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포스 Olympos
댄 시먼스 지음, 김수연 옮김 / 베가북스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전 미우주항공국(NASA)에서 달에 물이 그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양이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동안 아폴로 프로젝트와 마리너 프로젝트를 통해서 인류는 지구이외의 행성에 생명체의 흔적을 찾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가장 근접한 위성인 달에 최초로 인류의 족적을 새겼고 각종 데이타를 근거로 가장 확율이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화성으로 많은 위성과 탐사 로봇을 착륙시키면서 또 다른 생명체를 찾기 위해 노력해 왔다. 물론 반대론적 입장에서는 인류의 숨겨진 야심이 또 다른 지구 식민화를 염원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우려를 낳고 있지만 이는 아마도 우주라는 대양에서 혹시 있을지 모를 인류를 닮은 생명체에 대한 본능적인 호기심이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호기심은 SF라는 장르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이끄는 분야로 발달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SF물들이 쏟아져 나왔고 인간의 이러한 상상력은 서서히 공상이 아닌 실현단계에 이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반증이 바로 달에서 물이 발견되었고 혹시 아나 화성에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머지 않은 미래에 톱뉴스로 지면을 장식할지... <올림포스>는 흔히들 통칭하는 SF소설이다. 하지만 여타의 SF소설과는 스토리의 소재나 전재방식 그리고 전체적으로 작가가 추구하는 방식이 사뭇 다르다. 물론 세속적으로 시대적 배경은 아주 먼 시간적 정량화의 감을 잡기 힘든 40세기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그 공간적인 배경(굳이 공간적으로 함축한다는 것 자체가 SF소설에서는 의미가 없지만)은 지구화된 화성, 그리고 미래의 지구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또한 마지막 현생인류의 후손이라 불릴만한 호켄베리박사와 고전인류,후기인류와 모라벡이라는 유기체등의 출현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데 결코 부족함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고전적인 SF소설의 요소들로 이 소설이 진행되었다면 아마도 그저그런 또 하나의 SF소설로 남았을 것이다. 작가가 각종 단체의 상을 수상했던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아주 독특한 소재와의 조우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신이라는 존재이다.

