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 한국사 : 16세기, 성리학 유토피아 - 조선 2 민음 한국사 2
한명기 외 지음, 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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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은 개국과 동시에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화려했던 한세기를 보냈습니다. 15세기 그 화려했던 시기의 중심에는 태종과 세종이라는 거출한 두 군주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입니다. 자 이렇게 초창기부터 화려하게 불꽃을 태웠던 군주국가는 세계사를 통틀어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조선은 그 첫발자국이 위대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화려한 이면에는 언제 터지질 모르는 폭탄이 잠재해 있었고 그 폭탄은 마침내 다음 세기인 16세기에 가서 사정없이 터져 버립니다. 그 폭탄은 『성리학』이라는 고고한 이름으로 그 자체가 폭탄이지도 모른체 조선을 강타하게 됩니다.

 

           초장의 출발부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조선왕조 개국사상 궁궐에서 태어나 세자로 간택된 두번째 왕인 연산군, 왕실의 총애와 기대감으로 세상에 태어났지만. 아버지 성종과 폐비 윤씨 그리고 할머니 인수대비 한씨, 공신과 기존세력들인 훈구파와 이에 견제세력으로 성종이 히든카드로 키웠던 사림파 이렇게 연산군은 외우내환이라고 할 정도로 주변환경에 도움을 받지 못하고 불우한 군주의 길로 가게 되고 결국 조선역사상 최초로 폐위되는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 등장한 중종, 비록 왕이 되고자하는 갈망했던 후대의 인조와는 달리 자신의 의사와 반하여 용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죠. 16세기 선조와 더불어 가장 오래기간을 용상에 앉아있어지만 결국 16세기 조선의 폭탄놀음에 일등공신 역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조선역사상 인수대비에 버금갈정도로 대가 센 여인이 등장하여 다시한번 조선의 생명줄을 뒤흔들게 되면서 조선은 성릭학이라는 미명아래 사화로 만싱창이 일보직전까지 내몰리게 됩니다.

 

           결국 16세기의 정점을 찍은 인물을 선조라고 봐도 틀린말은 아닐 것입니다. 앞대의 군주들이 그나마 재기할수 있을정도의 여력을 남겨놨다면 이 양반은 한방에 조선을 그로키상태로 내몰죠. 망명까지 불사했던 조선의 군주 후대 인조와 더불어 이 나라를 말아먹을뻔 했던 군주이고 그 재위기간도 정말 길게 용상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나마 몇몇 제정신이었던 신하들과 백성들의 도움으로 지옥의 문턱일보직전에서 구제되었죠. 성리학의 긍정적인 면이라면 가장 크게 작용했던 위기탈출상황이 아니였라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16세기 -성리학 유토피아>

          후대에 의적 (아마도 그 당시 서민층들 사이에는 분명히 의적이라고 불렸을 테죠) 이라 불린 임꺽정에 대한 역사적 시각이 참신하게 수록되어있습니다. 명종대(참고로 그의 모후인 문정왕후 윤씨가 나라를 쥐락펴락했습니다) 발생했던 도적의 무리에 대한 실록과 야사를 근거로 왜 이런형상이 발생했으며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어땠는가에 대한 시각이 나오는데요 이부분에서 특히 주목할 수 있는것은 『성리학 유토피아』라는 대전제와 병행해서 해석했다는 점입니다. 왕과 왕실, 관료와 이들의 모집단인 사족세력이 임꺽정무리를 바라보고 생각했던 부분이 자신들의 커다란 틀인 성리학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시 생각해볼 거리를 제공해 줍니다. 역시 이번에도 임꺽정을 기화로 세계각지에서 출현했던 역사속의 도적이나 의적에 대한 리뷰가 곁들어져 있다는 점 독자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네요.

