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의 눈물 - 사라지는 얼음왕국의 비밀
조준묵 프로듀서 외 지음, 박은영 글, 노경희 스토리 / MBC C&I(MBC프로덕션)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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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북극의 눈물>을 책으로 접하기 이전 MBC창사 특별기획으로 제작된 다큐멘터리로 본 기억이 있다. 취재진이 약 300여일간 북극에 체류하면서 북극 생태계와 이누이트(에스키모족)의 삶을 생생하게 다루어 지구 온난화로 무너져 내리는 북극의 위기상황을 보았던 기억이 절로 난다. 바로 이 책은 이러한 TV다큐를 책으로 편집하여 출간한 것이다. 특히 아동층과 청소년층이 이해 하기 쉽도록 각종 화보와 과학상식을 덧붙여 북극의 실재상황을 말해 주고 있다. 

북극이라 하는 곳은 남극과 마찬가지로 지구상에 남아있는 오지 중의 대표적인 곳이다. 대체로 우리는 북극이라 하면 자연파괴자인 인간의 발이 닿지 않는 곳 그래서 빙하와 만년설로 지구의 오래된 역사가 마치 한장의 사진에 찍혀 있는 모습으로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왠지 북극은 황량한 얼음천국이 끊없이 이어지는 추운 겨울만 존재할 것 같은 생각을 한다.

그러나 막상 지금의 북극은 이러한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몸살을 앓고 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몸살을... 

환경오염으로 인한 지구온난화 문제의 직격탄을 맞은 곳이 바로 북극이다. 비록 북극에서 직접적인 개발행위를 하지 않았는데 북극이 무슨 위험에 직면해 있을까 하고 반문할 수  있지만 지구온난화로 인한 지구의 전체적인 온도상승 특히 북극의 온도상승으로 인한 위험성이 극에 달하고 있다. 매년 줄어드는 빙하와 녹아내리는 만년설로 인해 북극의 생태계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비단 북극의 변화만이 아니라 해수면의 상승으로 인한 인류전체의 재앙이 될 수 있음을 과학자들과 환경보호운동가들은 이제 경고조차 하지 않는다. 경고의 수준을 넘어선 예정된 재앙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적인 견해이다.

이런 견해를 뒤받침 하는 것이 바로 취재팀의 300일간의 긴 취재를 통해서 사실로 증명되었고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북극의 만년설과 빙하가 녹아내림으로 해서 바다의 염도가 낮아지고 이로인해 플랑크톤의 감소 플랑크톤을 먹고사는 어류의 감소 이는 바로 바다표범이나 바다코리끼의 감소로 이어지고 북극의 제왕인 북극곰의 생존위험을 가져오는 파급효과를 낳고 있다. 또한 수렵을 주업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누이트들의 생존위험과 조상대대로 살아온 땅을 떠나야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북극의 현실이 바다만 아니라 땅에서도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식물한계선 넘어 툰트라지대의 변화로 인해 순록이나 사향소의 개체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북극은 다방면에 걸쳐 몸살을 앓고 있다. 작은 생명체에서 부터 북극곰을 비롯한 거대한 생물 그리고 그 정점에 있는 우리 인간의 삶이 위태롭다.   

이 책은 사계절이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북극의 사계절을 따라 그 변화를 카메라에 담고 있다.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 봄에서 시작하여 해가지지않는 여름 그리고 온통 어둠뿐이 겨울까지 북극의 계절변화와 그 변화속에서 살아가는 자연생명들의 삶과 북극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이누이트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기후이상으로 예전에 비해서 하루하루 살아가기 힘든 북극곰의 더딘 발자국과 이누이트의 사냥감의 감소로 인해 직업자체를 잃어가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는 비단 동물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마져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 온 것이다. 그래도 이누이트들은 조상대대로 살아온 터전을 지켜내고 싶어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배품의 삶을 사는 모습이 가슴 뭉클하게 느껴지게 한다. 

