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마일 속의 우주 - 한 천문학자의 사계절 산책기 자연과 인간 14
쳇 레이모 지음, 김혜원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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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동안 겪게는 되는 다반사나 좀 더 한차원을 넘어서 사고를 고찰하거나 대상을 관찰할 경우 거시적 즉 매크로적인 사고에 익숙해 있다. 특히 우주라는 담론적인 개념에선 그 방대함과 거대함에 자칫 기가 눌릴 수 밖에 없다. 인류가 고안한 아니 정의한 가장 빠른 속도를 가진 빛의 속도로 우주의 범위를 표현하고 가장 우리와 가까이 있다고 추론되는 은하 역시 우리의 상식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숫자들의 향연속에서 그저 멍해질 뿐이다. 이런면에서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의 " 세상의 진정한 미스터리는 보이지 않는게 아니라 보이는 것이다"라는 말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매크로적인 그리고 그 크기의 정량화를 가늠할 수 없는 세계를 과연 우리는 볼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역으로 생각해서 우주-->우리은하-->태양계-->지구라는 크기의 절대화를 축소하여 마이크로적인 시각으로 대상을 볼때 비로소 현학적인 대상으로 가늠자의 범위내에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마이크로적인 범위 즉 우리가 쉽게 보고 넘기는 대상들을 우리는 많이들 외면하고 있다.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볼 필요성이 없어서 넘어가는 것인지 몰라도 다름아닌 바로 우리 발길에 닿고 손길로 느낄 수 있는 미시적인 대상에 대우주의 비밀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 또한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쳇 레이모의 <1마일속의 우주>는 물리학자겸 천문학자인 저자가 자신의 일터로 대략 1.6km를 걸어서 출퇴근 하는 길에서 만나게 되는 마을, 숲, 돌덩이, 개울, 들판, 초원등을 통해서 우주의 삼라만상을 보여주는 과학에세이이다. 저자 자신이 37년간 걸었던 길은 신대륙의 발견과 이주 그리고 산업혁명이라는 대격변을 통해서 급속한 산업화과정속에서 세계 어느 곳이나 겪어던 곳중에 하나이다. 산업화는 그동안 우리가 알았던지 무지했던지 간에 인류를 포함한 지구상에 모든 생명체에게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인류는 역사상 그 어느때 보다 풍요롭고 호화스러운 생활을 영위했단 물론 이러한 풍요의 잣대는 인류이외의 생명종에게 동의를 구할순 없을지라도 농업혁명이후 인류사의 흐름속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기를 보내는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비단 타종의 희생이 있었고 의도 되었던 그렇지 않던 간에 그것 또한 사실임에는 분명한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오랜시간 걸었던 길을 통해서 이러한 변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그리고 마이크로적인 시각에서 살펴보았다. 산업혁명의 대명사격인 에임스 삽공장의 흥망성쇠와 그로 인한 주변 자연 환경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인류가 자연에게 가했던 행위 그리고 반대급부로 자연이 인류에게 되돌려줬던 현상에 대해서 제3자적 관점에서 무덤덤하게 말하고 있다. 급격한 환경파괴로 인한 지구온난화등을 비롯한 환경파괴에 대해서 마치 환경보호를 주창하는 전도사적인 견지에서 설파하는 형식이 아닌 그저 있는 그대로를 기술하고 있다. 

지금같은 추세로 가면 머지않는 장래에 환경파괴로 인한 엄청난 댓가를 치룰것이라는 대재앙을 여기저기서 예고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저자는 나름대로 이 책에서 자연의 위대한 힘을 확인 시켜준다. 한때 황무지화된 들판과 초원 그리고 개울과 숲에서 인간의 약간의 노력(부작위을 포함해서)만으로도 자연은 그 자정능력과 회복능력에서 탁월한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사례를 대표적 사례로 보아서 그동안 환경파괴에 앞장선 인류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차피 인류와 자연과 우주라는 존재는 같이 더불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이고 그중에서 인간인 우리에게 선택의 폭이 다소 넓고 다양하다는 것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인류가 수렵, 채집생활을 포기한 오래전 부터 자연에 대한 인공적 변경과 우월의식은 가졌던 것이고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이런 의식은 버리지 못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인류와 자연의 대립관계가 아닌 상호유기적관계를 인식하고 상생의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저자는 자신이 오래동안 걸어왔던 길주변의 아주 작은 세계를 통해서 재확인 하고 그 생명력의 기적에 다시금 감탄한다. 그동안 너무 거시적 시각에서 접급했던 인류와 자연과의 공생관계의 방법을 작은 숲과 개울에서 찾은 것이다. 저자와 같이 걷는 길은 주변에 햇살을 머금고 있는 숲과 멀리서 들리는 새소리 그리고 무질서하게 펼쳐져 있는 초원에는 자연 나름대로의 규칙과 생명의 기적이 숨어있는 것이다.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미스터리의 해법이 바로 우리 발아래에 놓여있다. 대우주의 거대한 생명이 바로 1마일속으로 고스란히 다가온 것이다


