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태종 평전 - 뛰어난 용인술과 놀라운 포용력으로 제왕의 전범이 된 통치의 달인 중국 역대 제왕 전기 시리즈
자오커야오.쉬다오쉰 지음, 김정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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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618년 이연에 의해 수나를 멸하고 중국 중원에 등장한 당 나라는 907년 주전충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약290년간 중국대륙을 통일한 한나라 이후 제2의 최성기를 이룬 중국 역사상 위대한 제국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제도와 문물의 정비와 발전으로 인해 고구려,백제,신라,왜를 비롯한 동북아시아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나아가 로마제국등을 비롯한 서역제국들과의 교역을 확장한 대 제국으로써의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미국이 지금 현재 미치는 영향 이상의 의미로 당나라는 존재했던 것이라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런 제국의 탄생에 많은 기여를 했고 국가의 틀을 반석위에 올려 놓은 인물이 다름아니 고조 이연의 둘째 아들인 이세민으로 흔히 태종으로 일컫는 인물이 그 중심에 있다. 중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군주중에 하나로 칭송받고 있는 인물 바로 '정관의 치'를 이룬 당 태종에 관한 모든 것을 엿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서적이 국내에 출간되어서 그동안 당 태종에 대해 알려진 이런 저런 이야기들의 실상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겨진다. 

<당 태종 평전>는 태종 이세민의 개인 성장사와 더불어 국가의 건국과정, 왕위 획득과정 그리고 소위 '정관의 치'라는 치세기간 동안 시행했던 다양한 정치활동과 대외 정복 전쟁등을 통해서 이세민 개인의 삶과 더불어 당나라의 연착륙과정을 한번에 고찰할 수 있는 보기 드문 역사서로 비록 중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국내 독자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특히 당 태종당시의 시대가 고구려와 절체절명의 사활을 걸고 치열하게 벌인 고-당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기에 한국사와도 크게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제왕의 자리는 예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준다는 말이 있듯이 이세민이 제위에 오르는 과정은 현대적 해석으로 처세술과 자기개발관 관련된 부분들이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기에 이에 대한 부분 역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생각거리를 던져 주기도 한다.  

당 태종은 조선의 태종 이방원과 상당히 많은 점에서 유사한 점이 있다. 조선건국에 이방원이 일등공신역활을 했지만 논공행상에서 소외되었듯이 이세민 역시 같은 상황이었고, '현무문의 변'이라는 골육상잔을 통해 권력을 차지하는 과정등이 복사판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신생국가를 반석위에 올려놓기 위해서 시행했던 다양한 위민안정정책들과 향후 후계구도에 대한 결정등에서 군주국가(특히 신생국가라는 아킬레스건을 극복한 점에서)에서 정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실로 교과서 같은 역활을 수행해왔다는 평가를 받을만 할 것이다. 자기 반대편에 섰던 위징을 과감하게 등용하는등 인재등용에서 포용력을 발휘하고 신하들의 간언에 귀을 여는 모습등은 고당전쟁의 침략자라로 굳어진 국내독자들에겐 약간은 의야스러운 부분으로도 다가온다. 현대로 비유한다면 국가의 기반인 첨단 하이테크산업이라 할 수 있는 농업에 대한 다양하고 획기적인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민중과 국내 정치안정을 도모했던 정책이 결국 '정관의 치'을 대표하는 치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대외적으로 동돌궐, 토욕혼, 고창등의 정벌을 통해서 변경을 통일하고 안정시킨 공로도 인정 받고 있을 정도로 대내외를 막론하고 치세기간 내내 권력의 구심점에 서서 신생국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했다는 점이 중국사관들에겐 상당히 높은 점수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 당 태종은 제왕학의 교과서로 후대의 많은 군주들의 교범이 되었던 것이다. 

