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없는 세상
앨런 와이즈먼 지음, 이한중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2일 후 : 뉴욕의 지하철역과 통로에 물이 들어차 통행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1년 후 : 무전 송수신탑의 경고등이 꺼지고 고압전선에 전류가 차단된다. 이렇게 되면 무멋보다도 고압전선에 부딪혀 매년 10억 마리씩 희생되던 새들이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나게 된다.
3년 후 : 난방이 중단됨에 따라 몇 해의 겨울을 거치며 갖가지 배관들이 얼어터진다. 내부가 수축과 팽창을 거듭하면서 건물이 손상된다. 도시의 따뜻한 환경에 살던 바퀴벌레들은 겨울을 한두 번 거치는 동안 멸종된다.
20년 후 : 고가도로를 지탱하던 강철기둥들이 물에 부식되면서 휘기 시작된다. 파나마운하가 막혀버리면서 남북 아메리카가 다시 합쳐진다. 우리가 즐겨 먹던 일반적인 밭작물들의 맛이 지금 같지 않은 야생종으로, 그러니까 인간의 입맛에 개량되기 전 상태로 돌아간다.
100년 후 : 지금 지구상에 남아 있는 코끼리들은 상아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일이 없어지면서 개체수가 스무 배정도 늘어난다. 반면 너구리, 족제비, 여우 같은 포식자들은 인간이 남긴 생존력이 엄청나게 강한 고양이 등에 밀려 개체수가 오히려 줄어든다.
500년 후 : 알루미늄으로 된 식기세척기 부속과 스테인레스스틸로된 조리기구가 풀숲에 반쯤 덮인 채 있지만 그것들의 플라스틱 손잡이는 본체에서 떨어져 나왔어도 여전히 멀쩡하다.
1천년 후 : 뉴욕시에 남아 있던 돌담들은 결국 빙하에 무너지고 만다. 인간이 만든 인공구조물 가운데 이때까지 제대로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영불해협의 해저터널뿐일 것이다.
3만 5천년 후 : 납이 마침내 토양에서 전부 씻겨나간다. 하지만 카드뮴이 씻겨나가전까지는 7만 5천년 세월이 걸린다.
1억 20만년 후 : 인류가 남긴 청동 조각품은 아직도 형태를 알아볼 수 있다.
30억년 후 :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모습이겠지만 갖자기 생명체가 여전히 지구상에 번성할 것이다.
50억년 후 : 죽어가는 태양이 내행생들을 다 감싸면서 지구는 불타버릴 것이다. 

인류라는 새로운 종이 지구에 출현한 역사는 지구 전 역사와 비교해 보면 1%남짓의 극히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미비한 종이다. 하지만 그런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생명체가 지구라는 행성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적은 지구역사를 통틀어 단 한번도 있지 않은 아주 특별한 일이다. 그 만큼 인류를 제외한 여타의 생명체에게 인류는 다름아닌 통제 불가능한 존재였고 잔인한 포식자였다. 인류가 등장하면서 고대 거대 포유류들은 그 자취를 감추었고 야생의 동물들은 야생성을 상실하고 인류에게 복종하면서 또 다른 자체 생명력을 유지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애완동물 내지는 인류의 먹거리를 해결해주는 가축이라는 형태로.  