밤하늘의 시인이라는 별칭처럼 저자는 책을 읽는 동안 참 편안하게 독자들을 이끌어가고 있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는 식의 논쟁이나 새로운 현상이나 사실을 추구하는 지식전달이 아닌 우리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아주 작은 곳에서 그리고 보지 않을려고 했던 현상들에서 저자는 자연과 인류의 공생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바로 우리와 함께 숨을 쉬고 있는 공간이 다름 아닌 우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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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5 로마제국 쇠망사 5
에드워드 기번 지음, 송은주.김혜진.김지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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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가쁘게 달려온 기번의 로마 제국 서술은 이제 그 대단원의 막을 기다리고 있다. 포카스를 제위에서 밀어내고 헤라클리우스 황조를개창한 헤라클리우스에서 앙겔루스 황조까지의 대략 600여년간의 비잔티움 황실사를 기번은 간단 명료하게 한장에서 고찰하면서 개괄적인 로마제국 쇠망사의 결말을 도출해내고 있다. 물론 이 600년이라는 기간을 쳅터 하나로 마무리했다면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는 세간의 많은 역사서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번은 마지막 권에서도 기번만의 특유한 관점에서 로마 제국사를 고찰하고 있다. 비단 이 기간동안 역사적 사초의 부족이나 그간 알려져 왔던 수 많은 황제들의 치세를 다루는 것보다는 로마제국의 쇠망의 길에서 등장하게 되는 주변민족, 국가들의 흥망성쇄를 고찰하여 로마제국의 쇠망과 자연스럽게 연결해주는 교량역활을 자인하고 있다는 것이 이번권의 키포인트라고 해야겠다. 


우선 로마황제중 배교자로 악명을 떨친 율리아누스에 버금가는 혹평을 받고 있는 성상 파괴자 레오4세와 레오 사후 자신의 아내인 이레나에 의해 다시 성상숭배라는 광기로 치닫는 교회사를 거론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쇠망을 다루고 있다. 또한 이미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이탈리아, 갈리아를 비롯한 기본 서로마제국의 패권을 역시 교회와 접목시켜 고찰한 점에서 기번의 날카로움을 엿볼 수 있다. 서로마제국 멸망이후 동로마제국 황제의 간헐적인 정치적 간섭을 받았지만 이미 이곳은 로마교황의 개인적인 영주로 자리 잡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후 롬바르드족의 왕인 리우트프란드의 일시적인 간섭이 있었지만 로마교회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게 되고 그 파트너로 프랑크왕국의 대표주자인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가 선택된다. 로마교회와 사를마뉴의 조합은 동로마제국이 이미 포기해버린 형제의 땅을 효과적으로 아주 시의적절하게 통치 해나가게 된다.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시조격인 오토1세의 등장으로 프랑크왕국이 역사의 뒷편으로 살아져가도 여전히 한쪽의 파트너는 로마교회였다는 점에서 기번은 "교회와 국가의 영웅들은 공적 또는 사적으로 우호 관계를 맺어 단결했으며, 그들은 패배자들을 짓밟으면서도 아주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는 체하였다. 결국 교회의 통치권은 그들의 지상에서 천 년의 경외로까지 확장되었고 그들의 고귀한 호칭은 그들이 노예 신분에서 풀어준 대중이 자유롭게 선택했다"라는 논평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즉  교황과 카롤링거 가의 상호 의무는 고대와 근대 국가, 교회 역사의 중요한 연결 고리를 형성하게 된다. 이탈리아 정복에서 이 로마 교회의 옹호자들은 좋은 기회, 그럴듯한 명분, 대중들의 소망, 성직자들의 기도와 술책을 얻었다. 하지만 로마는 롬바르드 왕국의 개입으로 로마의 안전을 위협 받은 반면 자유를 보장 받았지만 이들이 살아지고 난 뒤로는 그나마 보장되었던 자유마저 불안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사기는 언제나 약하고 교활한 인간들이 사용하는 수단이다. 힘은 세지만 무지했던 야만족은 교회가 파 놓은 책략의 함정에 빠지는 일이 많았다. 그만큼 교회는 이들보다 한층 더 세련되고 현란한 수사를 종교적 힘을 뒤업고 행사했던 것이다. 바티칸은 로마 교회의 권익을 증진시킨기 위해서 경우에 따라 다양한 허위 또는 진실한, 부패한 혹은 미심쩍은 행동을 하거나 숨기는 무기고이자 제작소 역활을 했다. 대표적으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교령집과 기부장을 만들어 샤를마뉴에게 위대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관대함을 본받고 그의 이름을 되살리라고 훈계하고 주문했다. 이들 민족, 국가의 영웅들이 순서를 바꿔가며 자리매김을 하는 사이에도 교회는 굳건하게 자신들의 신분을 철저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레오4세이후 로마제국전역에 걸쳐 신학논쟁이 잦아들었던 점 역시 이들에 대한 교회의 사기를 한층 돋보이게 한 점도 있지만 이는 동방에서 새롭게 일어나는 광풍을 애써 무시한채로 이러한 술책과 사기들은 또 다른 다양성의 포기와 고립으로 나아가는 방편일 뿐이었다.

