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 쇠망사 - 그림과 함께 읽는
에드워드 기번 지음, 데로 손더스 엮음, 황건 옮김 / 까치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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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하고 지루했던 기번의 원작을 적절한 삽화와 더불어 효과적으로 발췌하여 효과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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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 교감 완역
이순신 지음, 노승석 옮김 / 민음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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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국보 76호 난중일기(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공의 일기를 제대로 읽어 본 사람 역시 의외로 많지 않다. 公께서 초서체로 흘려 기록하는 바람에 오역도 많고 초고본, 전서본, 일기초 등 사료의 정비불비로 인해 많은 번역본이 두서 없이 출간되어 정확한 난중일기의 묘미를 느낄 수 없었다는 점도 있다. 특히 1595년 일기인 을미일기가 빠져있었던 관계로 일기전체에 대한 맥락을 잡는데 어려움을 겪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구국의 성웅으로 충앙하고 있지만 정작 공이 직접 남긴 일기 (어쩌면 실록이나 기타 기록보다 더 진솔하고 정확하다고 볼 수 있는)에 대한 후대인들의 완역에 대한 노력은 그리 깊어 보이질 않았다. 이번 노승석교수의 난중일기는 그동안 산재되었던 초고본과 전서본 그리고 기존에 빠져있었던 누락부분의 일기초을 통합하여 교감한 난중일기의 완역본이라데 그 의의가 있다. 특히 을미일기를 추록하여 완벽한 충무공의 난중일기가 재탄생하게 되어 무엇보다 기쁨마음을 금할 수 없다.  

전국시대를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과 다이묘들의 반발을 억누르기 위해 왜는 명을 타도한다는 명분하에 1592년 4월 현해탄을 건너 부산 앞바다에 도달하고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한반도를 유린한다. 이를 역사는 임진왜란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조선개국이후 200여년간 그야말로 평온한 시절를 보낸 조선으로서는 한마디로 아닌밤에 홍두깨였지만 왜는 철저한 준비끝에 감행했던 도발이었기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더구나 군왕이라는 자가 솔선수범하여 몽진하는 형국에서 신하들의 비겁함을 탓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토록 만반의 준비를 했던 왜의 전략중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전라좌수영의 수장 이순신을 간과했다는 것이고 이는 곧바로 옥포해전에서 부터 시작하여 칠전량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기 까지 자그만치 5년간에 19차례 해전에서 전패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결국 왜의 전략은 바다의 神인 이순신의 벽을 넘지 못하고 처음부터 새롭게 맞추어야 했고 결국 명의 참전을 불러오게 되면서 7년이라는 기나긴 원정을 하게 되면서 명분도 없고 성과도 없는 소모전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이러한 결과는 이후 동북아시아의 정세에 커다란 반향을 가져오게 된다.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선조신록(수정실록포함), 유성룡의 징비록, 유몽인의 어우야담 등에 나와 있지만 그 내용이 그리 자세하지도 않고 전반적으로 전쟁을 통찰하는데 부족한 면이 있다. 실록은 정사라는 측면에서 특히 문신들의 입장에서 기록된 것으로 전장의 치열한 기록을 알 수 없는 한계가 있고 징비록의 경우도 후방에서 겪고 보고 들었던 기록물이고 어우야담(유몽인의 경우 난중일기에 그의 암행어사로서의 허위보고와 편협한 사고의 대한 비판이 나옴)의 경우 그야말로 야담형식으로 민간의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를 기록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이런면에서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임진년에서 부터 노량해전으로 戰死하기 이틀전인 무술년(1598년 11월 16일)까지 7년간의 방대한 기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대한 양보다 더 소중한 것은 바로 자신이 전쟁의 최일선에서 겪었던 생동감 있는 현장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전란을 통찰하는데 어떠한 기록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하여 승리한 해전을 거의 모두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상황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전란중에 벌어졌던 행주대첩, 진주대첩등 다양한 육전에 대한 정보와 장수와 문신들의 활약상 그리고 그들의 치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가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다.