 

          자 그럼 여기서 왜 부제를 『성리학 유토피아』 라고 했을까? 한번즘은 생각해볼만 한데요. 흔히들 16세기하면 조선의 근간을 뒤흔든 미증유의 사건인 임진왜란을 가장 먼저 떨올리고 임진왜란이후 조선사회의 변화에 대한 초점을 맞추게 마련이지만 이번에 보는 시각은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 대한 성리학이라는 사유가 얼마나 지대했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는가에 대해서 바로 보는 논저가 깊습니다. 대게의 경우 임지왜란같은 전쟁을 겪고 나면 거의 멸망의 길을 걷게 되지만 조선은 그대로 그 명목을 이어갑니다. 다음 세기 다시한번 양대호란을 통해 전 국토가 초토화되는 위기에 봉착해도 오뚜기처럼 재기하여 자신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데 그 가장 소중한 원동력이 바로 성리학에 있다는 논거중에 하나입니다. 전혀 틀린 논거는 아니죠. 사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성리학이라는 사유가 왕과 관료 및 사족의 마지막 끝이었고 사실 이러한 명분이 조선을 지탱했던거나 마찬가지 이니까요. 여기서 우리는 성리학이 한반도내로 유입된 배경과 시기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고려말에 도입된 성리학의 주된 목적은 친원계를 견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체제유지의 교학으로 인지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조선이 개국하고 훈구파가 날뛰던 시기까지 이어집니다. 사림들은 이들과 정쟁에서 게임이 될 수 없었고 현실또한 백전백패하면서 사화라는 선비죽이기 게임에서 완패를 하게 됩니다. 조광조가 『도학정치』라는 슬로건를 들고 나와서 나름 선방을 했지만 결국 이 벽을 넘지 못했죠. 조선의 4대 사화중 명종때 발생한 소윤과 대윤과의 정쟁을 빼면 이러한 사림들의 슬로건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아지만 명종과 선조대를 오면서 일대 변혁이 일기 시작합니다. 성리학을 체제의 교학이 아닌 일생일대 절대적인 관념으로 한 차원 업그레이드 시키는 캐치프레이즈를 찾아내는 거죠. 이 중심에 익히 알려져 있는 이황과 기대승이라는 걸출한 이미지 메이커가 있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서서히 사대부들의 지지를 받게 되면서 성리학의 유토피아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죠. 임진왜란이라는 환란을 그나마 극복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성리학의 힘이였던 것 무시할 수 없는 것이고요.

 

           이황과 기대승의 편지는 그 동안 일반 독자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 내용이라 크게 눈에 띄는 것은 아니지만 이언적의 『서망기당무극태극설후』란 생소한 글을 수록하고 해석해 놔서 이부분에 관심많은 독자들에게 신선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번에도 다양한 자료들과 화보들로 인해 16세기 조선을 이해할수있는 첨병 역활을 하고 있으며, 저 개인적으론 조선의 성리학 학맥을 한눈에 정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뒷부분 16세기의 창에서 언급된 청자와 백자에 관한 자료는 보기 드문 자료들로 당시 문화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참 그리고 연산군에 대한 서술에서 기존에 대한 오해중 숙모격인 박씨부인과의 간통설, 모후(법적)인 정현왕후를 핍박했고 배다른 동생 진성대군(훗날 중종)을 죽음의 궁지로 몰았다는 내용에 대해서 색다른 견해를 보여주고 있는점이 눈에 띄입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오희문의 『쇄미록』이라는 일기를 통해서 많은 사대부 양반들이 상업활동을 통해서 부를 축척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당시대나 지금이나 지배세력의 딴지는 여전했던것 같네요. 