팩스로드와 프리팩스 그리고 QT를 통해서 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어 자유자재로 공간이동 혹은 양자이동이 가능하고 자가복제와 다양한 검색기능을 갖추고 있는 40세기와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제우스를 비롯한 각종 신들 그리고 아킬레스, 오디세우스, 헥토르,파리스로 대변되는 트리이전쟁을 한데 묶어버린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이 바로 이 소설의 묘미인 것이다. 도무지 조화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상이한 두가지의 존재를 찰떡궁합으로 탄생시킨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과 제치있는 스토리 전개가 바로 이 소설의 방대한 분량을 금새 잊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곳곳에 담겨져 있는 영국의 대문호 세익스피어의 작품들을 통해서 SF소설과 문학작품 사이를 혼돈케 하기도 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로마 신화와 트로이전쟁을 살짝 각색해 버려 소설을 읽는 동안 다시 신화와 트로이전쟁에 대해서 검색해보게 하는 등 작가로 하여금 여러종류의 책을 다시 펼처보게 하는 재미 또한 숨겨져 있다. 소설에서 보듯이 신화와 40세기 첨단과학이 과연 어떻게 조화가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으나 달리 생각해 보면 우리가 알고 있고 알아왔던 모든 신화(그리스로마신화를 포함해서) 그 자체가 일종의 SF물이라고 보면 너무 비약적일까?
제우스의 번개, 변신술, 헤파이스토스의 제련술, 이카루스의 날개, 헬레오스의 하늘을 날으는 마차, 키르케의 마술 그리고 신들이 즐겨 먹고 마시는 넥타르와 암브로시아의 재생력은 지금 현재 과학의 힘으로 이루어졌고 향후 첨단과학의 대상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신화 그 자체가 다름아닌 신화를 창조했던 당시에 SF였고 지금도 SF으로 남아 있다고 하면 이런 발상자체 역시 상당히 SF적 공상에 지나지 않는가? 그래서 소설속의 공간이동이나 다양한 전투신보다 신화속의 신들의 힘을 약간더 업그레이드한 묘사가 오히려 더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가장 큰 이슈로 보이는 것은 다름아닌 신에 대한 생각의 전환일 것이다. 첨단과학의 발달로 인해 재생능력을 획득한 인간들의 신에 대한 생각과 태도(물론 40세기에 이르면 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과연 존재할까 라는 생각도 들지만)를 고대 신화의 주인공인 아킬레스와 헥토를 통해서 신이 아닌 단지 복수의 대상으로 전략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이에 적극 호응이라도 하듯이 신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권력투쟁을 통해서 신이라는 자체를 스스로 부인해버리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이러한 소재나 스토리전개가 여타의 SF장르의 작품들과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시간 떼우기식으로 쉽게만 읽어나갈 만한 소설은 아닌 것 같다. 신화적인 머리와 SF적인 감각이 동시에 필요한 작품이다. 그래서 읽을수록 흥미를 더하는 작품이었던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마일 속의 우주 - 한 천문학자의 사계절 산책기 자연과 인간 14
쳇 레이모 지음, 김혜원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동안 겪게는 되는 다반사나 좀 더 한차원을 넘어서 사고를 고찰하거나 대상을 관찰할 경우 거시적 즉 매크로적인 사고에 익숙해 있다. 특히 우주라는 담론적인 개념에선 그 방대함과 거대함에 자칫 기가 눌릴 수 밖에 없다. 인류가 고안한 아니 정의한 가장 빠른 속도를 가진 빛의 속도로 우주의 범위를 표현하고 가장 우리와 가까이 있다고 추론되는 은하 역시 우리의 상식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숫자들의 향연속에서 그저 멍해질 뿐이다. 이런면에서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의 " 세상의 진정한 미스터리는 보이지 않는게 아니라 보이는 것이다"라는 말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매크로적인 그리고 그 크기의 정량화를 가늠할 수 없는 세계를 과연 우리는 볼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역으로 생각해서 우주-->우리은하-->태양계-->지구라는 크기의 절대화를 축소하여 마이크로적인 시각으로 대상을 볼때 비로소 현학적인 대상으로 가늠자의 범위내에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마이크로적인 범위 즉 우리가 쉽게 보고 넘기는 대상들을 우리는 많이들 외면하고 있다.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볼 필요성이 없어서 넘어가는 것인지 몰라도 다름아닌 바로 우리 발길에 닿고 손길로 느낄 수 있는 미시적인 대상에 대우주의 비밀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 또한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쳇 레이모의 <1마일속의 우주>는 물리학자겸 천문학자인 저자가 자신의 일터로 대략 1.6km를 걸어서 출퇴근 하는 길에서 만나게 되는 마을, 숲, 돌덩이, 개울, 들판, 초원등을 통해서 우주의 삼라만상을 보여주는 과학에세이이다. 저자 자신이 37년간 걸었던 길은 신대륙의 발견과 이주 그리고 산업혁명이라는 대격변을 통해서 급속한 산업화과정속에서 세계 어느 곳이나 겪어던 곳중에 하나이다. 산업화는 그동안 우리가 알았던지 무지했던지 간에 인류를 포함한 지구상에 모든 생명체에게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인류는 역사상 그 어느때 보다 풍요롭고 호화스러운 생활을 영위했단 물론 이러한 풍요의 잣대는 인류이외의 생명종에게 동의를 구할순 없을지라도 농업혁명이후 인류사의 흐름속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기를 보내는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비단 타종의 희생이 있었고 의도 되었던 그렇지 않던 간에 그것 또한 사실임에는 분명한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오랜시간 걸었던 길을 통해서 이러한 변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그리고 마이크로적인 시각에서 살펴보았다. 산업혁명의 대명사격인 에임스 삽공장의 흥망성쇠와 그로 인한 주변 자연 환경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인류가 자연에게 가했던 행위 그리고 반대급부로 자연이 인류에게 되돌려줬던 현상에 대해서 제3자적 관점에서 무덤덤하게 말하고 있다. 급격한 환경파괴로 인한 지구온난화등을 비롯한 환경파괴에 대해서 마치 환경보호를 주창하는 전도사적인 견지에서 설파하는 형식이 아닌 그저 있는 그대로를 기술하고 있다. 

