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찾은 책벌레들
정문택.최복현 지음 / 휴먼드림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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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인류의 문명이 발달하게 된 가장 큰 동력은 무엇인가? 기술발달을 폭발시킨 산업혁명인가 아니면 부의 발전을 이룩한 인간의 지적혁명에 있는가 아마도 둘다 정답이 아닐 것이다. 바로 문자의 발명이다. 인간은 문자라는 독특한 기록체를 발명함으로써 인간사유의 모든 행위들을 기록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런 기록들이 비로소 책이라는 위대한 발명품을 만들어 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책을 통해서 인간은 후대에 자신들의 생각과 지식을 전달해왔다. 비록 IT산업이 최절정에 달한 현시점에서도 끊이 없이 책이 출간되는 이유중에 하나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책에 대한 애착은 그 어떤 재화보다 선순위에 있다. 책은 또한 시대성을 초월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옛사람의 사유를 시간적 제약을 떠나서 마음껏 향유할 수 있고, 공감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공간성을 초월하기도 한다. 지리적 이격감을 뛰어넘어 다양한 이들의 사유를 만끽할 수 있는 장점은 그 어느 것 보다 우수하다. 그런 면에서 책은 지금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도서관에서 찾은 책벌레들>은 우리에게 낮익은 세종, 정조, 원효, 이황, 이이, 허균, 박지원, 정약용등 27인의 선현들의 책에 대한 생각과 독서에 대한 나름대로의 방법을 통해서 그들의 삶을 조명한다. 단순하게 책을 가까이 하고 열심히 읽어서 후대에 이름을 남겼다는 등식에서 벗어나 그들이 책속에서 찾고자 했던 것을 보여준다. 과연 그들은 책속에서 무엇을 그토록 찾았을까?

대표적으로 세종과 정조의 경우 조선군주중에서 가장 독서열이 높은 군주였다. 집현전과 규장각을 설립하여 그런 독서에 대한 애착을 보여주었다. 세종은 독서를 일반백성과의 소통의 도구로 사용했다. 책을 통해서 백성의 안위를 찾고 백성을 위무했던 것이다. 반면에 정조는 책에서 기울러져 가는 조선의 개혁을 찾고 그 해결방안에 고심했다. 

이 책에 나오는 이들의 공통점이 바로 독서를 통해서 세상과의 소통을 중시했다고 할 수 있다. 원효대사의 불교의 대중화, 이황과 이이의 조선성리학의 정립, 박지원을 비롯한 북학파의 실증주의, 정약용의 민생철학, 구한말 안중근, 안찬호, 김구등의 독립에 대한 열의라는 모습이 바로 독서를 통한 세상과의 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책에 대한 남다른 소신과 독서에 대한 방법은 개인마다 유별날 정도로 독특하다. 그들은 작은 지면의 책에서 무한히 넓은 세상을 본 것이다. 그들은 책을 통해서 인생의 나침반을 창조했던 것 아닐까 싶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서 선현들의 독서방법이나 그 깊이를 배우는 점 또한 유익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책을 통한 시대와의 소통일 것이다. 그런 소통을 통해서 가치관의 확립과 자기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책을 통해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다양한 사유을 접할 수 있다. 독서 만큼 경제적인 것이 없는 것이다. 아마도 벌레중에 가장 유익한 벌레가 다름아닌 冊벌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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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스라엘 2000년의 역사
전호태.장연희 지음 / 소와당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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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서구기독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는 이라크, 이란 이나 동북아시아의 북한의 핵무기 제조와 관련하여 일명 '악의 축'이라는 용어까지 사용하면서 세계평화이 걸림돌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들 국가의 핵무장은 분명 평화에 위협적이고 주변국가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에는 근본적으로 오리엔탈리즘적인 사고가 저변에 깔려있다는 것 또한 지적하고 싶다. 