헤라클리우스황제 시대에 동방 즉 아라비아반도에서는 새로운 광풍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적그리스도라 불이는 마호메드의 등장은 세계사의 새로운 쟁점으로 등장하지만 로마제국의 몰락을 가속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버린다. 결국 다양성을 포기해 버리고 전제 일신교체제로 옷을 갈아 입은 로마는 자신들의 일신교에 맞먹는 또다른 전제일신교에 의해 같은 절차를 밟으면서 서서히 몰락하게 된다는 것이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겠다. 기번은 마호메드와 이슬람교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상세한 고찰을 하고 있다. 특히 그동안 그리스도교 시작에서 비하되고 왜곡된 이슬람교에 대한 기번의 인식은 상당히 진일보한 점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지금처럼 양단의 종교적 대립으로 인한 적대적 시각과 왜곡된 인식을 볼때 기번의 무게중심이 잡힌 사관은 놀라울 정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호메드의 출생에서 부터 성장 그리고 정치적 성공과 이슬람세력의 유럽확장등을 통해서 한층 더 이슬람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들을 서술해 나가고 있다. 당시 유럽사회의 지배적이었던 시각에서 벗어나 마호메드의 사상과 그의 치적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특히 그리스도교에서 벌어졌던 살육이나 정복에 비하면 이슬람의 그 농도가 더 우호적이었다는 점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기번은 이슬람 역시 전제일신교라는 점에서는 그리스도교만큼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다양성을 배제해버린 사회의 결말은 그 끝을 보지않더라도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 기번의 주장이기도 하다. 

<로마제국 쇠망사>는 오현제시대로부터 앙겔루스황조시대까지의 로마제국사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대저작이다. 기존의 역사서와 차별화되는 점은 다름 아닌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기번은 이러한 세계사적으로 대제국이었던 팍스 로마나를 달성한 제국이 어떻게 쇠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가에 그 촛점을 맞추고 그 과정을 서술하였다는 것이다. 대게의 역사서에서는 소상히 다루지 않는 가려지고 숨겨진 어두운 분야를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는 점이 여타의 역사서와 다른 점이다. 기번은 카이사르가 진두지휘 하고 아우구스투스가 발판을 마련하고 오현제에 의해 그 정점에 올라던 제국이 멸망한 가장 큰 원인을 바로 로마제국 내부에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외침보다는 바로 제국이라는 제도를 고안했고 유지할려고 노력했던 역대 황제들의 포용성 즉 다양성을 포기하면서 로마라는 대제국은 서서히 죽음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지적한다. 이는 그리스도교라는 전제일신교의 탄생과 성장을 비교해 보면 더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도시국가와 공화정시대를 거치면서 로마라는 작은 국가가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군사,제도,정책등의 하드웨어가 아니였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로마는 세계사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다양성을 용인했기 때문에 제국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고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길을 통해서 물질과 더불어 문화,종교까지 로마로 통했고 로마는 이러한 이질적인 문화,종교에 대해서 넓은 아량과 관용으로 포용했던 것이다.