지금같은 추세로 가면 머지않는 장래에 환경파괴로 인한 엄청난 댓가를 치룰것이라는 대재앙을 여기저기서 예고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저자는 나름대로 이 책에서 자연의 위대한 힘을 확인 시켜준다. 한때 황무지화된 들판과 초원 그리고 개울과 숲에서 인간의 약간의 노력(부작위을 포함해서)만으로도 자연은 그 자정능력과 회복능력에서 탁월한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사례를 대표적 사례로 보아서 그동안 환경파괴에 앞장선 인류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차피 인류와 자연과 우주라는 존재는 같이 더불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이고 그중에서 인간인 우리에게 선택의 폭이 다소 넓고 다양하다는 것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인류가 수렵, 채집생활을 포기한 오래전 부터 자연에 대한 인공적 변경과 우월의식은 가졌던 것이고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이런 의식은 버리지 못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인류와 자연의 대립관계가 아닌 상호유기적관계를 인식하고 상생의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저자는 자신이 오래동안 걸어왔던 길주변의 아주 작은 세계를 통해서 재확인 하고 그 생명력의 기적에 다시금 감탄한다. 그동안 너무 거시적 시각에서 접급했던 인류와 자연과의 공생관계의 방법을 작은 숲과 개울에서 찾은 것이다. 저자와 같이 걷는 길은 주변에 햇살을 머금고 있는 숲과 멀리서 들리는 새소리 그리고 무질서하게 펼쳐져 있는 초원에는 자연 나름대로의 규칙과 생명의 기적이 숨어있는 것이다.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미스터리의 해법이 바로 우리 발아래에 놓여있다. 대우주의 거대한 생명이 바로 1마일속으로 고스란히 다가온 것이다


밤하늘의 시인이라는 별칭처럼 저자는 책을 읽는 동안 참 편안하게 독자들을 이끌어가고 있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는 식의 논쟁이나 새로운 현상이나 사실을 추구하는 지식전달이 아닌 우리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아주 작은 곳에서 그리고 보지 않을려고 했던 현상들에서 저자는 자연과 인류의 공생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바로 우리와 함께 숨을 쉬고 있는 공간이 다름 아닌 우주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마제국 쇠망사 5 로마제국 쇠망사 5
에드워드 기번 지음, 송은주.김혜진.김지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숨가쁘게 달려온 기번의 로마 제국 서술은 이제 그 대단원의 막을 기다리고 있다. 포카스를 제위에서 밀어내고 헤라클리우스 황조를개창한 헤라클리우스에서 앙겔루스 황조까지의 대략 600여년간의 비잔티움 황실사를 기번은 간단 명료하게 한장에서 고찰하면서 개괄적인 로마제국 쇠망사의 결말을 도출해내고 있다. 물론 이 600년이라는 기간을 쳅터 하나로 마무리했다면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는 세간의 많은 역사서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번은 마지막 권에서도 기번만의 특유한 관점에서 로마 제국사를 고찰하고 있다. 비단 이 기간동안 역사적 사초의 부족이나 그간 알려져 왔던 수 많은 황제들의 치세를 다루는 것보다는 로마제국의 쇠망의 길에서 등장하게 되는 주변민족, 국가들의 흥망성쇄를 고찰하여 로마제국의 쇠망과 자연스럽게 연결해주는 교량역활을 자인하고 있다는 것이 이번권의 키포인트라고 해야겠다. 


