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 1 (양장) - 제1부 개미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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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를 베스트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명작... 개미속에서 우리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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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탄생 - 모성, 여성, 그리고 가족의 기원과 진화 사이언스 클래식 15
세라 블래퍼 허디 지음, 황희선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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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대부家의 가문의 영광으로 여겨졌던 열녀문을 비롯하여 정형화된 현모양처(賢母良妻)의 개념은 비단 성리학적인 잣대 위에서만 존재하는 개념이 결코 아니였다. 그 이전의 시대를 상고해 보더라도 현모나 양처에 대한 가치관은 깊숙히 우리의 문화속에 내재되어 있었고 성리학이라는 표준화되고 국가공식화된 이념의 또 다른 표출 방법중 하나였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치마열풍이나 강남열풍이니 하여 자식들에게 보다 나은 교육의 기회를 마련해주고져 밤낮 자식 걱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어머니들에게 이어져 왔다. 이러한 어머니의 헌신(사회적으로 상식적인 한계범위를 벗어나더라도)은 모성애(母性愛)라는 감정이입까지 들추어 내어 마치 어머니라는 존재가 필수불가분하게 갖추고 있어야 하는 덕목이상의 개념을 요구하고 있고, 당사자인 어머니들 역시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또한 이러한 모성은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지표로 간주되고 있고 초창기 진화론자들에게 각인되어 인간 진화의 산물처럼 굳어져 버렸다. 그럼 아직도 세계 1위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해외입양이나, 중세 유럽의 영아 살해, 극동아시아권의 성 선별적 영아살해(임신중절)를 비롯한 수많은 일련의 사건들은 과연 어떻게 설명 되어야 하는가? 그저 일부 몰지각한 나이 어린 혹은 준비되지 않은 어머니와 민족별로 편향적인 문화적인 강압으로 인해 자식(주로 성별로 딸들)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는 어머니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그리 생각하고 있겠지만 여기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다.  

<어머니의 탄생>은 바로 이러한 어머니의 헌신이라고 일컫는 모성본능에 대한 역사적, 생물학적, 진화론적, 사회문화적 고찰을 통해서 과연 모성본능이 초기 진화론자들이 주장한 것 처럼 영장류에서 호미니드로 갈라져 나오면서 진화된 산물인 것인지, 혹은 수렵/채집시대를 거쳐 농경사회로 진입 하면서 탄생한 가부장제도의 권력이 만들어 낸 메타포인지에 대해서 방대한 동물, 인간들의 실험과 사례를 통해서 그 해답에 접근하고 있는 보기 드문 인간 해부학(정신적인 산물까지 포함한)적 저서이다. 특히 저자가 여성이라고 해서 결코 성 편향적인 관점에서 모성본능을 바라보거나 패미니즘의 사유가 엿보이는 그런류의 감성적인 저술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이기 때문에 더 섬세하게 그러면서도 적확하게 모성본능에 다가가고 있다는 점이 눈에 돋보인다. 특히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 정립부분이 인상적이다.  