객관적으로 세계평화의 가장 위협적인 곳은 다름아닌 서구기독주의의 본산이라 일컫는 중동의 작은 땅덩어리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이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악의 축'이라 명명된 국가들에서 자행된 불손한 행동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 하진 않다는 소리이다. 또한 이 지구상에 몇 남아있지 않는 신정국가이기도 하다. 그네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왕국건설은 언제쯤이면 완공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처절한 몸부림의 연속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책을 통해 유대인의 역사를 음미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지금의 현상에 대해서 생각해 볼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 

<고대 이스라엘 2000년의 역사>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성립과정 정확하게 말해서 야웨가 선택한 유대인이라는 민족의 역사를 구약성경과 연결하여 설명하는 일종의 주일학교 교재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필자들이 머리말에서 언급했듯이 믿음을 가진 이들에겐 성경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기에 유효적절한 교재임에 틀림없는것 같다. 이 종교와 무관하거나 무신론자인 사람들에게 한번쯤 구약에 대한 체계를 잡는데 도움이 될 만하다. 물론 그 기본적인 사고나 주장에 대해선 검증이나 비판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전제조건하에서 말이다. 과학적 사고방식이나 종교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지 못하는 이들에겐 다소 생소하거나 받아들이기 거둑한 점 또한 많겠지만, 그것은 이 책에서 논할 논쟁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이 책을 통해서 유대인의 탄생과정에서 부터 예수의 등장에 이르기까지의 유대민족의 역사적 내지는 종교적 변천사를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성경에서 접했던 아브라함을 비롯한 모세, 그리고 솔로몬왕에서 마지막 세레요한등에 대한 내용을 성경의 구절과 필자들이 유추한 역사적 배경과의 맞물림을 통해서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폭을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느껴지는 감정들은 다양할 것 같다. 유신론이나 무신론이라는 근본적인 쟁점은 뒤로 하고 유대민족의 처절한 삶과 그네들의 신념과 믿음에 대한 몸부림은 충분히 전해진 것 같다. 아마도 그런 강력한 믿음이 있었기에 수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변치 않는 공통의 신념을 확립했던 것 은 아닐까 싶다. 세계사를 상고해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일개 민족의 정체성이나 자립성의 가장 근본은 다름아닌 물질의 풍요가 아니라 정신적인 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 민족의 시간적 뿌리가 깊은 종족일 수록 이런 경향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면에서 유대족의 정체성확보을 위한 긴여정을 이 책을 통해서 작지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특히 고대사회에서의 이러한 민족의 정체성이나 종교적신념은 무엇보다도 중요했을 것이다. 그러한 정신적인 무장이 없는 민족의 통치는 길지 못했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성경과 등장인물들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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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신화에서 역사로 - 고대 국가의 근원을 찾아가는 역사로의 여정
이형석.이종호 지음 / 우리책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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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게만 느껴졌던 이국땅 하지만 왠지 낯설지 않는 땅 바로 중국 요하지역이다. 이곳에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지금으로 부터 기원전 7000년 현재 중국땅 내몽고 지역 적봉시 인근 소하서촌이라는 곳에 다량의 동북아시아 최초의 신석기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이한 것은 흙으로 만든 사람의 얼굴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인근 흥륭와촌에서 대략 기원전 6200년경에 형성된 최대규모의 신석기 집단 주거지가 발굴되었다. 신석기 유적 발굴은 여서 멈추지 않고 요령성부근 몽고족 자치현 사해유적, 상택지역, 부하지역 및 조구부지역에서 출토가 되면서 대략 기원전 4400년이라는 절대년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아직까지 이들 지역에서 국가라는 개념의 틀을 형성한 집단들이 형성했다는 증거는 들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 신석기유적집단에서 멀지 않는곳요하지역 우하량에서 기원전 4000년전으로 추정되는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대량으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바로 홍산문화라 지칭하는 유적지이다. 그리도 이어서 하가점하층문화, 하가점상층문화가 속속 발굴되기 시작한다. 이들 유적지에서 주종을 이루는 발굴내용은 결상이식옥기(귀걸이), 청동제기와 비파형청동검, 적석총, 제사를 지내는 제단등과 신분을 구분하는 무덤의 형태를 미루어 보아 고대국가의 틀을 잡았다고 확정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옥기제품, 고인돌, 비파형청동검, 적석총등이 발견되므로서 그동안 고조선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달리하게 되었다. 특히 하가점하층문화의 경우 고조선의 건국연도인 기원전 2333년과 일맥상통하는 측정년도를 나타냄으로서 고조선 최초의 발상지라는 학계의 학설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또한 분묘에서 발견된 인골의 인류학상 검토를 통해 우리의 조상이라는 사실이 들어나면서 전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고 있다. 특히 홍산문화에서 하강한 일부세력이 중국 대표적인 상(은)나라를 건국한 세력이었다는 사실이 고고학적증거에 의해 증명되므로서 중화주의 역사관을 견지한 중국측은 일대 혼란에 빠져있는 상태이다.