<북극의 눈물>은 바로 빙하가 녹아내리고 만년설이 녹으면서 흘리는 눈물인 것이다. 이제는 북극의 눈물을 멈추기에는 너무 늦어 버린것 같다. 그나마 기후협정등을 통해 탄소배출량의 조절 및 그린에너지등의 화석연료 대체 에너지의 개발과 보존 프로그램등을 통해 북극의 눈물양을 줄여나가는 수 밖에는 없다. 북극의 눈물이 지금처럼 계속 늘어가면 결국 이 지구상에 사는 모든 생명체의 삶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의 청소년이나 어린이들에게 환경파괴의 위험성이 얼마나 많은 파장을 가져오는지를 충분히 일깨워 줄 수 있는 내용들이 많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북극 생태계와 그 속에 살아가는 이누이트들의 삶을 보면서 환경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유기적인 협동만이 지구를 지켜내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을 일깨워 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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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 - 묵점 기세춘 선생과 함께하는
기세춘 지음 / 바이북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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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의 즐거움을 다시 한번 알게 일깨워 준 책이다. 우리가 책을 읽는 것은 다름 아닌 저자의 사상과 소통을 위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특히 古典은 그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어 더욱더 소통의 의미를 배가 시킨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墨子>>는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특히 묵자를 접하는 동안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기독교의 복음서와 불교의 법화경, 마르크스의 유토피아,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등 마치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주요한 사상이 어떻게 그 옛날 한개인에 의해서 설파되었을까 하는 생각과 인문사상사를 다시 집필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묵자의 내용이 친근감으로 와닿았던 것이다. 

묵자는 단지 중국사상의 르네상스시대였던 춘추전국시대에 유가, 도가, 법가등 수많은 사상가중 하나로서 그리고 좀 더 나아가서 '겸애사상' 정도를 주창했던 잊혀진 고대사상가로만 알고 있었던 일자무식의 필부인 나에게 그래서 기세춘선생의 <<묵자>>는 많은 충격을 던져 주었다. 

사실 동양사상은 그 다양성이나 깊이면에서 서양사상과는 비교대상이 될 수 없을 정도로 심원하다고 할 수 있다. 단지 근대화라는 담론에서 서양의 영향을 받게 되어 그 의미가 퇴색한 부분도 있지만 그 근원을 고찰해보면 인류문명의 뿌리와도 같은 존재가 바로 동양사상인 것이다. 이러한 다양성이 한때 정치논리(한제국의 유교 공식화)에 의해 억압되었고 서양의 근대화담론에 의해 휘청거렸던 것이다. 심지어 고전사상은 사회발전의 걸림돌이나 병폐로 치부되기도 하였다. 그나마 몇몇 뜻있는 학자들에 의해 그 다양성을 재발견할 수 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보면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정치상으로는 혼란시대라고 하지만 사상적인 면에서는 그야말로 서구의 르네상스시대를 능가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사상의 다양성이 공존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사상들은 현대에 이르러 그 의미가 더 확대되고 연구되고 있지만 유독 묵가만이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주목받지 못한 이유가 여러가지 있을 수 있지만 나는 가장 큰 이유는 두가지 정도라고 생각된다. 

첫째, 묵자의 출신성분이 불손하다. -한족의 입장에서-

공자, 노자, 한비자, 순자, 맹자등 이름만 들어도 장장한 이들은 한족의 후예들이다. 하지만 묵자의 경우 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는 한족출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묵자는 어디에서 왔을까? 중국 사서의 기록으로 추론하면 묵자는 고죽국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바로 묵자가 동이족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추친된 중국의 상고사 발굴 프로젝트에 의하면 고죽국이 위치한 홍산문화, 하가점하층문화가 바로 동이족의 문화라는 것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근거로 보면 묵자는 동이족의 후예였고 그래서 한족의 시각에서 그의 사상을 부각시키는 것이 다소 부담스럽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둘째, 묵자는 아주 불손한 사상의 소유자이다. -지배계층의 입장에서-

