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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로 번역된 책은 품절 됐지만 올해 미국에서 새로 번역된 듯 싶다. 한국어판을 구하고 싶었지만 중고서점이나 소규모 서점들을 돌아다녀도 구하지 못했다ㅠ 영어 번역본이 나온 건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다. 이거라도 더듬더듬 읽어볼 생각이다. 혹시 이 책을 찾으시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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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만지지 마라 - 몸의 들림에 관한 에세이
장 뤽 낭시 지음, 이만형 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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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다. 그러나 무덤은 텅 비어 있었고, 무덤 곁에는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마리아에게 왜 우느냐고 물었다. 마리아는 예수를 찾는다고 답했다. 그렇게 말을 마치고 뒤돌아보자 묘지를 관리하는 정원지기가 있었다. 정원지기도 그녀에게 왜 우는 것이며 누구를 찾는 거냐고 물었다. 마리아는 무덤이 비어 있으며, 당신이 그를 옮겼다면 그 장소를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정원지기가 ˝마리아야!˝ 하고 불렀다. 그러자 마리아는 무덤지기에게 ˝라뿌니!Rabbouni!˝ 라며 응했다. 마리아가 예수를 알아본 순간, 예수는 말한다.

“내가 아버지를 아직 뵙지 못했으니, 나를 만지지 마라”

그리스어 ‘hapto‘에는 ‘만지다‘라는 의미와 함께 ‘붙들다‘라는 뜻도 있다. 만지는 행위는 곧 붙드는 행위로 매끄럽게 이어진다. 나의 손가락을 세워 타인의 살 위로 얹고 나면, 그러고 나서 손가락을 접고 놓지 않으면, 붙들고 있게 된다. 그러한 포박 행위가 생기기 전에 예수는 만지는 것조차 하지 말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를 만지지 말라는 문장 속에 ‘만지다‘라는 표현은 이미 ‘만짐‘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그 표현을 떠올리는 순간 감각적 표상에 의해 만지는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생성해낸다.

˝이 표현은 접촉하는 동작 일반을 언표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접촉이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지점을 만지고 있는 것이다. ‘만지다‘라는 동사가 구성하고 있는 바로 그 지점을 말이다.˝