이것이 카이사르가 고안했고 아우구스투스가 확립한 로마라는 제국의 실체였던 것이다. 이러한 장점은 그동안 팍스라는 미명하에 세계사를 뒤흔들 몇몇 국가들과 비교하면 로마제국의 다양성이 그 얼마나 위대하였는가를 더 실감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은 기번이 살던 당시의 팍스 브리티아나나 지금의 팍스 아메리카나를 외치는 미국에게 던져주는 강력한 메세지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다양성이 결여된 일방적인 그 어떠한 체제나 정책 그리고 문화는 역사적 퇴보를 면할길이 없다는 점을 우리는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통해서 다시금 재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로마제국 쇠망사는 지금의 스토리텔링식의 역사서와는 비교가 되질 않을 정도로 고리타분한 맛을 가지고 있다. 원문과 맞먹는 방대한 주석을 통해서 책읽기의 괴로움을 배가 시켜주기도 하지만 기번의 저술의도인 제국의 쇠망에 고루 분포되어 있는 그리스도교의 상세한 서술과 그로 인한 다양성의 쇠퇴 그리고 제국의 몰락을 따라가는 여행은 왜 우리가 역사서를 읽어야 하는 가에 대한 해답을 주는 저서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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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1 - 새 번역 완역 결정판 열하일기 1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 / 돌베개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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熱河日記는 1780년(정조 4년) 청나라 건륭황제의 만수절(70세 생일) 축하사절로 팔촌형인 금성위 박명원을 정사로 하는 사행단에 군관자제(개인수행원)자격으로 장장 5개월에 걸쳐 중원대륙을 다녀온 일정을 기록한 기행기이다. 당시 연암과 교류를 가졌던 일명 연암사단인 박제가, 홍대용등은 연암보다 먼저 청제국을 다녀온 상태에서 연암의 이번 기행은 다소 늦은 감은 있으나 오히려 연륜으로나 학문으로 정체성이 확립된 시점에서의 중국기행은 그의 안목을 한단계 업그레이드하는 절호의 기회로 다가 왔고 이런 기회를 연암은 열하일기라는 저작을 통해서 자신의 철학을 고스란히 담게 된 계기가 되었으니 후대에 우리에게 왜 연암을 조선최고의 문장가라 칭하는지 재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열하일기는 그 형식상은 기행문의 일종이지만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내용들은 가히 당시 조선을 경천지동하게 할 정도의 위력이 담겨져 있다. 오죽했으면 정조의 문체반정의 시범 케이스에 걸려 금서로 낙인찍히게 되었고 책이 간행되기도 전에 여러 선비들의 입소문으로 필사본이 먼저 돌아다니게 되었다. 결국 열하일기는 연암의 살아 생전 빛을 보지 못하게 되고 하물며 그의 손자인 박규수가 영의정이라는 자리에 올라서도 세인의 두려움으로 간행 되지 못했던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핵폭탄같은 위력을 담고 있는 저서이었다.

연암은 당시 계급상승의 지름길격인 과거를 거부했고 아직까지도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버리지 못하고 소중화로 자부하던 당시 주류양반들의 사상적 연대참여에 철저히 거부한 외로운 아웃사이더로 생을 살아갔다. 북학이라는 실용학문의 거두로써 이용후생적인 삶을 지향했던 그는 유언으로 그저 자기 "몸 하나 깨끗히 씯어달라" 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당시 여타의 선비들과는 확연히 다른 삶을 살았다. 비록 말년에 강권에 의해 몇차례의 지방직에 출사하지만 그의 관직생활 역시 일반민중들과의 소통에 거의 전부를 보내게 되고 <과농소초>라는 불후의 농경학서를 남기기도 한다.

이처럼 연암은 당시 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확립해 나가는 청나라에 대해서 오랑캐가 아닌 진정한 제국으로 인식했다. 열하일기가 당시 숭정이라는 명의 연호를 사용치 않고 청의 연호인 건륭을 사용하므로써 시작부터 직격탄을 받게 되지만 연암의 생각은 이들과 달리했다. 비록 오랑캐의 나라라도 배울것은 배워야 한다는 신념하에 여행을 하면서 청제국의 문물과 제도, 문화, 과학, 건축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만의 신념을 표방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각론격인 일신수필에서 언급한 수레제도, 벽돌제조과정, 난방방식, 말타기, 의복에 대한 그의 견해는 날까로운 눈썰미를 엿볼 수 있다. 사대부라는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고선 이런 세밀한 부분까지 관심을 가질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또한 도강록에서 보여주는 역사인식은 연암으로부터 230여년이 지난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상고사에 대한 왜곡으로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로 비정하고 고조선, 고구려의 강역을 축소해석하고 있는 현 주류사학자들에게는 더욱더 일침을 가한다. 연암은 심양(성경)에 도달하면서 여기가 바로 고조선, 고구려의 땅이었다고 설명하면서 고구려 수도인 평양이라는 명칭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표명하는데 이 논지는 지금 학자들 사이에선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열하일기는 이처럼 역사,경제,문화,정치등의 다방면에 두루두루 걸친 백과사전이자 연암의 지식의 보고인 셈이다. 그럼 왜 우리는 연암을 조선최고의 문장가 칭할까. 열하일기를 이런 백과사전으로 본다면 왠지 딱딱한 학문적인 뉘양스만 풍길테지만 사실 그 비밀의 열쇠는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열하일기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연암은 철저한 아웃사이더이자 노마드였다. 연암이 강을 건면서 던지 화두에서 그의 노마드적인 삶을 추측할 수 있다. 언덕과 물 사이에서 '사이'의 정의를 두 견해 사이의 중간이나 평균을 뜻하지 않고 이것과 저것 그 양변을 떠난 제3의 변이형이라고 해석하므로서 하나의 고정된 가치나 방향성을 갖는 것이 아니고 삶의 현실속에서 구체적이고 매 순간마다 새롭게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의 일생을 통해서 초지일관 지속되었던 사상이고 사행길에서 부딛치는 사물과 인물들의 만남에서도 그런 모습을 철저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노마드적인 정신이 인간적인 연암을 보여 주기도 한다.  

