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에게 고한다 세트 - 전5권 (일반판)
데즈카 오사무 글 그림, 장성주 옮김 / 세미콜론 / 2009년 9월
절판


인류 역사를 한시간에 비유하면 5분동안 평화로왔고 나머지 55분은 전쟁속에 지냈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전쟁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는 동일선상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그 어떠한 생명체 보다 동종을 멸종의 위기로 까지 몰고 가는 잔혹한 행위를 하는 종이 다름 아닌 우리 인간들이다. 그것도 정의라는 기치하에 정당화하는 행위는 우리말고 그 어떠한 생명체도 시도해본적이 없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인간만이 왜 이렇듯 상식밖의 행동을 서슴치 않은 것일까?

여기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우주소년 아톰의 아버지인 데즈카 오사무는 <아돌프에게 고한다>라는 작품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 해답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인간이라면 당연시 하는 가치 바로 다름아닌 정의라고. 인간이기 때문에 정의를 위해서 초개같이 목숨을 버릴수 있다는 궤변론적인 논리가 전쟁의 주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돌프에게 고한다>는 세계제2차대전을 배경으로 나치 독일의 총통인 아돌프 히틀러, 그리고 일본에서 살아가는 독일계 일본인 아돌프 카우프만, 그리고 유대계 독일인 아돌프 카밀이라는 각기 다르지만 이름이 같은 세명의 아돌프를 통해서 그들이 겪는 전쟁과 삶을 조명하고 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시작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파시즘의 원조격인 히틀러가 다름아닌 유대혈통이라는 픽션하에 출발한다. 히틀러 출생의 비밀이 담긴 문서를 되찾고자하는 나치스와 그 비밀문서를 세상에 폭로하여 나치즘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양방의 묵숨을 건 사투와 그런 과정에서 서서히 정의라는 대의앞에 변해가는 주인공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너무나 잘 알듯이 당시의 세계는 파시즘과 나치즘 그리고 일본의 군국주의에 의해 세상은 일촉즉발의 위기속에 있었다. 그런와중에 한반도와 중국은 일본군국주의자들에 의해 식민지화 되었고 유럽은 이탈리아와 독일에 의해 숙대밭이 되었다. 결국 연합국에 패배 히틀러는 자살이라는 최후를 맞이하게 되지만 나머지 두명의 아돌프는 또다른 인생의 길을 걷게 된다. 유대인들의 염원이었던 독립국가가 설립되고 중동땅에서 이스라엘과 아랍연합간의 또다른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결국 유년시절 절친했던 두명의 아돌프는 중동의 사막에서 적으로 맞이하게 되고 서로 그렇게 죽어가게 된다.

이 작품의 특징은 바로 이러한 시기를 직접 몸소 겪었던 작가의 경험담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한민족에게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안겼던 일본인의 시각으로 전쟁을 바라보고 있지만 전쟁기간 동안 일본이 자행했던 각종 만행에 대해서 작가는 있는 그대로는 보여주고 있다. 특히 전쟁기간 동안 민간인들의 삶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전쟁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동시에 국가의 정의라는 힘 앞에선 어김없이 복종하고 순종할 수 밖에 없는 가련한 인간의 모습을 담으면서 과연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전쟁이라는 자체가 절대다수의 기본권과 행복을 배제하여야만 가능한 행위임을 일본인들이나 유대인들의 삶을 통해서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전쟁을 다룬 많은 작품들을 접해왔다. 영화나 소설등을 통해서 전쟁이 가져다 주는 잔혹함과 비참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의 전쟁은 이땅에서 살아져야 한다고 되뇌이고 있지만 지금도 세계 곳곳에는 정의라는 미명하에 버저이 전쟁이 수행되고 있다. 나치에 의해 인종말살이라는 곤역을 겪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왕국을 위해서 또 다른 어쩌면 나치보다 더한 잔혹행위를 자행하고 있고 세계평화의 걸림돌이라 명명된 악의 축을 이루는 몇몇의 국가는 난데없는 전쟁속으로 휘말리는 상황에 쳐해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인 것이다.