결국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이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상나라를 세웠다는 논리가 되는 것이다. 또한 그동안 식민사관으로 뭉쳐져 있던 우리학계의 주장 역시 허구였음이 이번의 연구결과로 드러났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직접적인 조상은 중국 요하지역을 거점으로 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는 것이다. 그 중심세력에 고조선이 이었고 일부세력은 남하하여 상나라를 건설했던 것이다. 이번 연구결과의 쾌거는 한마다로 신화로만 인식되었던 고조선이 고무당당하게 역사의 첫페이지로 부상하고 있다는 점이다.
""  -고조선은 신화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어느 기자의 보도-

상기 내용은 팩션이다. 팩션은 팩트와 픽션의 혼합어이다. 사실 같기도 하고 허구 같기도 한 것이 팩션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팩션은 팩트을 기준으로 작성된다는 것이다. 

독일의 역사학자 랑케는 실증주의 사관을 주창하였다. 실증주의 사관이란 쉽게 말해서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역사로 봐야하는 것이지 평가자의 주관적 관점이 첨가되어서는 안된다는 논지이다. 이 사관은 지금도 여전히 대한민국 강단사학계의 신앙같은 존재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는 것은 픽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물론 정확하고 객관적인 역사관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실증주의의 비밀이 있다는것도 알아야 한다.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대에 서구열강들의 왜곡된 침탈 논리로 바로 실증주의사관이 큰 역활을 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식민지시대 일본의 내선일체전략으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왜곡된 부분이 바로 우리의 상고사이다. 식민지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임나일본부설을 창조하였고 우리의 뿌리인 고조선은 한반도내에만 존재했고 그 또한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사관이 일본어용학자들에 의해 뿌리깊게 설파되었다. 그런 시대에 역사교육을 받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학자 이병도를 필두로 그를 추종하는 강단학계에는 지금까지도 고조선은 신화라는 논지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게 현실이다.  

신화라는 것은 문자가 발명되기 전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공통된 경험을 구두로 설파한 역사의 한 갈래이기도 하다. 권력의 신성화를 정당화하다 보니 다소 허구성 깊은 내용들이 가미되고 긴세월을 구도로 전달하다보니 내용이 가감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화를 그냥 이야기로만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신화라는 것에 담긴 축약적인 의미를 잘 파악해 보면 바로 역사적 사실을 간파할 수 있는 것이다. 트로이의 발굴처럼 세계적인 대발굴의 시발점은 바로 이런 신화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우리 사학계는 실증주의 사관이라는 논거로 절대부족인 상고사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고조선에 대한 평가를 해왔다. 하지만 과학의 발전과 발굴되지 못한 유물의 발굴로 인해 그동안 주장했던 논거가 흔들리고 있는것 또한 사실이다. 편협하고 입맛에 맛는 고문해석으로 고집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이 역사왜곡을 단행한 중국의 학자들에 의해서 사실로 판명난 점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홍산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를 통해서 한민족의 직접적인 조상인 동이계열이 고대국가를 형성하였고 그 문화의 전파중 한 갈래가 중국 황하문명을 이끌어 냈다는 것이 중국학자들의 의견이자 정설로 자리 잡고있다. 하지만 지금도 우리 강단학계는 그 개연성은 있지만 명확하지 않다고 부인하고 있다. 한반도를 비롯한 만주일대에서 시쳇말로 발로 차면 나오는 고인돌, 적석총, 비파형동검등의 고고학적 유물들이 산재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물론 반대로 홍산문화를 우리것이라고 주장하기에도 무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역사는 행간을 읽을줄 알아야 제대로 역사파악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이러한 역사적 개연성에 대해서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분명 이들 지역에서 나온 유물들은 전통적인 동이계열의 유물이지 한족의 유물이 아님은 분명한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보면서 우리는 먼저 고구려를 떠올린다. 고구려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는 것이 동북공정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큰 오산이다. 동북공정의 실체는 다름아닌 이런 홍산문화를 중국의 최초 고대국가로 편입함으로써 자연히 우리가 주장하는 고조선이라는 나라를 중국역사로 편입하는 것이다. 자연히 고조선의 맥을 있어다는 고구려나 부여 역시 중국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동북공정은 무서운 것이다. 한민족의 뿌리가 고조선에서 시작하지 않고 신라에서 출발되어지기 때문이다. 수천년의 역사가 지워지는 아주 심각한 역사침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심각성에 대해서 잘 견지하지 못하고 있다. 막연히 가끔식 민족주의 감정이 앞서서 한때 잠시남아 성토하는 선에서 끝난다. 그리고??리편이 아니다. 그런 시간속에 중국의 역사침탈은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 중국측에서는 적반하장으로 한국이 자국의 역사를 침탈한다고 대서특필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의 잃어버린(아니 포기했다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상고사 고조선이나 고구려를 생각하면 항상 가슴한 구석이 텅빈것 같은 허전함을 누구나 느낄 것이다. 우리의 학계가 강단과 재야로 나뉘어 갑론을박하는 사이에 고조선은 이미 우리의 역사에서 이탈하고 있다. 세계사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자국민 그것도 명망있는 학자들이 자기들 영토안에 존재했다는 고대국가의 역사에 대한 주장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동안 재야학자들 중심으로 이런 식민사관에 대한 반성과 수없는 노력으로 이제 고조선에 대한 많은 부분들이 실체를 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중국처럼 일관된 목소리는 아직도 들리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국가교과서에 고조선에 대한 건국이라는 말을 게재하기까지 반세기라는 시간을 허비했다. 국립박물관에는 고조선이라는 명칭도 없다. 물론 중국처럼 대놓고 역사왜곡을 하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역사는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그 어느 누구도 보장해주지 않는 것이다. 

