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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못 된 세자들 ㅣ 표정있는 역사 9
함규진 지음 / 김영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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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조선 왕조는 정확히 27명의 군주가 그 명맥을 이어온 세계사 유래 없는 단일 장수 왕조이다. 이 비결에 대해서 후대의 평가는 다양하다. 절대왕권국가가 아니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논거 그러니까 왕과 사대부가 적절하게 권력을 양분했기 때문에 장수할 수 있었다는 설, 또한 타왕조 국가에 비해 철저한 세자교육이 있었고 그로 양성된 군주에 의한 치세가 가능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첫번째 논거에는 수긍이 가지만 두번째 세자제도에 관해서는 의구심이 많이 간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정확히 왕의 숫자만큼 왕의 후보라고 할 수 있는 세자 역시 27명 이었다. 정상적이라면 이들 세자중 자연사할 경우를 감안하더라도 많은 이들이 보위에 올랐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많은 이들이 보위에 오르지 못하였다. 이중 15명만이 최고의 권좌에 등극하였을 뿐 나머지 12명이라는 많은 이들이 보위에 등극하지 못했다. 보위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대부분 병사가 그 원인이었지만 그중에 반정으로 폐세자된(연산군 아들과 광해군 아들) 경우와 독살의혹이(소현세자와 효명세자) 있는 경우 그리고 의문의 죽음(사도세자)을 당해서 보위에 오르지 못한 경우도 있다.
<왕이 못 된 세자들>은 바로 보위에 오르지 못한 12명의 세자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무엇 때문에 이들은 보위를 잇지 못했던 것인가? 조선시대의 세자는 그 의미가 남달랐다고 볼 수 있다. 차기의 지존이라는 뜻에서 國本이라고 지칭했고, 세자의 교육을 위해서 별도의 독립기관인 세자시강원의 주도하에 철저하게 제왕수업을 받아야 했다. 왕비나 후궁의 임신에서 부터 지존의 자리에 오르는 순간까지 조선최고의 엘리트들로 구성된 씽크탱크에 의해서 차근차근 제왕의 자질을 키워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성리학에 근간을 둔 조선사회의 왕도정치 이념의 실현을 구현하기 위한 기본과정이었고 세자인 이상 이러한 절차는 필수요건이었다. 그만큼 세자는 나라의 근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자의 지위는 과연 부왕의 다음 자리에 해당할 정도였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이 가는 점이 있다. 세자라는 제도가 결국 제왕수업을 얼마큼 제대로 습득하느냐에 따라 언제든지 흔들릴수 있는 가변적인 위치였던 것이다. 때론 부왕의 정적으로 때론 신하들의 들러리로 이용될 소지가 많았던 것이다. 어찌보면 세자의 자리는 권력이라는 최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태풍의 눈이었는지 모른다. 결국 그들이 보위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조선이라는 제도적 모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왕도정치실현을 위한 철저하게 성리학으로 무장하지 못하는 대권후보는 자연도태되었던 것이다. 비록 이러한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보위에 올랐다 해도 생활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세자를 거치지 않거나 그러한 기간이 짧았던 군주들의 치세가 더 효과적이었던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아마도 너무 일찍 권력의 진실을 알아버린 탓에 신경이 무감각해진 것은 아니였을까 싶다.
왕이 되지 못한 세자들의 역사는 그 시초부터가 불행하다. 조선 최초의 세자(이방석)부터가 권력파워에서 밀려나 비명횡사 하면서 조선은 세자들의 무덤이 될 것이라는 예견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불길한 징조는 조선왕조 내내 지속된다. 보위에 오르지 못한 세자들의 공통점은 마지막 영친왕과 양녕대군을 제외하고는 자의이든 타의이든 혹은 자연적인 병사이든 타살의 의혹이든 제명을 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조선최대의 의료기관과 교육기관이 뒤받침하는 세자양성과정에서 그 낙오자의 비율이 이처럼 높았다는 것은 바로 세자의 지위가 후대의 우리가 알고 있는 만큼 그리 튼실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이 자체로서 조선왕실은 대단히 불행한 왕실이었다는 뜻도 된다. 조선은 내내 세자흔들기를 하였다. 이방석의 죽임, 앙녕의 중도하차, 계유정난을 통해서 보위에 올랐으나 정작 자신의 아들(의경세자)은 단명을 하게 되고, 터무니없는 이유로 반정에 성공하였으나 아들(소현세자)을 죽음으로 몰고, 선왕의 독살설에 연루되어 보위에 오르고도 부족하여 아들(사도세자)의 죽음을 방치하는 등 끊임없는 잡음과 소란속에서 그 명맥을 유지해왔던 것이 조선왕실의 역사이다. 불교의 인과응보처럼 그러한 정당성을 결여한 보위계승은 끝내 자손들에 대한 앙갚음으로 남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그 결말이 비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중종반정 이후 왕실의 손이 갑작스럽게 귀해지는 부분(이점은 이후 조선의 폐망까지 이어진다)이나 부자간의 권력대립이라는 극한상태를 연출하는 것을 볼 때 한낮 떠도는 이야기일 뿐이라고 치부하기에 왠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든다. 그나마 의경세자, 사도세자, 효명세자의 경우는 후에 왕으로 추존되는 것으로 그 울분을 달랬을까...
이들 세자중에서 주목받는 이가 바로 소현세자와 효명세자일 것이다. 특히 이들은 타살이라는 의혹이 후대에 이르기 까지 의견이 분분하여 그 안타까움을 배가 시킨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그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이들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이 조선의 중흥을 이끌수 있는 어찌보면 정말 마지막 기회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소현세자나 효명세자의 역사적기록에 의해 미루어 보았을때 성군의 자질이 충분하였다는 점이 더욱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이들이 보위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이미 물이 새기 시작한 배의 침몰을 멈출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이도 있지만 그래도 침몰하는 배만 바라볼 수 는 없는 것 아닌가.
이처럼 조선은 세자들의 수난시대였다. 물론 세자가 아닌 왕자의 삶은 불안의 연속이었다고 하지만 세자 또한 그 자리가 그리 녹녹치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려서 병사한 몇몇의 세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세자들이 그 한을 가슴에 안고 이승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폐세자 되고 나서 죽게되는 이황과 이질의 경우는 더 황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조선의 세자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단 하나도 없었다. 차기대권후보라는 공인의 신분으로 철저히 감내하기엔 그 댓가가 어마어마하게 컸던 것이다. 이점은 세자(세손포함)라는 교육을 제대로 완수하고 보위에 올라 제대로 된 정사를 이끌어간 군주가 정조가 유일할 정도라고 보면 세자들은 꽃이 만개하기 전에 시들었던 것 아닐까... 결국 그들을 죽음의 문턱으로 내몬것은 조선특유의 세자양성제도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