과연 이러한 전쟁의 정당성은 그 어디에 있는 것인가? 작가는 작품은 통해서 민족, 국가라는 개념을 떠나 전쟁의 진실은 정의의 왜곡된 실현에 있다는 메세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정의라고 명명된 집단의 신들림이 결국 정의라는 가면을 쓰고 같은 종에 가해지는 행태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한국전쟁이라는 동족간의 전쟁을 치른 민족이다. 그 정의때문에 동족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분단이라는 길로 들어선지 반세기도 훌쩍 지나버렸지 않는가.

물론 이러한 전쟁이 몇몇 골수분자들에 의해 그 단초가 제공되는 것이지만 결국 대다수의 인민들 역시 정의라는 개념하에 철저하게 전쟁에 가담하게 된다는 것을 작가는 보여주고 있다. 결국 전쟁의 우리 모두의 책임인 것이다. 젊은나이에 독일 나치의 친위대로 수많은 유대인을 살해했던 아돌프 카우프만의 "온세상의 아이들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살인을 배우면 언제가 세상 모든 인간들이 전멸하고 말거야"라는 독백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너무 태연하게 정의라는 단어를 잘도 갔다 붙이곤 한다. 몇 십년전 이땅에 정의사회구현이라는 명목하에 수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았듯이 정의는 어찌보면 아주 위험한 단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의는 결국 모든 인류가 품고 가야하는 대의인 것이다. 단지 우리가 그 사용방법을 곡해하거나 오인하고 있을 뿐 정의는 항상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많은 작품들이 전쟁의 잔혹함과 비참함을 통해 경개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이번 <아돌프에 고한다>는 비록 만화의 형식을 통하고 있지만 상당히 수준 깊은 철학서라고 해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독자들로 하여금 전쟁과 정의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사고를 갖게 하는 책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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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꽃 1 - 2009년 제25회 펜문학상 수상작
유익서 지음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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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춘춘시대 전국을 주유하면서 온갖 박해와 비웃음을 사면서도 그 행보를 멈추지 않는 것은 다름아닌 주나라때의 올바른 정치를 재현코져, 특히 禮를 근본으로 하는 정치를 설파하고자 하였다. 물론 당시의 세인들은 이러한 공자의 시도를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생각이라고 폄하 하였다. 결국 맹자에 이어 한나라때에 이르러 공자의 생각은 빛을 보게 되었다. 공자가 주창한 예에는 음악 또한 포함되어있다. 특히 조선의 성군 세종의 경우 궁중음악인 아악을 새로이 정립하면서 중국의 음악이 아닌 조선의 음악을 갖고저 부단히 노력을 하였다. 이는 음악이란 본디 특정나라 특정민족의 정신을 반영하여야 제대로 된 음악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예일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가 사고라는 형식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음악은 문자보다 더 먼저 이러한 사고와 감정의 표현 수단으로 사용되었고 지금도 그 역활을 해나가고 있다. 우리가 대중가요을 들어면서 음률과 그 노랫말을 무심코 흘려듣는것 같지만 그 노래가 전달 할려고 하는 감정들은 우리의 뇌리속에 자리잡게 된다. 달리 표현해서 노래는 바로 인간들이 삶을 대변하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소리꽃>은 한 歌人의 삶을 조명한 소설이다. 300여년만에 한적한 사찰의 석탑 밑에서 세상의 빛을 보게된 항아리와 그리고 가인의 일생을 요약한 목판을 통해서 진정한 자신만의 노래 그리고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노래를 찾아가는 기나긴 여정을 담고 있는 소설이다. 소설속 화자인 역사학자의 시각은 바로 작가의 시각이고 작가는 이러한 시선을 통해서 주인공 솔이의 삶을 그리고 있다. 녹색손님의 권유로 구곡산에서 가루라와 경주를 하고 음악의 신이 현현한 가릉빈가에게 인정받아 항아리를 손에 넣게 된지만 솔이의 고난의 역경은 바로 항아리에 소리를 담아야 하는 운명으로 결부된다. 그것도 여태까지 들을 수 없었던 새로운 노래만이 항아리에 담을 수 밖에 없다는 숙명으로 다가 온 것이다. 조선 중기 인조반정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 소설은 그동안 성리학에 철저히 길들여진 음율 다름아닌 조선의 것이 아닌 중국의 것을 모방한 음악일색이었다. 또한 이 음악은 바로 가진자 양반들의 사상을 대변할 뿐 절대다수인 대중의 삶은 그 어디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솔이 역시 저절로 있었도 노래가 절로 나올 정도로 노래에는 타고난 가인이었지만 그녀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노래 역시 전시대에 정형화된 노래였을 뿐이었다.  