저자는 당 태종의 시대를 말하는 '정관의 치'에 대한 평가에서 안민치국이라는 국내기반 안정화 정책를 다소 이색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당시 태종이 실행했던 휴양생식정책은 백성들을 안정시켜 농업생산력을 증진시키고 사회적 불안요소를 하나둘 제거함으로써 국내안정과 더불어 한나라 말기나 수나라 말기에 발생했던 민란등의 각종 반란을 방지하는 역활에 그 주안점이 있다는 지적과 더불어 이러한 기반으로 당 태종을 비롯한 지배기득권층의 영화를 도모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수나라 말기에 이연,이세민 부자등이 가담했던 농민 반란군의 진압과정을 계급갈등 구조의 일환으로 봄으로써 귀족자제 출신인 이세민에 대한 평가를 절하하고 있는 점도 눈에 띈다. 이는 아무래도 현재 사회주의라는 역사관에서 바라보는 저자나 중국사 연구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하는 논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 태종과 '정관의 치'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으로 보고 진보적인 플랜으로 해석하고 있는 점도 눈여겨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당 태종에 의해 그늘속에 가려져 있었던 고조 이연에 대한 평가 역시 새롭게 보인다. 그동안 이연은 왠지 나약하고(건국 결심 및 실행부분) 다소 미련한 인물(태자 선정과 아들들의 갈등)로 그려졌으나 실상은 당나라의 건업을 위해 그바 보여준 전략적이고도 치밀한 처세를 부각하여 이연에 대한 재조명을 했다는 점 역시 특이할 만한다.  

당 태종과 그의 치세인 '정관의 치'를 이해하는데 이만한 사료와 해설을 곁들인 책은 보기 드물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시각에선 다소 아쉬운 점이 남아있다. 저자는 동돌궐, 고창, 토욕혼등의 대외 정벌사와 관련된 논거에서 승리하거나 최소한 화친으로 결말짓은 부분에 대해선 진군도와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당시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새롭게 쓸법했던 고-당전쟁과 그에 대한 패전의 부분에서는 역시 춘추필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게 없다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고구려와 연개소문에 대한 언급자체가 극히 미비한 수준으로 제대로 된 평가를의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는 점에서 씁쓸한 감정을 감출수 없게 한다. 당시 당나라를 통해 선진문물이 고구려,백제,신라,왜로 유입되는 부분과 이들 국가에서 당나라로 선진문물의 수용을 위해서 교역을 활성화했다는 부분을 강조한 부분과 대비되어 더욱 공정성을 잃기도 한 서술들이 눈에 거슬리는 부분으로 다가온다.  

전반적으로 <당 태종 평전>는 '정관의 치'에 대한 구체적인 사안들을 평가함으로써 태종 이세민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전기이자 역사서로서의 역활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동안 국내 독자들 뇌리속에 자리잡은 당 태종과는 상당히 다른 면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활용할 수 있는 저작이다. 제위회득를 준비하는 치밀한 과정과 그리고 제위에 올라 펼친 치세기간동안의 다양한 위민정책(비록 저자는 지배계층의 영화 목적이었다는 평가를 내리지만 군주국가에선 오히려 합당한 논거이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국내안정을 기반으로 이루어낸 대외정벌(고구려에 패배한 부분은 무시하고 있지만)을 통한 신생국가를 무사히 연착륙시킨 태종의 정치감등은 그 어떠한 군주와 비교하더라도 손색없는 탁월한 점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동안 중국사에서 당 태종 이세민에 대한 평가부분을 당대, 송대이후 그리고 근현대를 구분하여 소개하고 재평가하는 부분에서 저자의 식견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저자의 견해는 마르크스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긴 하지만 나름 색다른 해석으로 받아들여야 할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정관의 치'와 인간 이세민을 이해하는데 이만한 교범도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저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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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