<인간없는 세상>은 바로 우리 인간이 없는 세상의 지구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를 추론해 보는 책이다. 이 지구상에서 어느날 갑자기 인류가 흔적없이 살아진다면 지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서두와 책표지에서 볼 수 있듯이 인류를 제외한 모든 생명체가 환호성을 지를 것으로 보인다. 새들은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닐 것이고 야생의 생명체는 그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 특히 그동안 인간에 의해 야생성을 박탈당했던 동물들 역시 초기에는 다소 힘겨운 종의 사투를 해야하나 서서히 자연의 법칙에 동화되어 그 옛날 자신들 선조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인류가 남긴 지구상의 흔적들 역시 세월의 힘에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필자는 이 책을 통해서 인간이 사라지고 나면 어떤 세상이 올 것인가 그리고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다른 생명체는 어떨것인가라는 막연한 상상만을 펼쳐가는 내용만은 아니다. 또한 단지 지구상에서 인류가 사라져서 인간없는 세상이 되면 다른 생명체와 지구라는 행성자체가 인간이전의 동의 다양성이나 온전한 자연을 그대로 회복할 것이라는 다소 희망적인 메세지를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필자는 우리의 DMZ나 지중해 연안의 키프로스 섬을 통해서 장시간에 걸쳐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생명체의 번성 보다 오히려 인간이 남긴 그 족적에 더 많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인류의 등장으로 지구라는 행성과 그 부속물은 인류에 의해 인류의 방식으로 리모델링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에 필요한 방식으로 인간의 이라는 종의 번식을 위해 지구자체가 변형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산물들은 각종 인공구조물에서 부터 시작하여 그동안 지구상에 단 한번이라도 등장하지 못했던 다양한 화학적 유전학적 변종들을 만들어 내면서 그 짧은 시간에 지구자체를 변화시켰다. 이러한 흔적들은 인간이 어느날 갑자기 지구상에서 살아지더라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흔적들이 인간이 없어진 세상에 그다지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플라스틱을 비롯한 핵관련 폐기물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류가 창조해낸 부수물은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으로 남아있는 생명체에게 유산으로 남겨질지도 모른다. 

막연하게 인간없는 세상이 지구의 자정능력에 의해 원상복구 될 것이라는 생각자체가 기대감 뿐이라는것을 말해준다. 필자는 이 책을 통해서 이러한 막연한 기대감 보다는 좀더 적극적인 인류의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 어차피 인류가 어느날 갑자기 살아질 확률은 거의 없다. 외부 행성의 충돌이나 지금처럼 갑자기 등장한 신종풀루등의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되더라도 결국 살아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가장 강력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류에게 남은 숙제는 무엇인가?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미 늦었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동안 인류가 출현해서 지금의 지구를 리모델링한 것처럼 앞으로도 인류에겐 지구를 리모델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상 우리는 새로운 지구를 재편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역시 인류이외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이라면 이제 다른 생명체들과 공존의 길을 모색해야 할때이다. 독불장군이 없듯이 인간만이 세상을 살아갈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더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인간없는 세상은 그리 좋아 보이질 않는다. 그 만큼 인간이 남긴 산물들은 인간을 제외하고는 통제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산물들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인간만 살아진다는 것 자체가 책임없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인간없는 세상은 인간도 상상하기 싫지만 여타 다른 생명체들도 그다지 반기지만은 않는다는 것이 많은 점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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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온난화에 속지 마라>를 리뷰해주세요.
지구온난화에 속지 마라 - 과학과 역사를 통해 파헤친 1,500년 기후 변동주기론
프레드 싱거.데니스 에이버리 지음, 김민정 옮김 / 동아시아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을 무색하게 하는 기상 이변도 이제 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겐 상당히 익숙해진지 오래 되었다. 앨리뇨니 라니냐하는 용어도 기상학 관련 이외의 평범한 일반인들에게도 이제 낯설지 않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인류가 지구상에 발자취를 남기기 시작하면서 기후(날씨)에 대해선 가히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산업혁명을 계기로 과학혁명이 몰아 닥치기전까지만 하더라도 하늘의 날씨는 신성한 것이였고 절대권력자의 권력과도 일맥상통한 것으로 파악했다. 특히 동양 사회에서는 그 의미가 절대적이 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계몽주의 사상과 과학혁명의 시대를 겪으면서 거의 모든 자연력은 인간의 통제하에 놓였다. 아니 통제가능하다고 생각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인간 특유의 오만성은 근래에 들어 각종 기상이변의 원인이 지구 온난화에 있다는 과학적인 연구와 홍보 덕택에 더 이상 인간이 자연력을 통제할 수 없으며 결국 자연과 평화로운 동반만이 생존의 길이라는 논리를 파급하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이산화탄소등의 온실가스의 과배출로 인해 지구의 온난화가 발생하게 되고 온난화로 인해 극지방의 빙하의 유실로 인한 해수면의 급증가로 인해 더 이상 태양계내 유일한 생명이 살고 있는 지금 같은 지구는 존재하기 힘들것이라는 엄청난 충격적인 사건으로 온 지구를 강타하고 있다. 이상태로 계속 가다면 머지 않은 장래에 우리는 후손들에게 엄청난 재앙을 물려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와 일본 교토를 통해서 전세계 거의 모든 국가가 합의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IPCC)이 탄생하였고 향후 장래를 향하여 의무적으로 이산화탄소배출량의 감소에 합의하게 이르렀다. 그리고 대체 에너지원을 개발해서 꾸준히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여 나가기로 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구 온난화에 관한 계략적인 이야기이다.