‘만진다‘라는 발화와 함께 우리는 이미 머릿속에서, 시야 속에서 상대를 만지고 있는 ‘지점‘이 있다. 하지만 더욱 엄밀하게 말하면, ˝‘만지다‘라는 동사가 범접하고 있지 않은 지점, 접촉을 시행하기 위해서 [아직] 접촉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지점이다.˝ 만지고 있으나 만지고 있지 않은 지점, 만지다, 라는 표현이 끌어모으는 모든 표상을 분리시키는 지점, 즉 만져지는 것에 대한 표상적 접촉과 실제적인 접촉 동작 자체를 분리시키는 선線이다.
만약 감각적 표상이 선을 넘어서 그대로 접촉으로 이어진다면, 그래서 마리아가 아버지께 돌아가려는 예수를 붙잡는다면, 떠나감으로써 완성되는, 그러나 불완전하기에 계속해서 완성되어야 하는 그의 부활을 막는다면, 낭시가 예단한 또 다른 해석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것은 포착, 고착, 접착, 더 나아가 그것을 특정한 사물 속에 가두고 사물을 그 자신 안에 가두어, 그것들을 맞물리게 하고 서로 상대방을 제것화화하고 동시에 상대방 안에서 적응되는 응착 속에서 실물화되기 시작할 것이다. 동일화, 고정, 소유, 부동성이라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고착된 상태에서 나는 ˝자아˝로 남게 된다. 그래서 나는 그 고착된 상태, 타인에게 내어준 나 자신을 감독하며, 그것들과 나를 구별한다. 구별 가능한 조건에서 완전한 고착이란 없기 때문에 이런 역설이 생겨난다. 자아는 오히려 그런 상태에 반동하며 고착된 타자를 나에게로 동일화시킨다.
그러나 나를 내어주며 만짐을 회피한다면, 다른 곳을 만지게 하거나 다른 것을 만지게 한다면, 그리하여 만짐 자체에 결락이 생기도록 한다면, 나는 이 내어줌 자체를 마음대로 하고 있지 않게 된다. 만지되 다시 떨어지게 되고, 떨어지되 다시 만지게 되는. 상대에게 완전히 고정되어 있지 않고, 좁지만 무한한 간격을 벌리는 행위. 자아는 무한히 넓혀진 거리에서 길을 잃고 타자에게 수동적으로 자리를 내어주고 만다. 아니면 계시를 실천할 수 밖에 없다.
이런 행위는 또한 애무와 다를 게 없다. 아니, 애무 그 자체이기도 하다. ˝모든 애무가 하는 일이 이런 게 아닌가? 애무에서 떨어져 물러날 때, 심장의 고동 혹은 입맞춤의 떨림이 있는데 아닌가?˝ 사랑하는 사람의 어느 부분에 입술을 댄다. 하지만 그 상태로 가만히 있게 되면 그건 더 이상 입술이 아닌 한낱 살점, 그것도 내 자신의 살점에 불과해지고 말 것이다. 입술이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옮겨가는 순간, 접촉했다가 다시 떨어지는 순간, 떨어지기 위해 잠시 머물렀던 순간이 애무를 만들어준다. 내 입술이 타인의 살결에서 떨어져 나와 허공의 간격 속에서 잠시 머무는 지점. 그 지점이 있기까지의 과정, ˝실제로는 나를 만지고 내게서 벗어나는 그/그녀, 혹은 나를 만지기 전에 내가 억제하는 그/그녀가 나로부터 (나의) 현존의 광채를 끄집어내는 것이다.˝
바디우에게 있어서 진리가 작동할 때 ‘주체‘가 생성되듯, 낭시에게는 둘 이상의 존재가 관여될 때, 그 관여 속에서 떠남이 있을 때, 진정한 ‘현존‘이 발생한다. 한 존재의 나타났다 사라짐으로 인해 사라진 자의 현존은 남는 자에게 각인된다. 하나의 존재인 나는 그와의 접촉, 또는 발성에 의해 흔들리고 있고, 얼굴로 표정을 지어 심정을 내놓을 수도 없으며, 몸이 지탱할 기반은 끊임없이 무너져내리다가 나를 다시 덮치고, 내 현존 위에 그의 떠남이 새겨져 있으며, 그런 떠남이 새겨진 현존하는 나는 떠나간 존재를 현시하고 있다.

˝그는 그 사람이 아니며, 동시에 그라는 존재, 그가 현시하는 존재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근본적인 변성, 근본적인 부재이다. 엄격하게 말해, 그는 ‘원래의 그가 아님‘ 그 자체다.”

원래의 그가 아닐 때, 사랑이, 진리가 그에게 도래한다. ˝사랑과 진리는 만지면서 밀어내는 것이다. 그것들은 닿는 이가 누구든 물러서게 한다. 왜냐하면 접근은 만짐 그 자체 안에서 그것들이 우리 힘 바깥에 있다는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중략) 그것[접촉]을 할 때조차도 그것을 잊어라. 너는 아무것도 잡고 있지 않다. 너는 누구도 잡거나 붙잡을 수 없다. 바로 그게 사랑하고 아는 것이다. 너에게 빠져 달아나는 이를 사랑하라. 가버리는 이를 사랑하라. 떠나고자 하는 이를 사랑하라.˝
사랑이나 진리에 대한 이런 서술은 살갗에 닿지 않는 관념적인 공론이 아니다. 정신은 그 자체로서 아무것도 못한다. ˝순수한 정신˝은 자기 안에서 닫힌 형식적이고 공허한 지표들만 제공하는 현존이다. ˝그에 반해 몸은 이 현존을 개방한다. 그것은 현존을 현재화하고 바깥에 내놓는다. 몸은 그것을 자신으로부터 떼내고, 그 사실을 통해서 다른 몸들과 함께 그것을 끌고 간다. 그렇게 해서 막달라 마리아는 사라진 이의 진정한 몸이 된다.˝
예수는 광휘가 휩싸이며 하늘로 올라가기 전에 마리아에게 자신에 대해 ‘내 형제‘들에게 가서 알리라고 이른다. 마리아는 그의 말대로 제자들에게 가서 자신이 주님을 뵈었다며, 자신이 예수에게 들었던 말씀을 전한다.