판소리가 일반 평민문학을 대변하는 것은 다름아닌 일반민중의 삶과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지배계층의 고고한 기상이나 절개와는 다른 일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노래형식으로 달리 표현했을 뿐 판소리 자체가 사람들의 삶 그 자체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 내용은 구구절절히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이는 것이다. 솔이가 새로운 노래를 찾아 길을 나서 겪게 되는 과정이 바로 교방한켠과 같은 작고 죽어 있는 공간에서 볼 수 있는 세상이 아닌 현실 그 자체 살아있는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한다. 몰락한 양반으로 저자거리에서 이야기를 팔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전기수 대우, 반정성공으로 전도양양한 앞길이 보장되었지만 모든 부귀영화를 뿌리치고 진경을 그리고져 노력한 고강, 불우한 출생을 겪고 어머니를 찾아서 남사당패에 들어간 어름사니 도일, 소작농으로 어렵게 자신의 논을 장만하였으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최개동 통해서 사장된 음악이 아닌 일반대중속에 살아있는 삶을 그대로 표현한 노래를 찾아가는 여정은 눈물겨울 정도로 고난이 연속이다. 마치 평민문학인 판소리가 탄생하기 까지 그 얼마나 많은 질시와 힘겨움이 있었겠나 하는 추측을 반증하기로 하듯이...

전기수 대우에게서 전체적인 노래의 스토리 전개과정, 어름사리 도일의 몸짓에서 느리고 빠른 장단, 소작농 개동의 삶을 노래한 무녀 선이네의 간장을 녹이는 애틋함, 고강에서 눈에 보이는 현실을 바로 바라보는 눈에서 마침내 솔이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그야말로 파격적인 새로운 노래를 완성하게 된다. 솔이가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항아리는 바로 현실 그 자체인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현실을 외면하고 살 수 없듯이 노래 역시 현실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서양의 클래식과 팝에 익숙한 지금의 우리에게 새삼 우리의 가락 우리의 노래 판소리는 너무나 멀리 비현실적인 존재로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명절때처럼 특별한 날이 아니면 듣기조차 힘든 노래가 판소리이다. 흥부가, 심청가등 대표적인 판소리를 우리는 단지 권선징악이라는 유교적인 교훈이 담긴 계도적인 형태로 인식하고 있지만 판소리에는 바로 그 시대를 살아갔던 일반 대중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어떠한 새련미나 포장도 없이 그냥 그대로 사람들이 느꼈던 희노애락이 담겨져 있고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고 있다. 소설속 승종이 솔이의 노래를 듣고 노래가 너무 길어서 어찌 이해가 되겠냐고 반문했듯이 판소리는 이러한 삶을 담고 있기 때문에 길 수 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판소리보다 진한 감동과 현실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 만큼 판소리는 노래가 아닌 일반 대중의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제는 식민통치기간 내내 판소리를 폄하하고 왜곡했던 것이다. 그 만큼 판소리를 노래가 아닌 대중의 사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도 판소리를 비롯한 우리 고유의 노래는 관심밖의 세상에 자리잡고 있다.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우리 고유 의식 박탈은 음악이라는 장르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한번 쯤은 우리 고유 노래를 음미해 볼 여유를 가져야 할 때는 아닌가 싶다. <소리꽃>는 그야말로 노래가 꽃으로 승화한 소설이다. 동살, 돋을볕, 씨아, 생청스러운, 기직자리는 노래처럼 그리고 화사한 봄날에 예쁘게 활짝핀 꽃처럼 아름답지만 여태까지 제대로 모르고 있는 우리말들을 만나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솔이가 항아리에 노래를 담듯이 작가는 소설속에 우리의 혼을 담고 있다. 마치 우리 소리의 한을 작가는 독자들 마음속에 자리한 항아리에 담고 싶어 하는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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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복수 1 - 인간 사냥
크리스티앙 자크 지음, 이상해 옮김 / 자음과모음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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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라는 기대를 이번에도 크리스티앙 자크는 저버리지 않은 것 같다. <람세스>,<오시리스의 신비>,<투탕카몬>으로 이미 크리스티앙은 이집트 신화와 문명의 전문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이면서 현대 서양문명의 근원인 그리스로마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고대 이집트의 문명은 그 신비로운 만큼이나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는 미지의 세계이다. 역사와 신화가 뒤섞여 마치 어디서부터 역사이고 어디서 부터 신화인지 분간하기 힘든 문명이 다름 아닌 고대 이집트이다. 우리는 그의 전작에서 이집트의 새로운 세계에 매혹되었다. 필자의 이집트에 대한 애착은 신화와 신비라는 베일을 하나씩 풀어가면서 독자들의 눈과 귀를 매혹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전 작품이 이집트 고왕국시대를 다루었다면 이번 작품은 BC528년전 이집트 제26왕조시대 페르시아의 캄비세스에 의해 신성의 땅이 짓밟히는 시대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의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이집트는 그야 말로 신들의 나라이다. 아몬과 오시리스를 대표하는 신들의 영광을 지상의 지배자인 파라오가 신들의 힘을 빌려 지배하는 나라였다. 백성들은 파라오를 신이 현현한 존재로 파악했고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인식했다. 이런 신들의 나라에서 신들이 서서히 인간들에 의해 그 존재의 가치를 잃어가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 <신들의 복수>는 크리스티앙 특유의 필치를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일개 장군에서 파라오에 등극한 아마시스는 그동안 이집트가 추진했던 신정 정치에 일대 개혁을 가한다. 비록 외세인 그리스용병의 힘을 빌어 신관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신정분리를 도모하면서 페르시아와 화해무드를 조성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왕비까지 그리스 출신의 타니트로 정함으로써 자신의 굳은 의지를 만천하에 공표하고 자신만의 왕권강화에 주력한다. 이미 수도를 멤피스에서 그리스와 가까운 사이스로 이전하여 신들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차단하면서 자신만의 새로운 이집트를 만들어 간다.(기존 이집트의 시각으로 봤을때 그리스는 신들을 배척한 타락한 문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시스의 이러한 개혁은 사역원 독살사건을 계기로 서서히 보이지 않는 저항을 받게 된다. 주인공 필사생 켈 그리고 그의 여인인 여신관 니티스, 켈이 죽마고우 베봉은 역모라는 누명을 쓰고 파피루스의 암호문을 풀기위해 테베의 태양의 신녀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이들을 뒤쫒는 젬판관과 정보국장 하네트 그리고 이들에게 누명을 덮어쉬운 음모자들.

