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역사
레베카 솔닛 지음, 김정아 옮김 / 민음사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곳은 수심이 깊어 위험하오니 접근을 금합니다.’
    지난 여름 내가 이사한 곳은 건국대학교 근방이다. 더위의 정점에서 손 빌리지 않고 이사를 한 탓인지 첫날부터 열병에 시달렸다. 동백처럼 터진 열꽃을 핥으며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낸 것은 강아지 한 마리뿐이었다. 혼곤한 잠에서 깨어나면 베갯잇은 눈물과 땀으로 뒤범벅된 채 또다시 나를 끌어당겼다. 끊임없이 목이 말랐고 갈라진 입술 사이에는 피가 고였다. 나는 낯선 곳, 낯선 집에서 이물감과 외로움에 시달리며 더위와 열을 참아냈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눅신한 어둠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이틀 밤낮을 문단속도 하지 않은 채 박혀 있었다는 것을 깨닫자 뒤늦게 공포가 밀려 왔다. 습습한 공기가 필요했다.
 
    산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수심 20M의 경고 푯말이 곳곳에 서 있는 호수 주변을 걷는 일은 야릇한 환각을 일으켰다. 죽은 자들이 쉼 없이 내게 말을 걸어왔고 때로는 나 스스로 호수 안으로 발을 내딛기도 했다. 나는 호수 바닥에 편안히 누워 그들의 한숨이 기포로 떠오르는 것을 보기도 하고 더할 나위 없이 무료한 물고기들이 깃털 고르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별빛이 내리꽂혀 심장에 깊숙이 박히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그럴 때면 죽음은 내 살처럼 익숙하고 편안한 것이라는 안도감과 함께 휴식이 찾아왔다. 더불어 낯선 고장의 익명성이 주는 느슨함으로 인해 주변의 모든 것들이 오히려 살갑게 느껴졌다. 호루라기를 불며 지나가는 경비원 아저씨,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노파, 땀복으로 온몸을 가린 채 속보를 하는 뚱보 아주머니, 술에 절어 벤치에 널부러져 있는 청년도 어느 순간 나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하고 다가왔다. 나는 그들의 몸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숨 쉬며 그들의 목소리로 말을 하고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 그것은 신비롭고도 슬픈 정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더 이상 타인이 아니었다.

 
    걷기의 미학

    『걷기의 역사』는 이렇듯 사적인 걷기에서부터 출발하여 공적인 걷기의 역사를 밟아 나간다. 「서론」에서 레베카 솔닛은 걷기를 ‘몸의 역사’로 파악한다. ‘직립 보행의 역사이고 인체 해부의 역사’인 보편적인 행동에 특수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 ‘걷기의 역사는 상상력의 역사와 문화의 역사에 포함’되기 시작한다. 걸으면서 느끼는 기쁨과 숙고는 사람마다 다르고, 걷기에 부여하는 의미도 제각각이다. 바슐라르가 촛불을 보며 몽상의 세계를 구축했듯 어떤 사람은 걷는 행위를 통하여 사유와 성찰의 리듬을 발견하고, 또 다른 사람은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걷기를 이용하기도 한다. 레베카 솔닛은 금문교 북쪽에 있는 곶으로부터 태평양 쪽으로, 그곳에서 다시 산기슭으로 이어지는 길들을 걸으며 500페이지에 달하는 『걷기의 역사』를 탐사한다.
 
