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균 쇠 (무선 제작) - 무기.병균.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개정증보판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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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문명사 발전과 그 계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통찰력을 키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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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세트 (반양장본) - 전3권 - 새 번역 완역 결정판 열하일기 4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 / 돌베개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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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쉽게 그리고 깊게 열하일기에 접근할수 있는 유일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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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고백
김려령 지음 / 비룡소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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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김려령 작가의 신작 <가시고백>을 만나게 된다. 영화나 문학작품에서 데자뷰 되듯이 전작이 너무 흥행을 거두면 차기작에 대한 부담이 절로 작가의 필력을 압박할 수 밖에 없을 것이지만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독자들의 기대 역시 만만치 않아 다소 맥을 빼버리는 경우가 왕왕있기 마련이다. 여하튼 베스트셀러이자 영화로 제작된 전작의 이미지가 강하게 독자들 뇌리속에 남아있어 이번 신작에 대한 여러 하마평을 거둬낼수는 없겠지만 이번 작품을 전작에 비교 한다면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르센 루팡의 현신같은 존재감의 해일, 입은 거칠지만 가슴속 깊은 애정과 우정이 담겨져 있는 진오, 부모의 이혼과 친아버지와 새아버지 사이에서 정체성을 혼란을 겪으면서 방황하는 지란, 자타가 공인하는 공식 모범생 다영 그리고 공공의 적 미연등 작품속에 등장하는 낭낭 18세 고2 새파란 청춘들의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펼쳐나가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언듯 등장인물들의 면면을 보아도 이번 작품 역시 성장소설의 전형적인 규범을 따르고 있는 듯이 비쳐지고 있다. 

 

우선 등장인물의 설정에서 청소년 성장소설이 구비해야할 제조건들(캐릭터의 유니크한 특이성 내지는 공감성)을 골고루 매뉴판에 올려놓고 메인 메뉴 못지 않은 인기를 구가하는 사이드메뉴인 보조인물들(감정설계사 해철과 개그콘스터를 방불케하는 해일의 부모님 여기에 뜬금없는 듯한 아리 쓰리(병아리)라는 존재감으로 인해)의 구성은 청소년 성장소설이 구비해야 할 거의 모든 스트럭쳐를 완비하고 있다. 그리고 내러티브의 식상성을 타파해주는 팁으로 웃음과 울음 그리고 둘 사이에서 아쓸아쓸하게 줄타기를 하는 기성세대의 들어내놓고 싶지 않는 한켠의 비밀들 까지 뒤범벅이 되어 해일의 표나지 않지만 절제되고 빠른 손맛(?) 그리고 진오의 거침없는 육두문자의 행진, 아버지에 대한 끌모를 증오의 화신 지란, 여기에 감정설계사라는 고차원적인 열망을 지니고 있는 해철의 선문답들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한편의 시티콤을 보는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유쾌한 작품이다. 사실 작품을 접하는 내내 이들의 뱉어내는 말한마디 한마디에 상당하게 안면근육의 신축을 느끼게 되었고 재미있게 작품을 대했던것 같다.  이렇듯 내러티브나 등장인물들 면면의 성격설정등만을 들여다 봐서는 그저 시중에 흔하디 흔하게 접하는 그런 성장소설의 단례를 보는듯 하지만 사실 이 작품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바라보면 약간의 시니컬한 냉소가 전반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들어오게 되면서 상당히 복잡한 내면의 감정을 끌어오게 한다. 도둑질을 해야만 하는 당위성에서 가족의 파탄, 그리고 학교내에서 일종의 파워게임같은 수 많은 마음속 '가시'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시고백>은 청춘 4인방을 통해서 상호 각자 내면속에 자리잡고 있는 응어리를 마치 손톱밑에 박혀 있는 가시를 빼내듯이 하나 하나 제거해 가면서 마음속에 담아두는 것 보다 밖으로 표출하는 것이 더 긍정적일거라는 메세지를 담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일련의 성장통을 통해서 자기 정체성의 확립내지는 세계관의 다변화를 통하여 성인으로 발돋움하는 하나의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극히 자연스럽게 자기 합리화적이고 기만적인 현 기성세대들의 아픈 곳을 들어 내기도 한다. 이점은 작가가 의도했던 아니던 간에 특히 성인독자들에게 이들 4인방의 행동은 자신 스스로 더 움츠려들게 하면서 가슴속 깊이 박혀 있는 가시에 대한 아픈 기억들을 끄집어 내기도 한다.