이주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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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칼집에서 잠자코 있는 매서운 칼날을 꺼내들었다. 그동안 제아무리 허튼소리를 하고 인신공격에 가까운 매도를 자행하더라도 묵묵히 참고 왔지만 더 이상은 묵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꺼낸 칼날은 그저 매섭기만 하다. 마치 최고봉의 무사의 칼날처럼 단칼에 썩은 뿌리를 도려내듯이 그 칼날의 끝은 매섭기만 하다. 그리고 더 이상의 가타부타한 요설과 눈가림으로 세인들의 눈과 귀를 막아왔던 세치 혀를 향해 칼끝은 매섭게 달려간다. 악성종양이 3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잠복해왔고 이제 정신마저도 갉아먹고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집도의는 그동안 진행해왔던 방사능치료나 약물치료로서는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다고 판단하고 과감하게 환부를 도려내는 대수술을 감행하게 된다. 그리고 개복하는 순간 집도의나 스탭진이 예상했던 환부보다 훨씬 많은 부위로 전위되어 환자의 생명자체가 백척간두에 이르는 지경을 목도하게 되고 수많은 갈등끝에 환자의 끈질긴 의지를 확인하고 드디어 환부 하나씩을 깔끔하게 도려내는 작업을 시작한다. 아직 그 수술은 진행중이지만 썩은 종양을 하나둘씩 도려냄으로서 서서히 환자의 매박이 돌고 피가 맑아지느 모습을 보고 집도의는 한결 더 희망을 가지고 수술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비록 짧은 순간에 완치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그 희망의 끈을 놓을 수 가 없는 것은 수 많은 대한국인의 염원을 익히 알고 있기에 그리고 환자의 재활의지가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어떠한 외압이나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수술을 진행하기로 했다.""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은 바로 그동안 쉬쉬하던 한국사 전반에 걸쳐 있는 노론/식민사관의 병폐를 마치 외과의의 수술집도처럼 썩고 문드러진 부위들을 하나 하나씩 도려냄으로써 악성종양으로 인해 산소호흡기에 연명해 왔던 한국사라는 환자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러넣은 극약처방을 보여주는 저작이라고 해야겠다. 그러다 보니 이번 책에는 다소 높은음자리쪽의 소리를 방불케 하는 고음과 더불어 극히 정신상태가 제자리에 있는 대한국인들이라면 상당하게 혈압을 상승케 하는 그 무언가로 인해 속이 편할 수가 없는 내용들이다. 물론 그동안 노론/식민사관으로 무장한 주류강단사학계가 전도한 한국사에 대해서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서 고개를 갸우뚱하고 설마라는 생각을 가져본 이들이 상당수 많겠지만 이번 처럼 부끄러운 가정사를 타인들에게 까발려서 공개하는 경험은 아마도 처음이지 않을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동안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인 이덕일은 한국사전반에 걸쳐져 있는 왜곡된 부분들을 요목조목 대비하고 밝히면서 한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많은 국민들로부터 올바른 한국사 전도사의 역활을 수행해 왔다. 하지만 저자의 시각에서 이덕일소장의 온건한 전도행위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그만큼 한국사는 심각한 지경에 봉차했고 더이상 전도행위로는 치료불가능하다는 판단하에 전사로 나서기로 작정했고 그 전사의 붓끝은 정말 매섭게 돌진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십년묵은 체증을 한번에 날려줄 만큼 명쾌하고 속이 후련하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왠지 씁쓸함을 감출수가 없다. 이번 책에서 논거된 사도세자의 죽음, 정조의 독살, 이이의 10만양병의 허구등은 어찌보면 빙산의 일각일뿐이라는 생각에 더욱더 가슴 저미는 느낌을 감출수 없게 한다. 자국의 영토를 알아서 부인하고 식민통치를 긍정하는 나라는 세계사를 통틀어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라는 생각마저 갖게 하는 것이 한국사가 처해져 있는 현실이기에 정말 어디에서 부터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한 것이 현실의 문제이기도 한다.  

