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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함께 쓰기다 - 나를 발견하는, 글쓰기 모임 사용 설명서
김민영 외 지음 / 북바이북 / 2016년 9월
평점 :
“자신과의 약속보다는 타인과의 약속을 더 잘 지킬 것 같다.”
일 년 전 글을 쓰고 싶다는 지인들과 한 달에 한 번 글을 써서 합평하자,라고 소박하게 글모임을 시작했다. 평생 처음 단편을 써보고, 서평이나 에세이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시도해 보았다.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온몸이 근질거렸는데 막상 써놓고 보니 저런, 내가 써낼 수 있는 글이 고작 이 정도인가,라는 절망감에 빠졌다. 그래도 궁디 팡팡 서로 두들겨주면서, 때로 가슴 아프지만 정확하게 꽂히는 지적질도 감내하면서, 그렇게 꾸역꾸역 서로에 대한 약속을 지키려 애를 썼다. 물론 아주 대단한 노력을 들인 건 아니다. 한 달에 한 번이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한 달 반이나 두 달에 한 번씩 만나기도 했다. 그리고 어제, 강화도로 워크샵을 떠났다.
‘나는 왜 쓰는가’에서부터 시작해 지속적으로 쓰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이 제시되었다. 달랑 다섯 명이지만 그 안에서도 역학이 존재한다. 굴러가려면 입장 차에 대한 이해와 방향에 대한 조율은 필수다. 치유에서, 기록과 존재의 이유까지 쓰는 이유는 다양했다. 따라서 쓰는 것에 대한 절실함도 다를 수밖에 없다. ‘좋은 글’에 대한 시각 차도 분명 존재한다. 그럼에도 모임을 지속시키는 건? 결국 멤버에 대한 관심과 매력, 그리고 ‘재미’다.
<이젠, 함께 쓰기다>에서 인용한 <모멸감>의 한 구절처럼,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신뢰의 공동체’ 구축. 글은 명분일 뿐, 중요한 건 그런 ‘관계’를 만들어내는 일. 거창하게 인문학 공동체까지 갈 것도 없다. 내 옆에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한 인간과 만들어내는 관계. 알고 지내는 사람들과 공동의 목표를 두고 만들어내는 관계에서 매순간 삶의 양식을 시도하고 재구성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이 민주주의를 훈련하는 것이라고 본다.
무엇을 위해 읽고 쓰는가.
오랜 화두이기도 하다. 앎의 욕구에 급급한 독서는 사유의 바다로 나가는 길을 쉽게 열어주지 않았다. 나를 증명하기 위해 안달하는 글쓰기는 성취도 만족도 모두 멀리 달아나게 만들었다. 별처럼 빛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엉덩이로 써야 한다’는 금과옥조는 엉덩이로 쓰지 못하는 현실을 진저리치게 했다. 기실 중요한 건 그냥 ‘글’이 아니라 ‘어떤 글’을 ‘어떻게’ 써야하는 것이 아닌가. ‘써야한다’는 거대한 중압감에 스스로를 옥죄고, 쓰지 않음을 탓하고, 쓰지 못함을 한탄하는 과오를 오래 반복했다.
우리는 늘 숨을 쉬지만 의식하며 호흡하는 훈련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수행자가 아닌 다음에야 늘 호흡을 의식하며 살진 않는다.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숨도 안 쉬고) 게눈 감추듯 먹어치우기도 하고, 목청껏 노래부를 때는 (호흡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호흡을 의식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어있는 모든 순간 호흡을 의식하면 내 삶을 좀 더 깊게 알아차릴 수 있다. 내게 글쓰기는 호흡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 삶을 살아있게 만드는 길.
타고난 폐활량은 모두 다르다. 나에게 주어진 폐활량을 꾸준한 운동을 통해 건강하게 유지하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매순간 또는 매일 호흡을 의식하고 호흡해야 한다는 의식은 버리기로 했다. <이젠, 함께 쓰기다>에서 글쓰기 습관을 들이기 위해 ‘100일 쓰기 프로젝트’를 서로 격려하며 완수했다는 글쓰기 모임의 성과는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그것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음으로써 또 다른 자유를 맛보았다. 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지 않는 것. 그 모든 욕심과 욕망을 내려놓는 것. 그것이 어쩌면 글쓰기의 진정한 시작이 아닐지.
이번 워크샵의 가장 큰 소득은 글쓰기의 강박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매일 써야 한다는, 잘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놓여나는 것. 나는 에베레스트를 등정하겠다는 열망도, 42.195km를 완주하겠다는 목표도 없다. 언젠가 허락된다면 존 뮤어 트레일을 걷고 싶다는 희망조차 없는 건 아니지만. 힘을 빼고 천천히 걷는 산책이야말로 내가 바라는 가장 지극한 기쁨이 아니겠는가. 산책에 관한 한 김영민 글이 늘 힘이 된다.
“삶의 출발점과 종착점을 임의로 확정하고 고집하는 그 모든 독단주의자들은 걷지 못한다. 산책은 상처입은 미로의 삶이 그 기억, 혹은 의도의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외출이며, 그 오연한 의도의 체계, 앓을 수밖에 없는 기억의 체계와 창의적으로 불화하려는 생활정치다. 산책, 그것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선 자본제적 체계와 생산적으로 불화하는 삶이다. 출구는 체계의 곳곳에 하리가 들어 그 강제력이 어긋나거나 뒤틀리게 만들 수 있도록 하는 다른 삶의 양식이며, 그 양식을 이드거니 유지할 수 있는 연대와 그 실천적 현명함이다.” <동무론> 김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