˝그녀는 오직 떠남일 뿐인 현존 앞에서 포기했다. 오로지 어둠일 뿐인 영광 앞에서, 오직 냉랭함일 뿐인 향기 앞에서, 그녀의 포기는 사랑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기도 하며 낙담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둘의 동시성은 이 순간 자체의 ‘들림‘을 낳는다.ㅡ일어서면서 사라지는 들림을.˝ 사랑과 낙담은 서로 붙을듯 떨어질듯 애무하며, 동시에 수평을 그리며 함께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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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식민주의에서 못 벗어난, 또는 벗어나는 과정(?)인 한국에서는 가감해 읽어야할 부분들있다.
예를 들자면, 인권의 개념을 말하는 경우 바디우는 프랑스의 상황 윤리를 가져와 대입한다(당연히 그가 프랑스를 사고하기 때문에). 하지만 우리 사회는 먼저 인권/차이와 관련된 열렬한 판단(이번에 있었던 낙태 논의를 비롯해서)과 시행착오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바디우의 진리와 악에 대한 논의는 충분히 수용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한국에는 생명권이나 차별에 있어서 부딪혀야 될 과제가 많다. 이러한 개별 사례에 있어서, 피터 싱어의 실천 윤리학이 더욱 절실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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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이야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조르주 바타유 지음, 이재형 옮김 / 비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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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중)


  "인간의 성적 욕망이란, 만약 누군가에게 의해 왜곡되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고 즐거운 기능이지만, 음란함은 관습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 조르주 바타유의 소설

  2. 그(작가)의 후기

  3. 수잔 손택의 포르노그래피 문학에 대한 비평

  4. 소설가 김태용의 해제

 

 그리고 위의 인용문은 비평(3)에 나오는 일부분이다. 수잔 손택은 앞의 인용문을 "사회가 자연에 부과한 소설"이라면서 비판한다. 터부taboo가 있기 때문에 음란해진다는 건 오히려 섹슈얼리티라는 자연스러움에 사회가 부여한 허구라는 것이다. 손택이 지적한 음란함에 대한 범주의 오류 논지를 이어나가자면, '관습'이라는 것에 중점을 두는 순간 그들의 주장은 무너진다. 사회적 관습이라는 건 결국 시대와 지역에 따라 상대적일 뿐더러 종교에 있어서도 성행위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성행위의 범주는 외계인이 도착한 한 분화구에서 모든 문명이 나타났다고 하는 사이비적 범주가 아니다. 오히려 여러 분야에 걸쳐 서로 교집합을 이루고 때로는 서로의 집합에 비껴 바깥에 머물기도 하는 다공성이다. 상대적 범주를 가지고 있다는 건, 음란함이 하나의 잣대로 규명되어지는, 모든 곳에서 동질적이고 불가분적인 일자성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반증이다. 그러므로 음란함은 모든 곳, 도처에 있으면서도 아무데도 없다. 음란함은 관습 안에서 있고 관습을 넘어서서 있으며 관습이 없는 곳에도 있다. 음란함은 만연해 있는 것이므로 이로써 성행위와 같이 자연스러운 지위를 얻게 된다.

  (물론 만연해 있고, 자연스럽다고 해서 그 행위가 당위성을 얻는 건 아니다. 이 논의에서는 불가피하게 윤리가 개입될 수밖에 없는데, 이에 대해서는 유보한다.) 