역사는 방대한 의미나 고품격적인 의미로 제단하지 않더라도 한 국가 내지는 한 민족의 정체성을 말하는 혼과도 같은 존재이다. 자신의 영혼을 빛내지는 못하더라도 팔아먹어서야 어떻게 국가와 민족이 존재하겠는가. 세계사를 상고하고 현재의 상태를 보더라도 자국사를 홀대하는 국가나 민족은 세계사에 발붙일 곳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해본 민족이 다름아니 우리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경험이 제대로 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정도 한국사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이 부족함을 개탄할 수 밖에 없다. 물론 해방이후 반민특위의 무산으로 일제청산의 기회를 놓친점과 군사정부와 천민자본으로 인해 철저히 외형 키우기에 몰두하다보니 그런 기회가 작았다고 할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더이상 외형 키우기만으로는 한계점에 봉착한 것이고 우리의 영혼이 역사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그동안 철저하게 왜곡된 진실을 바로 잡아가야 한 시점인 것이다. 우리 속담에 늦었다고 할때가 가장 빠른때라는 말처럼 지금 시작이 늦은것 같지만 지금이라도 시작한다면 300년동안 썩어왔던 노론/식민사학이라는 종양은 제거될 것이라고 여겨진다. 방법론으로 저자와 같은 전사적인 학자가 필요한 것이고 이런이들을 후방에서 지원해줄 독자들이 더 많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광견병에 걸린 미친 개한테 약보다는 몽둥이가 더 효과적일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책은 자의든 타이든 간에 베스트셀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비록 많은 이들이 노론/식민사관의 잘못된점을 알고 있지만 아직 그 수는 미비하다고 판단되고 이번 책의 출간으로 세인들의 입속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면서 한국사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가 시작되리라 여겨진다.  

정신병원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대게의 정신병자는 자신은 멀쩡하고 남들이 미쳤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들에게 정신병원만한 장소가 필요한 것이고 아주 많은 노력과 치료를 통해서 다시 사회로 환원시켜야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자 역활인것이다. 정신병을 치료하는 과정은 다양한 방법과 많은 시간을 소요하게 된다. 우리 대한국인의 영혼인 역사에서 정신병적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절실하고 간절한 마음과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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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이순신 - 전8권 세트
김탁환 지음 / 황금가지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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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다른 시절의 이야기이지만 불과 몇십년전 군부정권하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거의 대부분의 남자 어린이의 롤 모델 0순위는 이순신 장군이었다. 아니 그냥 장군만으로도 부족해서 구국의 영웅인 성웅 이순신이었다. 과거 시험장에서 낙마했지만 부러진 다리를 동여메고 끝까지 과업을 완수한 불굴의 의지력과 일본과의 7년전쟁 동안 단한번의 패배도 없었던 전승의 신화를 기록한 탁월한 리더십과  전략, 그리고 마지막 전투인 노량 앞바다에서 장렬히 전사함으로써 그 피날레를 날렸던 그의 삶은 한국사 역사상 그 어떠한 위인에게 찾아볼 수 없는 모델로서 유소년기의 남자아이들에겐 그야말로 다른 대안이 있을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반화된 현상에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정통성이 결여된 정권이 들어서면서 지정학적 요인이나 정권 홍보적인 요인등으로 인해 이순신은 상당히 왜곡되기 시작했고 이순신 그 자체보다는 그를 둘러싼 뿌연 안개속에서 홀로 빛을 발하는 등대와 같이 세상과 동떨어진 인물로 말들어 버렸다. 국가공인 교과서나 위인전 그리고 정보홍보용 자료(현충사를 비롯한 각종 기념유적물등)등 마치 똑같은 활자체에서 찍어내는 인쇄물처럼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정말 일맥상통하게 같은 점만을 들어내고 있고 우리는 그런 필요성에 의해 왜곡된 이순신의 형상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하나의 형식으로 영원히 봉인해 버렸다. 