역사왜곡을 자행하고 있는 일본이나 중국을 매도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들의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도 철저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우물안 개구리식의 편협하고 왜곡된 사관에서 탈피하여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사관을 하루빨리 수용해야 할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말했듯이 "고조선 없는 한국사는 없다" 라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고조선은 신화가 아니다. 고조선은 분명한 역사이다. 이는 과학적이고 고고학적인 유물이 말을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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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 찾은 고조선
이종호 지음 / 글로연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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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고조선은 신화인가 역사인가? 

<과학으로 찾은 고조선>은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하는 책이다. 여기서 말하는 많은 생각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아니 알고 있다고 하는 우리민족 한민족의 정체성과 고조선에 대한 막연한 생각들이나 개념들에 대해서 차분히 생각할 기회를 부여하는 책이다. 그동안 일본 극우파들의 망언이 있을때 마다 혹은 중국의 동북공정을 접할때 마다 민족적 자존심이라는 감정이 절로 표출되었던 우리의 역사관에 대해서 정말 차분히 생각해 볼 기회를 마련해 주는 책이다.  

독도의 영유권 문제나 고구려의 중국사 편입에 대해서 발끈하면서도 정작 그에 대한 준비는 전혀 없는 나라, 일국의 민족, 역사 정체성에 대한 기준의 척도라는 국립박물관에서 조차 그 뿌리의 흔적을 지워버린 나라, 그러다가 또 이런 문제가 나오면 입에 거품을 무는 나라, 이러한 나라가 다름아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마치 양은냄비에 물이 끊다가 갑자기 식어버리듯이 한때의 관심과 기억의 저편으로 흘려 보내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다. 역사를 전공하고 연구한다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통일되지 않고 자기 밥그릇 지키기에 급급하다보니 정작 다른나라의 발굴과정에서 자국의 역사를 찾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그나마 이러한 작태가 반복되어서 역사에 대한 끈을 아주 놓지 않은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대한민국은 세계사에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혹독한 식민지시대를 겪다보니 여러분야에서 왜곡된 점들이 수도 없이 많고 아직도 제대로 고쳐지지 않는 부분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국권의 강탈을 넘어서 민족의 정체성 말살정책으로 한민족에 대한 근본적인 틀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학에 대한 왜곡은 그 민족의 뿌리와 정체성을 흔든다는 점에서 아주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에서 우리는 불행하다고 할 수 있다. 식민사관으로 똘똘뭉친 학자들이 생각하는 역사관속에서 반세기를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나마 요즘들어 재야민족사학자들의 끊임없는 연구로 인해 우리의 잃어버린 뿌리에 대한 사관이 많이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왔지만 아직까지도 강단사학계의 입김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그 뿌리가 깊다.  