우선 로마황제중 배교자로 악명을 떨친 율리아누스에 버금가는 혹평을 받고 있는 성상 파괴자 레오4세와 레오 사후 자신의 아내인 이레나에 의해 다시 성상숭배라는 광기로 치닫는 교회사를 거론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쇠망을 다루고 있다. 또한 이미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이탈리아, 갈리아를 비롯한 기본 서로마제국의 패권을 역시 교회와 접목시켜 고찰한 점에서 기번의 날카로움을 엿볼 수 있다. 서로마제국 멸망이후 동로마제국 황제의 간헐적인 정치적 간섭을 받았지만 이미 이곳은 로마교황의 개인적인 영주로 자리 잡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후 롬바르드족의 왕인 리우트프란드의 일시적인 간섭이 있었지만 로마교회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게 되고 그 파트너로 프랑크왕국의 대표주자인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가 선택된다. 로마교회와 사를마뉴의 조합은 동로마제국이 이미 포기해버린 형제의 땅을 효과적으로 아주 시의적절하게 통치 해나가게 된다.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시조격인 오토1세의 등장으로 프랑크왕국이 역사의 뒷편으로 살아져가도 여전히 한쪽의 파트너는 로마교회였다는 점에서 기번은 "교회와 국가의 영웅들은 공적 또는 사적으로 우호 관계를 맺어 단결했으며, 그들은 패배자들을 짓밟으면서도 아주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는 체하였다. 결국 교회의 통치권은 그들의 지상에서 천 년의 경외로까지 확장되었고 그들의 고귀한 호칭은 그들이 노예 신분에서 풀어준 대중이 자유롭게 선택했다"라는 논평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즉  교황과 카롤링거 가의 상호 의무는 고대와 근대 국가, 교회 역사의 중요한 연결 고리를 형성하게 된다. 이탈리아 정복에서 이 로마 교회의 옹호자들은 좋은 기회, 그럴듯한 명분, 대중들의 소망, 성직자들의 기도와 술책을 얻었다. 하지만 로마는 롬바르드 왕국의 개입으로 로마의 안전을 위협 받은 반면 자유를 보장 받았지만 이들이 살아지고 난 뒤로는 그나마 보장되었던 자유마저 불안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사기는 언제나 약하고 교활한 인간들이 사용하는 수단이다. 힘은 세지만 무지했던 야만족은 교회가 파 놓은 책략의 함정에 빠지는 일이 많았다. 그만큼 교회는 이들보다 한층 더 세련되고 현란한 수사를 종교적 힘을 뒤업고 행사했던 것이다. 바티칸은 로마 교회의 권익을 증진시킨기 위해서 경우에 따라 다양한 허위 또는 진실한, 부패한 혹은 미심쩍은 행동을 하거나 숨기는 무기고이자 제작소 역활을 했다. 대표적으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교령집과 기부장을 만들어 샤를마뉴에게 위대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관대함을 본받고 그의 이름을 되살리라고 훈계하고 주문했다. 이들 민족, 국가의 영웅들이 순서를 바꿔가며 자리매김을 하는 사이에도 교회는 굳건하게 자신들의 신분을 철저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레오4세이후 로마제국전역에 걸쳐 신학논쟁이 잦아들었던 점 역시 이들에 대한 교회의 사기를 한층 돋보이게 한 점도 있지만 이는 동방에서 새롭게 일어나는 광풍을 애써 무시한채로 이러한 술책과 사기들은 또 다른 다양성의 포기와 고립으로 나아가는 방편일 뿐이었다.

헤라클리우스황제 시대에 동방 즉 아라비아반도에서는 새로운 광풍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적그리스도라 불이는 마호메드의 등장은 세계사의 새로운 쟁점으로 등장하지만 로마제국의 몰락을 가속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버린다. 결국 다양성을 포기해 버리고 전제 일신교체제로 옷을 갈아 입은 로마는 자신들의 일신교에 맞먹는 또다른 전제일신교에 의해 같은 절차를 밟으면서 서서히 몰락하게 된다는 것이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겠다. 기번은 마호메드와 이슬람교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상세한 고찰을 하고 있다. 특히 그동안 그리스도교 시작에서 비하되고 왜곡된 이슬람교에 대한 기번의 인식은 상당히 진일보한 점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지금처럼 양단의 종교적 대립으로 인한 적대적 시각과 왜곡된 인식을 볼때 기번의 무게중심이 잡힌 사관은 놀라울 정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호메드의 출생에서 부터 성장 그리고 정치적 성공과 이슬람세력의 유럽확장등을 통해서 한층 더 이슬람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들을 서술해 나가고 있다. 당시 유럽사회의 지배적이었던 시각에서 벗어나 마호메드의 사상과 그의 치적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특히 그리스도교에서 벌어졌던 살육이나 정복에 비하면 이슬람의 그 농도가 더 우호적이었다는 점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기번은 이슬람 역시 전제일신교라는 점에서는 그리스도교만큼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다양성을 배제해버린 사회의 결말은 그 끝을 보지않더라도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 기번의 주장이기도 하다. 