저자는 현존하고 있는 수렵/채집집단과 영장류의 행동을 통해서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한 결과 흔히들 문명화된 집단이 가지고 있는 모성본능의 개념과 사뭇 다른 결과를 도출해 내고 있다. 이는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모성애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될 수 도 있고 한편으로 어미니와 모성이 가지고 있던 메타포에 대한 어마어마한 손질이 불가피 할 수 도 있다. 물론 저자는 모성본능에 대한 진화론적 관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금처럼 막연하게 형이상학적으로 규정된 모성본능에 대해서는 반기를 들고 있다. 이에 대한 역사적, 생물학적, 진화론적 증거는 무수히 많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좋은 어머니' 라는 개념에 반대하고 있다. 좋은 어머니 즉 헌신적인 모성애를 가진 어머니라는 개념은 인류학적으로 진화된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 후대에 창의된 허상이라는 개념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강요되고 도식화되고 만들어진 '좋은 어머니'가 마치 인간이 진화된 과정속에서 자연선택을 받은 것처럼 비추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럼 모성본능은 과연 어떤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 냉혹하게 표현하면 C < Br (c:행위자가 부담다는 비용, b:수혜자에게 돌아가는 이득, r:연관도)라는 단순한 수학적 부등식 표현된다. 즉 행위자(어머니)가 부담하는 비용이 수혜자(자식)에게 돌아가는 이득과 수혜자와 행위자의 생물학적 연관도를 감안하여 최소한 비용보다 클 경우에 한하여 자식을 키울거라는 논리이다. 이 논거는 정상적인 부부관계, 미혼모, 두번째 아내 그리고 원하지 않는 분만을 비롯한 다양한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현상으로 이해되고 있다. 또한 어머니와 자식(태아를 포함한)의 관계 역시 자연선택의 범위를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대결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놀라운 논거이면서도 한편으로 수긍이 가는 논거이다. 그동안 우리에게 각인된 모성본능은 진화적인 시간과 역사적인 시간의 틀 속에서 확대 재생산되면서 하나의 이념으로 자리잡은 발버둥과도 같은 개념으로 받아 들여진다. 마치 전체적으로 효과적인 생존을 위해서 불가피하게 한쪽에게만 강요되어진 구도이다. 이러한 구도는 '좋은 어머니'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확대되어 전파 되었고 세대에 세대를 거듭 하면서 하나의 정설로 받아 들여지게 된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일련의 논거(비단 저자 뿐 아니라 많은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들이 독자들에게 그다지 반갑게 받아 들여지지 않을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저자가 주장하는 모성본능이라는 개념은 거대한 어머니 대자연이라는 틀 속에서 진화적으로 선택되었던 생물학적, 사회학적 진화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단지 그동안 모성본능에서 파생된 지고지순한 메타포에 감춰져 있는 내면을 보지 못했거나 보지 않을려고 했던 우리에게 문제가 있을 뿐이지 자연선택으로 촉발된 어머니 대자연은 지금도 진행중이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진행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결국 저자의 취지는 이러한 모성본능을 종교적,사회문화적 잣대로 제단하고 은폐할 경우 그 패해는 고스란히 우리의 한쪽 성인 여성에게 전가될 뿐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결국 생물학적으로 번식의 상대편에 대한 편견은 종전체의 지속적인 건강한 삶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이번 책으로 인해 어머니와 자식 그리고 모성본능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그 실체에 대해서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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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 18현 - 조선 선비의 거울
신봉승 지음 / 청아출판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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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 [文廟]는 중국 당나라때 공자를 문성왕으로 추봉하면서 문성왕묘라는 말에서 후대에 문묘로 통칭하게 된다. 유가의 좌장인 공자와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4성()과 그 밑의 10철()의 신위를 배향함으로서 명실공히 유가의 산실이자 정신적인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우리나라는 신라시대에서 시작되어 고려조에 대성전을 건립하여 배향하였으나 본격적으로 신주를 받들기 시작한 것은 성리학을 정치적 모토로 출발한 조선시대에 와서야 정확한 자리를 잡게 된다. 더욱이 조선초기 신생국의 정치,사회,경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훈구대신과 사림들간의 맞대결에서 사림들이 승리를 거두면서 중국의 성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성현들의 배향문제가 대두되면서 문묘에 종사되는 문제로 이해집단간의 혈투가 벌어지게 된다. 

<문묘 18현>는 바로 서울 문묘에 배향된 조선의 성리학자 18명의 삶과 개인사를 다룬 역사 에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조선왕조 5백년, 소설 한명회로 대중적인 역사소설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작가의 새로운 변신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김굉필,조광조,정여창,이언적,이황등을 비롯한 조선시대를 풍미했던 18인의 삶과 그들이 군주에게 상소한 명문들을 고찰함으로써 선비로서의 정신세계를 잠시나마 엿 볼 수 있도록 작가는 조선왕조실록과 그들이 개인문집 및 각종 역사적 사료를 검증하여 이들의 삶을 추적해 나가고 있다. 