          이렇듯 이번 <16세기-성리학 유토피아> 역시 전편과 비교해서 전혀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면서도 독자들에게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의 다변화를 갖게 해줍니다. 여기에 그 동안 역사의 주연에 묻혀 조명받지 못했던 조연들의 활약상을 다시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어 한국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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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의 회전 - 헨리 제임스 장편소설 열린책들 세계문학 192
헨리 제임스 지음, 이승은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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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독자들은 귀신이나 유령이야기에 매료되기 마련이죠. 이는 아마도 각 개인의 잠재 의식 속에 상상으로 남아있는 귀신이나 유령의 형의상학적인 이미지가 작가라는 제3자를 통해 형이하학적인 실재적이고 뚜렷한 존재로 다시금 확인하고 싶어하는 충동과 더불어 귀신이나 유령에 대한 사유의 공통성을 발견할 수 있음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각 개인만이 느끼는 그러한 감정이나 느낌등을 불특정 타인과 비교해보기도 하고 서로 공감을 하면서 내심 안도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기도 하기 때문이겠죠. 이러한 면에서 지금으로부터 한세기도 더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 이 귀신이나 유령을 다룬 대표적인 소설로 손에 꼽히고 있는 이유가 바로 독자들의 상상력을 정확하게 문자화했다는데에(엄밀히 말하면 독자들과 비슷한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있을 것입니다. 이 작품은 전형적으로 그로데스크한 설정배경과 등장인물 그리고 여기에다 액자구조까지 곁들이고 있지만 왠지 고딕소설로만 볼 수 없는 미묘한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것이 <나사의 회전>의 진정한 묘미일 것 같네요. 그리고 백여년이 더 지난 현대의 독자들에겐 더욱이 호러공포장르에 왠만히 길들여진 독자들에겐 왠지 김빠지고 시시하게 다가올 것이 자명할 정도로 내러티브의 잔혹성, 피의 향연과 귀신이나 유령과의 담판등 다양한 공포-호러적인 요소가 하나도 없고 내러티브 자체만 보면 다소 밋밋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호기심의 증폭을 더한다는 것이죠. 오히려 가정교사(유일하게 이름이 들어나지 않고 있죠)와 마일스, 플로라, 그로스 부인등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상태를 기가막히게 묘사하여 이러한 심리적 상태로 인하여 독자들에게 혼란을 가중시키는 일종의 심리물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수도 있을거란 생각도 들고요. 물론 이에 대한 반론이나 이의제기도 만만치 않겠지만 전반적으로 퀸트나 제슬양의 유령에 대한 실체가 드러나지 않고 유독 가정교사만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러한 괴기스럽고 어두운 분위기를 작중화자인 가정교사가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점에서 고도의 모호함을 지닌 사이코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네요. 물론 작가는 두 유령의 생존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한 부분과 그로스 부인의 절대적인 지지를 가미해서 정말 존재하는 유령으로 이끌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크게 호응받기는 힘들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뭐 이유 불문하고 <나사의 회전> 은 이렇듯 보는 독자들의 시각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낳게하는 다양한 테제를 가지고 있는 작품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공방을 떠나서 <나사의 회전> 이 오랜시간동안 독자들의 사로잡고 있는 매력은, 작중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작가의 심리묘사나 배경설명의 리얼리즘이라고 봐야겠는데요. 이는 마치 나사가 회전하면서 조여들듯이 독자들의 시선을 고정시키면서 그 상황으로 감정이입을 하지 않으면 안되겠끔 흡인력이 뛰어난 문체들의 향연이고 이러한 심리적 묘사부분이 시대나 공간의 이격성을 걷어버린다는 점에서 많은 감흥을 주고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눈에 띄고 끌리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작가는 내러티브의 진행을 나사의 조임으로만 일관하지는 않는다점, 나사의 주역활이 조임(연결성)에 있지만 간혹은 헛바퀴 돌듯이 급작스럽게 풀리기도 하듯이 긴박함과 흡인력으로 일관하던 내러티브가 한 순간 갑자기 헐거워져버린다는 느낌으로 맥을 놓게 하기도 하는 점에서 유령의 존재만큼이나 모호함을 가중 시키고 있다는 것이 작품을 읽는 내내 찾아드는 느낌이었던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레파토리를 소개하는 또 다른 화자인 더글라스의 모호한 분위기에서 시작하여 액자속 이야기 자체도 모호함의 연속이고 그 결말 역시 모호함으로 끝을 맺는 모호함 그 자체라고 보여지는데요. 그렇지만 이러한 모호함속에 일련의 사실성이 내재되어 있고 등장인물들의 심리상태가 마치 독자들이 직면하게 되는 상상속의 귀신이나 유령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표현했다는 점에서 모호함은 독자들 나름대로 나사를 조이고 풀어가면서 느끼는 일종의 그 끝을 바라고 싶지 않는 심리상태를 유지하게끔 하고 있다점이 참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이는 상상속에서의 공포를 다 체험하고 싶지 않듯이 현실화된 소설속에서도 그런 안도감을 주는 것으로 독자들의 상상력에 맡겨두어 더 모호함을 증폭시키는 장치로만 남아 다양한 결말의 연장선에 독자들을 남겨두기 때문입니다. 그 어떠한 잔혹성이나 공포의 확정성을 체화하지 않으면서도 이러한 장치가 오히려 더 심리적으로 긴장감을 증폭시킨다는 점에서 오랜세월이 지났지만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라고 보여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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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열린책들 세계문학 17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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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인가 꼭 읽어 본다라는 생각은 강하게 뇌리속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지만(그리고 책도 오래전에 서가귀퉁에 고이 모셔 놓고 쳐다만 보고 있었지만) 막상 실천에 옮기지 못한 작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조지 오웰의 <1984> 입니다. 몇해전에 일본과 국내 독자층을 강타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를 접하면서(물론 제목만 비슷하지 내용은 다르지만요 그래도 하루키의 1Q84는 자연스럽게도 조지 오웰의 1984를 떠올리게 하던군요) 정말 이번에는 꼭 읽어보리라 다짐을 했건만 끝내 책장 한귀퉁에 방치해둔채로 외면했던 <1984> 를 이번에야 완독해 보게 되었네요. 물론 그동안 써머리나 여러 경로를 통해서 <1984> 에 대한 계략적인 내용은 알고 있어지만 문학 작품이란게 더욱이 故人의 작품인 경우 정말 그 작품을 읽어 보지 않고는 섣부른 평가를 내릴수 없기 때문이겠죠. 여하튼 얼마 먹지 않았지만 이 나이에 <1984> 를 이제야 읽어봤다는 안도감에 우선은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 같습니다(책줄이나 꽤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책도 안보고 뭐했냐고 하는 말에 이제 핑계거리 하나 잡았다는 생각이 위안을 주네요^^)