    솔닛이 최초로 탐사한 곳은 사유로서의 걷기이다. “나는 걸을 때만 명상에 잠길 수 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나의 마음은 언제나 나의 다리와 함께 작동한다.”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론』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하는, 「마음은 한 시간에 3마일을 걷는다」에서, 그는 걷기가 문화적 이데올로기로 정착하는데 시초를 제공한 인물로 루소를 든다. ‘걷기는 루소가 선택한 존재의 방식’이었던 것 같다는 솔닛의 말은 온당하다. 루소는 위대하고도 대담한 사상가로서 당시 프랑스 귀족들의 심한 박해에 시달려야 했다. 몰이해와 비난 속에서 사교를 박탈당한 루소에게 자연은, 자연을 배경으로 또는 자연의 하나가 되어 걷는 행위는, 하나의 반란이자 도피였을 테니 말이다. 도시가 활기와 열정으로 충만할 때 자연은 장식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도시가 경쟁의 속도로 혼란스럽거나 패배의 조짐을 드러낼 때 자연은 모태의 안락으로 인간을 부른다. 초록의 경쾌함과 안온함은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고, 소외감에서 인간을 구원한다. 자연의 치유 능력은 걸을 때 증폭한다. 걸음은 공기를 움직이게 하고 움직이는 공기는 자연의 숨을 인간의 허파에 이입시킨다. 녹색의 호흡을 흡입하면서 심장과 두뇌는 비로소 잔잔한 명상에 잠긴다.
 
    걷기와 사유를 연결시킨 철학자 중의 하나로 솔닛은 또 키에르케고르를 호명한다. 솔닛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키에르케고르 같은 사람에게는 ‘거리를 걷는 일이 사람들 틈에 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은 키에르케고르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듯하다. 루소가 자연을 벗 삼아 걸었다면 키에르케고르는 도시의 산만함과 왁자지껄함을 벗 삼아 걸은 사람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주위가 산만할 때 정신이 가장 활발’했다고 한다. 인식 능력이 뛰어나거나 자기 몰입에 유연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가 아닌가 싶다. 도시를 벗어나지 않고 도시와 함께 숨 쉬며 명상과 다작을 향유할 수 있다니!
 
    이밖에도 솔닛은 ‘걷기를 자신의 핵심적인 연구 과제로 명시한 철학자’로 에드문트 후설을 꼽는다. 후설은 이전의 사상가들과는 다르게 감각과 정신에 비해서 걷는 행위 자체를 강조한 학자라고 하는데 후설의 저서를 읽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한 페이지 분량으로 할애한  서술이 감질나게만 느껴진다. 걷는 행위 자체를 강조했다는 것은 몸에 대한 탐구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에서 비롯한 몸에 대한 담론은 20세기 후반에 들뢰즈나 푸코, 메를로 퐁티와 같은 걸출한 몸철학자들을 배출했다. 그동안 정신세계의 고색창연한 빛으로 인해 위축되고 도외시되었던 몸이 비로소 제대로 된 ‘몸’을 지니게 된 것이다. 걷기를 강조한 후설에 대해 좀더 많은 탐색이 이루어졌다면 후설과 몸철학을 연결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무식한 자의 용감한 호기심일 뿐이다.


    길찾기로서의 걷기

    ‘순례는 걷기의 기초적인 유형, 즉 잡을 수 없는 것을 찾아가는 행위이다.’
    솔닛은 ‘성금요일’에 치마요 성지로 향하며 은총에 이르는 순례길에 대한 지도를 만든다. 명상으로서의 걷기가 특별한 목적의식 없이 출발하여 깊은 사색의 흔적을 양산한 것과는 달리 순례자의 걷기는 처음부터 뚜렷한 목적을 갖고 출발한다. 오체투지로 순례길에 오르는 사람이나 거대한 십자가를 지고 신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은 감사와 경배, 구원에 대한 약속을 희원한다. 순례는 ‘영혼의 경제 활동’으로서 ‘고된 노동이 보상받고 빼앗긴 것은 되돌아’올 것을 갈구하는 행위이다. 또 순례는 ‘영적 여행의 수단’이며 ‘금욕과 육신의 고통을 영혼 성숙의 수단’으로 이해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나는 도시에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지만 장거리 여행을 할 때는 자가용을 선호하는 편이다. 고속버스나 기차의 정형화된 움직임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고속버스나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말 그대로 풍경일 뿐 살아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벽에 걸린 고흐의 ‘삼나무가 있는 보리밭’일 뿐이며 모네의 향기 없는 ‘수련’일 따름이다. 시각에만 의존해야 하는 풍경은 슬프다. 눈에 걸리는 대로 땅을 밟으며 느끼는 풍경만이 정신과, 육체와 소통한다. 내 마음을 끌어당기는 풍경 중의 하나는 ‘산사’이다. 국도 곁가지로 소박하게 열린 소로(小路) 입구에는 대부분 사찰의 이정표가 붙어 있다. 마음 동하면 차를 세우고 이정표를 따라 길을 걷는다. 사바세계와 불국정토를 나누는 일주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세상과 무연해진다. 일주문에 걸린 편액이 깊이 몸을 숙여 나를 어루만지는 듯하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일주문 안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금욕의 자세와 진리를 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이러한 평정심은 또다시 길을 달리고 어스름과 박명을 거치고 도시의 소음 속으로 귀가한 뒤에도 오래도록 지속된다, 구원이다. 순례자가 모두 신자(信者)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성취지향적인 걷기   