<신들의 복수>는 페르시아에 의해 점령 당했던 제26왕조의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왜 신들의 나라가 어이없이 인간들의 나라에 지배를 당했는가를 다른 각도에서 풀어간다. 역사적 실존인물들의 등장과 가공의 인물들의 적절한 배합은 팩트와 픽션이라는 구도를독자들로 하여금 혼란케 한다. 또한 그의 전작인 <람세스>에서 모세와 트로이전쟁 영웅들의 카메오같은 등장으로 즐거움을 주었듯이 이번에 피타고라스를 등장시켜 또다른 희열을 제공한다. 피타고라스는 철학자이면서도 신비주의자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신비주의는 이집트 신화에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소설을 읽는 색다른 즐거움과 개연성을 갖게 한다.

소설의 즐거움은 역시 반전에 있을 것이다. 켈을 비롯한 주인공들이 고난을 이겨 내고 마침내 암호문을 해석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음모자의 비밀이 밝혀지고 이집트 미래를 위해 누비아마을에서 만나게 되는 낮익은 인물을 통해서 대반전을 야기한다. 항상 등잔 밑이 어둡다고 적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기 마련이다. 음모자의 정체가 밝혀지기 까지 독자들은 젬판관의 여러가지 추측으로 켈의 죽마고우인 베봉을 머리속에서 지울 수 없지만 필자는 새로운 결과를 보여준다.
 