 

  물론 절대주의자에게는 위의 말이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위의 논지는 모든 문화를 인류가 이룩한 위대한 '문명'이나 신의 절대적 '교리'가 아닌 동질적인 '문화'로 바라볼 때 얻을 수 있는 결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의 관점 역시 허구에 불과하다. 절대주의자는 교화와 포교 활동을 통해 이른바 미개한 자들을 계몽시켜려고 한다. 만약 그들의 문명과 포교가 절대적으로 당연하거나 옳은 것이라면, 상대방을 교화시킬 필요가 없다. '절대적'이라면 상대방은 그들의 신념이나 문명을 아무런 저항 없이도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계몽을 당하는 그들이 저항하거나 반격을 할 가능성이 있는 순간, 그들의 절대는 무너지고 만다. 또 다른 관점으로는 음란함에 대한 인정을 들 수 있겠다. 그들은 역설적으로. 성적 욕망을 끊임 없이 경계하는 데에서 그들이 성에 대한 욕망을 외면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챌 수 있다. 그리고 그 욕망에 대해 절대적으로 부분이라도 인정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그 경계심을 염두에 두지 않고 충동적이고 단순하게 나체를 전시하는 포르노그래피가 있다. 다른 하나는 관습에 대한 경계심을 주시하며 그것을 넘어서는 것에서 쾌락을 느끼는 포르노그래피가 있다. 전자는 말 그대로 전시에 불과하다면, 관습을 넘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눈 이야기>는 앞의 두 가지 것과는 다른 성질이라고 볼 수 있다. 전시를 하기 위해서 이야기가 생성되고 그 이야기로 인해서 다시 전시가 일어난다. 관습을 물리치고 조롱하고 침뱉고 그 위로 사정한다. 하지만 그런 음란한 행위는 관습을 넘어서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다. 단지 자신의 음란함 그 자체를 뿜어내는 과정 속에서, 나체가 전시 되는 긴 회랑 속에서, 따라붙는 큐레이터가 실시간으로 전시되고 있는 고유한 나체에 대해 이야기를 덧붙여주는 것 뿐이다.  


  음란의 음은, 장마의 '음'이기도 하다. 장마철이 되면 습도가 올라가며 몸이 축 늘어진다. 그런 반면 왠지 모르게 뜨거워지는 몸이 떠오른다. 그 뜨거움에는 일련의 상상이 뒤따른다. 밖에서 잔뜩 비를 맞고 온 상대방 몸 위로 달라붙은 옷은 신체의 윤곽을 드러낸다. 비를 맞은 그의 몸은 미열을 띄고, 그 온기를 담아낸 입김을 내뱉는다. 그리고 주로 실내에 머물게 된다. 이러한 장마를 누군가는 도래하는 생명의 단물로 치부하기도 한다. 가뭄을 해결해주며 바닥을 보이던 저수조가 다시 채워지게하는 목적을 가진 것으로. 이는 음란을 '생명의 탄생'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일삼는 견지과 같다. 사실 장마에게는 어떤 목적성도 없다. 단지 장마이기 때문에 산사태가 발생하게도 하고 홍수가 일어나게도 한다. 또한 비가 몰아친다고 해서 사람들이 굳이 '안 에서' 머물 이유도 없다. <눈 이야기>에서 그 사례는 노골적으로 묘사된다.


  (...) 어둠이 내림녀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다가 내는 엄청난 소리는 긴 천둥소리에 벌써부터 압도당했고, 번갯불이 번적일 때마다 두 처녀가 입을 다문 채 엉덩이를 흔들고 있는 모습이 대낮처럼 환하ㅔ 드러났다. 어떤 난폭한 열광이 우리 세 사사람의 육체를 부추기고 있었다. 두 개의 젊은 입술이 내 엉덩이와 불알, 음경을 다투었고, 어떤 괴물의 포옹에서 벗어나려는 듯 침과 정액으로 축축해진 여자의 두 다리를 나는 계속해서 벌리고 있었다. 괴물이란 내 움직임의 극도의 난폭함 같은 것이었다. 결국에는 따뜻한 빗물이 억수처럼 쏟아지더니 완전하게 발가벗고 있는 세 사람의 몸뚱이를 따라 철철 흘러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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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택은 성적 행위와 음란함을 같은 선상에 위치시킨다. "인간의 섹슈얼리티는, 기독교의 억압과는 별개로 매우 의심스러운 현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적어도 잠재적으로나마, 인류의 일반적 경험보다는 극단적인 것에 속한다." 