<로마제국 쇠망사>는 오현제시대로부터 앙겔루스황조시대까지의 로마제국사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대저작이다. 기존의 역사서와 차별화되는 점은 다름 아닌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기번은 이러한 세계사적으로 대제국이었던 팍스 로마나를 달성한 제국이 어떻게 쇠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가에 그 촛점을 맞추고 그 과정을 서술하였다는 것이다. 대게의 역사서에서는 소상히 다루지 않는 가려지고 숨겨진 어두운 분야를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는 점이 여타의 역사서와 다른 점이다. 기번은 카이사르가 진두지휘 하고 아우구스투스가 발판을 마련하고 오현제에 의해 그 정점에 올라던 제국이 멸망한 가장 큰 원인을 바로 로마제국 내부에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외침보다는 바로 제국이라는 제도를 고안했고 유지할려고 노력했던 역대 황제들의 포용성 즉 다양성을 포기하면서 로마라는 대제국은 서서히 죽음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지적한다. 이는 그리스도교라는 전제일신교의 탄생과 성장을 비교해 보면 더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도시국가와 공화정시대를 거치면서 로마라는 작은 국가가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군사,제도,정책등의 하드웨어가 아니였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로마는 세계사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다양성을 용인했기 때문에 제국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고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길을 통해서 물질과 더불어 문화,종교까지 로마로 통했고 로마는 이러한 이질적인 문화,종교에 대해서 넓은 아량과 관용으로 포용했던 것이다.

이것이 카이사르가 고안했고 아우구스투스가 확립한 로마라는 제국의 실체였던 것이다. 이러한 장점은 그동안 팍스라는 미명하에 세계사를 뒤흔들 몇몇 국가들과 비교하면 로마제국의 다양성이 그 얼마나 위대하였는가를 더 실감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은 기번이 살던 당시의 팍스 브리티아나나 지금의 팍스 아메리카나를 외치는 미국에게 던져주는 강력한 메세지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다양성이 결여된 일방적인 그 어떠한 체제나 정책 그리고 문화는 역사적 퇴보를 면할길이 없다는 점을 우리는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통해서 다시금 재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로마제국 쇠망사는 지금의 스토리텔링식의 역사서와는 비교가 되질 않을 정도로 고리타분한 맛을 가지고 있다. 원문과 맞먹는 방대한 주석을 통해서 책읽기의 괴로움을 배가 시켜주기도 하지만 기번의 저술의도인 제국의 쇠망에 고루 분포되어 있는 그리스도교의 상세한 서술과 그로 인한 다양성의 쇠퇴 그리고 제국의 몰락을 따라가는 여행은 왜 우리가 역사서를 읽어야 하는 가에 대한 해답을 주는 저서라고 할 수 있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하일기 1 - 새 번역 완역 결정판 열하일기 1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 / 돌베개 / 200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熱河日記는 1780년(정조 4년) 청나라 건륭황제의 만수절(70세 생일) 축하사절로 팔촌형인 금성위 박명원을 정사로 하는 사행단에 군관자제(개인수행원)자격으로 장장 5개월에 걸쳐 중원대륙을 다녀온 일정을 기록한 기행기이다. 당시 연암과 교류를 가졌던 일명 연암사단인 박제가, 홍대용등은 연암보다 먼저 청제국을 다녀온 상태에서 연암의 이번 기행은 다소 늦은 감은 있으나 오히려 연륜으로나 학문으로 정체성이 확립된 시점에서의 중국기행은 그의 안목을 한단계 업그레이드하는 절호의 기회로 다가 왔고 이런 기회를 연암은 열하일기라는 저작을 통해서 자신의 철학을 고스란히 담게 된 계기가 되었으니 후대에 우리에게 왜 연암을 조선최고의 문장가라 칭하는지 재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열하일기는 그 형식상은 기행문의 일종이지만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내용들은 가히 당시 조선을 경천지동하게 할 정도의 위력이 담겨져 있다. 오죽했으면 정조의 문체반정의 시범 케이스에 걸려 금서로 낙인찍히게 되었고 책이 간행되기도 전에 여러 선비들의 입소문으로 필사본이 먼저 돌아다니게 되었다. 결국 열하일기는 연암의 살아 생전 빛을 보지 못하게 되고 하물며 그의 손자인 박규수가 영의정이라는 자리에 올라서도 세인의 두려움으로 간행 되지 못했던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핵폭탄같은 위력을 담고 있는 저서이었다.