 

          조지 오웰의 <1984> 는 한마디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불멸의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회자될 만한 충분한 자격요건을 갖춘 작품이라고 감히 평하고 싶네요(물론 이러한 간략한 평이 늘그막에 이 작품을 대해서 면피용 발언은 결코 아닙니다). 우선 조지 오웰의 시대인 1940-1950년대에는 미래의 암울한 상(특히 도버해협 건너편에서 히틀러와 그 아이들, 동쪽 유럽으론 스탈린과 그 패거리들 그리고 동아시아에선 천황무리들 이렇게 전체주의적 트라우마가 강하게 남아 있는 시대였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체주의에 대한 걱정이 앞설수 밖에 없는 시점이었습니다)을 조명한 디스토피아계열의 작품으로 빼어난 내러티브를 가진 명작이자 정치 권력 형태에 강한 경종을 울리는 사회성 짙은 작품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고 시간이 흘러 냉전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세상의 모든 규정을 결정했던 냉전시대에는 그야말로 전체주의의 악을 예견했고 그 실상을 폭로한 문제작으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마치 예견된 종말의 끝을 본 것처럼요. 그리고 냉전시대가 끝나고 더 이상 어느 한쪽을 악의 축으로 규정지을 수 없게 되면서 조지 오웰의 <1984>는 서서히 그 향이 잊혀져 갔습니다.(이데올로기라는 개념자체가 희석되면서 새로운 끝없는 글로벌개념과 디지털 혁명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패러다임이 지구촌을 강타하면서 1984년 <동물농장>과 함께 수능의 논술대비용 가치나 그냥 서가의 고전으로서의 역활 변화를 맞게 되었다고 해도 틀린말은 아닐 것입니다. 기껏해야 SF뉘양스가 살짝 묻어나오는 흥미본위로 그 값어치가독자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져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하지만 지금처럼 全지구인이 리얼타임으로 시시각각 정보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디지털 시대에 다시금 그의 작품이 다시 재조명 받는 현상이 일어나리라는 생각, 작품을 읽는 내내 머리가 자연스럽게 끄덕여지면서 절로 공감하게 되었네요. 특히 냉전시대에 대한 그나마의 아련한 기억거리가 있는 독자들에겐 아마 저와 같은 느낌에 많이 공감하리가 여겨지네요. 이런면에서 조지 오웰의 <1984> 는 60여년이라는 세월을 관통하면서 많은 의미를 부여해주는 작품으로 남을거이고 앞으로 미래상(당시대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충분히 예측 가능한 미래상이기도 합니다)에 대해서 충분한 논란거리를 제공하는 작품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리고 <동물농장>에서 느꼈듯이 조지 오웰의 혜안에 그저 감복할 따름입니다.