그래서 이순신에 대한 조그만한 부정적인 요인이라도 제기된다면 발끈하게 되고 그런 제안자는 사회속에서 공공의 적으로 매장되기 일쑤였고 아예 그런 발상 자체가 국민적인 정서에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이순신은 인간을 뛰어넘어 신으로 자리매김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 이순신을 다루는 문제는 국민제인들의 어느정도 똘레랑스와 더불어 암묵적인 동의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런 측면에서 김탁환의 <불멸의 이순신>은 김훈의 <칼의 노래>와 더불어 인간 이순신을 아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으로 사료된다. 비록 역사소설이라는 장르로 만나게 되는 이순신이지만 역사적인 고증과 사료들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이순신의 삶과 그가 살았던 당시 에포크상을 그려보는데 이만한 작품도 드물 것으로 보여진다. <칼의 노래>가 임진왜란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면 <불멸의 이순신>은 평전에 가까울 정도로 이순신 일대기 전반을 다루고 있어 성장배경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를 둘러싼 거의 모든 것을 엿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선조와 유성룡,원균등을 비롯한 동시대인들의 사유와 더불어 심리적인 묘사가 심도깊게 펼쳐져 있어 수 많은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특히 正과 反, 善과 惡의 구도로 각인 되었던 원균과의 관계를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각도로 접근하게 함으로써 그동안 경직되어온 사고에 유연성을 가미해 주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또 하나의 특징적인 면에서 허균이라는 인물을 비중있게 다루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이는 작가의 후작이 될 <허균 최후의 19일>에서 펼치질 허균의 사유를 프롤로그하는 형식으로 미리 독자들에게 선을 보이는 보너스적인 역활을 하게 된다. 절대왕권을 꿈꾸는 선조(광해군)와 이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허균 그리고 무엇보다 민의를 최우선으로 여겼던 이순신의 3자구도를 통해서 정치가 가져야 정도가 어떤 것인가를 독자들에게 슬그머니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구도 설정은 그동안 독자들의 뇌리속에 깊숙히 각인된 이순신과 그외 인물들이라는 극단적인 구도에서 이순신을 비롯한 당시대 모든 이들에게 저마다의 논리와 사유가 존재했고 그러한 사유들을 선과악, 정과반이라는 시각으로 볼수 없다는 것을 대변해주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오히려 이러한 구도설정이 인간 이순신의 삶을 제대로 고찰할 수 있는 눈을 뜨게 하고 그러므로서 인간 이순신에게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불멸의 이순신>은 역사적 인물간의 대립구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을뿐 아니라 역사적 인물과 가공의 인물간의 절묘한 매칭으로 한결 맛깔스러움을 더하고 있는 일종의 심리물이라고 해도 그다지 큰 범주내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역사소설이라는 커다란 메타포속에 담겨진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갈등과 묘사가 역사적 배경과 시의 적절하게 연결되어 한층 내러티브의 힘을 증폭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작품의 제목속에 내제되어있는 '불멸'이라는 뜻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영원토록 멸하지 않는 영생하는등으로 직역될 수 있는 불멸의 메타포는 아마도 이순신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절로 들게 한다. 이는 그동안 성웅, 구국의 영웅등으로 비쳐진 이순신의 공적 내지는 겉모습의 상징이 아닌 인간 이순신의 내면적인 모습을 투영한 표현으로 이순신 그 자체를 지칭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이순신이 시종일관 지켜왔던 중용(중도가 아닌)이라는 사유의 기반이기도 할 것이다. 조선내부의 편가르기, 왜라는 적군과 아군, 통제영 내부의 갈등, 군주와 군주의 명에 대한 갈등... 이순신에게 수많은 갈등과 고뇌가 부여되지만 이순신은 이쪽 저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길이 아닌 자신만의 길을 걸었고 그 길이 바로 불멸의 길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광화문사거리에 표호하고 있는 추상적인 상징요소로서의 이순신이 아닌 우리 마음속에 영생하고 있는 실제적인 이순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이순신에 대한 고착화된 이미지를 최대한 완화하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작가는 등장인물들과 그들을 둘러싼 사건(역사적이든 비역사적이든간에)을 마치 교향악단의 지휘자처럼 절묘하게 오케스트레이션을 하면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어 가고 있다. 