북경에 도착하여 갑자기 열하로 오라는 황제의 명에 따라 북경에서 하인 장복과와 이별하는 모습에서 마치 절친한 지인과의 이별에서나 느끼는 애절함과 마두인 창대와 열하로 떠나는 여정에서 창대의 예기치 못한 발병을 간호해주는 모습은 당시 철저한 신분사회인 조선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휴먼니스트였던 것이다.

그러나 연암의 노마디즘과 휴머니즘보다 더 강력하게 열하일기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철촌살인같은 그의 웃음 즉 유머러스하고 나이브한 철학이 담긴 위트일 것이다. 사행중 갑자스럽게 들런 상가집에서의 문상장면, 그리고 흉악하고 덩치큰 무뢰배를 만나 슬그머니 뒤걸음치는 장면, 가게점포의 현판을 곡해해서 생기는 해프닝, 한밤중에 고북구를 나오면서 성벽에 자신의 이름 석자를 쓰기 위해 아껴 두었던 술을 사용하는 장면, 정진사를 비롯한 사행단에게 중간 중간 날리는 맨트를 그야말로 왜 우리가 열하일기에 열광하는지는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진면목이라고 볼 수 있다.

자칫 기행문이 백과사전 내지는 철학서로 흐르는 것을 방지하기라도 하듯이 연암은 군데 군데 적절하게 이런 나이브한 웃음을 독자들에게 선사하고 있는 천하의 문장가인 것이다. 하지만 연암의 이런 나이브한 웃음도 호질(범의 꾸중)에 이르면 씁슬한 맛을 느끼게 한다. 비록 중국 이야기라고 운을 떼지만 이는 필시 조선양반사회를 실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임에 틀림없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계급에 대한 비판은 비단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연암은 아랑곳 하지 않고 독설을 쏟아내고 있다.

渡江錄(압록강을 건너며) --> 盛京雜識(심양의 이모저모) --> 馹迅隨筆(말을 타고 가듯 빠르게 쓴 수필) -->關內程史(산해관에서 북경까지의 이야기)--> 漠北行程錄(북경에서 북으로 열하을 향해)

이처럼 한양를 출발하여 심양을 거쳐 산해관을 통과하여 마침내 수도 북경에 도달하게 된 사행단 일행은 갑작스런 황제의 통보로 부랴부랴 열하(승덕)으로 급히 출발하게 되고 수많은 난관을 무릎쓰고 열하의 태학관에 도달하게 된다. 

▣ 눈여겨 볼 만한 각론은 일신수필의 장대기, 관내정사의 이제묘기와 호질등이 있다. 장대기는 산해관 만리장성의 장대를 오르면서 느낀 감회로 무릇 인간이란 높은데 오를때는 느끼지 못하지만 막상 내려올때는 그 높이에 질려 혼비백산하듯이 이는 관직이 높을수록 그 나락의 충격도 크다는데 비유해서 관직생활의 청렴함과 덧없음을 시사한다.

▣ 이제묘기에서는 또 한번 연암의 나이브한 넋두리가 보인다. 백이,숙제가 고사리만으로 살았다지만 정작 자신은 고사리를 먹고 속이 불편했다면서 고사리는 어느 땅에서 난 것이냐며 에둘러 백이,숙제에게 한방 날리는 풍경은 연암이 이율배반적인 중화사상에 젖어있는 이들에게 가한 일갈인 것이다. 