 

          빅 브라더, 텔레스크린, 마이크로폰, 이중사고, 사상경찰, 신어, 활주로가 필요없는 비행기, 핵확산의 경고, 전쟁의 진정한 목적, 과거기록의 조작등 이 작품에 등장하는 용어나 플롯 그 자체만 보더라도 섬뜩할 정도로 지금의 시대를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왠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보는듯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네요(물론 노스트라다무스는 굉장히 추상적이게 표현했지만 조지 오웰는 정말 꼼꼼하게 들어맞는 느낌을 주네요)비록 당시대엔(냉정시대를 포함해서) 전체주의에 대한 예견으로 여겨졌지만 오히려 지금처럼 고도로 발달해가고 있는 디지털 정보화시대에 더 딱맞는 예견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정도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항상 다양성을 상실한 조직이나 집단의 미래는 암울했던 것이 역사적으로도 판명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 많은 다양성을 가지고 있고 개별적이면서 글로벌적이라고 자화자찬 하지만 리만사태나 유럽발 경제위기 뭐 가까이 선거때면 벌어지는 양대진영의 색깔전쟁등을 바라보면서 과연 다양성을 갖추 세상을 살아가고는 있는 것일까라는 강한 의구심이 절로 들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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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 - 왕을 만든 사람들 그들을 읽는 열한 가지 코드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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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일과 그의 저작들을 대면하게 되면 많은 생각을 불러오게 합니다. 우선 우리시대 한국사에 대한 역사인식의 시각을 새롭게 조명해준다는 점이 가장 먼저 떠오르죠. 그 동안 식민사학과 노론계열에서 부터 뿌리 내려온 기득권 위주의 사학이 기반이 된 대한민국 강단사학계의 피동적이고 왜곡된 사관만을 강요받았던 독자들에겐 상당한 임팩트 같은 역활과 동시에 가슴속 울분이 씻겨 내려가는 속 쉬원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역사 왜곡이 되었고 그것도 자국사에 대한 일말의 자부심마저 앗아가 버린 기존의 사관과는 판이하게 다른 시각으로 우리 한국사를 새롭게 인식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이러한 시각에는 몇몇 사초나 사실등을 기반으로 억지로 끼워맞추지식이 아니라 치밀한 역사적 고증을 통해서 펼처가는 논거가 베이스로 깔려 있기에 더욱 더 그와 그의 저작에 대한 믿음이 강하게 다가오는 것이죠. 여기에 독자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막연하게 암기해야하고 지루하고 따분하게만 느껴졌던 역사라는 영역을 대중속으로 끌어왔다는 점이 가장 높이 평가할 만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 동안 수많은 저작을 집필하고 출간하면서 쟁점 내지는 왜곡되었던 한국사를 대중과 더불어 같이 고민하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마련함으로서 역사는 그저 지나간 세월의 기록물이 아니라 현 시대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했다는 점이 독자들로 많은 호응과 사랑을 받는 이유일 것입니다. 한국사에 대해서 이만큼 고뇌하고 연구하는 학자를 요즘같은 시대에 찾아보긴 힘들고 그런 학자와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한국사를 좀더 알게되었다는 점이 행운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이런 면에서 이번 저서 역시 독자들에게 신선함과 동시에 역사의 궁금점을 풀어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왕과 나> 는 절대권력과 이를 떠받치고 있는 지근의 신하들을 살펴보면서 왕이라는 어떤 존재이면 왕을 보필하는 신하는 또한 어떤 존재였는가라는 왕과 신하들(혹은 왕의 지근거리에 있는 왕족들)의 관계성을 살펴볼 수 있는 저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이라는 존재는 인력보다는 천력으로 만들어진다는 개념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왕권신수설이라던지 특히 동양권에서는 천자라는 개념으로 인력의 범주를 벗어나 있는 존재이기도 하죠. 하지만 실상은 이런 담론과는 사뭇 다르게 진행되었다고 해도 틀린말은 아닐 것입니다. 부재에서 보듯이 '왕을 만든 사람들' 왕과 신하들과의 관계는 양날의 칼과 같은 존재내지는 수레바퀴의 바퀴처럼 쌍생의 구족라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이번 저서는 왕과 그를 둘러싼 킹메이커들의 삶과 옥좌에 올린 정당성 내지는 그 사유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는 기회인 것 같습니다. 