IPCC의 탄생으로 우리의 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산화탄소의 주범인 화석연료의 자제와 새로운 에너지원의 개발을 위한
다양한 연구 그리고 범 국가적인 노력이 필요한 현재의 시점에서 한때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스캔들처럼 만약에 지구온난화가 이러한 스캔들이라고 하면 과연 이를 믿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바로 이 책 <지구 온난화에 속지마라>은 우리가 알고 있고 믿어 의심치 않는 지구 온난화 문제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책이다. 더욱더 충격적인 것은 1500년 기후주기 라는 학설을 지구 곳곳에 산재하고 있는 각종 신빙성 있는 과학적 증거를 제시함으로서 이책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혼란속으로 빠뜨린다는 점이다. 중세시대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을 비롯한 모든 천체가 돌고 있다는 천동설은 거의 진리였다. 그래서 지동설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의 학설은 이단이었고 외면당했던 것처럼 지금의 지구 온난화에 대한 의견 역시 이와 일맥상통할 것이다. 불특정 다수가 믿어 의심치 않는 이론을 전적으로 반박하는 내용은 그래서 대접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역사가 말해주듯이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내용들은 상당수가 정치적인 음모에 의한 진실 감추기가 많았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지구온난화에 대한 전면적인 재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지구는 그동안 우리가 인식하던 하지 못하던 간에 주기적으로 온난기와 한랭기를 반복해서 기후 변화를 해왔다. 과학적 근거에 의하면 오히려 온난기에 각종 생물의 성장이 좋아졌고 인류에게도 유익한 결과를 나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한랭기에 접어들면서 식량문제가 대두됨으로서 더 많은 산림과 농토가 필요하게 되고 이는 결국 자연생태계 교란으로 더 악영향을 미쳤다는 것 역시 과학적 증거에 의해 판명되었다.
온난화라를 부추기고 있는 대표적인 온실가스인 이산화가스의 증가 역시 온난화를 주장하는 이들의 생각보다 훨씬 안정적인 수치 이고 지구자체 정화력에 의해 우리가 우려할 정도의 수위는 아니다라는 것 역시 다시 생각해 볼 문제이다. 필자는 그렇다고 지구 온난화로 인한 발생 가능한 문제에 대한 지금이 대처노력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대응반응이 문제라고 본다. 정치적인 논리와 경제적 논리가 혼합되어 온난화에 대한 확대 왜곡된 논거들이 재생산되면서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지금의 대처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논지이다. 결국 온난화를 방지하기 위해 인류가 발명한 가장 효율적인 에너지원인 화석연료을 포기하고 비경제적이고 오히려 생태파괴의 주범이 될 수 있는 대체 에너지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보다는 화석연료를 좀더 크린하게 바꿀수 있는 방법론에 더 많은 관심과 투자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온난화를 방지하기 위해 화학비료의 근절은 그 만큼 비례하여 방대한 농토의 확대화를 가져올 것이고 이는 바로 생태계의 파괴로 이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는 지구 온난화라는 거대하고 극히 위험한 물결앞에 놓여있다. 물론 필자를 비롯한 반대 의견은 온난화가 너무 과도하게 확대 해석되어 불필요한 공포감만 조성하고 있다고 한다. 어느쪽의 의견이 맞을지는 우리같은 일반인으로서는 파악하기 힘든것이 사실이다. 단지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보다 효율적이고 친환경적인 여건을 만들어가는 방법의 모색이 가장 시급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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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일 2 - 불멸의 사랑
앤드루 데이비드슨 지음, 이옥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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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일이란 중세 고딕성당 지붕 등에 날개가 있는 괴물의 상이 놓여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이 가고일이다. 원래 악마의 이미지로 만들어진 상이다. 기독교가 서양에 확산되자 그 때까지 믿고 있던 신들은 사신(邪神)이 되어 버렸다. 이 사신들이 건물 바깥에서 망을 보는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조각상들이다. 책 제목에서 부터 풍기는 이미지가 이런 신성과 악마와 연관된 사랑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종의 약간으 흔한 그리고 식상한 소재의 러브스토리로 여기서 책을 읽어나갔다.  