그리고 이러한 금기와 욕망은 갑자기 타인에게 아무 이유 없는 폭력을 가하고 싶은 충동에서부터, 죽음이라는 의식의 소멸에 대한 관능적 갈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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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그 동네의 아이들은 쥐를 잡는다. 정부에서도 쥐를 잡는다. 쥐는 질병의 매개체다. 그런 낙인을 지녔기에 죽여도, 괴롭혀도 마땅한 대상이다. 허나 쥐들만이 그렇지 않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인간‘을 쥐로 은유한다. 정부의 정책 실패로 쌓인 쓰레기 더미 때문에 모이는 쥐들, 그 쥐들 속에서 살아가는 주민들.
정부가 보낸 사무적인 주거지 조사원들에게는 주민들이, 가부장에게는 그에게 속한 가족 구성체가, 사내아이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취약하게 비치는 동네의 소녀가 쥐로 그려진다. 또한 의도치 않게 하천에서 죽은 아이도 쥐에 부합한다. 마지막 사례이자 은유, 그러니까 하천에 빠진 아이가 어떻게 쥐로 전치될 수 있을까. 영화 초반에 아버지가 쥐를 집아 변기 속에 넣는다. 그리고 자신의 딸이 안타까워 하는 모습을 보고 쥐는 바다로 갔을 거라며 달랜다. 이 장면은 스노우볼(생쥐)을 풍선에 매달아 하늘로 날려 보내고 나자, 달로 갔을 거라 안위하는 아이와 등치되며 그 의미를 재차 확인 시켜준다. 바다/달 모두 인간 또는 쥐가 살 수 없는 곳, 즉 비장소이다. 이 비장소들이 지시하는 건 다름아닌 아이가 갖는 위로이자 이상일 뿐이다. 그들은 영화 초반에 모사된 타조처럼 하늘을 날지 못하며, 부패해가는 하천으로 들어가면 바다로 가지 못하고 끝내 죽거나 운이 좋게 살아 나왔다 해도 질병에 옮고 만다. 이렇게 해서 ‘변기에 내려진 쥐=하늘로 올려 보내진 쥐‘라는 등식은 ‘바다로 가지 못하는 쥐=달로 갈 수 없는 쥐, 또는 하늘을 날 수 없는 타조‘(이상의 허물어짐)로 치환될 수 있다. 바다로 갈 걸라는 꿈은 품은, 변기에 내려진 쥐는 결국 하천으로 내려가 죽고 말므로 이는 곧 꿈을 품었어야 될 대상인 ‘하천에 빠진 소년‘과 상응한다. 그리고 이 장면은 영화 내내 중첩된다.
쥐로 대상화된 주연 소년은 쥐를 잡아야 하는 곳에서 부단히 감수성 충돌을 겪는다. 쥐로 대상화 해야 될 타자와 소년의 내면(내면 속이 아닌)은 갈등한다. 이런 충돌 속에서 새로운 집이라는 갈망이 움튼다. ‘새로운 집‘ 이라는 건 깔끔-청결(물리적으로서의)한 장소가 아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정부에 의해서 물리적으로 치워진 쓰레기 더미는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텅빈 행위다. 소년의 소망은 쥐가 없는, 쥐로 은유되지 않을 수 있는, 감수성이 상처 받지 않을 수 있는 장소-비장소를 지시한다. 그리고 그 비장소는 마지막에 가서야 환영 속에서 뒤늦게 취하게 된다.
이 영화가 성장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성장 영화라는 장르는 바깥에서 갈등하는 과정과 그 과정 속에서 겪는 감수성의 동요를 안고 ‘성장‘하며 살아가는 것일 텐데, 이건 그렇지가 않다. 어쩌면 성장의 역설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성장영화다.
그 밖에 눈여겨 볼 것들
- 동물 보호 협회에 들어갈 거라는 소년의 친구가 쥐를 잡고 있는 장면
- 소년이 여자 몸 위에서 그저 엎드려 있는 모습
- 초반 커튼과 스크린 또는 액자처럼 연출된 창문
- 한 순간 영웅으로 비춰진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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