 

          특히 이번 저서에는 저간에 알려지지 않는 인물을 새롭게 조명하는데요, 사대부라는 특권층 출신이 아니면서 왕에 대한 충성심과 토목건축 방면의 전문 기술로 1품의 자리까지 올랐던 박자청이라는 인물은 일반 독자들에겐 생소한 인물입니다. 현존하고 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건축물 태종은 박자청의 충심과 차별화된 기술력을 인정하고 그를 중용함으로써 수도 서울의 마스트플랜을 착실히 세워나가죠. 비록 기득권층의 탄핵과 비난등이 있었지만 왕은 보호자로서의 왕 나름대로의 역활을 하고 신하인 박자청은 자신 나름대로의 충심과 기술력으로 태종을 보필하는 쌍생의 관계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점이 왕과 신하의 성공적인 사례를 말해주는 일례일 것입니다. 또한 김유신편에서 신라의 통일과정을 어느 한쪽의 시각으로 편향되게 보지 않고 있는 서술은 신라와 김유신에 대한 올바른 판단의 근거가 되리라 여겨집니다. 굳이 폄하하여 평가할 필요성도 없지만 그렇다고 삼국통일이라는 거대한 담론으로 확대해석하는 부분도 경계해할 필요성을 일깨워 주는 저자의 예리한 해석이 돋보였습니다.

 