하지만 책을 읽어 나가면서 상당한 지적 수준을 요하는 소설임을 알게되었다. 우선 단테의 신곡을 읽었으면 좀더 다른 감동을 받지 않았겠느냐 하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수없이 나오는 중세의 언어들의 향연이랄까 라틴어에서 부터 시작하여 중세유럽의 다양한 언어로 점철된 내용은 마치 언어학교재로써도 손상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중세 기독교의 이해 특히 수녀원과 수도사들 그리고 삼위일체등의 성서적 지식 또한 필요할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또한 화상과 정신분열증에 대한 의학적인 지식 또한 풍부하게 설명되어 있고 무엇보다도 포로노영화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는 점 또한 웃음짓게 하는 부분이다. 
 

소설은 1인칭 화자인 전직 포로노배우 겸 제작자가 우연한 교통사고로 전신화상을 입고 생사의 고락을 넘는 부분에서 시작된다. 엄청나게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자신의 척추속에 뱀이 들어왔다는 표현에서부터 그 뱀과의 사투가 시작되고 단지 살아있는것 보다는 죽는게 낫다고 생각한 그에게 어느날 마리안네 엥겔이라는 평범치 않는 여성이 나타난다. 물론 그 여성은 같은 병원 정신병동에 입원해 있는 정신분열증의 환자였고 더 커다란 충격은 자기가 700년을 기다려온 연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자신은 중세의 수녀였다는 사실을 고백함으로써 소설의 시작을 알린다. 물론 여기까지는 여타 연애소설의 기본적인 구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의 시대와 과거 연인의 입을 통한 중세의 사랑이야기를 들으면서 특히 자신의 가슴에 난 상처의 역사적 인연을 알게 되면서 이 소설은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한 이 소설속에는 주인공 자신의 사랑뿐만 아니라 다른 사랑이야기가 몇가지 나온다. 물론 오래된 연인들의 사랑이야기이다. 바이킹과 일본 다이묘시대의 이야기, 영국에서 귀족과 사랑이야기등을 보여준다. 물론 이 이야기들의 결말은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남자가 죽고 여자가 죽고 아니면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뒤따라는 죽는 그야말로 가슴아픈 사랑이야기이다. 이 사랑이야기의 전제에 바로 주인공 자신의 사랑이야기도 묻어있다고 본다. 700년전 이루지 못한 사랑을 현실에서 다시 이루고 싶은 절실함이 몇몇의 사랑이야기의 공통점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이 소설의 또 다른 매력은 사랑을 소재로 펼쳐진 이야기이지만 상당한 역사적인 지식을 제공하고 있는 점이다. 중세의 기독교와 영주와 기사들의 관계 그리고 신곡을 둘러싼 필경사들의 내용과 일본의 다이묘시대상 그리고 바이킹의 삶등 다양한 면에서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한 역사소설같은 이미지도 강하다. 
 