공자를 비롯한 사상가들의 출신성분은 대체로 사(士)였다. 요즘으로 치면 식자층에 속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묵자의 경우 비천한 노동자 출신으로 출신만 놓고 보면 이들과 비교대상이 되질 않는다. 특히 그가 내세운 겸애사상 즉 만민평등사상은 당시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왕조국가에서도 받아 들이기 힘든 사상임에 틀림 없었다는 것이다. 하물려 현대의 정치제도하에서도 상당히 진보적인 사상이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한족이 아니고 하층민출신으로 위험천만한 사상을 펼친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진시황의 전국통일이후 진행된 집단의 망각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서서히 역사의 망각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묵자의 사상을 좀더 쉽게 그러면서도 그의 뜻이 제대로 살아있는 말로 함축하면 아마도 "天下無人"  "兼愛" 이 두마디로 대변될 수 있을 것이다. 글자그대로 풀이하면 천하무인은 천하에 남은 없다라는 뜻이고 겸애 두루평등하게 사랑하라는 뜻이 될 것이다. 묵자의 철학과 정치,경제, 외교,반전사상등을 한꺼번에 표현하는 말이 바로 천하무인과 겸애이다.
천하에 남이 없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나를 대하듯 남을 대해야 하는 것이고, 자기 가문을 대하듯 남의 가문을 대해야 하는 것이고, 자기 나라를 대하듯 남의 나라를 대한다면 그 어떠한 분쟁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하늘아래의 그 어떠한 차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유가에서 말하는 사농공상의 그 어떤 신분적인 차별이 없는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는 입장이다.
겸애는 천하무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되는 말이다. 천하에 남이 없는데 어찌 두루두루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두루 평등하게 사랑하는 세상이 묵자가 바라는 바로 유토피아였던 것이다. 현대인들은 더불어 같이 살아가는 공동?? 묵자가 주장했던 것이다. 

묵자는 천하무인/겸애의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 두가지의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삼표론과 절용론을 통해서 천하무인, 兼相愛 交相利로 이르는 길을 설파하고 있다. 마치 예수가 그의 하나님을 찾아 가는 구도의 길을 제시하듯이 말이다. 묵자가 말하는 구도의 길은 삼표론과 절용론으로 대변된다. 

三標論
묵자는 천하무인/겸애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天志)만이 가치판단의 근원이면서 표준이라 주장했다. 묵자가 제시하는 세가지 표준을 이른바 삼표라고 한다.
: 하늘의 뜻을 실행한 바 있는 성왕의 역사적 경험을 표본으로 삼는 것이며(본받을 표본이라는 뜻으로 보편적인 선)
: 판단 주체인 인민의 이목에 따르는 것이며(근원으로 삼아야하는 공동의 선)
: 실제로 인민의 이용후생에 이로운 것을 따른다는 것(백성의 이익을 위한 구체적인 실용성)
묵자가 말하는 모든 가치의 근원은 유가에서 말하는 군사부(君師父)가 아니라 일반 백성의 뜻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봉건 지배 체제를 부정하는 혁명선언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맹자는 묵가들을 부모도 모르는 탕아들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묵자의 민의는 이러한 효나 충의 개념을 뛰어넘는 담론이다. 당시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를 반대하고 본받을 표준은 오직 인민의 뜻과 이익뿐이라고 주저없이 주장했고 이러한 삼표만이 천하무인를 이룩하는 기준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지금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보다 더 민본주의, 민주주의적인 사고인 것이다.

節用論
묵자가 말하는 절용이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절약의 개념과는 사뭇다르다. 절용이란 절도 있는 소비를 지칭한다.
그럼 절도있는 소비란 어떤 의미인가? 백성들로 하여금 재화를 풍족하게 사용하토록 하되 이용후생에 보탬이 되지 않는 것은 결코 하지 말라는 것이다. 첫째로 백성의 이용후생에 보탬이 되지 않는 것은 생산하지도 말고 할 필요성도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재화는 그 본래의 목적대로 소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백성의 노동과 자원을 지배계급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낭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유가에서 강조하는 예악(禮樂)의 개념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이다. 묵자는 귀신에 대해선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도를 넘어서는 장례나 호화로운 음악으로 인한 재물낭비를 비판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절용의 도를 넘어서는 것이 요즘의 경제학 용어로 말하면 시장실패의 원인이 되고 또한 전쟁의 목적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자기 나라에서 나오는 물산을 주어진 목적대로 사용하게 되면 전쟁은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기막힌 발상인가 묵자가 아닌 그 어떠한 이가 이처럼 생각했겟는가. 이것은 묵자 자신이 노동계급출신이기 때문에 이런 폐단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특히 고대의 경우 전쟁의 목적중 가장 큰 목적인 이러한 노동력의 확보였다는 점에서 묵자는 절용을 통한 자국의 경제안정과 반전사상을 동시에 설파했던 것이다.