 

누구나 저마다 남모르는 가시가 가슴속 한켠에 박혀있기 마련이다. 뺄려고 하면 뺄수록 더 깊숙이 박혀버리는 가시는 제거나 망각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차라리 타인에게 고백하여 스스로 빠져나가게 하라는 교훈적인 메세지를 담고 있는 무거운 소재이지만 주인공인 4인방과 그들을 둘러싼 조연들의 캐리턱가 적절하게 배합되어 한편의 강한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그저 쉽게 웃으면서 내러티브를 쫒아가게 되지만 작품 전반에서 밀려오는 잔잔한 감동이 오랜 여윤을 남기는 작품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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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
계승범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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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시스템속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삶의 가치라는 말은 이미 퇴색되어 버린지 오래되었다. 자본,물질,금권만이 모든 것을 제단하는 사회속에서 삶의 가치를 운운하는 것은 시대 역행적인 발상이면서 패배주의자적인 자기 연민의 합리화 대상으로 비쳐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근대화라는 파고를 자의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우리에겐 이러한 전통적인 가치의 회상 그 자체만으로도 누워서 침뱉는 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날 갑자기 강요되고 수용되어야 했던 서구문명의 근대화는 이제 당연한 절차상의 방법론이었고 서구가 설계해왔던 산업자본화에 익숙해지면서 그 어떠한 담론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구조속에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에겐 전통의 가치가 가져다 주는 무게감은 클 수 밖에 없다. 특히 신자유주의를 중심으로 각 개인들 생활패턴까지 깊숙히 침투한 근대적 가치판단의 근거들에 대한 재판단이 이루어지면서 전통적인 가치관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유교와 선비(사대부)에 대한 담론들이 봇물터지듯이 제기되고 있고 현대적 가치관과 전통적 가치관의 접목이라는 흐름속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과거를 되돌아 보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선비(사대부)라는 존재가 자리 잡고 있다.

 

보통 우리가 선비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지조와 의리로 자신의 주장을 그 어떠한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관철해나가면서 청빈과 안빈낙도 같은 삶으로 타의 모범이 되는 정신적인 주체로서의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상례이자 거의 머리속에 도식화로 각인된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선비라는 그 단어자체가 발산하고 있는 아우라 그 자체만으로 별다른 부차적인 설명의 필요성 자체를 제기할 필요 없는 담론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나오는 소나무처럼 고고한 절개와 한일합방이라는 국치를 당해 초개처럼 목숨을 던진 매천 황현같은 이들이 선비의 대명사로 우리의 뇌리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교와 선비에 대한 긍정적인 면들을 다룬 출간물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선비는 지고지순의 선과같은 존재, 현대처럼 각박한 시대에 정신적인 위안을 받을 수 있는 대상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이런 측면에서 보면 상당히 발칙한 서술들과 더불어 기존의 상식을 무참하게 짓누르는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물론 어느 정도 인지야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대놓고 들어내기보다는 될수록 좋은면만 보고자 했던 우리에겐 상당히 당황스럽기도 하다). 세계화라는 무정체성 시대에서 그나마 전통적인 가치관을 회복하고자 열열히 노력하는 이들에게 그야말로 찬물을 끼엿는 불편한 담론들을 담아내고 있기에 도끼눈을 뜨고 바라볼 수 밖에는 없는 그런 책이기 때문이다. 특히 식미지를 경험하면서 소극적인 식민사관에 점철된 우리 역사사관을 그나마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사관으로 전환코져 선비와 유교 조선을 재조명하는 이들과 그들의 바램에 동승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겐 전통 가치관의 확신성에 대한 믿음마저 뒤 흔들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동안 우리의 머리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선비의 모습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지조와 의리, 청빈과 안빈낙도의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선비의 또 다른 실재적인 모습을 고찰하면서 그들이 펼쳐나간 수신제가치국이라는 대의명분의 허와 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동안 유교와 조선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이라도 그나마 선비라는 이들에 대해선 서두에서 말한 세한도나 시문등을 통해서 상당히 긍정적인 정형화된 이미지로 뇌리에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러한 선비의 이미지는 근대화에 비록 늦게 발을 담갔어도 전통적인 가치관에서는 누구보다 남다르다는 보상심리와 자긍심이 마련한 일종의 현실왜곡장으로 역활을 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실상 조선을 지배하고 이끌어왔던 선비들의 실재적인 모습은 그들이 신앙처럼 받들었던 성리학(주자학을 포함한 원시 유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자신들만의 이율배반적인 논리였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선비라는 공동체 전체의 모습을 개인적인 삶과 공식적인(정치적) 행위 양단을 고찰함으로서 그동안 선비의 한쪽 면만 보아왔던 독자들의 편엽된 시선을 바로잡아 준다. 또한 지금 사회,경제,문화,정치적으로 일고 있는 유교의 접목화와 선비정신의 고양등이 적확한 사실판단을 근거로 진행되어야 하며 자짓 커다란 오류에 봉착할 수 있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선비라고 제대로 대접받아야 마땅한 인물들도 많지만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선비들은 선비정신과는 사뭇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것 역시 사실이고 이런 선비들이 이끌어 나간 사회가 조선이다. 그리고 그 조선은 결국 이민족에게 짓?히는 미증유의 역사를 연출했고 그에 대한 합당한 책임 역시 있는 것이다. 단지 선비들이 주창했던 도덕적인 캐치프레이즈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조선시대 선비들을 동급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 역시 제고해 봐야할 일이다. 물론 조선은 현대와는 사뭇 다른 시대였다. 그리고 지금의 시각으로 그들을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선비들이 주창했던 담론과 그 담론들의 실천성를 감안하더라도 그들의 이중적인 모습은 벋겨지지 않는 것이다.