자는 소설을 통해서 많은 사랑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7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기다려 사랑하는 사람을 재회하는 주인공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남녀간의 사랑과 동성간의 사랑, 그리고 우정, 배려등을 말하고 있다. 아마도 사랑이라는 것은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변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이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그 사랑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는 이상 자기의 목숨은 큰 부분을 찾지 하지 않는 다는 불변의 진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랑에 대한 각국의 언어로 표현된 말들은 아무리 이국적인 언어로 표현되어도 들을수록 더 듣고 싶고 말할 수록 더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랑해. 아이 러브 유. 아이시테루. 에고 아모 테. 티 아모. 예흐 엘스카 시흐. 이히 리베 디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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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를 껴안고 -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일본과 일본인
존 다우어 지음, 최은석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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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개인들이 전쟁,폭력,강간,정신적 가해등으로 인해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이라는 심각한 병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의사들의 표현에 따르면 이러한 요인 즉 트라우마를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없는 인간의 뇌구조로 인해서 완전치유는 불가하더라도 효과적인 트라우마 희석으로 그 증세를 완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즉 트라우마를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 현실과의 조화를 통해서 좀더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은 비단 개인뿐 아니라 확대된 의미에서 국가 내지는 민족적 형태로 확대 되기도 한다. 다름 아닌 우리 한민족에게 일본이라는 트라우마는 아주 강렬하게 남아 있다. 임지왜란과 일제감정기라는 역사적 거대한 트라우마는 그 기간내내 민족 개개인에게 개인적인 트라우마로 확대 재생산 되면서 민족 전체의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증상을 발현시키는 대상으로 자리매김했다. 가까우면서도 멀기만한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는 일본의 패망 이후 5년 8개월이라는 미군정기간 동안 일본과 일본인의 의식구조를 고찰한 책이다. 우리에게 일본 특히 1945년전후의 일본에 대한 인식은 거의 1차적으로 감정적인 반응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강력한 트라우마를 제공한 원인에 대한 일종의 경계심이 저변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제대로 일본을 보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존 다우어는 이 시기의 일본과 일본인의 심리상태를 고찰하므로서 지금의 일본과 일본인을 이해하는 시금석을 제공하고 있다. 얼마전 자민당의 장기집권이 막을 내리고 새로운 정권이 자리잡은 일본은 패전의 아픔(?)을 딛고서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면서도 극우세력들의 망언과 전범을 위한 신사참배 및 교과서 역사왜곡등을 통해서 주변 당사자국들의 심리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일본과 일본인의 근저에 깔려 있는 심리상태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우리에게는 상당한 숙제거리중에 하나이다.  

이 책을 통해서 지금의 일본의 상태를 100%다 파악할 수 없지만 세계 2차 대전이후 미군정의 점령하에 놓인 일본의 상태와 일본인들의 심리상태를 통해서 어느 정도 유추가능 하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우리가 보기엔 다소 우호적일 수 밖에 없는 시각으로 패망이후 일본을 바라보고 있지만 학자다운 냉정함을 잃지 않고 현상 그대로 기술하고 있어 일본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쇼와천황(히로이토)의 항복선언으로 일본은 적어도 일반대중은 한밤중에 난리를 맞은 격이었다. 극도로 통제된 사회에서도 몇몇 루트를 통한 불리한 전황의 소식을 듣긴 했지만 그동안 천황을 비롯한 군국주의자들과 초국가주의자들의 오래된 교육과 홍보에 의해서 도저히 질 수 없는 전쟁에서 패망했다는 현실을 받아 들이기 힘들었다. 그리고 미군의 점령이 현실화 되면서(이때 미군은 19세기 페리제독을 앞세워 강제로 개방을 할 당시 게양했던 성조기를 다시 달고서 또 다시 일본땅에 발을 딛게 된다) 일본인의 삶은 표현 그대로 산산조각 난 삶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절망 이나 허탈의 의미하는 교다쓰라는 말이 전후 일본 사회전체를 대변하는 신조어가 되어버렸다. 그전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야마토신민이라는 우월성을 입증(?)받은 민족이 하루 아침에 4류국민으로 전략함으로써 교다쓰의 강도는 실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을 능가했던 것이다. 육체적인 피로감보다 패망이후 밀려오는 심리적 허탈과 절망은 일본사회구조를 송두리채 변신시키기도 남을 만큼 엄청난 것이였다.