또한 공의 일기에는 판옥선을 비롯한 전선의 제작과정과 둔전(병사가 직접 경작을 하여 군량미를 조달하는 방식)그리고 거북선과 정철총통을 비롯한 신무기의 개발과 개량에 대한 세세한 기록이 남겨져 있어 군수품관리와 전선보급 관리등에서 공만의 주도면밀함을 확인할 수 있다. 제하는 비록 일기라고 하지만 그야말로 7년전쟁을 세밀하게 다룬 전쟁사라고 해야 할 정도 전투전략, 적 정세파악, 국가의 전략, 인재의 배치 및 활용, 정규군과 의병의 활동등에서 카이사르의 내전기나 갈리아전쟁기보다 뛰어난 면을 보여주고 있는 기록물이다. 

하지만 난중일기를 전쟁사로만 팍아해서는 그 의미를 십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난중일기에는 공 자신의 사상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일기라는 자체가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기록 하듯이 난중일기에는 공의 솔직담백한 내용들을 포함한 공의 모든것이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어느 누구라도 감추고 싶어하는 남녀간의 정사문제도 기록하므로서 정말 자신에게 충실한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그동안 원균과의 불화는 모두 인지하고 있지만 권율, 당시 암행어사로 파견된 유몽인, 윤두수, 윤근수, 이억기(전라우수사),기효근(남해현령),이일등의 인물평은 당시 조선군 전체의 분위기를 보는듯 해서 마음이 착찹해 질 뿐이다. 또한 일기를 통해서 본 공의 성격이 그대로 표출되고 있다. 자신의 오른팔 격이었던 순천부사(권준)과 사도첨사(김완),전라우수사(이억기)가 기한내에 작전지역에 도착하지 못한 것에 대한 냉정한 징계와 모함으로 백의종군하는 과정에서 백성이 준 음식을 받아온 종에 대한 질책에서 공과 사에 대한 확고 부동한 태도를 엿 볼 수 있다. 임진년 사천해전에서 어깨에 총상을 입은 이후 계속되는 신병와중에도 대필한 공문서의 글자모양이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직접처리하는 과정를 보면 공의 꼼꼼한 면을 확인할 수 있다. 부안의 첩과 동침한 여종에 대한 기록에서는 자신의 허울도 감추지 않는 솔직함을 볼 수 있다. 특히 원균을 비롯한 부하장수들의 술주정에 대한 힐책이 많이 보이는 점은 정신과 자세의 올바름을 강조하는 공의 성격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이렇듯 충무공의 전반적인 성격은 쉬이 범인들이 접근하기엔 상당히 어려운 인물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례이다.

하지만 공의 이러한 성격이 오히려 관리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대변하고 있다. 진중에서 일반백성들과 병사들에 대한 배려는 장수로서 그리고 목민관으로서의 부족함이 한치도 없어 보인다. 최하층계층인 노비들의 이름과 승병들의 이름 그리고 일반 백성들의 이름 하나하나까지 거론하면서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아픔을 자신의 아픔같이 감싸주는 모습에서는 그저 공이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생각마저 들게 할 정도이다. 선조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이에 편승한 원균과 서인들의 중상모략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백의종군하고 모친의 죽음과 아들 면의 전사등 그야말로 안팍으로 괴로운 시기였지만  공은 일기가 끝나고 자신이 전사하는 노량해전까지도 단 한번도 임금에 대한 원망자체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견하듯이 정유년 9월의 일기에 송사 이강과 이약수전을 인용하면서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비장한 결의를 보여 주어 읽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비단 선조는 자신을 라이벌로 생각했더라도 신하인 공은 단 한번도 선조에 대한 충념을 버리지 않고 일기에 기록했듯이 목숨으로 섬김을 다했던 것이다. 

