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1501년-1570년)은 율곡 이이와 더불어 조선성리학의 대부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대표적인 사상인 이기호발설은 영남학파라는 학맥을 탄생시키면서 이이의 기호학파와 양대산맥을 형성하여 조선시대 학문번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물론 이런 학파가 단순한 학문정진을 넘어서 정치에 관여함으로서 당쟁이라는 돌이킬수 없는 부정적인 면도 보였지만 중국보다 더 깊은 학문적 성과를 발휘했던 것은 사실이다. 후대에 와서도 이황과 이이는 화폐에 등재될 만큼 우리에게 영향력이 대단한 인물이다. 이러한 면들로 인해서 우리에게 이황은 고지식하고 원리 원칙적인 학자의 이미지로 비쳐지기도 한다. 대부분 이황을 접하게 되는것은 그의 학문적인 이론이나 정치적인 담론에 급급하다보니 한 개인의 인간성에 대한 면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분명 이황은 대학자이기전에 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인간이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그의 학문적 업적에 철저히 가려져 실상 인간 이황의 참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퇴계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중에는 자식들과 주고 받은 편지나, 정계은퇴 이후 고향마을에 은둔하면서 지은 한시등이 포함되어 있지만 주로 학문적연구성과나 정책조언등의 저술에 퇴계의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퇴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너무나 공적인 면만을 부각하게 되었고 정작 퇴계가 일반대중으로 부터 멀어지는 사단을 낳게 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퇴계의 편지집을 보게 되면 그야말로 한 인간의 애절한 모습을 보게된다. 부모의 자식사랑에서 부터 부부간의 애틋한 정,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 대한 가감없는 솔직한 감정을 볼 수 있어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점이 많아 오히려 퇴계를 알수 있는 단초가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번 <퇴계잡영>은 은퇴 후 고향마을인 토계에 정착하면서 그간 정치적인 허탈감과 학문적인 고뇌, 선비로의 삶등을 한시로 남긴 것을 모은 책이다. 한시라는 특성이 아무래도 서찰 만큼의 개인적인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지는 못하더라도 퇴계의 개인적인 감정이 물씬 묻어있음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아마도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의 중간쯤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 한시들을 통해서 진정한 선비로서의 삶을 보여주는 일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고향집에서 마주하는 산천의 아름다움과 그 자연과의 친화을 담은 시는 고래로 부터 선비들이 추구했던 안빈낙도의 삶을 대변해주는것 같아 지금의 시대에 읽어봐도 몸과 마음이 참 편안한 구절들이다. 토계에서 바라본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의 변화를 인간의 삶에 투영시킨 시들은 삶의 의미를 재조명해주는 명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퇴계는 이러한 한시를 통해서 자신의 복잡하고 번뇌로운 감정을 드러냈을 것이다. 결국 대자연의 섭리앞에 굴복하는 모습이 아니라 동행하는 정신으로 이후 학문적 연구에 정진하고 완성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퇴계잡영>의 한시는 거의 토계마을에서 아침저녁으로 마주하는 시냇물과 청명한 하늘 그리고 그 아래 푸르기만 한 산에서 풍기는 정취를 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진흙탕처럼 어수선한 정치장을 떠났다는 안도감 또한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퇴계의 이러한 면들이 대학자 이황을 만든 밑거름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조선시대는 학문과 정치가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지 않았다. 왕도정치라는 개념하에 성실한 학문이 곧 올바른 정치를 만든다고 믿었기 때문에 퇴계는 후학양성에 심혈을 기울렸던 것이다. 비록 그의 진정한 마음을 제대로 이해한 제자들은 드물었지만 향후 발생하는 당쟁의 원인을 영남학파의 태두인 퇴계에게 전적으로 그 책임을 물을수는 없는 것이다. 이 번 한시 모음집을 읽고 있노라면 현대사회처럼 바쁘게 살아가면서 정작 삶에 대한 한줌의 의문도 가질 수 없는 현대인들이 마냥 부끄럽게만 여겨진다. 그 만큼 퇴계는 그 자신을 학문이 아닌 자연에서 찾았다고 하면 억지로만 들리는 것일까?