이러한 정신적 공황상태에 대해서 일본군국주의하에서 고통받은 민족이나 국가입장에서는 당연시 되는 시각이지만 당시 일본인들은 분명 그랬다는 것이다.  

맥아더를 수장으로 하는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일본은 또다시 혼란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연합국의 좌장인 미국의 점령으로 일본은 수술대에 오르게 되고 정치,경제,사회,문화등 모든 분야에 걸쳐 군정의 정책에 따라 사회구조를 재편하게 된다. 어느날 갑자기 미군와 함께 온 민주주의는 하늘이 준 선물이라는 찬사를 받으면서 일반 대중속으로 깊이 넓게 퍼지면서 동시에 왜곡되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와 한국전쟁 이후 우리가 겪어던 비뚤어진 민주주의 산출물들을 고스란히 일본대중들도 겪었던 것이다. 식민지로부터의 물량공급이 차단되면서 일본경제는 그야말로 파탄자체였고 그저 일반대중은 하루먹고 살기도 바쁜 상태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가 익히 겪었던 바 있던 이데올로기의 혼란은 패망이라는 좌절과 함께 이들을 강타했고 나라의 근간이라고 하는 헌법의 제정마저도 그들의 손이 아닌 미군정의 하급관리들의 손에 의해 명시되는 치욕을 겪게 된다. 물론 연합국측에서 보면 당연시 되는 방법이었지만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이 오히려 일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시행착오였고 이러한 시행착오가 불씨를 남기게 된 계기가 된 것 또한 사실인 것이다. 미군정은 한반도의 남쪽에서와 같이 일본에서도 제대로 된 역활을 수행하지 못했다. 일본에 대한 전문가 없이 일본을 통치했던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정작 도쿄전범재판은 피해당사자인 조선이나 인도네시아을 비롯한 동남아시아국가를 배제한 서구일색으로 처리하여 일종의 면죄부를 부여한 꼴이 되어버렸다. 또한 맥아더는 천황이라는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고 오히려 천황제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역사적 단절이 아닌 재연장시키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의 일본의 재무장과 군국주의의 재등장이라는 불편한 진실의 근원은 바로 다름 아닌 이 시기 미군정과 일본 극우세력의 합작품이라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신민의식의 정점에 서있던 천황을 존속시키면서 왜곡된 민주주의의 도입자체가 그 태생적 한계를 갖게했기 때문이다. 전범재판을 통해서 면죄부를 획득한 구군국주의자들의 정계 복귀(미군정의 암묵적 동의하에)와 히로히토의 건제는 패망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스틱스의 강속으로 밀어버리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내부적인 요인과 일본인들이 말하는 신의 선물인 한국전쟁 그리고 냉전이라는 새로운 시대가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행운이었던 것이다. 사실 한국전쟁발발전 까지만 하더라도 미군정은 일본경제에 대해서 관심자체가 없는 그저 뿌리대로 거둔다는 방관자적 입장을 견지했으나 한국전쟁은 이런 방침을 일거에 바꿔 버린 결과가 되버렸다. 미군정은 그동안의 점령을 통해서 파악한 일본의 최대강점인 집중과 관료주의에 의한 경영방식을 통해 한국전쟁을 지원하게 되면서 일본은 하루아침에 다시 살아나게 되는 계기다 되었던 것이다. 전범재판을 통해 도조 히데키등의 A급전범을 비롯한 몇몇 군국주의자 및 초국가주의자들을 처리하므로써 더 이상 국민전부가 전쟁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면죄부를 받은 상태에서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고기가 물을 만나격으로 일본재건에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물론 일본인 전체가 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중 진정으로 전쟁에 대한 책임과 황군이라는 이름으로 행했던 해외에서의 잔혹한 행위에 대한 진심어린 반성과 사과를 통해 새로운 일본을 건설해야 한다는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 하지만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제도의 근본적인 변혁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근본적인 심리는 단지 신에서 인간으로 옷만 갈아입은 천황을 위주로 정말 새로운 일본을 향해 질주했던 것이다. 패망으로 받은 교다쓰의 상태는 너무나 쉽게 마치 어느날 갑자기 피었다고 져버리는 벚꽃처럼 정말 허망하게 잊혀져 갔던 것이다. 