이렇듯 난중일기는 전란의 진행상황과 전투의 결과, 전략의 수립, 신무기 개발, 유성룡을 비롯한 중앙관직 인사들의 언행과 행보 권율,원균,곽재우,이일,이억기등 최전방일선에서 활동한 장수들의 활약상, 목년,갓동,철매,한경,돌쇠,해돌,금이, 중 해당등 이름 없는 민초들의 이름, 가장(개고기),사슴고기,연포탕,동아등 당시 애용했던 음식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백과사전 같은 방대하면서도 다양하고 그러면서도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기록들을 담고 있는 개인의 일기이자 전쟁사이며 하나의 문화사이기도 한 소중한 유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비록 후대에 5.16쿠테타로 그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충무공을 신격화 하였다는 비판도 있지만 난중일기만을 놓고 보더라도 공의 위대함은 이런 비판을 잠재우고도 남는다. 우리는 난중일기에서 공의 성웅적인 기질을 보는 것 보다 공역시 일개 인간으로서 우리와 같은 희노애락을 갖고 살아갔던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이 올바른 난중일기의 접근방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새로게 보완되고 첨부되어 완역된 난중일기를 통해서 공의 진중에서의 일상과 목민관으로서 자세, 자식으로서 효, 부모로의서의 자애, 목숨을 건 전장에서 전우애 그리고 나아가 국가에 대한 충념을 다시한번 알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는 지금처럼 가치관의 아노미상태에 접어든 시대에 충무공이 던져주는 삶의 화두일 것이다.
 
安國家定社稷, 盡忠竭力, 死生以之(국가를 편안히 하고 종사를 안정시키는 일에 충성과 능력을 다하여 죽으나 사나 그렇게 하리라) 자신이 기록한 일기의 이 말을 위해 죽는 순간까지도 충무공에게는 국가와 백성이 최우선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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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사진가 - 사진과 그림으로 기록한 인간의 땅 아프가니스탄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디디에 르페브르 사진.글, 에마뉘엘 기베르 그림.글, 권지현 옮김 / 세미콜론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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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아프카니스탄 하면 떠오르는 두가지 장면이 있다. 미국 헐리우드액션의 선구적인 영화 람보와 9.11테러로 인해 오사마 빈 란데의 인계를 거부하여 미,영 연합국의 공격을 받았다는 정도 그리고 이슬람 원리주의를 표방하는 탈레반 정권에 의해 지금 이시각에도 상호간의 반목을 중지하지 못하는 나라정도로 기억에 남아있을 것이다.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조로아서트교의 중심으로 한때 번창하였으나 알랙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으로 인해 인도에 편입되면서 페르시아 사산왕조와 인도의 굽타왕조의 침략에 하루라도 조용한 날이 없는 시기를 지내왔고 19세기에는 영국과 제정 러시아의 침략대상이 되었으며 독립된 와중에서도 구 소련의 내침등으로 인해 불안한 정치를 가지고 있는 불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결국 정치적인 불안정은 반란과 쿠테라는 비정상적인 권력의 이동을 반복하게 되고 마침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 의해 신권정치가 자행되게 되었다.

<평화의 사진가>1979년 구소련군의 내침과 이에 호응한 카르말 정권이 등장하면서 반군세력인 무자헤딘의 대립을 다룬 르포형식의 내용을 담고 있다. 프랑스의 사진가 디디에 르페브로와 국경없는 의사회의 활약상 그리고 파키스탄과 아프카니스탄을 오가는 여정속에서 두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한 전쟁의 참화와 아프카니스탄 국민들의 애환을 뷰 파인더에 담아 흑백사진과 더불어 삽화로 전쟁과 평화가 과연 어떠한 것인가를 지금의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달해 주고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네이팜탄의 폭격으로 온몸에 화상을 입은 소녀을 촬영한 사진 한장은 그 해 퓰리처상을 수상했지만 무엇보다도 이 사진 한장이 가져온 여파는 어마어마하게 퍼져 나갔다. 결국 반전운동에 굴복한 미국은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되고 전쟁은 끝났지만 아무런 단어 하나 없는 사진 한장이 전파하는 무언의 메시지가 이처럼 강하게 울려 퍼지거라는 것은 작가도 짐작치 못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깊게 각인 되었던 것이다. 사진의 힘은 이처럼 말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언어를 뛰어넘어 사람들의 감정에 그대로 흡수되고 각인된다. 비단 한컷의 사진이지만 이 한 컷이 말해주는 것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이번 <평화의 사진가>에서도 말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상황들을 아니 오히려 언어라는 문장으로 표현하면 왜곡될 수 도 있는 상황들을 사진이라는 단순한 전달 매체이지만 이처럼 완벽하게 전달해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거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한다. 인물들의 표정 하나 하나, 아프카니스탄의 산들과 들판 그리고 험난 하기만한 여정속에도 희망이라는 끈을 찾아가는 인간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상호간의 믿음과 우정들... 이러한 모습들은 과연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라는 것으로 제대로 표현하는게 가능할까라는 생각마저 들도록 작가는 그 순간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고스란히 담아 내었다. 물론 작가가 밝혔지만 수도 없는 촬영 컷 중에서 단 한장의 쓸만하고 마음에 드는 사진을 건질 수 있다지만 이 역시 작가의 기본적인 감성이나 피사체들과의 교감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작가가 파키스탄에 도착해서 아프카니스탄으로 떠나기 전 그들과 공감대를 찾기 위한 노력과 현지에서 무자헤딘들의 삶을 이해할려고 하는 자세에서 이미 그들과 상호간에 교감을 가지기 시작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과 일원이 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는 작가가 이들과 언어로서 공감대를 형성할려고 했다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최종 목적지인 야프탈로 향하는 여정이나 도착하고 나서 곧바로 의료행위를 펼치면서 전쟁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번 전쟁의 참화를 여실히 깨닫게 한다. 결국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정치적 노선이나 이념과 전혀 무관한 일반 민중이다. 그중에서도 왜 전쟁을 해야하는것인지 이유도 모른채 전장의 총알받이로 내몰리는 어린이와 여성 그리고 노인들이다. 신의 뜻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이러한 잔혹성은 그들이 믿는 신역시 바라지 않는 바일것인데도 지금도 그 신의 이름으로 이들은 죽음선을 넘나들고 있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에 대해서 자문하게 하는 안타까운 장면이 많다.  