이처럼 묵자는 천하무인과 겸애가 실현되기 위해서 삼표론과 정용론을 방법론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방법론의 핵심은 다름아닌 백성의 뜻(民意)에 따라 백성의 이롭게(利)하는 것이 진정한 성인의 방침이라는 것이다. 국가가 지향하는 모든 정책은 결국 인민의 행복을 위해서만이 그 존재가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백성이 존재하지 않는 국가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어떠한 사상보다 묵자의 사상은 사람을 중요시 한다. 유가의 사(士)가 아닌 일반 백성을 중요시 한다. 백성의 뜻이 바로 하늘의 뜻이라는 것을 묵자는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만이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점은 민주화된 제도에서 정치를 펼치고 있는 지금의 정치인들에게 많은 점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러한 백성본위의 사상으로 인하여 묵자사상은 그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굳 없었던 것이다.

묵자의 사상은 한마디로 토탈리스트라 할 정도로 철학,정치,외교,사회,종교,경제등 분야에서 그의 표현처럼 두루두루 걸쳐 확인되고 있다. 그 어떠한 사상가보다 확고한 신념과 자기정체성을 가졌던 사상가였던 것이다. 비록 묵자의 사상은 그 당시에 철저하게 외면 당했지만 예수의 하나님과 불교의 중생구제, 애덤스미스의 국부론, 마르크스의 유토피아를 통해서 그 면면을 전달했던 것이다.약 2500여년전 이러한 불세출의 사상가의 사상이 시대를 흘러 지금에 와서야 빛을 보게된 것은 어쩌면 역사라는 신의 시샘은 아니였는지 모르겠다.


忠實欲天下之富 而惡基貧    진실로 천하가 부유하기를 바라고 가난을 싫어한다면
欲天下之治 而惡基亂           또한 천하의 태평을 바라고 혼란을 싫어한다면
當兼相愛 交相利                  마땅히 두루 평등하게 서로 사랑하고 이롭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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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못 된 세자들 표정있는 역사 9
함규진 지음 / 김영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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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는 정확히 27명의 군주가 그 명맥을 이어온 세계사 유래 없는 단일 장수 왕조이다. 이 비결에 대해서 후대의 평가는 다양하다. 절대왕권국가가 아니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논거 그러니까 왕과 사대부가 적절하게 권력을 양분했기 때문에 장수할 수 있었다는 설, 또한 타왕조 국가에 비해 철저한 세자교육이 있었고 그로 양성된 군주에 의한 치세가 가능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첫번째 논거에는 수긍이 가지만 두번째 세자제도에 관해서는 의구심이 많이 간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정확히 왕의 숫자만큼 왕의 후보라고 할 수 있는 세자 역시 27명 이었다. 정상적이라면 이들 세자중 자연사할 경우를 감안하더라도 많은 이들이 보위에 올랐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많은 이들이 보위에 오르지 못하였다. 이중 15명만이 최고의 권좌에 등극하였을 뿐 나머지 12명이라는 많은 이들이 보위에 등극하지 못했다. 보위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대부분 병사가 그 원인이었지만 그중에 반정으로 폐세자된(연산군 아들과 광해군 아들) 경우와 독살의혹이(소현세자와 효명세자) 있는 경우 그리고 의문의 죽음(사도세자)을 당해서 보위에 오르지 못한 경우도 있다.  
<왕이 못 된 세자들>은 바로 보위에 오르지 못한 12명의 세자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무엇 때문에 이들은 보위를 잇지 못했던 것인가? 조선시대의 세자는 그 의미가 남달랐다고 볼 수 있다. 차기의 지존이라는 뜻에서 國本이라고 지칭했고, 세자의 교육을 위해서 별도의 독립기관인 세자시강원의 주도하에 철저하게 제왕수업을 받아야 했다. 왕비나 후궁의 임신에서 부터 지존의 자리에 오르는 순간까지 조선최고의 엘리트들로 구성된 씽크탱크에 의해서 차근차근 제왕의 자질을 키워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성리학에 근간을 둔 조선사회의 왕도정치 이념의 실현을 구현하기 위한 기본과정이었고 세자인 이상 이러한 절차는 필수요건이었다. 그만큼 세자는 나라의 근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자의 지위는 과연 부왕의 다음 자리에 해당할 정도였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이 가는 점이 있다. 세자라는 제도가 결국 제왕수업을 얼마큼 제대로 습득하느냐에 따라 언제든지 흔들릴수 있는 가변적인 위치였던 것이다. 때론 부왕의 정적으로 때론 신하들의 들러리로 이용될 소지가 많았던 것이다. 어찌보면 세자의 자리는 권력이라는 최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태풍의 눈이었는지 모른다. 결국 그들이 보위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조선이라는 제도적 모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왕도정치실현을 위한 철저하게 성리학으로 무장하지 못하는 대권후보는 자연도태되었던 것이다. 비록 이러한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보위에 올랐다 해도 생활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세자를 거치지 않거나 그러한 기간이 짧았던 군주들의 치세가 더 효과적이었던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아마도 너무 일찍 권력의 진실을 알아버린 탓에 신경이 무감각해진 것은 아니였을까 싶다.  