 

개인적 수양 측면과 공적인(정치사회부분) 참여부분등을 망라해서 선비의 거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고 항목별로 조목조목 비교해보는 논거들을 볼 수 있어 그동안 선비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막연하거나 다소 왜곡된 이미지를 걷어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이러한 비판적인 논거들이 우리 전통가치관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이나 정체성에 대한 일종의 흠집내기가 아니라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여 보다 나은 전통가치관의 확립에 기여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담겨져 있다는 점이 중요할 것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더 나은 미래상을 위한 비판이라는 점을 염두해 두고 볼때 선비들에 대한 적확한 이해만이 우리 전통문화와 가치관을 올바르게 정립하는 방안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선비 일개 개인의 삶이나 담론이 아니 선비라는 특수계층의 전체적인 면을 볼 수 있었다는 점과 현대에 일고 있는 유교와 선비정신의 적용여부에 대한 핵심적인 사안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높게 평가한다. 다만 아쉬운점은 정조의 죽음과 이이의 십만양병설등의 저자의 태도가 극히 정형화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점이 본 저서 내용과는 다른 문제점이기는 하나 역사전반을 다루는 학자 입장에서 한번쯤은 집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가져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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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집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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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오르한 파묵의 초년작품인 <고요한 집>은 그동안 국내에 소개된 여타의 작품과 비교해 보면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이미 <내 이름은 빨강>,<순수박물관>,<새로운 인생>등을 통해서 작가의 진중하면서도 인간의 깊은 심연속을 적나라게 들어내면서 숨가쁘게 혹은 그러면서 온화하게 내러티브를 끌어가는 필체는 국내 독자들에게 터키문학의 정수를 만끽하게 하고 꽤 많은 메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는 파묵만의 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번에 소개된 작품 역시 작가의 고국인 터키를 무대로 한 가정의 가정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 가족의 가정사에 얽혀 있는 비밀을 아흔의 노파와 그의 손자들 그리고 또 다른 핏줄의 시각에서 각각 다르게 바라보는 저 마다의 이야기들를 다층적이면서 1인칭화자 시점으로 구성하여 마치 각각의 장에 해당하는 내러티브들이 별개의 이야기로 들리는 듯하면서도 결국 할아버지-아들-손자로 이어지면서 끊을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처럼 이들 다섯명 화자의 내러티브들이 하나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묘한 스트럭쳐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러한 스트럭쳐가 파묵만의 고유한 구도는 절대 아니지만 왠지 파묵의 작품이기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딱 어울리는 작품의 구도가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이는 비록 형식은 다인칭적인 화법을 구사하고 있지만 크게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보는 듯한 착각도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나 이미 그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는 독자 양측 둘다 이번 작품은 또 다른 묘미를 선사하고 있다. <고요한 집>은 시간상으로 이 작품이후 출간되는 파묵의 작품들의 근간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파묵 자신이 밝힌바 있는 유일한 정치적인 소설인 <눈>의 프롤로그를 보는 듯하면서도 <내 이름은 빨강>의 추리적인 모티브 <순수 박물관>의 애특한 사랑과 다소 편집증적인 집착등을 연상케 하는 모티브등 향후 작가가 펼치게될 작품세계를 미리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특히 매 작품에서 들어나는 것이지만 굴곡에 찬 터키 근현대사와 그 시대를 살았던 인간들의 삶이 반영되어 있어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오듯이 이번 작품 역시 군부쿠테타 직전의 터키 시대상을 담고 있다. 