그런면에서 이번 <과학으로 찾은 고조선>은 의미있는 연구라고 봐야 하겠다. 강단사학계에서 그동안 마치 성서의 신앙처럼 여겨왔던 실증주의 사학에 대해 그들이 생각하는대로 눈에 보이는 현실을 제시하면서 그동안 얼마나 어리석은 사관에 젖어있었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 물론 민족주의라는 감정만을 내세운 재야사학계에게도 반성의 기틀을 마련해 주는 연구이다. 비록 우리손이 아닌 중국의 손을 빌려 나온 결과이지만 이제는 양측의 학계에서 서로의 주장만을 반목하지 말고 발전적인 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해주고 있다. 

우리의 상고사는 실증사학에서 주장하는대로 그 기록적 문헌이나 유적이 극히 작다. 그렇다보니 고조선에 대한 실체나 단군이 역사이냐 신화이냐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이런 점은 자칭 실증사학에 곡해를 한 이병도로부터 출발한 우리 사학계의 병패중에 하나일 것이다. 또한 한반도내로 그 강역을 비정해버린 상태에서의 연구이다 보니 그 한계가 여실히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는 사이에 다름 아닌 중국땅에서는 아주 큰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동안 중국의 역사관은 황제헌원을 시조로한 황하문명을 자국사로 인지했었다. 그러니까 황하문명을 기준으로 해서 문명이 동서남북으로 전파되었다고 하는 華夷觀을 바탕으로 국가형성의 시점을 대략 기원전 2000년경으로 추정했던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우하량 홍산문화의 발굴 그리고 하가점하층문화, 하가점상층문화의 발굴과 연구가 진행되면서 중국의 역사관은 일대 대 변혁을 갖게 된다. 바로 중화5천년이라는 신개념이 형성된 것이다. 이는 그동안의 황야문화보다 1500년정도 앞서는 시기에 그들이 오랑캐의 지역이라 생각했던 요하에서 신비의 왕국이라는 국가의 형태가 존재했다는 유적이 나오면서 수정된 역사관이다. 즉 이것이 바로 동북공정의 실체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국은 이지역에서 발굴된 청동기유물과 유골 그리고 분묘의 형태가 기존 중국역사관과는 동떨어진 결과를 접하고 당혹해왔다. 바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잘 알려진 비파형청동검(세형청동검), 적석총, 옥기등의 형태가 대량 발굴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골의 인류학적 분석도 중국인이 아닌 동이계열이라는 결과를 접하게 되었다. 이는 그토록 중화를 강조했던 그들에게 심한 상처를 주었지만 중국은 이들 문화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고 시조마저도 화하족이 아닌 동이족이라고 인정해 버렸다. 그래서 그동안 적대시 되었던 치우가 어느날 갑자기 황제와 같은 반열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익히 듣고 있는 동북공정의 실체이다. 현 자국의 영토내에서 발생한 역사는 모두가 자국의 역사라는 것이다. 단지 고구려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한민족의 근원에 관한 문제이기에 더 무서운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동안 고조선의 연구에 대한 강단학계의 공통된 의견은 한반도내에서 이루어졌다. 평양중심설을 비롯하여 한사군의 문제 더 나아가 기자조선과 단군조선에 대한 부정 이는 독일사학자 랑케가 주창한 실증사학을 기초로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발견에 있는 것이다. 타국의 역사를 자국역사로 변모시키려는 나라에서 자국의 역사를 부정하는 나라의 비밀이 발굴되었다는 현실이 정말 아이러니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이점에 대해선 중국학자들에게 감사라도 해야할 입장이다.