연암은 당시 계급상승의 지름길격인 과거를 거부했고 아직까지도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버리지 못하고 소중화로 자부하던 당시 주류양반들의 사상적 연대참여에 철저히 거부한 외로운 아웃사이더로 생을 살아갔다. 북학이라는 실용학문의 거두로써 이용후생적인 삶을 지향했던 그는 유언으로 그저 자기 "몸 하나 깨끗히 씯어달라" 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당시 여타의 선비들과는 확연히 다른 삶을 살았다. 비록 말년에 강권에 의해 몇차례의 지방직에 출사하지만 그의 관직생활 역시 일반민중들과의 소통에 거의 전부를 보내게 되고 <과농소초>라는 불후의 농경학서를 남기기도 한다.

이처럼 연암은 당시 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확립해 나가는 청나라에 대해서 오랑캐가 아닌 진정한 제국으로 인식했다. 열하일기가 당시 숭정이라는 명의 연호를 사용치 않고 청의 연호인 건륭을 사용하므로써 시작부터 직격탄을 받게 되지만 연암의 생각은 이들과 달리했다. 비록 오랑캐의 나라라도 배울것은 배워야 한다는 신념하에 여행을 하면서 청제국의 문물과 제도, 문화, 과학, 건축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만의 신념을 표방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각론격인 일신수필에서 언급한 수레제도, 벽돌제조과정, 난방방식, 말타기, 의복에 대한 그의 견해는 날까로운 눈썰미를 엿볼 수 있다. 사대부라는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고선 이런 세밀한 부분까지 관심을 가질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또한 도강록에서 보여주는 역사인식은 연암으로부터 230여년이 지난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상고사에 대한 왜곡으로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로 비정하고 고조선, 고구려의 강역을 축소해석하고 있는 현 주류사학자들에게는 더욱더 일침을 가한다. 연암은 심양(성경)에 도달하면서 여기가 바로 고조선, 고구려의 땅이었다고 설명하면서 고구려 수도인 평양이라는 명칭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표명하는데 이 논지는 지금 학자들 사이에선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열하일기는 이처럼 역사,경제,문화,정치등의 다방면에 두루두루 걸친 백과사전이자 연암의 지식의 보고인 셈이다. 그럼 왜 우리는 연암을 조선최고의 문장가 칭할까. 열하일기를 이런 백과사전으로 본다면 왠지 딱딱한 학문적인 뉘양스만 풍길테지만 사실 그 비밀의 열쇠는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열하일기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연암은 철저한 아웃사이더이자 노마드였다. 연암이 강을 건면서 던지 화두에서 그의 노마드적인 삶을 추측할 수 있다. 언덕과 물 사이에서 '사이'의 정의를 두 견해 사이의 중간이나 평균을 뜻하지 않고 이것과 저것 그 양변을 떠난 제3의 변이형이라고 해석하므로서 하나의 고정된 가치나 방향성을 갖는 것이 아니고 삶의 현실속에서 구체적이고 매 순간마다 새롭게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의 일생을 통해서 초지일관 지속되었던 사상이고 사행길에서 부딛치는 사물과 인물들의 만남에서도 그런 모습을 철저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노마드적인 정신이 인간적인 연암을 보여 주기도 한다.  

