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박물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7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레스토랑의 양은수저, 소금통, 립스틱,귀걸이,메뉴판, 아이스크림 콘,머리빗,영화 입장권,영화 전단지와 사진들,연인이 마셨던 사이다 빈 병,퓌순의 손목시계,괘종시계,그녀의 손수건,톰발라 놀이 세트,기도용 달력,골무,단추,실패,냉장고,뜨개질 도구,성냥갑(퓌순의 손길이 닿았던),퓌순의 담배 꽁초(무려 4231개),슬리퍼,커피 잔,머리핀,퓌순의 수영복(이것은 어떻게 수집했는지 모르지만),그녀와 처음 사랑을 나눈 침대 매트리스, 심지어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간 장본인 56년형 시보레 자동차의 잔해물들... 이는 터키 이스탄불의 추크르주마에 있는 사랑하는 여인의 집을 개조하여 올 하반기에 오픈할 예정인 <순수박물관>속에 전시될 목록중의 극히 일부분이다.   

포탈 싸이트에서 박물관[, museum]을 검색하면 다음과 같이 친절한 정의를 소개한다. 박물관이란 "역사·예술·민속·산업·과학 등 고고학자료·미술품, 기타 인문·자연에 관한 학술적 자료를 수집·보관·진열하여 교육적 배려하에 일반 민중의 전람에 이바지 하고, 또 그들의 자료에 대하여 조사 연구하는 시설"이라고 아주 간단 명료하게 정의 되어져 있다. 우리는 국립중앙박물관,전통문화박물관,철도박물관,자동차박물관,도자기박물관,김치박물관등 다양한 테마를 가지고 있는 박물관들을 한 두번쯤을 다녀 왔다. 그리고 박물관의 정의대로 교육적이고 학술적인 가치를 바라보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타인들과 더불어 앞선 시대를 살아갔던 이들에게서 작게 느껴지만 공감을 형성할 수 있는 전시물을 한두가지 기억 할려고 한다. 또한 박물관은 지난시대의 공통된 기억을 엿 볼 수 있는 지금의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단지 박물관이 지니고 있는 공통된 기억은 개인적인 기억 보다는 오히려 극히 공적인 기억에 더 근접 한다고 해야 겠다. 

하지만 작가는 박물관을 다음과 같이 정의 하고 있다. 1) 돌아다니는 곳이 아니라 느끼고 경험하는 곳이다 2) '느끼게 될 것'의 영혼을 형성하는 것은 수집품이다. 3) 수집품이 없는 곳은 박물관이 아니라 전시관이다. 

이런 면에서 파묵의 <순수박물관>은 기존의 박물관이 정의하는 개념과는 사뭇 다른 공식적인 기억이 아닌 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은밀한 기억을 담고 있다. 44일 동안 사랑을 나누었고 339일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매였으며, 2864일 동안 그녀를 바라본 남자의 30년에 걸친 지고지순하면서 강렬한 사랑과 그에 대한 집착에 대한 모든 기억이 순수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수집품에 묻어 있기 때문이다. 이 순수박물관에 하나둘씩 수집된 물건들의 추억은 케말과 퓌순의 짧지만 긴 사랑에 관한 기억들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1975년부터의 터키 이스탄불의 부유층을 비롯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공유했던 온갖 기억들이 온통 다 머물러 있다. 특히 작품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에 대한 정의를 언급하면서 밝혔듯이 순간과 순간들을 하나의 선으로 잇는 것이 바로 작중 주인공이자 작가의 현신인 케말이 퓌순과 관련된 물건 하나 하나를 수집하면서 그녀와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믿음이고, 자신의 박물관은 순간 순간을 간직하고 있는 물건들을 결합시켜 결국 하나의 시간이라는 개념의 틀 속으로 의미를 부여해 버렸다.  

영원하면서도 고갈되지 않는 사랑을 소재로 많은 작가들이 작품을 내놓고 있고 우리는 많은 사랑 이야기를 알고 있다. 인간은 어찌 보면 이렇듯 진부하다시피한 사랑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으면서도 또 다른 사랑 이야기에 몰두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종교적인 열정 보다 살아있는 우리의 이야기를 볼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인 동시에 너무나 모르는 이야기가 사랑이다. 파묵은 순수박물관을 통해서 색다른 사랑이야기를 담아 내고 있다. 어찌보면 사랑하는 연인과 관련된 물건들을 슬쩍(?)하여 수집하는 행위를 다소 편집증적인 광기나 집착으로 볼 수 도 있지만 사랑을 해본 독자들이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광경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 사람이 간직하고 있는 물건을 소유하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그 사람과 같은 시간과 공간에 있다는 혹은 있었다는 행복한 나르시즘에 빠져 본 기억들이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사랑하는 사람의 물건을 몰래 입수했다는 자책감으로 인한 부끄러움을 파묵을 순수박물관을 통해서 아주 소중한 기억의 보고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고통을 동시에 담고 있는 수집품들을 통해서 그동안 잊혀졌던 그리고 잊혀지기를 강요 당했던 기억들을 맞주 하게 하였다. 

지금처럼 디지털 혁명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디지털카메라,mp3,동영상등을 비롯한 파일형식을 빌려서 우리의 인생을 기억코자 한다. 이를 라이프 로깅이라고 한다면 파묵의 <순수박물관>은 시각적, 촉각적, 후각적인 면에서 살아 있는 실체를 기억하게 하는 진정한 라이프 로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 본다. 또한 마치 작가 자신과는 전혀 관련 없는 내러티브를 풀어가면서 왠지 모르게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강한 뉘양스를 주는 것과 동시에 설마 아니겠지라는 독자들의 실날같은 바램 사이를 정말 교묘하게 줄타기 하면서 정말 '끝까지 가게"하는 작품이다. 특히 69장 <때로>의 내용에서 그야말로 오르한 파묵의 필력을 유감 없이 엿 볼 수 있는 즐거움이 숨어져 있다. 그리고 다양한 수집품들에 대한 세세한 설명과 더불어 그 순간 순간에 벌어졌던 등장 인물들의 다양하고 특히한 감정의 미세한 변화까지 담아 내고 있는 구성 자체가 다소 지루하게 이어져 나갈 것 만 같지만 하나 하나 엮어 보면 절로 수긍이 가게 끔 하는 작가의 화술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순수박물관>은 한 남자의 사랑에 대한 기억과 고통 그로 인한 행복을 담고 있다. 하지만 한 개인의 기억이 아닌 터키 이스탄불을 매개로 하는 지난 30년간의 모든 기억과 추억들이 담겨 있는 독특한 구조의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어가면서 어떤 이는 지고지순한 한 남자의 사랑에 감명 받아 눈물을 흘릴 것이고 어떤 이는 터키의 역사와 경제 그리고 사회 문화의 변화상을 보면서 보다 더 거시적인 측면을 볼 것이고, 또 다른 이는 소설속에 나오는 다양한 물건들의 이름과 그 쓰임새에도 주목할 것이다. 정말 책의 제목 처럼 세상 온갖 모든 것이 다 담겨져 있는 박물관 같다는 생각이 들고 아마도 마지막 페이지를 덥고 나서야 소설의 전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또 다른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 마치 박물관을 아무런 목적 의식 관람하고 박물관 나와서 나와 타인의 기억이 소통될 때 느끼는 다소의 안도감이나 일종의 희열 같은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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