하지만 이번 작품이 전쟁의 참화만을 다루었다면 일반 전쟁르포형식의 다큐와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내일도 기약할 수 없는 전쟁통속에서도 사람들의 살아있는 눈빛을 통해서 평화와 희망을 보았고 이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필름에 담아 내었다.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이들은 바로 평화와 희망을 위해서 손에 총을 들 수밖에 없다는 모습으로 비쳐질 수 도 있지만  국가의 독립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고 싶어하는 열망은 세상 어느 나라 어느 민족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국경없는 의사회의 자원의료봉사와 비단 종교적인 색체는 다르고 가치관을 달라도 같은 인간이라는 공통점에서 인간만이 공유할 수 있는 인간미를 보여주고 있다. 포탄의 바다 속에서도 봄이 오면 어김 없이 꽃이 피듯이 황무지 아프카니스탄에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금 한장의 사진이 보여주는 감동을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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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남자 - 인류 최초의 남성 '아담'을 찾아 떠나는 유전자 오디세이
스펜서 웰스 지음, 황수연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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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라는 창세기 1장의 말처럼 우리 인간들은 그야말로 하나님(만일 존재하기라도 한다면)의 충복처럼 이 지구라는 행성을 뒤덮어 버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상 어디에선가 인간들이 태어나고 죽어가지만 멜서스의 예언처럼 인구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지구를 신이라는 존재에게서 위임받아 대리청정하고 있다는 착각아닌 착각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지구의 역사를 1년이라는 달력으로 축소해서 보면 고작 12월 31일 오후 늦게 등장한 생명체가 마치 그 앞의 364일을 살아온것 처럼 말이다. 

이러한 인류자기 중심적인 사고가 지구라는 행성을 서서히 목죄우고 있고 이러한 행위는 결국 인류라는 종의 종말을 가져올 수도 있음을 모르고 있는게 현실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류지상주의는 결국 인류가 다른 생명체와는 다른 종교적인 표현으로 "신의 선택"를 받았다는 자기합리화에 그 기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과 진화는 이러한 우리들의 얄팍한 자기합리화를 사정없이 깨트리고 있다. 우리가 받아들이던 아니던 간에 사실은 사실일 뿐이다. <최초의 남자>는 바로 인류의 기원에 대한 진화론적 고찰을 담고 있는 책이다. 대략 500-600만년전의 흔적에서 적게는 40-50년전의 호모에렉투스등 시간적인 감각이나 현생 인류와는 사뭇다른 외관등에 익숙한 우리에게 좀더 친근하고 접근가능한 범위로 축약한 인류의 기원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띄인다. 물론 이렇게 시간적 단위를 몇만년 범위로 축속했다고 해서 인류의 기원을 짧게 잡았다는 논거는 아니다. 저자는 철저하게 진화론적인 입장에서 인류의 기원을 고찰하면서 단지 지금 인류에게 있어 가장 최근의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할 뿐이다.  