역사적 사건의 부각으로 인해 자치하면 사건중심으로 편중될 수 있는 역사소설의 한계를 말끔이 걷어내고 사건과 인물(내면적 심리구도)을 유효적절하게 배합함으로써 내러티브를 한결 더 깔끔하게 끌어가고 있는 점이 눈에 돋보인다. 특히 이순신과 동시대를 살았을법한 역사라는 공식적인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민초들(임천수,박초희,날발...)을 거의 조연급 이상으로 발탁함으로써 이순신의 가치를 더 부각시키고 동시에 이러한 민초들의 삶을 어깨에 지고 가야하는 불멸의 당위성을 표출하게 하는 스트럭쳐가 인간 이순신을 적확하게 바라보는 시각임을 넌즈시 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작품을 통해서 그동안 하드웨어적이고 국가 공식적인 이미지로 봉인되어 정체되어버린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기억들이 새롭게 재탄생하는 계기가 충분히 되리라 여겨진다. 공이 추구했던 불멸의 삶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순간 이순신은 영생불사하는 진정한 불멸의 영웅으로 국민들의 가슴에 자리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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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들, 자살하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8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이화연 옮김 / 민음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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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처녀들 자살하다>는 한마디로 정의하기엔 상당히 곤혹스러운 작품이다. 소설의 스트럭쳐나 내러티브가 지향하는 방향성 또는 작품속에 담겨져 있을법한 작가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화두등 일반적으로 그리고 상식적인 범주내에서 살펴보더라도 딱히 뭐라 표현하기 힘든 작품이라고 해야겠다. 자살 ,(소녀들 특히 한 집안의 자매들이 하나 둘도 아니고 다섯이라는 집단 자살)이라는 소재 자체가 그로데스크하면서 어두운 잿빛 요소를 충분히 던져줄 것 이라는 예견된 느낌을 가지고 이 작품을 접하는 독자 일반에게 작품을 읽는 내내 곤혹감 마저 들게 할 정도로 소재인 자살이라는 암울한 시발점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해학스럽다는 느낌을 뛰어넘어 지극히 냉정하는 느낌마저 불러 일으키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또한 작품속에 등장하는 리즈번 자매들의 성향이나 자살에 대한 특별한 동기 그리고 리즈번 자매들을 자살로 몰고갈 수 밖에 없었던 상황등 그녀들의 자살과 연관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도덕적 혹은 문학적인 접근 자체를 차단해 버리고 마치 CCTV에 녹화된 영상만(무성영화같은)을 보여주는 듯한 시선 자체에 또 한번 곤혹감을 감출수 없게 한다. 여기에다 리즈번 자매들의 자살과 디트로이트 시 외각의 소도시인 장소적 배경을 어떤 방식으로던 연관시켜 그녀들의 자살과 도시의 쇠락을 연결시켜봄으로서 대승적인 뉘양스라도 끄집어 내고 싶지만 이 또한 상당한 억측과 더불어 무리수를 둔다는 점을 깨닫게 하는 작품이다. 특히나 화자인 십대 소년들의 시각으로 바라본 리즈번가와 그를 둘러싼 지역사회에 대한 묘사부분은 정말 번잡스러울 정도로 구석구석까지 화자들의 레이다망에서 벋어날 수 없을 정도로 마치 세밀화를 보는듯한 묘사를 작품이 끝나는 시점까지 끌어 가면서 독자들을 한층 더 미로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행여나 이쯤이면 화자의 작품에 대한 총평내지는 감정이입정도가 나오겠지라는 독자로서 최소한의 기대감과 그런 기대감으로 읽어온 인내심을 아주 간단하게 무시해 버린다. 이는 생물학적 나이가 더 많을 수록 더 크게 다가 오게 하는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한다. 일면은 무미건조함으로 혹은 무덤덤함으로 진행되는 저인망식 서술들이 은연중에 독자들 개개인들의 의식과 교묘하게 동화되어 작품과 별개의 또 다른 상상력이나 과거의 경험등을 믹스해서 묘한 상태로 이끌어 간다. 예를 들어 리즈번 자매들을 스캔하는듯한 시선들에서 어린시절 옆집 여학생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면서 느꼈던 당시의 야릇한 희열이 되살아나 자살이라는 모티브와 소도시의 쇠락이라는 암울한 감정보다는 훔쳐보기에 대한 감출수 없는 기쁨을 앞세우는 이율배반적인 느낌이 들면서 왠지 도덕성에 상처을 입었다는 죄스럼마저 갖게 한다. 이러한 묘사가 작가의 의도된 장치인지 아니면 그저 나레이션의 하나에 불과한지에 대한 판단 역시 모호하게 해버린다.  