           왕은 하늘이 내린다고 하지만 왕을 제대로 왕답게 만드는 것은 하늘이 아닌 사람임을 역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굳이 현대적인 시각에서 접목하더라도 최고권력자를 어떻게 보필해야 제대로된 틀이 정립되는지는 굳이 역사를 통해서 반면교사로 삼지 않더라도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것을 저자는 9가지의 사례를 들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사를 관통하는 역사적 사건과 그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왕과 신하의 관계성을 들어 거칠지만 한번쯤 통찰해볼 수 있는 기회의 장이 아니였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저서입니다. 군데 군데 그동안 한쪽의 시각으로 익숙해져있던 사관들의 새로운 해석도 눈여겨볼 만한 논거들이고요, 무엇보다 요즘의 시대와 비견해볼 수있는 시의적절한 사례들이라 독자들의 눈길이 사로잡는 기획이었던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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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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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덕분에 세계문학들을 대면할 기회가 잦아지는것 같습니다. 학창시절 써머리형태의 팜플릿으로 접했던 명작들을 새삼 완독해 보니 알고 있는 내용과는 달라도 많이 다르다는 느낌 강하게 받고요, 의무감으로 읽었던 기억들의 왜곡이 상당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네요. 이번에 접한 노벨상수상작가인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역시 이 범주에 속하지 않나 싶네요. 정확한 기억속에는 없지만 어렴풋이 망망대해속을 가르는 돛단배와 배 고물쪽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청새치 그리고 세월의 세파를 달관한 표정의 노인.... 뭐 이런 장면을 어디선가 보았고 나중에야 그게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를 영화한 거란 사실을 알게되었을 정도로 헤밍웨이의 작품을 대면해 보지 못했지만 뇌리속에는 강한 像을 심어놓은것 같네요. 195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미국 정신(프론티어 스프리트) 을 대변하는 작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F.스콧 피츠제럴드, 윌리엄 포크너와 더불어 미국을 대표 하는 작가로 지금까지도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죠. 물론 세계적으로도 많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고 지금도 그의 작품들이 곳곳에서 읽혀지고 연극, 영화로 리메이커되듯이 세계문학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작가입니다.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야 헤밍웨이의 원작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무릇 스포트라이트를 꾸준히 받는 작품을 접할때 가장 염려스러운 부분이 작가나 작품의 뒤에 걷어낼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후광의 빛을 좀처럼 걷어내지 못하고 작품을 보게 된다는 점 그래서 순수하게 작품의 사유를 느끼기가 만만치 않다는 점(기존의 유명 리뷰어들이나 작품의 해설등 엄청나게 쏟아낸 평을 무시할 수 는 없으니까요) 을 빼면 나름 작품의 바다속을 목적지 없이 항해하는 책읽기도 또 다른 감흥을 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몇자 끄적거려 봅니다.

 

          <노인과 바다> 뭐 워낙 알려진 작품이지만 대부분의 독자들(물론 저를 포함해서요) 뇌리속에 남아있는 <노인과 바다> 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청새치를 배에 달고 귀향하는 극히 한정된 씬일 것입니다. 작품 전반을 통틀어서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고 상어떼들의 공격보다 더한 파토스를 남기고 있는 서사이기에 <노인과 바다> 하면 딱 그 장면이 고착화되어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솔직히 달리 떠오를 만한 테제가 없을 정도로 <노인과 바다> 는 저 개인에게는 굉장히 비쥬얼이 강한 작품속에 들기도 하고요. 왠만한 거장들의 명작품과 비교해봐도 이런점은 눈에 띌정도로 강하게 독자들 뇌리속에 각인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영상으로 이 작품을 대하지 않더라도 독자들 머리속에는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장면이라는 말이죠. 인생에서 성공이라는 꼭지점에서 끝이없는 나락으로 일순 떨어지는 허망함과 더불어 모든것을 놓고 가야 한다는 당위성 사이에서 밀려드는 그런 느낌으로 말이죠.

 