한가지 더 눈여겨 봐야할 것은 그동안 발굴된 화석이나 뼈에서 추출한 DNA로 연대를 측정하는 방식을 벗어나 좀더 현실성 있는 방법인 mtDNA(미토콘드리아 DNA)와 남성에게만 존재하는 성염색체인 Y염색체를 이용한 인류의 추적방식으로 현생 인류의 기원을 되집고 있는 점이 눈에 띄인다.
여기서 물론 세부적인 과학적 이론에 대한 가부를 언급할 수 는 없으나 저자의 논거가 과학적 접근방법이나 증명에서 오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이론적 근거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저자의 이러한 측정방식에 의거하면 인류의 기원은 대략 5만년전 아프리카 동북부에서 아담이라 지칭하는 M168이라는 최초의 남자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동안 인류는 아프리카를 비롯하여 세계 몇 곳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진화해왔다는 이론이 있었지만 이후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지금의 현생 인류로 진화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없었다는 점에서 이번 저자의 이론은 주목할만하다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인류는 한차례의 빅뱅이라는 대도약을 거치면서 중동지방으로 이동했고 다시 유럽으로 아시아로 퍼져나가면서 구인류를 몰아냈고 그 자리를 자신의 핏줄로 메어나갔다던 것이다. 

저자는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전세계로 퍼져나가게 된 결정적인 동기를 당시의 기후변화로 추론하고 있다. 열대우림에서 사바나로 그리고 스텝으로 이어지면서 수렵,채집으로 살아가던 인류에게 식량난이 닥쳐왔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인류는 자발적으로 좀더 안락하고 식량확보가 용이한 중동지방으로 진출했고 이어서 원예농경이라는 두번째 빅뱅시기를 맞이하여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가게 된 것이다. 특히 두번째 도약인 농경이라는 신기술로 무장한 신인류앞에 구인류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당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 결국 현생인류가 지구를 점거하게 된 것이다. 다윈의 자연선택은 우수한 유전자가 선택받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적응하지 못하는 유전자가 제거되는 것임을 말하듯이 이렇게 구인류는 차츰차츰 자연에서 제거되었고 그 빈틈을 신인류는 표나지 않게 메워나갔던 것이다. 저자는 세계의 다양한 인종들의 mtDNA와 Y염색체의 분석 그리고 세계 각지의 언어을 통해서 이러한 이동경로를 증명하였다.  