무엇보다 조선시대에 선비로서의 가장 큰 영광은 다름 아닌 죽어서 문묘에 배향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정치적,사회적으로 공적이념인 성리학을 통해 학문과 정치, 그리고 백성들의 교화를 목표로 햇던 사대부들에게 있어 문묘가 갖는 의미는 절대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측면에서 문묘에 배향되었다는 의미는 학문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 하면서 선비로서의 올바른 자질을 갖춘 성현의 반열에 올랐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말은 문묘에 뱅향된 18인의 삶도 당연히 성현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말이 될 수 도 있다. 하지만 과연 순수하게 선비로서의 자질을 갖춘이들이 문묘에 배향되어 있는가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갖게 하는 것이 배향된 18인(특히 조선시대 인물 14인)에 대한 역사적 시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우암 송시열이 효종에게 상소한 내용중 공자가 말하기를 "하늘은 사사로이 덮는 것이 없고, 땅은 사사로이 싣는 것이 없고, 일월은 사사로이 비추는 것이 없다" 라는 말은 바로 성리학을 요체로 하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공통된 관점을 대변하고 있다. 개인의 이익을 고려한 사사로운 감정을 뛰어 넘어 대의적인 관점을 지향해야 한다는 면에서  절대군주인 왕에게도 직언을 마다 하지 않고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논리를 펼쳐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타의 모범이 됨은 물론이고 선비 자신이 표방하는 성리학의 완결을 의미하는 것이였기에 조선이라는 절대군주국가가 그나마 제대로 흘러갈 수 있는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김굉필과 조광조를 비롯한 초기에 배향된 인물들의 삶을 통해서 투영된다. 조선초기 정국은 공신들의 사사로운 이권으로 얼룩지게 되고 이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 사림이 등장하면서 인,의,예에 기반을 둔 왕도정치를 표방하게 되고 이런 과정에서 초기 사림들의 희생이 이어지게 된다.  

이처럼 정암을 비롯한 초기 배향된 인물들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거의 없지만(물론 이도 사림이라는 계층들의 시각으로) 이후 배향된 인물에 대해서 과연 송시열의 상소문처럼 개인의 나아가 당파의 사사로움 없는 진솔된 정책과 학문을 펼쳐나갔는가에 대해서 상당히 의문스러운 점이 많음을 다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선조대에 이르러 동서인으로 양분되기 시작한 당쟁과 이후 노론의 집권으로 야기된 정치파행과정을 과연 공자의 가르침대로 따랐느냐에 대해선 논란이 분분한 것은 사실이다.  

전반적인 구성면에서 역사적으로 신선한 소재를 다루고 있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실록의 상소문이나 문집의 인용부분이 너무 많고, 논란의 쟁점이 있는 역사적 사건(광해군,소현세자,효종,현종의 죽음, 송시열의 북벌정책등)에 대한 작가의 역사관점이 다소 편향된 느낌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다만 최치원과 설총등 상고시대 학자들과 고려시대 인물들에 대해서 재조명되었다는 점이 소득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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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박물관 2 민음사 모던 클래식 28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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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토랑의 양은수저, 소금통, 립스틱,귀걸이,메뉴판, 아이스크림 콘,머리빗,영화 입장권,영화 전단지와 사진들,연인이 마셨던 사이다 빈 병,퓌순의 손목시계,괘종시계,그녀의 손수건,톰발라 놀이 세트,기도용 달력,골무,단추,실패,냉장고,뜨개질 도구,성냥갑(퓌순의 손길이 닿았던),퓌순의 담배 꽁초(무려 4231개),슬리퍼,커피 잔,머리핀,퓌순의 수영복(이것은 어떻게 수집했는지 모르지만),그녀와 처음 사랑을 나눈 침대 매트리스, 심지어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간 장본인 56년형 시보레 자동차의 잔해물들... 이는 터키 이스탄불의 추크르주마에 있는 사랑하는 여인의 집을 개조하여 올 하반기에 오픈할 예정인 <순수박물관>속에 전시될 목록중의 극히 일부분이다.  

포탈 싸이트에서 박물관[, museum]을 검색하면 다음과 같이 친절한 정의를 소개한다. 박물관이란 "역사·예술·민속·산업·과학 등 고고학자료·미술품, 기타 인문·자연에 관한 학술적 자료를 수집·보관·진열하여 교육적 배려하에 일반 민중의 전람에 이바지 하고, 또 그들의 자료에 대하여 조사 연구하는 시설"이라고 아주 간단 명료하게 정의 되어져 있다. 우리는 국립중앙박물관,전통문화박물관,철도박물관,자동차박물관,도자기박물관,김치박물관등 다양한 테마를 가지고 있는 박물관들을 한 두번쯤을 다녀 왔다. 그리고 박물관의 정의대로 교육적이고 학술적인 가치를 바라보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타인들과 더불어 앞선 시대를 살아갔던 이들에게서 작게 느껴지만 공감을 형성할 수 있는 전시물을 한두가지 기억 할려고 한다. 또한 박물관은 지난시대의 공통된 기억을 엿 볼 수 있는 지금의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단지 박물관이 지니고 있는 공통된 기억은 개인적인 기억 보다는 오히려 극히 공적인 기억에 더 근접 한다고 해야 겠다. 