철저하게 잘못된 선입관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말해주는 책이다. 디지털 카메라의 보편화로 인해 요즘은 거리나 공원에서 카메라 셔트를 연신 눌러대는 사람들을 보는게 다반사일 만큼 사진이라는 예술 영역은 대중화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일반인들도 사진에 대해서 좀더 향상된 기법을 추구하게 되고 시중의 서적들은 거의 그런 스킬 위주로 편집된 책들이 대부분이다. 이번 책도 그런 부류즘으로 생각하고 집어들었지만... <내 사진에 힘을 주는 101가지>는 사진을 어떻게 하면 잘 찍을수 있는가에 대해서 기술적으로 말하는 책이 아니다. 흔히들 우리가 명화를 보거나 잘 찍었다는 사진을 감상할 때 어떻게 하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작품의 구도나 명암 그리고 카메라의 노출, 대상 사물을 바라보고나 촬영한 각도등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나도 이런 저런 스킬을 사용하면 비슷한 컷을 얻을수 있을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촬영을 하게 되지만 정작 그 출력물은 이러한 기대를 산산조각내게 되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럼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어 같은 사물을 찍었는데 누구의 것은 명작이라고 하고 나의 것은 단순한 촬영이라고 하는가? 같은 노출과 렌즈각도로 찍었는데 그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 큰것일까? 바로 이러한 의문에 답을 해주는것이 이 책이다. 필자가 말하는 사진은 화가들이 말하는 그림과 같은 존재라고 한다. 이는 그림을 통해서 화가의 감정이나 사상이 고스란히 들어나기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명화를 보고 감동을 받는 것이다. 사진 또한 같은 맥락이다. 사진에는 찍을 때의 작가의 감정 상태가 담긴다고 한다. 자신이 사진을 보거나 다른 사람의 사진을 볼 때 이런 감정 상태를 읽지 못한다면 그러한 사진은 무익하다고 한다. 다소 추상적인 이야기이지만 수긍이 가는 부분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퓰리처상의 수상한 사진들을 바라보면 그 작고 순간적인 한 컷에 촬영 작가의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진이란 이렇게 단순한 순간적인 컷이이지만 전혀 정적인 이미지가 아닌 것이다. 작가의 철학과 의도가 고스란히 담겨진 한 컷의 사진은 영화 한편이나 한 권의 책에서 말하는 내용보다 더 강렬하게 대중에게 다가가게 마련이다. 바로 이러한 사진이 우리가 말하는 명작인 것이다. 필자는 단순하게 말한다. 심혈을 기울인 꾸밈없고 솔직한 감정을 담을 수 있는 사진이라면 모두가 명작이라고. 아마도 그동안 우리는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바라보는 누를 범하면서 살아왔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기술진보적인 사회에서 작은 스킬하나라도 뒤 떨어지면 마치 큰일이라도 나듯이 화소가 많은 카메라, 줌 성능이 우수한 카메라, 고각의 카메라만 고집한 것은 아닐까 한다. 정작 그 한 컷의 출력물에 담겨져 있는 본인의 영혼은 무시한채로 허상만을 향해서 열심히 셔트를 눌러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뿐이다. 사진이라는 것은 순간적인 감정이입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때 그때의 감정표현에서 그 어떠한 예술작품보다 반응속도에 대한 장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반대로 한번 지나쳐가는 감정이입은 영원히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더욱 힘는게 사진촬영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보는 세상은 결코 다른 세상이 아니다. 단지 렌즈는 화가의 캠퍼스와 붓의 역활을 할 뿐이다. 정작 그 바탕에 사물을 채워 놓는것은 기계적인 기법이 아닌 내 감정의 발산인 것이다.
인조의 항변 " 후대의 사가들이나 사람들이 우리 조선왕조의 역대왕 중에서 나를 가장 못난 사람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내치와 외치에 실패했고 민생을 도탄의 길로 빠트렸고 하다못해 혈육인 아들과 손자 그리고 며느리까지 죽음의 문턱으로 내몰았다는 점을 들어 나를 가장 못난 군주라고 평하는 것을 모를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러한 평가에 대해서 나로서는 다소 억울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숙부인 광해를 권자에서 끌어내리고 보위에 오른 것은 다름 아닌 대의명분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연산을 내치고 보위에 오르신 중종과는 그 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분은 신하들에 의해 반강제로 보위에 오르셨지만 난 적극적으로 보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영창대군의 사사나 인목대비의 폐모는 단지 하나의 작은 구실에 불과했다. 가장 큰 문제는 다름아닌 이나라 조선의 근간을 뒤흔든 오랑케 청국과의 외교적 문제였기 때문이다. 태조께서 조선을 창업하시면서 존명사대와 성리학을 조선의 근간으로 삼으셨고 그 전통은 유구히 흘러왔다. 지난 임진년 혈맹으로서 우리를 도운 명을 배신한다는 것은 조선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비록 아들이자 세자인 소현과 강빈의 행동은 정말 적절치 못했다. 소현은 볼모시절부터 몸이 좋지못했다. 비록 독살설등이 나돌지만 나와는 전혀 무관하다. 또한 봉림에게 보위를 잇기 위해선 나로선 태종의 심정으로 며느리를 정리할 수 밖에 없었다. 봉림은 내가 겪은 수모를 털어낼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빈 강빈의 변 " 내 남편이자 세자이신 소현이 정상적으로 보위를 잇어다면 이나라 조선의 운명은 180도로 바뀌었을거라고 후대의 사람들은 말한다. 물론 긍정적인 발전쪽으로 변했을 것이다는 말이다. 이점만은 누구보다 내가 자신한다. 난 세자와 함께 저들이 적대시 하는 청나라에서 8년동안 볼모생활을 했다. 말이 볼모생활이지 일종의 분조역활을 했던 것이다. 