그들의 발굴이 없었다면 지금까지도 갑론을박하고 있을 나라가 있을테니까 말이다. 이번 연구를 통해서 우리의 청동기시대에 대한 역사적 추정도 많이 수정이 되어야 한다. 또한 고대국가의 성립조건을 도식화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홍산문화를 통해서 다시금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한반도내에 존재하는 많은 유물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집중되어야 할 때이기도 하다. 이점은 바로 요동과 한반도의 문화적 연결성을 재구성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여튼 이번 발굴과 연구를 통해서 우리의 잃어버린 상고사에 대한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확인 의미를 100%를 수용할 수 있는 단계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역사적 개연성은 충분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중국측에서도 인정한 바이다)이다. 그렇지만 이번 중국의 동북공정을 통해서 우리 학계의 반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역사적 문헌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단군을 신화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신화라는 것은 그 당시 살았던 사람들의 공통된 경험이나 기억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홍산문화를 통해 발굴된 유물들을 유추하여 한민족 나아가 동이의 산물이라고 단정하기에도 아직까지는 무리한 부분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단지 과학적인 큰 틀의 개연성으로 보아서 우리민족의 근원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제는 이 실마리를 어떻게 풀어나갈것이가에 대해서 강단학계나 재야학계가 머리를 마주하고 노력해야 할 때임은 분명한 것이다. 개인의 조상에 대한 뿌리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이는데 하물며 민족공통의 뿌리를 찾는 일에 의견이 분분해서야 말이 되겠는가.  그동안 우리의 잃어버린 상고사 고조선에 대한 실체가 하나 둘 씩 표면위로 나오고 있다. 이제는 이런 파편들을 잘 연결하여 성숙한 역사관 확립을 도모해야 할 때인것이다. 언제까지 왜곡된 역사관을 후손들에게 되물림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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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 - 1884부터 1945까지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 1
김흥식 기획, 김성희 해설 / 서해문집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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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500백년을 지탱해오던 조선이라는 나라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물론 지난 500여년이라는 세월동안 일본과의 7년전쟁, 그리고 청국과의 두차례의 전쟁을 거치면서 조선의 기본적인 사회구조에 일대 변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사실상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명은 정조사후로 종지부를 찍었다고 했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런 시대적, 역사적 변혁의 물결을 타고 조선은 近代라는 높은 파고에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근대라는 개념은 무엇인가? 특히 일반민중에게 근대라는 개념이 과연 존재했을까? 타의로 근대화를 물결을 타게 된 조선에 서구열강세력의 손길은 지배계층에게는 마수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일반민중들에게는 신천지를 보는듯한 환상에 빠졌을 것이다. 특히 새로운 문물을 접하면서 더욱더 그런 생각이 강하게 자리매김 하였을 것이다.

그런 신진문물중에서 가장 대중에게 근대라는 개념을 각인시킨것은 다름아닌 新聞이었다. 현대나 고대나 권력유지의 가장 큰 틀은 정보 장악력이라고 볼 수 있다. 정보를 가지고 있는 자가 권력을 잡고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면에서 중세 조선도 예외는 아니였다. 이러한 정보를 지배계층만이 향유함으로써 정보 유출의 방지와 정보의 왜곡을 통해서 기난긴 세월 동안 민중을 통치해왔던 것이다. 그런 개념이 근대라는 물결을 타고 일반 대중에게 전파되었던 것이 바로 신문의 탄생이다. 수백년동안 일반 민중들이 갈망했던 정보의 공유화가 실현되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문의 역활은 지대한 것이다. 비록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홍수속에 살고 있는 시대이지만 아직까지 그런 신문에 대한 역활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더욱더 요즘 몇몇신문들에 대한 안타까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일 것이다.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 是日也放聲大哭을 실어 정간당했던 <황성신문>, 그리고 한때나마 민족지라 자부했던 <동아일보>, <조선일보>등의 신문을 통해서 구한말시대에서 해방시기까지의 신문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당시의 시대상을 추측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의 역사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이번 기획은 기존의 판에 박힌 역사적 인식을 고찰하는 개념을 초월하여 일반 민중에게 시사되는 많은 부분을 신문지상이라는 형식을 빌려 시대상을 대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지금처럼 정보 취득의 다양성이 떨어졌던 시대에 이런 신문의 역활은 바로 개인과 역사의 매게역활을 톡톡히 했다고 생각된다.  