대동아공영을 내세워 조선,대만,중국,동남아시아를 식민지로 편입하면서 시작된 군국주의의 망령은 지금도 그 피해 당사국들에겐 너무나 큰 결코 완치될수 없는 트라우마로 존재하고 있다. 비록 일본 역시 전쟁을 통해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피해자임에는 틀림없다. 유사 이래 처음으로 원자폭탄의 피해를 입고 해외에서 사라져간 수 많은 인명들을 생각하면 가해자나 피해자를 떠나서 있어서는 안될 일이 벌어진것만은 사실이다. 우리가 역사를 바라보고 상고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의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다시는 이런 불행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 제대로 된 역사 인식이 그 첨경인 것이다. 이런면에서 보는 패망이후 일본 점령정책과 사회변화상은 아주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전쟁과 패전은 일본인이 '인간성,인격,개성'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며,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정신을 기르지 못했기 때문에 군국주의나 초국가주의의 도래를 막지 못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쟁 책임은 일본인 전체가 져야 하며 국민은 세계를 향해 사죄하지 않으면 안된다" 필자의 이 한마디가 의미하는 바는 실로 큰것이다.  

<패배를 껴안고>는 피해당사자국들이 보기엔 일종의 일본 껴안기로 오인될 수 있는 소지가 있을수 있으나 이 책은 패망 이후 일본의 변화과정을 미군정과의 관계를 통해서 서술하고 있는 일본국내에 한정된 내용들이다. 패망을 받은 상처와 개인들의 산산조각난 꿈을 통해서 결국 인류가 껴안고 가야할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껴안기는 결코 일방적인 껴안기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본과 그외 당사자국들의 진심어린 상호 껴안기를 통해서 좀더 성숙하고 발전된 미래가 당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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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3 로마제국 쇠망사 3
에드워드 기번 지음, 송은주.윤수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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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연합군에 대항하여 헥토로와 더불어 최후까지 대항했던 신의 아들(아프로디테의 아들) 아이네이아스는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과 함께 고국 트로이를 떠나 크레타,카르타고등의 유랑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이탈리아반도의 라티움에 정착하고 그 곳 왕의 딸과 결혼하여 로마라는 도시국가를 탄생시킨다. 이후 로물루스라는 왕의 시대에 들어 본격적인 틀을 갖춘 로마는 이후 왕정에서 공화정을 거쳐 제정의 시대로 접어들게 마침내 세계유일의 제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로마제국은 콘스탄티누스에 의해서 서서히 동서로 분활되면서 마침내 서기 476년 이민족인 게르만족의 왕 오도아케르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살아질때 까지 무려 1200이라는 세월을 영위해왔다. 물론 나머지 반쪽인 동로마제국(비잔티움제국)은 앞으로 1천년이라는 세월을 더 영위하게 되겠지만 본토인 로마의 함락이라는 상징성을 보게 되면 사실상 로마제국의 사형선고는 게르만족의 왕인 오도아케르에 의해서 집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연의 일치일지는 모르지만 로마제국 건국의 아버지와 서로마 제국 마지막 황제의 이름이 로물루스로써 똑같다는 점이 뿌린자가 거둔다라는 말로 회자될 수 있을뿐 오랜 세월 제국위치에서 주변 이민족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던 제국의 수명은 바로 이 이민족중의 하나로 인해 역사의 무대에서 떠나게 된다. 