대체적으로 이번 소설 역시 이집트 신화와 문명을 좀더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로 넘쳐 난다고 할 수 있다. 신에 대한 고대 이집트인 들의 갈망과 숭배 그리고 신화를 현세에 받아 들이면서 살아가는 모습들에서 살아있는 생생한 느낌을 받게 된다. 거기에다 이번 소설은 왠지 또 다른 이야기가 전개 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한다.(또다른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 같은) 마치 이대로 이야기가 끝난다면 너무나 아쉽고 허망하다는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 것 처럼. 이 또한 크리스티앙의 또다른 매력이지 않을까 싶다 나머지 이집트의 재건이야기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둔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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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 사이드의 남자 2
칼렙 카 지음, 이은정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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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우리에게 잘알려져 있는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최우수 언론인에 수여되는 '퓰리처상'을 만든 장본인 조지프 퓰리처, 전세계 금융가의 대부인 J.P. 모건, 뉴욕 마피아계의 대부 폴 켈리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인물들이 사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실존인물들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인 19세말 뉴욕 경찰청장을 역임하면서 희대의 살인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일종의 팩션을 가미한 스릴러 소설으로 볼 수 도 있지만 19세기말 미국 뉴욕의 시대상을 반영해 주는 역사소설 겸 사회고발소설의 역활도 동시에 하고 있는 작품이다. 경찰청장과 하버드대학 동기인 가상의 인물인 타임스지 기자 존 무어와 법의학자 클라이즐러가 루스벨트의 장례식장에서 해후하여 지난 25년전 뉴욕을 강타한 희대의 살인마 존 비첨의 살인행각을 추척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이 소설은 사이코패스인 살인자을 통해서 단순한 엽기적인 살인행각을 그리는 소설은 아니다. 살인자가 사이코패스로 돌변하게 되는 여러가지 원인들을 제시하고 그 원인제공이 개인적인 차원과 사회적인 차원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대변한다.

극중 주인공인 클라이즐러박사의 견해로는 인간은 유녀시절의 강력한 메세지로 인해 그 인생이 결정되는 것이지 탄생에서부터 그 선악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유년시설 부모로부터의 학대나 외면과 육체적인 경험등을 통해 피폐해진 사고는 결국 육체적인 어른으로 성장은 하였으나 그 정신세계는 유년시절의 고통으로 해방되지 못하고 또 다른 분출구를 찾아 해매게 된다. 그 분출구가 급기야 살인이라는 극단의 표현으로 표출된다는 것이 우리 주인공의 논지이다.  

소설이 이런 희대의 살인마를 추척하는 수사팀의 수사과정에서 발생하는 외부의 압력(대표적으로 대주교와 J.P.모건등의 가진자)과 수사팀 구성원들간의 이견을 거치면서 최종적인 살인범 검거에 이르게 된다. 어찌 보면 전형적인 스릴러 소설로 치부될 수 밖에는 없는 구도이다. 

하지만 필자의 또 다른 의도는 다른곳에 있다. 신대륙의 발견과 그리고 미합중국이라는 신생국의 탄생과정에서 미국은 그야말로 기회의 땅이 되어버렸다. 물론 지금도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는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당시 19세기의 미국은 열광의 도가니를 방불케했다. 골드러쉬와 산업, 금융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하여 미개척 식민지였던 국가가 짧은 시간에 엄청난 발전을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발전의 이면에 정말 눈뜨고 볼 수 없는 피해가 많이 있다. 인디언들의 희생, 흑인노예들의 희생, 그리고 이민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뉴욕이라는 거대도시의 화려한 불빛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사회의 어두운면을 소설의 요소요소에 뿌려놓고 있다. 아니 어쩌면 존 비첨이라는 살인자와 그의 희생양인 된 매음굴의 어린소년들과 이들의 매개로 업을 삼고 있는 마피아들을 통해서 사회고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발전하는 사회에서 철저하게 소외당했던 이들을 통해서 정작 발전이란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을 대두시킨다. 그러면에서 보면

이 소설은 가슴 아픈 부분들이 많다. 지금의 잣대로 19세기말을 단정할 수는 없다. 그 당시만 해도 왠만한 유력집안에서는 하녀를 부리고 있던 시절이었고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던 시절임은 틀림없다. 그런 시절에 이들 소외계층의 문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반문할 수 도 있지만 결국 역사발전의 원동력은 희생이다라는 점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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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2 - 하 - 휘발유통과 성냥을 꿈꾼 소녀 밀레니엄 (아르테) 2
스티그 라르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아르테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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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국내에 밀레니엄이 소개될때 각종 미디어에서 인용한 문구가 "이 책을 절대 일요일저녁에 보지 말라 그러면 다음날 출근에 지장이 있을 것이다" 라는 말이 문득 떨올랐다. 하지만 그냥 무시하고 일요일 저녁부터 읽기 시작한 것 자체가 후회 스러웠다. 이틀을 정말 꼼작못하고 책읽기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 읽고 난 뒷끝은 잠을 제대로 못잤지만 정신이 맑고 시원한 느낌이 든 작품이다. 