하지만 작가는 박물관을 다음과 같이 정의 하고 있다. 1) 돌아다니는 곳이 아니라 느끼고 경험하는 곳이다 2) '느끼게 될 것'의 영혼을 형성하는 것은 수집품이다. 3) 수집품이 없는 곳은 박물관이 아니라 전시관이다. 

이런 면에서 파묵의 <순수박물관>은 기존의 박물관이 정의하는 개념과는 사뭇 다른 공식적인 기억이 아닌 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은밀한 기억을 담고 있다. 44일 동안 사랑을 나누었고 339일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매였으며, 2864일 동안 그녀를 바라본 남자의 30년에 걸친 지고지순하면서 강렬한 사랑과 그에 대한 집착에 대한 모든 기억이 순수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수집품에 묻어 있기 때문이다. 이 순수박물관에 하나둘씩 수집된 물건들의 추억은 케말과 퓌순의 짧지만 긴 사랑에 관한 기억들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1975년부터의 터키 이스탄불의 부유층을 비롯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공유했던 온갖 기억들이 온통 다 머물러 있다. 특히 작품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에 대한 정의를 언급하면서 밝혔듯이 순간과 순간들을 하나의 선으로 잇는 것이 바로 작중 주인공이자 작가의 현신인 케말이 퓌순과 관련된 물건 하나 하나를 수집하면서 그녀와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믿음이고, 자신의 박물관은 순간 순간을 간직하고 있는 물건들을 결합시켜 결국 하나의 시간이라는 개념의 틀 속으로 의미를 부여해 버렸다.  

영원하면서도 고갈되지 않는 사랑을 소재로 많은 작가들이 작품을 내놓고 있고 우리는 많은 사랑 이야기를 알고 있다. 인간은 어찌 보면 이렇듯 진부하다시피한 사랑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으면서도 또 다른 사랑 이야기에 몰두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종교적인 열정 보다 살아있는 우리의 이야기를 볼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인 동시에 너무나 모르는 이야기가 사랑이다. 파묵은 순수박물관을 통해서 색다른 사랑이야기를 담아 내고 있다. 어찌보면 사랑하는 연인과 관련된 물건들을 슬쩍(?)하여 수집하는 행위를 다소 편집증적인 광기나 집착으로 볼 수 도 있지만 사랑을 해본 독자들이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광경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 사람이 간직하고 있는 물건을 소유하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그 사람과 같은 시간과 공간에 있다는 혹은 있었다는 행복한 나르시즘에 빠져 본 기억들이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사랑하는 사람의 물건을 몰래 입수했다는 자책감으로 인한 부끄러움을 파묵을 순수박물관을 통해서 아주 소중한 기억의 보고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고통을 동시에 담고 있는 수집품들을 통해서 그동안 잊혀졌던 그리고 잊혀지기를 강요 당했던 기억들을 맞주 하게 하였다. 