북경에 도착하여 갑자기 열하로 오라는 황제의 명에 따라 북경에서 하인 장복과와 이별하는 모습에서 마치 절친한 지인과의 이별에서나 느끼는 애절함과 마두인 창대와 열하로 떠나는 여정에서 창대의 예기치 못한 발병을 간호해주는 모습은 당시 철저한 신분사회인 조선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휴먼니스트였던 것이다.

그러나 연암의 노마디즘과 휴머니즘보다 더 강력하게 열하일기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철촌살인같은 그의 웃음 즉 유머러스하고 나이브한 철학이 담긴 위트일 것이다. 사행중 갑자스럽게 들런 상가집에서의 문상장면, 그리고 흉악하고 덩치큰 무뢰배를 만나 슬그머니 뒤걸음치는 장면, 가게점포의 현판을 곡해해서 생기는 해프닝, 한밤중에 고북구를 나오면서 성벽에 자신의 이름 석자를 쓰기 위해 아껴 두었던 술을 사용하는 장면, 정진사를 비롯한 사행단에게 중간 중간 날리는 맨트를 그야말로 왜 우리가 열하일기에 열광하는지는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진면목이라고 볼 수 있다.

자칫 기행문이 백과사전 내지는 철학서로 흐르는 것을 방지하기라도 하듯이 연암은 군데 군데 적절하게 이런 나이브한 웃음을 독자들에게 선사하고 있는 천하의 문장가인 것이다. 하지만 연암의 이런 나이브한 웃음도 호질(범의 꾸중)에 이르면 씁슬한 맛을 느끼게 한다. 비록 중국 이야기라고 운을 떼지만 이는 필시 조선양반사회를 실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임에 틀림없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계급에 대한 비판은 비단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연암은 아랑곳 하지 않고 독설을 쏟아내고 있다.

渡江錄(압록강을 건너며) --> 盛京雜識(심양의 이모저모) --> 馹迅隨筆(말을 타고 가듯 빠르게 쓴 수필) -->關內程史(산해관에서 북경까지의 이야기)--> 漠北行程錄(북경에서 북으로 열하을 향해)

이처럼 한양를 출발하여 심양을 거쳐 산해관을 통과하여 마침내 수도 북경에 도달하게 된 사행단 일행은 갑작스런 황제의 통보로 부랴부랴 열하(승덕)으로 급히 출발하게 되고 수많은 난관을 무릎쓰고 열하의 태학관에 도달하게 된다. 

▣ 눈여겨 볼 만한 각론은 일신수필의 장대기, 관내정사의 이제묘기와 호질등이 있다. 장대기는 산해관 만리장성의 장대를 오르면서 느낀 감회로 무릇 인간이란 높은데 오를때는 느끼지 못하지만 막상 내려올때는 그 높이에 질려 혼비백산하듯이 이는 관직이 높을수록 그 나락의 충격도 크다는데 비유해서 관직생활의 청렴함과 덧없음을 시사한다.

▣ 이제묘기에서는 또 한번 연암의 나이브한 넋두리가 보인다. 백이,숙제가 고사리만으로 살았다지만 정작 자신은 고사리를 먹고 속이 불편했다면서 고사리는 어느 땅에서 난 것이냐며 에둘러 백이,숙제에게 한방 날리는 풍경은 연암이 이율배반적인 중화사상에 젖어있는 이들에게 가한 일갈인 것이다. 