연암과 함께 하는 18세기말의 중국기행은 다름아닌 연암이라는 불세출의 문장가이자 노마드, 휴머니스트 그리고 재치있는 위트가 있어 여행의 끝은 지루하지 않고 마냥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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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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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몸은 2/3가 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지구상에 생존하고 있는 거의 모든 생명체에게 물이라는 존재는 생명의 필수요소이다.
역시 한반도는 삼면이 물(바다)에 의해 감싸져 있는 형국이다. 우리주변 지천에 흔하디 흔하게 있는 것 또한 물이다. 그 투명도나 깨끗함을 떠나 물이라는 존재는 우리와 분리할 수 없는 또 다른 우리자신인지도 모르다. <공무도하>는 바로 이런 물의 이야기이다. 집중호우로 인해 침수되고 제방이 붕괴된 창야로 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서해안의 작은 갯펄인 해망의 이야기와 더불어 물로 끝을 맺는다. 등장인물들의 삶 또한 물과 관련지어진다. 해망에서 장철수와 바다밑 고철수거를 하는 베트남 여인 후에도 자신의 고향은 해망을 닮은 바닷가의 어촌이었고, 미호의 죽음으로 고향땅을 등진 방천석 역시 9대를 갯펄에서 살아온 바다 사나이였다.

또한 고향 청야을 등지고 해망에 새로운 둥지를 튼 장철수 또한 다시 물이 지천인 해망으로 삶의 연장선을 찾게 되고, 또한 불을 진압하기 위해 물을 쏟아 부었던 소방관 박옥출 역시 해망에서 새 삶을 영위하게 된다. 그리고 기자인 문정수 역시 이러한 인물들과 뒤 엉겨 물의 흔적을 찾아 다니게 된다. 온통 물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작가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물은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물을 담기 위한 용기의 모양에 따라 그리고 물을 사용하는 용도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게 마련이다. 특히 물이 휩쓸고 지난간 자리는 과거의 그 어떠한 기억도 깨끗하게 지워버린다. 청야의 저수지가 버람해서 장철수의 과거를 지워버렸고, 박옥출은 백화점화재 진화과정에서 자신의 범죄행위를 지워버렸고 방천석은 자식의 죽음을 개펄의 매립으로 지워버렸다.  

<공무도하>에 등장하는 각양각색의 인물들의 공통점은 바로 이렇게 자신만의 아픈 기억들을 물로 지워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샤워를 한다. 우리 몸에 남아있는 더러움을 남김없이 덜어내기 위해 소설속 노목희가 자신의 생리혈을 씯어내기 위해 샤워를 하고 난뒤 몸에 나는 물냄새는 왠지 뒤끝이 남는 듯 하기만 하다. 몸의 더러움이 아닌 우리 삶속에 담겨져 있는 슬픔, 더러움 그리고 희망 역시 아무리 물로 씯어내더라도 그 흔적만큼은 여전히 남는다.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떠날 수 있으나 상처받은 영혼만은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듯이 해망을 떠난 방천석이나 다시 창야로 돌아가는 장철수나 모든 것을 남기고 유학길에 오르는 노목희의 내면은 결코 자신들의 상처를 물로 씯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 시퍼런 물을 건너 저편의 양안에 도달하면 나아지겠지라는 기대는 좀처럼 그 해답을 보여주질 않는다. 어찌보면 당초부터 물건너 저 편에는 그런곳이 없는 지도 모른다. 삶을 살아가는 우리 인생에 한두번쯤은 있을수 있는 일이 벌어져 버린 것처럼 모든 아픔과 상처를 물길에 따라 흘려보내더라도 우리에겐 항상 그 앙금은 남아 있기 때문이고 우리는 그 앙금을 작중 작가인 타이웨이 교수의 <시간의 넘어>라는 제목처럼 나마의 시간속 넘어에 남겨 두고 싶을 뿐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쉽게 손에 들고 또 속도감있게 읽어나간 작품이었지만 그 내용은 생각하면 할 수록 어려운 소설이다. 특히 <칼의 노래>나<남한산성>처럼 그의 역사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이라면 또 한번 작가의 새로운 변신에 새로운 시각으로 다가가게 될 것 같다.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當奈公何』 
"사랑하는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기어이 물을 건너시다, 물에 빠져 죽으니 이제 임을 어찌할거나"
물에 빠져 죽은 사랑하는 사람이나 그 사랑하는 사람을 품고간 물보다 더욱 가슴저린 것은 물과 함께 님을 떠나 버렸다고 그리고 모든게 다 끝나버렸다고 여기는 이쪽 편의 남아 있는 사람의 지워지지 않는 흔적같은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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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 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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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3개 지상파 방송사의 메인 뉴스에 그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한국상고사에 대한 확고부동한 논지가 재정립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동북아역사재단(이 단체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국민의 혈세로 설립된 단체이다)에 의하면 역사적인 사초와 기존 주류학계의 일목요연한 논지를 받아들여 우리 상고사의 결정적 KEY를 쥐고있는 浿水(패수)의 위치비정을 대동강이 아닌 한강으로 봐야 타당하다는 논지를 펼치면서 한사군은 분명하게 한반도내 한강이북에 존재했다는 기존의 정설이 확정되었다고 발표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행해진 독립무장항쟁에 대해서 국권회복운동이냐 對테러리즘의 일부이냐에 대한 견해도 금명간에 확정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각계의 반응은 다양하게 나왔지만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이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그동안 분열된 국론이 말끔히 정리됐다. 과거가 무엇이 중요한가 지금 현실이 중요하다. 특히 어린 학생들은 반응은 한결 더 하다. 학교 교과서에서 배우는 거랑 집에서 아버지께서 말해주는 역사가 너무나도 차이가 나서 혼란스러웠는데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네요. 뭐 독도고 고구려고 우리역사나 땅이 아니면 어때요 지금 대학입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겐 별 도움이 안되었는데 잘된 일이죠"  의외로 한국희극인협회는 성명을 통해서 이보다 더한 코메디는 없었다라는 짧막한 논평을 냈다.』
 