지금처럼 디지털 혁명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디지털카메라,mp3,동영상등을 비롯한 파일형식을 빌려서 우리의 인생을 기억코자 한다. 이를 라이프 로깅이라고 한다면 파묵의 <순수박물관>은 시각적, 촉각적, 후각적인 면에서 살아 있는 실체를 기억하게 하는 진정한 라이프 로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 본다. 또한 마치 작가 자신과는 전혀 관련 없는 내러티브를 풀어가면서 왠지 모르게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강한 뉘양스를 주는 것과 동시에 설마 아니겠지라는 독자들의 실날같은 바램 사이를 정말 교묘하게 줄타기 하면서 정말 '끝까지 가게"하는 작품이다. 특히 69장 <때로>의 내용에서 그야말로 오르한 파묵의 필력을 유감 없이 엿 볼 수 있는 즐거움이 숨어져 있다. 그리고 다양한 수집품들에 대한 세세한 설명과 더불어 그 순간 순간에 벌어졌던 등장 인물들의 다양하고 특히한 감정의 미세한 변화까지 담아 내고 있는 구성 자체가 다소 지루하게 이어져 나갈 것 만 같지만 하나 하나 엮어 보면 절로 수긍이 가게 끔 하는 작가의 화술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순수박물관>은 한 남자의 사랑에 대한 기억과 고통 그로 인한 행복을 담고 있다. 하지만 한 개인의 기억이 아닌 터키 이스탄불을 매개로 하는 지난 30년간의 모든 기억과 추억들이 담겨 있는 독특한 구조의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어가면서 어떤 이는 지고지순한 한 남자의 사랑에 감명 받아 눈물을 흘릴 것이고 어떤 이는 터키의 역사와 경제 그리고 사회 문화의 변화상을 보면서 보다 더 거시적인 측면을 볼 것이고, 또 다른 이는 소설속에 나오는 다양한 물건들의 이름과 그 쓰임새에도 주목할 것이다. 정말 책의 제목 처럼 세상 온갖 모든 것이 다 담겨져 있는 박물관 같다는 생각이 들고 아마도 마지막 페이지를 덥고 나서야 소설의 전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또 다른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 마치 박물관을 아무런 목적 의식 관람하고 박물관 나와서 나와 타인의 기억이 소통될 때 느끼는 다소의 안도감이나 일종의 희열 같은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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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박물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7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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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토랑의 양은수저, 소금통, 립스틱,귀걸이,메뉴판, 아이스크림 콘,머리빗,영화 입장권,영화 전단지와 사진들,연인이 마셨던 사이다 빈 병,퓌순의 손목시계,괘종시계,그녀의 손수건,톰발라 놀이 세트,기도용 달력,골무,단추,실패,냉장고,뜨개질 도구,성냥갑(퓌순의 손길이 닿았던),퓌순의 담배 꽁초(무려 4231개),슬리퍼,커피 잔,머리핀,퓌순의 수영복(이것은 어떻게 수집했는지 모르지만),그녀와 처음 사랑을 나눈 침대 매트리스, 심지어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간 장본인 56년형 시보레 자동차의 잔해물들... 이는 터키 이스탄불의 추크르주마에 있는 사랑하는 여인의 집을 개조하여 올 하반기에 오픈할 예정인 <순수박물관>속에 전시될 목록중의 극히 일부분이다.   

포탈 싸이트에서 박물관[, museum]을 검색하면 다음과 같이 친절한 정의를 소개한다. 박물관이란 "역사·예술·민속·산업·과학 등 고고학자료·미술품, 기타 인문·자연에 관한 학술적 자료를 수집·보관·진열하여 교육적 배려하에 일반 민중의 전람에 이바지 하고, 또 그들의 자료에 대하여 조사 연구하는 시설"이라고 아주 간단 명료하게 정의 되어져 있다. 우리는 국립중앙박물관,전통문화박물관,철도박물관,자동차박물관,도자기박물관,김치박물관등 다양한 테마를 가지고 있는 박물관들을 한 두번쯤을 다녀 왔다. 그리고 박물관의 정의대로 교육적이고 학술적인 가치를 바라보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타인들과 더불어 앞선 시대를 살아갔던 이들에게서 작게 느껴지만 공감을 형성할 수 있는 전시물을 한두가지 기억 할려고 한다. 또한 박물관은 지난시대의 공통된 기억을 엿 볼 수 있는 지금의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단지 박물관이 지니고 있는 공통된 기억은 개인적인 기억 보다는 오히려 극히 공적인 기억에 더 근접 한다고 해야 겠다. 

하지만 작가는 박물관을 다음과 같이 정의 하고 있다. 1) 돌아다니는 곳이 아니라 느끼고 경험하는 곳이다 2) '느끼게 될 것'의 영혼을 형성하는 것은 수집품이다. 3) 수집품이 없는 곳은 박물관이 아니라 전시관이다. 