시아버지를 비롯한 조정이 대신들은 그야말로 패닉상태에 빠져있었다. 그런 상태에세 나라경영은 파탄에 빠졌고 백성들은 희망이라는 단어를 잊고 산지가 오래되었다. 손자병법에 나오듯이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고 유일하게 세자께서 그 점을 터득하고 청나라에 대한 연구를 하셨다. 비록 처음 세자께서도 꺼렸지만 내가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결과이기도 하다. 세상은 도움도 안되는 한줌의 성리학이론에 좌지우지되는 시절이 지났다. 이제 국제적인 정세는 실리위주로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에 바로 청나라가 있었다. 이런 점을 모르고 시아버지와 조정대신들은 죽어가는 자식 불알잡기식으로 명에 의존하고 있었으니 나라꼴이 이렇게 되지 않는게 이상할 것이다. 세자께서 비록 평소에 몸이 허약하긴 하였어도 그리 허망하게 가실줄은 몰랐다. 또한 원손이 버젓이 있는 상황에서 차남이 대군을 세자로 앉힌 처사는 정말 법도에도 어긋나면서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나를 자신을 독살할려고 했다는 말도 안돼는 죄명으로 사사한것 자체도 넌센스이다. 아마도 시아버지는 강박증에 시달렸을 것이다. 청에서 몇번 세자에게 보위를 양위해야 한다는 말이 그 자신을 그토록 매정한 사람으로 몰고 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야박한 것은 바로 봉림의 행동이다. 내가 사사되고 난뒤 그의 행동은 마치 자신에게 용상의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어찌 그리 매정하게 대할 수 있는가. 비록 세자와 정치적인 노선을 달리했더라도 혈육인 조카들을 죽음을 방관하고 있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권력이란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세자의 죽음, 나의 아들들의 죽음 그리고 나의 죽음에 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몇일밤낮을 지새워도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후대에까지 독살설들의 소문이 가라앉지 않는 것에 대해서 내가 여기서 가타부타할 수는 없다. 난 이나라 조선의 세자빈으로서 당당하게 이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이었고 그렇게 했다. 누굴 원망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우리 일가의 죽음으로 나의 조국인 조선이 반석에 올라가길 바랬을 뿐이다." 역사에 가정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 가정에 매달리게 된다. 왜? 그 만큼 안타까움이 배어 나오기 때문이다. 조선사을 통틀어 이러한 가정에 가장 오르내리는 인물이 정조와 소현세자일 것이다. <별궁의 노래>는 바로 그 중 한사람인 소현세자와 관련된 역사소설이다. 소현세자가 정상적으로 보위를 이었다면 조선은 분명이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비록 획기적인 변화는 없더라도 발전적인 방향으로 개혁이 이루어 졌을 것이다. 일부 시각에서는 서인들이 대다수 집권하고 있는 정국에서 그 영향은 미비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성리학에 대한 절대적인 맹신에 충격을 주었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별궁의 노래>는 이러한 조선의 격변기 시절에 몸소 볼모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일들은 소현세자의 입장인 아닌 세자빈인 강빈의 입장에서 풀어가는 소설이다. 바로 이점이 이 소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역사는 군주와 사대부중심의 역사이었기에 여성에 대한 역사적 배려나 그 자취가 남아있지 않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그들의 삶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태부족하다보니 수많은 억측을 낳게 마련이다. 물론 이 작품 역시 소설이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력이 많이 가미 되어 있는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동안 소현세자나 인조등의 시각에 초점을 마추었던 방식에서 탈피하여 과감히 여성인 강빈의 시작에서 그 시대상을 연출했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또다른 특징은 강빈이 바라본 인조와 소현세자를 비롯한 이해당사자들의 생각을 묘사하는 부분이 실감나고 더 재미있게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래도 여성이라는 관찰자가 바라보는 것이라 세밀하고 감정적인 표현들이 솔직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에 몰입하게 하는 것 같다. 또한 당시 민초들의 삶과 청국에서 농업이나 무역에 관한 서술들이 흥미롭다. 분명 이 작품은 팩션이다. 역사적인 사실을 기초로 하였지만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 되었기 때문에 이 작품을 통해서 역사적인 판단을 하겠다면 그 오산이다. 물론 독자들의 역사적인 판단은 별개의 것이지만 서두에 인조와 강비의 인터뷰에서 보았듯이 역사는 정반합이라는 절차에 의거하여 흘러가는 것이다. 역사를 재단할 때 항상 균형이 시각을 잃어서는 올바른 역사판단은 불가능한 것이다. 특히 감정적인 대응은 더욱더 금물일 것이다. 우리가 소현세자나 인조에 대한 그동안의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오류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감정적인 시각일 것이다. 작가는 그래서 소설의 말미에서 밣혔듯이 강빈은 조선의 세자빈이었고 그런 세자빈의 위치에서 당당히 죽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우리의 감정적인 시각에 대한 반론을 던져주는 것은 아닐까 한다. 그동안 인조나 소현세자 그리고 봉림대군(효종)에게 초점이 집중되었던 당시의 시대상을 여성 강빈의 시각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가치는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