상기의 내용은 가상의 기사이고 인터뷰이다. 물론 말도 안된다는 허튼 소리라고 할 지 모르나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가 사실은 우리 현실속에 버저히 존재하고 있다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어쩌면 이런 내용은 현재 대한민국 주류사학계에서는 내심 은근히 바라고 있는 기사일지도 모른다. 뭐 이렇게 생각하면 억측이나 기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세계사를 통틀어 우리민족 만큼 자국역사에 대한 관심과 자긍심이 높은 나라도 드물지만 반면에 우리만큼 자국역사를 폄하하고 모르는 민족 또한 눈을 씯고 찾아봐도 없다. 또한 학계가 양분되어 어디까지 내땅이고 어디까지가 남의 땅이라고 갑을박론하는 나라 역시 이 지구상에는 대한민국이 유일하게 존재할 뿐이다. 그럼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재야 사학자 이덕일씨는 그동안 골리앗을 상대로 고분분투하였으나 결국 거대한 허상과 자기기만에 빠져 있는 집단에 의해 그의 주장이 사장되었다. 하지만 이에 좌절하지 않고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이라는 저서를 통해 이들 세력에 대해서 칼을 뽑아 들었다. 그동안 강단과 재야 양측학계의 공방대상이었던 사안을 그대로 두고 보아서는 안된다는 입장에서 범국민적인 인식의 전환을 위해서도 진실을 밝히는 것이 공론화 되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본서가 집필된 것으로 사유된다.

저자는 본서를 통해 한국사의 가장 논쟁거리인 한사군의 한반도내 존재사실,삼국사기 불신론, 조선후기 역사왜곡,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의 격하등 크게 4가지 부분에 대한 숨겨진 진실을 토로하고 있다. 우리는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이나 독도의 자국 영유권 주장 그리고 지금 거의 확정 되어버린 중국의 고조선,고구려,부여등을 중국변방의 역사 편입이라는 동북공정프로젝트를 접할때 마다 마치 양은냄비가 달아오르듯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대정부 강경대응등을 외치지만 결국 약간 그것도 아주 약간의 시간만 지나면 마치 무슨일이 있었느냐듯이 잠잠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자국의 내노라는 사학자들이 알아서 상고사에 대해 축소해석해주니 중국이나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 얼마나 고맙고 기특한 일이겠는가. 이는 일제 강점기때라면 아마도 귀족으로 작을 내려주고도 시원치 않을 만큼 환호할 일인 것이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크게 두 분류의 집단에 의해서 자행된 행태라고 본다. 근본 교주주의 성리학으로 무장한 노론계와 그 후손인 친일식민학자들에 의해 우리의 역사는 철저하게 그들의 입맛에 맞게 재구성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중국 즉 중화라면 사죽을 못쓰던 노론계에 의해 고려사와 상고사는 뒤죽박죽이 되어버렸고 이들의 자손들인 친일식민학자들은 일본의 식민지정책에 적극 호응하고 아예 새로운 역사를 창출해 문학작품으로 변질시켜 버렸다. 해방이후 반민특위의 무산으로 새로운 역사인식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해버린 대한민국 사학계는 결국 이들의 길러낸 제자들에 의해 학계의 머리수가 채워지면서 지금까지도 철옹성 같은 철밥통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것이 OECD회원국이자 G20회원국이고 세계경제 열손가락안에 들고 있다고 동네방네 홍보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인 것이다.