이런 면에서 파묵의 <순수박물관>은 기존의 박물관이 정의하는 개념과는 사뭇 다른 공식적인 기억이 아닌 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은밀한 기억을 담고 있다. 44일 동안 사랑을 나누었고 339일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매였으며, 2864일 동안 그녀를 바라본 남자의 30년에 걸친 지고지순하면서 강렬한 사랑과 그에 대한 집착에 대한 모든 기억이 순수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수집품에 묻어 있기 때문이다. 이 순수박물관에 하나둘씩 수집된 물건들의 추억은 케말과 퓌순의 짧지만 긴 사랑에 관한 기억들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1975년부터의 터키 이스탄불의 부유층을 비롯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공유했던 온갖 기억들이 온통 다 머물러 있다. 특히 작품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에 대한 정의를 언급하면서 밝혔듯이 순간과 순간들을 하나의 선으로 잇는 것이 바로 작중 주인공이자 작가의 현신인 케말이 퓌순과 관련된 물건 하나 하나를 수집하면서 그녀와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믿음이고, 자신의 박물관은 순간 순간을 간직하고 있는 물건들을 결합시켜 결국 하나의 시간이라는 개념의 틀 속으로 의미를 부여해 버렸다.  

영원하면서도 고갈되지 않는 사랑을 소재로 많은 작가들이 작품을 내놓고 있고 우리는 많은 사랑 이야기를 알고 있다. 인간은 어찌 보면 이렇듯 진부하다시피한 사랑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으면서도 또 다른 사랑 이야기에 몰두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종교적인 열정 보다 살아있는 우리의 이야기를 볼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인 동시에 너무나 모르는 이야기가 사랑이다. 파묵은 순수박물관을 통해서 색다른 사랑이야기를 담아 내고 있다. 어찌보면 사랑하는 연인과 관련된 물건들을 슬쩍(?)하여 수집하는 행위를 다소 편집증적인 광기나 집착으로 볼 수 도 있지만 사랑을 해본 독자들이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광경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 사람이 간직하고 있는 물건을 소유하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그 사람과 같은 시간과 공간에 있다는 혹은 있었다는 행복한 나르시즘에 빠져 본 기억들이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사랑하는 사람의 물건을 몰래 입수했다는 자책감으로 인한 부끄러움을 파묵을 순수박물관을 통해서 아주 소중한 기억의 보고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고통을 동시에 담고 있는 수집품들을 통해서 그동안 잊혀졌던 그리고 잊혀지기를 강요 당했던 기억들을 맞주 하게 하였다. 

지금처럼 디지털 혁명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디지털카메라,mp3,동영상등을 비롯한 파일형식을 빌려서 우리의 인생을 기억코자 한다. 이를 라이프 로깅이라고 한다면 파묵의 <순수박물관>은 시각적, 촉각적, 후각적인 면에서 살아 있는 실체를 기억하게 하는 진정한 라이프 로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 본다. 또한 마치 작가 자신과는 전혀 관련 없는 내러티브를 풀어가면서 왠지 모르게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강한 뉘양스를 주는 것과 동시에 설마 아니겠지라는 독자들의 실날같은 바램 사이를 정말 교묘하게 줄타기 하면서 정말 '끝까지 가게"하는 작품이다. 특히 69장 <때로>의 내용에서 그야말로 오르한 파묵의 필력을 유감 없이 엿 볼 수 있는 즐거움이 숨어져 있다. 그리고 다양한 수집품들에 대한 세세한 설명과 더불어 그 순간 순간에 벌어졌던 등장 인물들의 다양하고 특히한 감정의 미세한 변화까지 담아 내고 있는 구성 자체가 다소 지루하게 이어져 나갈 것 만 같지만 하나 하나 엮어 보면 절로 수긍이 가게 끔 하는 작가의 화술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순수박물관>은 한 남자의 사랑에 대한 기억과 고통 그로 인한 행복을 담고 있다. 하지만 한 개인의 기억이 아닌 터키 이스탄불을 매개로 하는 지난 30년간의 모든 기억과 추억들이 담겨 있는 독특한 구조의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어가면서 어떤 이는 지고지순한 한 남자의 사랑에 감명 받아 눈물을 흘릴 것이고 어떤 이는 터키의 역사와 경제 그리고 사회 문화의 변화상을 보면서 보다 더 거시적인 측면을 볼 것이고, 또 다른 이는 소설속에 나오는 다양한 물건들의 이름과 그 쓰임새에도 주목할 것이다. 정말 책의 제목 처럼 세상 온갖 모든 것이 다 담겨져 있는 박물관 같다는 생각이 들고 아마도 마지막 페이지를 덥고 나서야 소설의 전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또 다른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 마치 박물관을 아무런 목적 의식 관람하고 박물관 나와서 나와 타인의 기억이 소통될 때 느끼는 다소의 안도감이나 일종의 희열 같은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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