왕이 되지 못한 세자들의 역사는 그 시초부터가 불행하다. 조선 최초의 세자(이방석)부터가 권력파워에서 밀려나 비명횡사 하면서 조선은 세자들의 무덤이 될 것이라는 예견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불길한 징조는 조선왕조 내내 지속된다. 보위에 오르지 못한 세자들의 공통점은 마지막 영친왕양녕대군을 제외하고는 자의이든 타의이든 혹은 자연적인 병사이든 타살의 의혹이든 제명을 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조선최대의 의료기관과 교육기관이 뒤받침하는 세자양성과정에서 그 낙오자의 비율이 이처럼 높았다는 것은 바로 세자의 지위가 후대의 우리가 알고 있는 만큼 그리 튼실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이 자체로서 조선왕실은 대단히 불행한 왕실이었다는 뜻도 된다. 조선은 내내 세자흔들기를 하였다. 이방석의 죽임, 앙녕의 중도하차, 계유정난을 통해서 보위에 올랐으나 정작 자신의 아들(의경세자)은 단명을 하게 되고, 터무니없는 이유로 반정에 성공하였으나 아들(소현세자)을 죽음으로 몰고, 선왕의 독살설에 연루되어 보위에 오르고도 부족하여 아들(사도세자)의 죽음을 방치하는 등 끊임없는 잡음과 소란속에서 그 명맥을 유지해왔던 것이 조선왕실의 역사이다. 불교의 인과응보처럼 그러한 정당성을 결여한 보위계승은 끝내 자손들에 대한 앙갚음으로 남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그 결말이 비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중종반정 이후 왕실의 손이 갑작스럽게 귀해지는 부분(이점은 이후 조선의 폐망까지 이어진다)이나 부자간의 권력대립이라는 극한상태를 연출하는 것을 볼 때 한낮 떠도는 이야기일 뿐이라고 치부하기에 왠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든다. 그나마 의경세자, 사도세자, 효명세자의 경우는 후에 왕으로 추존되는 것으로 그 울분을 달랬을까... 

이들 세자중에서 주목받는 이가 바로 소현세자효명세자일 것이다. 특히 이들은 타살이라는 의혹이 후대에 이르기 까지 의견이 분분하여 그 안타까움을 배가 시킨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그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이들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이 조선의 중흥을 이끌수 있는 어찌보면 정말 마지막 기회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소현세자나 효명세자의 역사적기록에 의해 미루어 보았을때 성군의 자질이 충분하였다는 점이 더욱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이들이 보위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이미 물이 새기 시작한 배의 침몰을 멈출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이도 있지만 그래도 침몰하는 배만 바라볼 수 는 없는 것 아닌가.  