동북공정의 역사왜곡에 대응하라고 혈세를 투입하여 세워준 단체에서 오히려 중국사학계보다 한발 더 앞서 알아서 교통정리를 해주는 사태를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과연 이나라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나라에 사는 우리는 이러한 행태를 뭐라고 해야하나? 우리에게 역사라는 것은 과연 존재했기나 한가?

아무리 재야학계에서 중국고대문헌과 그리고 실존하는 중국의 역사유물(홍산문화유적,하가점상하층유적등)을 제시해도 이병도를 교주로 한 주류사학계의 신앙은 변치 않는다. 이러한 현실은 사학이라는 학문을 폄하시키고 젊은층으로 부터 외면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면서 결국 일반대중과 괴리되는 현상을 자아내게 했다. 결국 역사는 그들만의 역사로만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제 일회성 이벤트 형식이 아닌 좀더 먼 안목을 가지고 우리 역사 연구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이다. 가장 늦었다고 할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처럼 어찌보면 너무 늦어버렸는지도 모르지만 지금이라도 새로운 역사인식에 촞점을 맞추어 왜 우리의 역사가 반만년인가에 대한 자숙의 시간을 가져야할 때이다.

단재선생은 역사는 我와 非我의 투쟁이라고 누누히 역설했다. 지금의 시대는 과거처럼 총과 칼로 다투는 시대가 아니라 문화와 경제그리고 역사로 패권을 다투는 시대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우리의 역사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그 어떤 누구도 지켜 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그동안의 뼈아프고 부끄러운은 경험을 통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한줌의 흙밖에 되지 않는 집단에 의해 한민족의 역사가 뿌리통채로 흔들려서야 어찌 말이 되겠는가. 지금에 와서 당시의 대동아 통합을 캐치프레이로 내건 대일본제국을 너무나 흠모한 나머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표의문자인 한자를 음독하여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한반도내에 한사군을 일본보다 더 적극적으로 비정해 버리고 그것도 부족해서 외모마저도 일본인을 닮고 싶었던 철없는 학자 개인을 질타하자는 것은 아니다.(이는 역사가 두고두고 그의 반민족행위를 기억할테니까 굳이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감정적일 수 밖에 없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것은 이 사람을 사학의 태두로 신봉하는 무리들이 문제가 되면 더 된다는 것이다. 진보적이고 적극적사관을 설파하는 저자를 비롯한 재야사학계를 너무 감정적인 면에 치우치고 실증사학을 배제한다고 몰아가는 그들이야 말로 정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경우인 것이다.

재야학계를 비롯하여 국민들은 단지 우리 역사의 진실을 알고져 할 따름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과연 우리 한국사에 단 한번이라도 진실이란 것이 존재하기라도 했던가라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있게 강단사학계와 재야사학계가 범국민적인 여염을 받들어서 제대로된 우리 역사를 새롭게 구성해야 할 것이다. 아니 새로운 구성이 아닌 있는 사실 그대로 기술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대체로 유교권의 국가뿐만 아니라 서양의 경우에도 한 집안의 역사를 담고 있는 족보 내지는 가계도에 대한 전통을 중요하게 여긴다. 하물며 한민족의 근원인 뿌리를 찾는 문제는 두말하면 잔소리일뿐이다. 우리가 스스로 찾지 않는 우리의 뿌리는 그 어느 누구도 찾아주지 않는다것이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을 통해서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나는 저자가 이번 저서를 통해서 저자처럼 전문적인 지식으로 역사인식하자는 소리는 아니라고 본다. 단지 그동안 알아왔다고 여겨졌던 한국사에 대한 인식을 커다란 범주내에서 재고찰할 필요성을 제시해주는 책이라고 생각된다.

서산대사가 남긴 시 한편이 지금 우리 한국사 연구와 접근방법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할 길에 대해서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
" 눈 내린 들판을 밝아갈 때는 모름지기 그 발걸음을 어지러이 하지마라, 오늘 우리가 걷는 발자국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 라는 말처럼 지금 한국사에 대한 제대로 된 고찰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우리의 후손들은 또 다시 남의 발자국을 보고 걸어 가야만 하는 운명에 놓일 것이다. 이 문제는 전적으로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전부의 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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