아프리카에서 발원한 현생인류가 전세계로 퍼져나가는 과정은 기후 변화라는 외부적 환경도 한 몫을 했지만 결국 인류의 자의적이고 능동적인 힘이 그 근간을 이루었다. 결국 이러한 인류의 도약은 지금의 현생인류로 진화하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양날의 검처럼 다른 이면은 철저한 정복과 파괴가 뒤따랐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류가 첫 발을 뒤딘 미지의 땅에 살아가고 있던 다양한 생명체는 어느날 갑자기 출현한 인류라는 종에 의해 철저히 이유도 없이 멸종했다는 점에서 앞으로 인류가 진화해 나가야 할 방향타를 제시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세번째의 도약의 길에 놓여있다. 세계가 리얼타임으로 연결되고 국경이나 언어의 장벽등이 흐릿해지면서 그야말로 이동성에 대한 대폭발의 시대를 살고있다. 5만년전만 하더라도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까지 인류가 이동하는데에는 1만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겨우 몇시간이면 이동할 수 있는 최첨단의 시대를 살고 있다. "자신의 역사를 안다는 것은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아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앞으로 인류가 나아가고 진화해가는 길에 있어 가장 시급한 것은 바로 인류 자신의 정체성과 그 근원을 파악하는 것이다. 인류의 근원을 되돌아보면서 어떻게 인류가 진화를 해왔고 그러한 진화라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다양한 변화들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미래로 나아가는 인류의 시금석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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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2 - 7月-9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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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만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킬 거라는 예상을 하고도 남았지만 막상 작품을 읽고 나서 다시 한번 우리가 왜 하루키의 작품에 매료되는지에 대한 적당한 단어로 규정할 수 없는 일종의 경외감마저 들게 하는 소설이었던 것 같다. 그의 전작인 <상실의 시대>에서 가졌던 몽환적인 플롯은 여전히 이번 <1Q84>에도 녹아들어 있다. 달(MOON)은 예로부터 태양과 반대의 개념을 우리 인간들에게 각인 시켜왔다. 태양이 밝음, 힘, 남성성을 상징하는 반면에 달은 어둠, 나약함, 여성성등을 상징하여 마치 종교적인 관점을 떠나서 보편적이고 일반론적으로도 선과 악이라는 개념으로 우리들 한켠에 부지불식간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달은 모성을 비롯한 순수한 여성의 사랑을 상징하듯이 몽환적으로 우리들에게 다가 오기도 한다. 이번 소설의 모멘트 역시 달이 표방하는 몽환적인 분위기 상징성인 아오마메와 그녀의 지고지순하고 절대적인 사랑 덴고라는 두 화자를 통해서 작가는 사랑을 말하고 이별을 말하고 동시에 사라짐 아니 정확히 상실됨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 다소 SCIENCE FICTION적인 플롯이 가미되어 현존하는 1984년과 현존하면서도 동시에 현존할 수 없는 1Q84년이라는 시간적, 공간적 개념이 산재하므로서 독자들의 시선을 더 끌게 한다. 특히 소설속의 또 다른 소설인 <공기번데기>에 대한 궁금증은 마치 아오마메와 덴고가 언제쯤 해후할까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의 궁금증만큼이나 더 관심의 대상이 되게 한다. 이번 작품 역시 하루키 특유의 세세한 묘사가 일품으로 꼽히는 작품일 것이다. 인물에 대한 감정묘사에서 외모적인 묘사는 1장과 2장을 읽으므로서 두 주인공에 대해 독자들이 움직일 수 없게 머리속 깊이 각인시켜 버린다. 그리고 주변 인물들이나 상황변화에 따르는 묘사들 역시 하루키의 작품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장황하면서도 정교하고 지루하지 않다. 마치 뭔가 더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 마저 같게 해버린다. 특히 남녀간 섹스의 묘사는 하루키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문구들의 향연일 것이다. 하루키의 섹스는 에로틱한 느낌보다는 자신 작품속을 관통하는 몽환적이 느낌의 표출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보기에 따라 다소 민망한 표현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반적인 섹스의 묘사는 에로시즘과는 별개로 섹스라는 행위를 통해서 작가만의 메세지가 담겨있는 듯한 분위기이다. 

이번 소설에서도 곳곳에 음악이 녹아있다. 특히 아오마메를 상징하는 야나체크의 심포니에타는 서두에서 부터 그녀의 예정된 삶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루키는 아오마메나 덴고 그리고 후카에리등 주요 등장인물을 묘사할때 곳곳에 이런 장치를 곁들어 놓아 인물이해를 문자라는 단어와 음악이라는 음률로 동시에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어 인물들에 대한 애착을 한결 더하게 한다. 

무엇보다 이번 소설이 가지는 매력은 상실에 대한 작가 나름의 가치관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죽음, 이별, 분실, 사라짐, 제거등 우리는 현실속에서 나에게 귀속 되었던 것이 나를 이탈하는 순간에 다양한 단어로 이 과정을 묘사하곤 한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들이 과연 적절한가라는(혹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인가라는) 것에는 그 어떠한 의문도 가져보질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번 소설을 통해서 이러한 일련의 표현들이 '상실'이라는 하나의 표현으로 압축되어 진다. 상실이라는 모멘트는 주인공들의 일상적인 삶의 연속이자 삶 그 자체인 것이다. 마치 우리들의 삶이 그러하듯이. 

전반적으로 일반 대중에게 기꺼이 다가가기엔 다소 무거운 작품이다. 작중 덴고 아버지의 말 "설명해주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은, 설명해줘도 모른다" 처럼 알것 같기도 하면서 모르는 것 같고 모르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새 잔잔하게 가슴에 와닿는 것이 하루키의 매력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후 이어지는 내러티브 역시 많은 추측을 낳고 있지만 그것 역시 읽어봐야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더 기다려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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