이처럼 조선은 세자들의 수난시대였다. 물론 세자가 아닌 왕자의 삶은 불안의 연속이었다고 하지만 세자 또한 그 자리가 그리 녹녹치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려서 병사한 몇몇의 세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세자들이 그 한을 가슴에 안고 이승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폐세자 되고 나서 죽게되는 이황이질의 경우는 더 황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조선의 세자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단 하나도 없었다. 차기대권후보라는 공인의 신분으로 철저히 감내하기엔 그 댓가가 어마어마하게 컸던 것이다. 이점은 세자(세손포함)라는 교육을 제대로 완수하고 보위에 올라 제대로 된 정사를 이끌어간 군주가 정조가 유일할 정도라고 보면 세자들은 꽃이 만개하기 전에 시들었던 것 아닐까... 결국 그들을 죽음의 문턱으로 내몬것은 조선특유의 세자양성제도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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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전 3 - 천추태후
문재인 글, 그림소프트 그림, KBS 한국사傳 제작팀 원저 / 세모의꿈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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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비기를 완성하는 두번째 단서 현무를 찾아서 시간여행을 나선다. 장소는 바로 고려...
현무는 거북과 뱀이 한몸이 상상의 동물 즉 한몸에서 두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형국이라는 힌트를 가지고 시작되는 고려여행 속으로 떠난다. 

고려 제5대 임금인 경종의 비(헌애왕후)이자 7대왕인 목종 어머니가 바로 천추태후이다. 조선과 고려를 통틀어 처음으로 수렴첨정을 시행했던 여인이었다. 또한 천추태후 만큼 역사의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는 여인 또한 드물 것이다. 남성적인 시각과 조선 성리학자들의 시각에서 그녀에 대한 평가는 혹독하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권력유지의 야심을 버리지 못하여 아들인 왕을 좌지우지 하고 심지어 김치양과의 소생인 아들로 하여금 보위를 잇게 할려고 했던 비정한 여인으로 평가되고 있는게 사실이다. 

고려는 왕건이 창업한 나라이다. 그 이름에서도 의미 하듯이 고려는 고구려의 정신을 계승한 나라이다. 비록 고구려의 광활한 고토를 회복하진 못했지만 태조왕건의 유시에서 부터 암시하듯이 언제가는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한다는 것을 가장 큰 정책으로 삼고 출발한 나라이다. 그래서 스스로 고구려처럼 황제국임을 만천하에 선포했던 것이다. 하지만 경종조에 이르러 유교사상이 통치의 근간으로 자리 잡으면서 송나라에 대한 사대의 외교를 펴게 되고 황제국이 아닌 제후국으로 보신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왕건의 손녀이자 선왕의 비인 헌애왕후는 이러한 굴욕적인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게 된다. 결국 경종이 승하하고 자신의 아들인 목종이 보위에 오르면서 그녀의 본격적인 대외활동이 시작된다. 그동안 폐지되었던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시킴으로서 황제국의 재선포에 이르게 되고 자주적인 외교에 전념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권력에 대한 욕심의 한계가 들어나게 되고 결국 강조의 정변으로 그녀 역시 아들인 목종의 주검을 안고 오열하게 되면서 역사의 뒷편으로 퇴장하게 된다. 

한국사에 있어 황제국이라고 자칭했던 시기는 고구려와 발해 그리고 고려초반 이외에는 없었다. 이러한 황제국이 가지는 의미는 다름 아닌 자긍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체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외교적 간섭을 받지 않는 진정한 독립국가로서의 자긍심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이 바로 황제국이었던 것이다. 고려는 비록 영토는 작았지만 이러한 기백이 살아있어 당시 동북아 정세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강동6주을 반환받았던 것이다.  

지금 한창 TV에서 방영되는 천추태후의 영향등으로 고려사에 대한 재조명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내용들이 담겨져 있어 어린학생들에게 고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져다 줄 것으로 보인다. 전편인 발해에 이어 이번 고려의 천추태후 이야기는 우리 선조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좋은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무의 형상처럼 두얼굴을 가지고 있었던 천추태후의 인물면을 정확히 보여주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역사관을 가지게 해주는 것 같다.