연암과 함께 하는 18세기말의 중국기행은 다름아닌 연암이라는 불세출의 문장가이자 노마드, 휴머니스트 그리고 재치있는 위트가 있어 여행의 끝은 지루하지 않고 마냥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의 몸은 2/3가 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지구상에 생존하고 있는 거의 모든 생명체에게 물이라는 존재는 생명의 필수요소이다.
역시 한반도는 삼면이 물(바다)에 의해 감싸져 있는 형국이다. 우리주변 지천에 흔하디 흔하게 있는 것 또한 물이다. 그 투명도나 깨끗함을 떠나 물이라는 존재는 우리와 분리할 수 없는 또 다른 우리자신인지도 모르다. <공무도하>는 바로 이런 물의 이야기이다. 집중호우로 인해 침수되고 제방이 붕괴된 창야로 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서해안의 작은 갯펄인 해망의 이야기와 더불어 물로 끝을 맺는다. 등장인물들의 삶 또한 물과 관련지어진다. 해망에서 장철수와 바다밑 고철수거를 하는 베트남 여인 후에도 자신의 고향은 해망을 닮은 바닷가의 어촌이었고, 미호의 죽음으로 고향땅을 등진 방천석 역시 9대를 갯펄에서 살아온 바다 사나이였다.

또한 고향 청야을 등지고 해망에 새로운 둥지를 튼 장철수 또한 다시 물이 지천인 해망으로 삶의 연장선을 찾게 되고, 또한 불을 진압하기 위해 물을 쏟아 부었던 소방관 박옥출 역시 해망에서 새 삶을 영위하게 된다. 그리고 기자인 문정수 역시 이러한 인물들과 뒤 엉겨 물의 흔적을 찾아 다니게 된다. 온통 물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작가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물은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물을 담기 위한 용기의 모양에 따라 그리고 물을 사용하는 용도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게 마련이다. 특히 물이 휩쓸고 지난간 자리는 과거의 그 어떠한 기억도 깨끗하게 지워버린다. 청야의 저수지가 버람해서 장철수의 과거를 지워버렸고, 박옥출은 백화점화재 진화과정에서 자신의 범죄행위를 지워버렸고 방천석은 자식의 죽음을 개펄의 매립으로 지워버렸다.  

<공무도하>에 등장하는 각양각색의 인물들의 공통점은 바로 이렇게 자신만의 아픈 기억들을 물로 지워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샤워를 한다. 우리 몸에 남아있는 더러움을 남김없이 덜어내기 위해 소설속 노목희가 자신의 생리혈을 씯어내기 위해 샤워를 하고 난뒤 몸에 나는 물냄새는 왠지 뒤끝이 남는 듯 하기만 하다. 몸의 더러움이 아닌 우리 삶속에 담겨져 있는 슬픔, 더러움 그리고 희망 역시 아무리 물로 씯어내더라도 그 흔적만큼은 여전히 남는다.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떠날 수 있으나 상처받은 영혼만은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듯이 해망을 떠난 방천석이나 다시 창야로 돌아가는 장철수나 모든 것을 남기고 유학길에 오르는 노목희의 내면은 결코 자신들의 상처를 물로 씯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 시퍼런 물을 건너 저편의 양안에 도달하면 나아지겠지라는 기대는 좀처럼 그 해답을 보여주질 않는다. 어찌보면 당초부터 물건너 저 편에는 그런곳이 없는 지도 모른다. 삶을 살아가는 우리 인생에 한두번쯤은 있을수 있는 일이 벌어져 버린 것처럼 모든 아픔과 상처를 물길에 따라 흘려보내더라도 우리에겐 항상 그 앙금은 남아 있기 때문이고 우리는 그 앙금을 작중 작가인 타이웨이 교수의 <시간의 넘어>라는 제목처럼 나마의 시간속 넘어에 남겨 두고 싶을 뿐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쉽게 손에 들고 또 속도감있게 읽어나간 작품이었지만 그 내용은 생각하면 할 수록 어려운 소설이다. 특히 <칼의 노래>나<남한산성>처럼 그의 역사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이라면 또 한번 작가의 새로운 변신에 새로운 시각으로 다가가게 될 것 같다.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當奈公何』 
"사랑하는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기어이 물을 건너시다, 물에 빠져 죽으니 이제 임을 어찌할거나"
물에 빠져 죽은 사랑하는 사람이나 그 사랑하는 사람을 품고간 물보다 더욱 가슴저린 것은 물과 함께 님을 떠나 버렸다고 그리고 모든게 다 끝나버렸다고 여기는 이쪽 편의 남아 있는 사람의 지워지지 않는 흔적같은 것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