또한 이번 책을 통해서 안창호와 재미교포들이 제작한 <공립신보>, 미국 호놀룰루에서 발행된 <국민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된 <권업신문>과 임정의 기관지인 <독립신문>등의 희귀한 자료들을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어서 한층 기획의 의도가 돋보이는 부분이 있다. 그동안 역사공부 특히 구한말의 역사에서 단순암기식으로 실체를 볼 수 없었으나 이번 책을 통해서 이러한 신문들을 접하게 된 점이 바로 살아있는 역사공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신문은 여론을 대변한다고 한다. 이 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말이다. 지금도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을 대변하는 신문이 있듯이 당시에도 그런 색깔을 지니고 있는 신문들이 있었다. 특히 한일합방을 계기로 주권상실의 시대를 거치면서 그러한 경향을 더욱더 커지게 된다. 비록 일제의 검열이 강화되고 언론통제가 심한 시대였지만 그와중에서도 시대를 말하는 신문들이 있어다는 점이 눈에 띈다. 비록 정간이나 폐간의 어려움은 있었어도 이를 극복하고 민중들에게 정확한 정보와 독립에 관한 무언의 메세지를 전달했던 신문들이 있었기에 민중들이 그 암흑기를 버텨낼 수 있는 작은 힘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신문과 비교하면 많은 점에서 부끄러운점들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우리는 이 시대의 신문들을 통해서 굳이 거대한 역사적 상황이나 시대적 소명 내지는 독립의 갈망을 따질 필요가 없다고 본다. 역사서의 행간을 통해서 역사를 투영 하듯이 신문기사의 행간을 통해 그 당시 시대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 역시 중요한 의미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신문이라는 것이 그 시대상을 대표하는 기록물임을 인지하는 것이 우선일 것으로 보인다. 그런 역사적 인식은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많이 접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매체의 다양성이 떨어졌던 시대에서 신문의 역활은 지금같은 그런 역활을 뛰어넘어 모든것을 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 일반 민중에게는 더욱더 그런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이 책에 게재된 신문을 유심히 보면 그 재미가 한층 더 하다. 

1896년 4월 7일 <독닙신문>창간호에 나온 "광고"라는 기사에 신문 8장 가격에 10장을 준다는 마케팅 광고를 보면서 지금 신문사들의 마케팅전략과 비교해 볼 때 잔잔한 웃음이 배어 나온다. 또한 1905년 제국신문에는 민영환의 자살소식과 함께 광고란에 그의 부고를 실은점이 특이하다. 또한 소설이나 만평(우슴거리)같은 유머가 실여있는 점 역시 지금의 신문과는 다를바가 없다. 최초로 간행된 신문에서 출발하여 1918년까지의 신문은 대세가 정치적인 이슈등을 다루는 관보형식의 역활이 컷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1919년을 기점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다. 다양한 알거리와 볼거리가 제공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광고라는 형식을 빌려 본격적인 상업광고가 게재되고 있다. 이들 광고의 특징중의 하나는 유독 임질이나 매독 및 중풍에 관한 치료제 광고가 눈에 많이 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의 의학적 수준으로 보아서 치명적인 질병이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 것이다. 또한 신식문물의 확대로 인한 제화점 광고와 여성들 바느질에 일대 혁명을 가져온 제봉틀에 관한 광고, 그리고 화장품 광고등이 자주 등장한다. 또한 사진과 함께 게재되는 봄나들이의 풍경들은 아마도 암울한 시기에 작은 희망이라도 가져보라는 취지는 아니였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이렇듯 이 시대의 신문들은 그 당시 일반 민중들의 삶을 투영해주고 있다. 나라잃은 슬픔도 중요하지만 일반민중에게 가장 큰 걱정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현실이었던 것 아닐까 싶다. 당시 신문을 통해서 역사적 인식이라는 거대한 의미를 부여할 수 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일반 민중들의 삶을 바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시대에도 봄나들이도 가고 싶은 것이고 외모에 대한 신경도 쓰고 싶은 것이고 신식의 의복과 구두도 신고 싶은것이 인지상정이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신문이라는 기록물을 통해서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면 너무나 큰 억척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지금보면 유치한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더 솔직하고 순박한 느낌이 들어서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역사적 사초나 기록물을 통해서 올바른 역사인식을 지향하고 있지만 반드시 빼먹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일반 민중들의 삶에 대한 접근일것이다. 그러한 의도 없는 역사적인식이야 말로 한쪽으로 치우친 역사 인식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그들 민중의 삶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고 시대상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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