          사실 작품 전체적인 내러티브는 특별한 이슈가 보이지 않을 만큼 밋밋한 느낌을 주는것도 사실입니다(뭐 속된 말로 찰랑찰랑 파도 치는 바닷가에 발다금고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노인과 소년 그리고 노인과 노인의, 노인과 고기라는 구조는 세대와 세대, 자신의 정체성과의 사투, 대자연과 인간이라는 또 다른 플롯을 상상케 하는 이중적 구조로 그리 난해하지도 않죠. 그리고 스토리를 전개상 두번의 클라이막스를 엿볼 수 있죠, 첫번째는 거대한 청새치와 사투에서 독자들은 손에 땀을 쥐면서 노인과 청새치의 전쟁의 결과를 주목하게 되고 노인의 승리로 막을 내린 1차 전쟁에서 희열을 공감하게 됩니다.(뭐 낚시광이라면 이 부분이 엄청난 느낌을 가져다 줄 정도로 헤밍웨이의 서사는 일품입니다) 그리고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바다는 그야말로 세상모든 것을 품을듯한 자애로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독자들 역시 노인과 더불어 편안하게 고른숨을 내쉬게 하지만 곧 이어지는 상어떼의 공격과 자신이 온힘을 다해 잡은 청새치를 지키는 2차 전쟁의 모습을 사뭇 다르게 전달됩니다. 헤라클레스같은 지혜와 힘으로 청새치를 굴복시켰던 노인은 온데간데 없고 무기력하게 상어떼에게 자신의 포획물을 헌납하는 순수한 노인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독자들의 심장의 박동 강도도 느려지고요 실상 내러티브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극적인 반전이지만 막상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강도는 한없는 나락으로 빠져드는 무기력함을 느끼게 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설정이 헤밍웨이의 사유가 집약된 부분일거란 생각이 들구요. 등장인물들과 화자의 설정에서 이중적 구조를 보여주듯이 이러한 반전을 통해서 헤밍웨이는 자연과 인간이라는 사슬구도를 암시하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합니다. 이는 소년과 노인과의 대화 노인과 노인(고기가 현현한 노인으로 봐도 무방하겠죠) 의 대화는 육지와 바다라는 구도와 일맥상통하기도 하죠. 뭐 평론적으로 파고들면 끝도 한도 없이 복잡한 구조를 말해야겠지만 겉으로 들어난 구조상으로도만 보더라도 많은 부분을 대변하고 있는 설정들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들어가면 사실상 재미없는 논쟁만 남을테니까요.

 

          제목 자체로만 보면 독자들 머리속에는 쪽빛 같은 적도의 바다와 강렬한 태양에 반사된 눈부신 수평선 그리고 세상을 다품을 듯한 노을빛등 서정적인 묘사가 먼저 떠오르지만 내러티브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서정적인 서사와는 무관한 사실주의적 서사들을 대면하게 됩니다(아마 이부분이 작품해설과는 상반되는 부분일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낚시 장면, 생선을 해부(해체)하는 장면, 청새치와 사투하는 장면등...에서 서정적인 서사는 찾기 힘들어지고 그저 무덤덤하게 사실적인 면을 강조하죠. 뭐 작품 해설자는 하드보일드 기법이라고 하지만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헤밍웨이는 이런 사실주의적인 서사속에서 독자들의 상상력을 증폭시킨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죠. 노인과의 감정이입을 통해서 마치 바다위에서 실재로 청새치와 사투중에 느끼는 손맛이랄까요. 뭐 그런 상상의 나래속에 우리 독자들도 무임승차한다는 기분으로 슬쩍 다리하나를 걸치면서 나름이 감정을 흡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재미있는 것은 낚시중 노인이 내뱉는 코믹한 멘트나 바다 낚시의 생생한 묘사는 마치 살아있는 고기를 낚은 현장에서 리얼타임으로 생중계를 하는듯한 서사가 일품입니다. 만세기를 낚시로 잡는 장면과 해체하는 장면은 정말 실감나죠. 마치 생선의 비릿한 냄새마저 느껴지게 하면서(예전에 읽었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사냥장면에서 화약냄새을 느낄 수 있었던 만큼이나 생생합니다) 생선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솔직히 입안 가득 군침마저 돌게 하구요. 마치 자갈치 시장에서 생선을 정리해주는 아주머니의 손길을 눈앞에서 처다보는 느낌마저 자아내게 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노인에 대한 애잔한 감정들 그리고 고기와 사투에서 느껴지는 비장함등 왠지 모를 일체감일까 뭐 그런 느낌들을 자아내게 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 를 통해서 사실적인 서사와 더불어 감정적인 서사가 절묘하게 내러티브 전반에 깔려 있기에 스웨덴 한림원에서 대표적인 작품으로 노벨상을 수여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정로 문학적인 격이 높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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