스티그 라르손 스웨덴인이다. 노벨상으로 유명한 노벨의 나라 스웨덴, 그리고 <삐삐 롱스타킹>으로 일약 세계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한 린드그렌의 나라, 하지만 그외 스웨덴에 대한 지식은 전무한 편이지만 왠지 필자의 작품을 통해서 태어나서 한번도 가보질 못했던 스웬덴, 그리고 그 중심인 스톡홀롬을 손바닥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그만큼 필자의 작품에 매료되었다고 할까?
 

<밀레니엄>
은 잡지사 이름이자 발행하고 있는 잡지의 이름이기도 하다. 여타의 잡지사와는 상당히 진보적인 색체를 가지고 있는 구성원들로 구성된 잡지사로 우리의 주인공이자 린드그렌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인 슈퍼 블롬크비스트를 설정한 것 또한 필자의 의도된 인물 구성이지 않을까 또한 그 정체를 쉽사리 파악하기 힘든 아가씨인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마치 삐삐의 성장후 모습을 투영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성공한 영화나 소설의 후속편은 1편에 비해 그 감흥이 떨어진다라는 속설이 있지만 밀레니엄 2부는 그런 속설과는 거리가 있는 듯하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이 다를수는 있지만 1부에서 만끽한 서스팬스와 추리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반전이 그래도 이어지고 있다. 1부에서 미카엘에게 결정적인 힌트를 제공하고 수수께끼를 푸는데 지대한 역활한 리스베트의 숨겨진 또다른 개인사로 시작되는 2부의 이야기 전개 또한 정말 박진감 넘치면서 추리의 그 끝을 알 수 없게 만드는 묘미를 제공해 주고 있다.
 

전편이 금융그룹의 사기행각과 어느 대그룹의 가족사를 파헤친다면  이번은 리스베트의 출생에서 부터 시작한 사포라는 스웨덴 비밀정보기관의 엄청난 음모와 수사기관과의 숨막히는 정보싸움 그리고 그 정점에 다름 아닌 리스베트의 친부가 있다는 사실이 마지막 반전으로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다. 물론 3부로 이어지는 내용도 역시 예측하기 힘든 앤딩으로 인해서 더욱더 독자들의 시선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1부에 등장했던 미카엘의 연인인 에리카와 관계와 하이리트와의 관계, 다소 엉뚱하고 비정상적이다고 생각해던 리베스트의 신상을 자세히 비추면서 다시 1부의 여운을 남기고 있어 책장에 한번더 손을 가져가게 하는 점도 있다. 다소 국내의 독자들에겐 생소한 연인관계나 성개념, 자유분방한 성에 대한 사고방식들에 의해 의아해 하는 부분도 있지만 추리소설에서 빠질수 없는 부분이고 오히려 필자는 솔직하게 인간의 잠재적인 성에 대한 생각을 지면에 드러낸 것이다. 또한 필자는 르포르타주의 형식인 고발성을 가미해서 사회상을 풍자하고 있다. 1부에서 대그룹의 잘못된 가족사와 크게는 금융계의 비리를 폭로했다면 2부는 역시 한 여인의 비참한 개인사를 통해 인신매매, 매매춘과 폭력, 그리고 정보기관의 음모등을 필자의 분신인 블롬크비스트를 통해 사회에 고발하고 있는것이다. 
 

1부와 2부의 공통적인 맥락은 여성들을 혐오하는 이들에게 그 상대가 남성이든 여성이든간에 그에 대한 댓가를 호되게 지불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로 남성들이지만 비뚤어진 여성관에 대한 정말 철저한 응징이 이루어 지고 있는 점 또한 아마도 3부에서도 계속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면에서 극단과 중도를 오가는 페미니즘을 엿볼수 있는 또 다른 서비스를 필자는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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