이러한 점들이 오히려 파묵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겐 초년의 그의 작품을 접하면서 파묵의 작품세계에 빠져드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며 이미 파묵의 작품에 빠져있는 독자들에겐 파묵의 작품세계를 한층 더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문명(서양문명)과 이슬람문명(동양문명)이 상존해온 역사적 운명만큼이나 터키의 근현대사는 다양한 이념과 매카니즘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고 그런 혼재된 다양성들이 오히려 파묵의 작품이 획일성에 빠져드는 것을 방지했다고 사료된다.  작가는 자신이 살아왔던 치열했던 동서양 문명의 충돌이라는 거대한 담론들을 작품을 통해서 필연적으로 순응할 수 밖에 없었던 개개인들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적절하게 혼합함으로써 그 존재론적 가치를 부각 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이상을 꿈꾸는 이상주의자이던, 혁명을 꿈꾸는 공산주의자던 혹은 아메리카 드림에 목말라 있는 현대자본주의 지향주의자든간에 그들 개인이 한번쯤은 생각하고 갖고 있을법한 삶을 내러티브속에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당시 터키의 시대상을 가감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전달한다. 또한 그들의 삶의 지향점이 사랑이던, 혁명이던, 이상이던, 허영이던간에 그들 하나 하나가 가지고 있는 특성들 그 자체에 대한 평가를 유보하면서 마치 신문 기사를 아무런 감흥없이 읽어나가는 것 처럼 대하게 하는 것 역시 묘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파묵의 작품에 빠지게 하는 유니크한 점이기도 한 것이다. 그냥 거대한 파도에 대항하지 않고 순응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저항하는 돗단배같은 느낌들(작중 메틴의 암산능력을 가늠케 하는 두자리수의 곱하기 암산문제에서 맞는 답도 있고 틀린 답도 있지만 그 누구하나 그 정답의 정오에 대해서 확인하려 들지 않는 다는 점)과 커다란 패러다임속에서 자신들만의 소소하지만 소중한 가치관들을 유감없이 들어내는 밀알같은 개인들의 삶이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체적으로 이번 작품은 제목처럼 고요하다. 마지막 결말에서 공산주의자 닐귄의 뜻하지 않은 죽음이외에는 그 어떠한 서스팬스나 충격파 없이 진행되고 있어 약간은 지루한 진행에 진도가 빨리 나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이러한 내러티브의 흐름은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작품을 제외하면 거의 비슷한 흐름의 강도이기도 하지만 1주일이라는 짧은 시간적 배경에 비하면 유독 더디게 독자들에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이런 더딘 진행속도가 왠지 폭풍전야의 고요처럼 혹은 살얼음판을 걸어가는 아슬아슬함처럼 다가오는 것 역시 파묵의 교묘한 설정들 속에 있다. 삼대에 걸친 역사적 흐름의 키를 가지고 있는 파르마와 터키 굴곡의 역사를 연구하느 파룩, 급진주의자인 닐귄과 하산, 아메리카 드림을 꿈구는 메틴 그리고 그림자와 같은 존재이지만 없어서는 안될 존재인 난쟁이 레젭 이들 각각의 영역들이 별개의 스토리를 던져주고 있는 것 같지만 전체적인 내러티브상에서 서로 얽히고 얽혀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런한 면들이 거대한 시대적 담론과 그 속에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필수적인 요소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사유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에 한결 정갈한 맛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매번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대하면서 익싸이팅하거나 반전을 기대하는 입장과는 다소 거리가 먼 어떻게 보면 상당히 정적인 작품들을 대면하게 되지만 오히려 이러한 파묵의 작품세계가 리얼타임으로 꼭 무엇인가 눈앞에서 해결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현대인들의 사유구조에 대해서 경종을 울리는 것 같아서 한결 마음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된다. 순수박물관에서 한 남자의 길고도 지고지순한 사랑처럼 오래토록 여운을 남기는 그런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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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오름 2012-03-09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벨문학상이라는게 역시 그냥 받을 수 있는게 아닌듯 하군요. 좋은 리뷰 잘 읽고 많이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