비록 민족적인 자부심고취을 위해 노력한 부분은 긍정적이집만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인한 폐단에 대해서도 같이 언급하여 어린학생들로 하여금 귀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객관적인 역사기술이 자라나는 학생들의 역사관을 바로 잡아 줄 것이다. 새가 한쪽 날개로 날 수 없듯이 우리가 역사를 보는 눈 또한 객관적이고 냉철한 두 눈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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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 이야기 - 고대영웅들의 화려한 귀환
서영교 지음 / 살림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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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역사를 고찰하면서 쉽게 그리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인물중심으로 역사 따라잡기 만큼 그 흥미와 의미를 배가 시켜주는 방법 또한 없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이번 <신라인 이야기>는 나해이사금의 아들 우로에서 부터 시작하여 진성여왕과 김위홍에 이르기 까지의 신라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특이한 점은 보통 왕조사를 말할때 시조에서 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군주까지의 역사를 다루지만 이번 책은 그런 틀을 벗어 던졌다. 저자의 정확한 의중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신라초기 역사기록에 대한 신빙성과 신라말기의 역사서술의 왜곡이라는 측면에서 배제되지 않았나 하는 개인적인 추론을 해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진정한 신라인 이야기에 걸맞게 우로에서부터 시작하여 진성여왕에 이르는 시대에 신라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역사에 대한 관심역시 시대적 문화사조와 같이 그 붙임성을 같이 하는 것 같다. 예전에 국민학교를 다닐때 한국사에서 가장 닮고 싶은 인물 그리고 존경하는 인물하면 대체적으로 태종무열왕이나 김유신을 비롯한 신라쪽으로 그 무게 중심이 있었던 같다. 그리고 청소년시절 내내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한 업적에 대해서 많은 비중을 둔 교육을 받은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경향도 지금은 많이 퇴색해졌다고 할 수 있다.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역사관의 확립으로 인하여 신라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 지면서 통일신라시대라는 말이 사라지고 발해와의 남북국시대로 그리고 삼국중에서 고구려에 대한 연구와 비중이 활성화 되면서 신라의 평가가 절하되는 경향이 생겼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당이라는 외세와 손잡고 이룩한 부분통일이 비판의 대상에 오르면서 신라는 기억의 저편으로 잊혀져 간 것 역시 사실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수 없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신라가 아닌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우리의 역사는 상당한 부분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을 한다. 아마도 이는 그 만큼 우리가 겪어왔던 역사의 질곡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묻어나오는 소리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역사는 신라를 선택하였고 자의든 타의든 반쪽이라도 부분 통일을 이룩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외세 개입에 대한 변명으로 한반도 한쪽 구석의 작은 나라인 신라의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바로 생존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강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자가 진정한 역사의 주인공이 되듯이 신라는 그렇게 살아남았고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게 된 것은 아닐까. 

거대한 역사적인 담론으로 견주어 보면 신라의 통일이 부정적일 수 도 있겠지만 그것 또한 역시 바램인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거대한 담론을 비켜서서 일 개인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신라인으로서 살아가는 삶과 그들이 선택했던 삶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면서 겪었던 희노애락을 볼 수 있다. 그동안 몇몇 인물들 특히 군주와 삼국전쟁 당시의 장군들에에 대한 조명은 있어지만 이번 처럼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여 전반적으로 신라인에 대해 조명된 책은 처음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더욱더 신라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비록 역사적 사초의 부족으로 인해 다소의 추정이 불가피 한 점은 있지만 대체적으로 신라인에 대한 입장을 대변하는 책인 것 같다. 물론 신라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서술하다보니 다소 편중된 부분이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는 문학작품에서 주인공 중심의 서술에 무게감이 절로 가듯이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했으면 한다. 

그동안 다소 폄하적이고 주체적이지 못했다는 인식이 강했던 신라와 신라인들에 대한 생각을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삼국의 통일방식이나 그 결과물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수는 없지만 그 시대를 살아갔던 신라인들은 분명히 우리에게 영웅이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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