테오도시우스황제 이후 로마 제국의 황권은 동서로마를 막론하고 정말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특히 무게의 중심이 이미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간 이후 서로마 제국의 황위는 그야말로 이전투구의 장으로 그네들이 그토록 열광했던 야외경기장의 검투사게임을 보는듯한 혼탁하면서도 암투에 의한 제위 교체이외에는 그 어떤 의미도 부여하기 힘들 정도로 혼란 스러운 시기였다. 수많은 황제(이름조차 파악하기 힘들만큼 잦은 교체는 제국이 존재하고 있다는 자체 그것만으로 위안을 받게 한다)들의 난립으로 후대 역사학도들의 머리만 아프게 할 뿐이다. 그나마 동로마제국은 새로운 로마제국의 적자로 부상하면서 서로마제국에 비해선 황위의 대외적인 안정감이 서로마제국에 비할수 없을 정도로 높은것 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점은 콘스탄티누스의 뛰어난 혜안으로 인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지정학적으로 서방은 동방에 비해서 다양한 이민족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동방은 페르시아가 가장 크고 정형화된 적으로 간주되었지만 서방은 게르만족을 필두로 한 다양한 이민족들이 보이지 않고 그리고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가상의 적으로서 언제든지 목을 조를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들이 서로마제국을 더 빨리 쇠망으로 몰아갔던 것 역시 사실중의 하나이다. 

그럼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서고트족의 알라리크, 훈족의 아틸라, 반달족의 가이세리크, 게르만족의 오도아케르 라는 이민족만의 요인으로 돌려야 하는가에 대해서 기번은 당연히 부정하고 있다. 기번은 결국 사형선고를 받은 환자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이가 이런 이민족이었지만 비단 서로마제국이라는 환자는 인공호흡기를 제거하지 않더라도 사실상 사망한거나 마찬가지라고 보고 있다. 이미 로마제국은 내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제국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되었다. 초기 제국의 핵심이었던 다양성이 그리스도교라는 유일성으로 대체되면서 로마제국의 근간을 뒤흔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제국은 로마를 포함한 이탈리아 본국와 그외 속주와 이민족간의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정책으로 대제국을 경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제국의 경영에는 모든 문화와 종교를 포함한 각종 제도의 수용과 인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콘스탄티누스의 그리스도교 공인과 국교화이전까지는 약간의 마찰음이 발생하더라도 유지되었던 보편적인 진리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하나를 향한 열정은 이러한 모든 다양성을 거부하게 되었도 이러한 현상은 제국 전체적으로 불협화음을 낳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서로마제국의 멸망에는 외부의 요인과 버금가는 내부적인 요인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마나 기번은 그리스도교의 착실하고 획기적인 열정으로 그네들이 야만족이라 지칭한 이민족에까지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는 것이 로마제국의 쇠퇴를 가속화시켰지만 승리한 새 종교는 멸망의 폭력성을 경감시키고 정복자들의 사나운 기질을 완화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위안을 찾고 있다. 

기번은 이번에도 그리스도교에 대한 많은 양을 배분해서 그 실상을 파헤치고 있다. 암브로시우스, 그레고리우스, 아타나시우스 는 그리스도교 정통파를 대변하는 성인으로 추앙 받고 있는 인물들이지만 막상 그들의 실생활과 권력지향적인 삶은 후세에 과대포장되었다는 점과 수도회와 수도사의 근원과 그들의 삶 그리고 발전등을 다루면서 오히려 세상과 등지고 살아갔던 이들 수도사들이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교가 아니였을까라는 개인적인 의견도 피력하고 있다.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를 집필하면서 유독 그리스도교에 대한 날카로운 시각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표출하고 있다. 이는 그만큼 기번의 역사관점에서 로마 제국의 쇠망사에 결정적인 카운터 펀치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교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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