그럼 이처럼 애매모호한 작품이 굳이 영화로 재탄생하고 모던클래식의 반열에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을 가져보면 다름아닌 특정화 내지는 확정화에 대한 나름의 반기를 들었기 때문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비추어보게 된다. 우리는 문학작품을 통해서 무엇인가에 대한 특정화를 도출하고자 한다. 그 특정화가 도덕적이든 감정적이든 좀더 확장하여 사회적이든간에 문학작품 그리고 작가가 암시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독자들 나름대로의 생각이나 느낌 그리고 이러한 느낌이나 생각을 마치 공통적인 연대감으로 이끌어 내고 그러한 사회적 연대감을 하나의 형식으로 규정함으로써 일련의 안도감을 자위하게 하는 것이 통상의 행위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특정화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고 무엇을 특정하는 것을 당연시 한다. 하지만 <처녀들 자살하다>는 그동안 독자들이 가지고 있던 바로 이런 특정화에 대한 관념을 흔들어 놓고 있는 작품이다. 역자의 표현대로 아마도 이 작품을 읽는 연령층 내지는 세대간에(혹은 개개인의 성향등에) 따라 이 작품은 아주 많은 편차를 가지고 독자들 개개인에게 다가올 것이다. 구세대에 가까운 나에겐 리즈번 자매들의 자살과 한 소도시의 쇠락이 동체로 느껴져 마치 자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에 대한 동질감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또다른 독자들에겐 이런 느낌이 많이 희석될 법하게 교묘하게 다중적인 분위기가 작품전반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이 이번 작품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한번쯤은 문학작품의 홍수속에서 주제나 작품이 내비치고 있는 어떤 특정화에서 벋어나 무위속에 빠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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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컬링 (양장) - 2011 제5회 블루픽션상 수상작
최상희 지음 / 비룡소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목표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과 그러지 않는 삶은 분명한 차이가 존재할 것이다. 또한 목표가 부재한 삶에 대한 의미부여성이 설득력을 잃듯이 이에 반한 목표지향적이고 명확한 삶의 가치에 대한 다양한 미사여구의 찬사들은 즐비하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고래적부터 바로 이러한 목표의식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는 당위성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을뿐 아니라 그러한 삶을 인생의 지고지순한 가치로 판단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나 요즘처럼 미래에 대한 불명확성과 변화무쌍한 미래의 삶에 대해서 바로 이러한 '목표의식'이 없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위험한 삶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라고 여겨지는게 세상 풍토이기도 하다.

