱정이 대부분인 사람들은 진정으로 자신이 택할 수 있는 것이 무언지 생각하는 능력을 소멸시켜버렸다."라는 알랭 드 보통의 말이 떠올랐다. 시급 6,030원을 받으며 생계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겐 사치스러운 고민으로 들릴까. 월급도둑 운운하며 태업을 걱정하는 사장님들에겐 씨나락까먹는 소리일까.

실제로 일에 대한 정의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변화해왔다. 궁극적으로 높은 이상과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일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었고, 원래 괴롭고 힘든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자본주의의 태동과 더불어 신이 주신 소명이라는 노동윤리는 떠도는 한량과 베짱이들을 공장으로 불러들여 고된 노동을 시킬 수 있는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해주기도 했지만 현재 발달한 자본주의는 더 이상 대규모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맑스는 모든 가치는 노동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하며 필요한 만큼 노동하고 가져가야 한다고, 한나 아렌트는 일을 생존을 위한 노동, 작업, 그리고 정치적 활동으로 세분화했다. 현대의 능력주의와 소비주의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더 많은 헌신을 요구하고, 소비라는 강력한 최음제로 자본주의를 돌릴 수 있는 인력을 확보하고 있다. 현재 체제에 그닥 기여할 수 없는 인력들은 무능력이라는 오명을 쓰고, 점차 그 수를 늘여가고 있다. 과연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아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금융자산을 통해 일하지 않고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저자는 무엇 하나 정답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각자 자신의 답을 찾아 다양한 색깔과 형태로 길을 만들어나가듯 차분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소임을 다했다. 이제 그 질문은 책장을 넘어 나에게 당도했다. 나는 이 질문을 어떻게 변형시켜 어떤 길을 만들어나가는 데 쓰이게 할 것인가. 언제나 시작은 지금과 여기. 혼자가 아닌 지금 옆에 잡은 작은 손. 타인에 대한 이해가 결국 자신에 대한 이해라는 사실. 나의 호흡을 알고 지나치게 애쓰지 않는 것. 경제적 건전성을 확보하는 일. 이런 것들을 기반으로 차분히 하루하루 들여다보면 나 자신의 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느 날 다리 골절로 흐르는 시간을 천천히 보게 된 이 시간이 필연적이었던 것처럼. 삶의 극적인 순간들이 돌이켜보면 모두 의당 그래야 했던 일로 여겨지는 것은 요즘 내가 불교책을 너무 많이 봐서 일까. 그래도 이 순간, 다리뼈가 부러져 경험하고 있는 이 모든 순간들이 나에겐 모두 숙명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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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참된 것과 거짓된 것에 대해 질의하는 게 아니라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바에 대해 질의하고, 또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판단할 수 있다거나 그렇지 못하게 만드는 바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사유의 형식을 ‘철학’이라 명명하도록 합시다. 이것을 철학이라 명명한다면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변형을 가하는 탐구 실천 경험 전반을 ‘영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인식이 아니라 주체, 심지어는 주체의 존재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를 구성하는 정화, 자기 수련, 포기, 시선의 변환, 생활의 변화 등과 같은 탐구, 그리고 실천, 경험 전반을 ‘영성’이라고 부르도록 합시다. - <주체의 해석학> 미셸 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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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06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하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공부하고, 앎의 즐거움을 누린다면 `공부=독서`라는 공식이 성립된다고 생각해요. 아주 바람직한 자세인거죠. 하지만 우리 사회는 취업, 자기계발 목적으로 `공부=독서` 공식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독서로 지식을 습득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사회에 성공하는 사람으로 보는 반면에 책 안 읽고, 독서의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독서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로 규정됩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계발 목적으로 책을 억지로 읽으려고 하는데, 독서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원인이 됩니다.

나뭇잎처럼 2016-09-06 20:53   좋아요 1 | URL
`앎의 즐거움’은 곧 결국 내가 몰랐다는 걸 알게 되는 기쁨, 내가 틀렸다는 걸 깨닫는 희열이라 불러도 되겠지요? 앎은 반드시 책이 아니라 사람 사이에서도, 삶 속에서도 깨우칠 수 있는 것이겠구요. 그러니 공부는 곧 독서이자 삶이고, 누군가에게는 글쓰기와도 동의어가 될 수 있겠습니다. 독서가 성공을 위한 수단이 되어 쓸모 없음의 쓸모 있는 가치를 일깨우는 인문학이 어느덧 액세서리가 되는 희한한 시대, 이곳에서 독서의 참의미에 충실한 분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기 그지 없습니다.^^ 독서에 대한 욕망을 조절하는 것이야말로 평생 읽어도 다 읽지 못할 사랑하는 책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중요한 태도가 아닌가 싶기도 해요. 자칫 독서가 자신의 도그마를 강화하는 재료로 쓰이면 곤란하니까요. 역사적인 첫 댓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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