 

특히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우리 청소년들에겐 더욱더 '목표의식'이 필요하며 청소년기에 정해진 목표의식이 어떤것이냐에 따라 나머지 삶의 척도를 예측할 수 있다는 식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SKY, 서성한, 중경외시 무슨 고사성어 같은 말이지만 실은 대한민국 대학들을 서열화 하여 나타낸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서열화를 기반으로 우리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목표의식을 알뜰하게 햠양시키고 있고 이에 순응하여 청소년들의 목표의식 또한 정해져 버렸다고 하면 너무나 지나친 비약일까...

 

컬링는 동계스포츠 종목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는 종목중에 하나로 가끔 올림픽경기시즌때나 TV방송을 통해서 한번쯤 스쳐가는 낯선 운동종목으로 비인기 종목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경기의 규칙이나 그 기원등 컬링전반에 대한 관심도 부족하거니와 굳이 인기있는 종목도 많고 많은데 굳이 이런 종목에까지 신경써야할 당위성 또한 없는 종목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자면 여타 인기 스포츠 종목에 비해서 참여자나 관전자 양측 모두에게 별다른 목표의식을 부여하지 못할 소지가 다분한 그저그런 종목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냥, 컬링>는 생소한 컬링이라는 운동을 통해서 우정과 가치관 그리고 삶에 대한 깨달음을 다루고 있는 흔한 표현으로 성장소설에 분류되는 청소년 소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대게의 플롯이 대동소이하듯이 이번 작품에도 친구들간의 끈끈한 우정 그리고 가정과 학교생활의 갈등과 해소등 성장소설이 갖추어야할 덕목은 거의 갖추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영화 <국가대표>컨셉을 방불케 하는 내러티브는 스키점프를 컬링으로 대치한 것 같은 느낌마저 주고 있어 겉으로 표출되는 내러티브의 급반전등을 기대하기도 힘든게 사실인 평범한 스터럭쳐와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성장소설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러한 구조적 표현적 내면적 평이성보다 끌리게 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목표의식'의 부재라는 점에서 여타 성장소설과는 차별화 되면서 눈에 확 띄인다.

대게의 문학작품 특히 독자층을 청소년을 상대로 하는 작품의 경우 그 사회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교훈적인 요소나 도덕적 가치관이 반영되기 마련이고 이러한 장치들을 통해서 청소년층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만드는 구도가 정형화되어 있다는 면에서 이번 <그냥, 컬링>는 이러한 상식적인 구도를 벗어난다. 그래서 오히려 더 매력적인 면으로 다가온다고 해야겠다. 아무도 신경쓰지않고 아무도 처다보지 않는 심지어 웃음마저 자아내게 하는 이상하고 어리버리하게만 보이는 컬링이라는 운동을 통해서 작가는 요즘 우리 청소년들에게 만연되어 있는 왜곡된 '목표의식'에 대한 반기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컬링을 통해서 자아를 실현하고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가고 적어도 게임을 통해서 승부욕이라도 고취할 수 있는 그런 목표의식은 전혀 보이지 않고 단지 컬링을 하고 빠져드는 이유가 '그냥'이라는 표현으로 그동안 기성세대에 의해 획일화된 목표의식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가지게 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고차원적이고 자기희생을 통해서 인류애를 고취하는 틀에 박히고 이율배반적인 그러한 목표의식을 우리는 그동안 우리 스스로에게 그리고 다음세대인 청소년들에게 강요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목표의식으로 인해 과연 인류의 삶이 고차원적이고 자기희색적이며 인류애를 고취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었냐는 물음에 과연 누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으라차,며루치,산적,박카스처럼 흐릿한 목표의식을 가지면 대학진학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고 그 이후 이들의 삶이 평탄하지 못하리라는 예측은 절로 가게 된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올바르다고 맹종하고 있는 '목표의식'이 과연 정말 정답일까라는 점과 뭐 특별한 이유없이 그냥 좋아서라는 미덥지 않게 보이는 사고가 틀렸다고 단정해야만 하는 현실속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한번쯤은 그냥 좋아서 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필요한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특히 미래의 축이라 할 수 있는 우리 청소년들에겐 더욱더 절실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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