    목적의식을 배태하고 있다는 것은 공통적이나 순례자의 걷기와는 또 다른 걷기의 방식도 존재한다. 인간의 욕망을 투영하는 것으로서의 걷기가 그것인데, 이것은 공적인 명예나 사회적인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의지의 발로이자 성취를 목표로 한다. 등반가들은 단순히 산에 오르는 과정에서 느끼는 개인적인 기쁨 외에 험난한 산을 정복했다는 성취감과 함께 세인의 찬사를 희구한다. ‘최초의 등정, 최초의 북사면 등정, 최초의 미국인, 최초의 일본인, 최초의 여성, 최단 시간, 이런저런 장비를 쓰지 않은 최초의 등정 같은 모든 신기록’들은 그러한 인간의 욕망을 대변하는 기록들이다. 그리고  ‘최초’의 사람들은 산에 자신의 이름이나 국적을 드러내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자긍심을 증폭시킨다. 이러한 등산 숭배와 명성에 대한 욕구는 급기야 ‘발마’로 하여금 등산로를 개척하고 원정을 주도한 파카르의 공로를 가로채게 만들기도 하였다.
 
    걷기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땅 전쟁에 나선 사람들도 있었다. 바야흐로 ‘땅 위를 걷는 것’이 ‘계급 전쟁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땅을 소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지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울타리를 치고 말뚝을 박았다. 따라서 ‘전통적인 통행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원의 개방을 부르짖으며 ‘옛날식 소로 보존회’나 ‘스코틀랜드 통행권 협회’, ‘개방 공간 협회’ 등을 만들어 통행의 자유를 위해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대학들이 근래 들어 벽을 허물고 개방 정원을 만드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서구에 비하면 이백 년이나 뒤늦은 시도이다. 그것도 지역 주민들의 권리 찾기에서 시발한 것이 아니라 서구의 환경을 모방하려는 정부 시책의 결과일 뿐인 것은 어쩐지 씁쓸하다.
 
    통행권의 보장이라는 소박한 전쟁에 비해 보다 치열하고 확대된 전쟁은 바로 종교적 신념과 민족적 자부심, 민주주의를 쟁취하려는 시민들의 대대적인 행렬이다. 솔닛은 미국에서 열리는 게이 축제 행진이나 성 파트리키우스의 날 행진, 프랑스 혁명과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벳 혁명 등을 모두 걷기의 역사에 포함시킨다. 이렇게 본다면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으로 시작된 촛불시위는 물리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게다가 시각적으로까지 걷기의 역사 중 더없이 아름다운 한부분을 장식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주의를 지나쳐 이기주의가 팽배한 시민들이 하나로 뭉쳐 촛농 같은 눈물을 흘리던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러한 저력이라면 독도 사수쯤은 문제도 아니다. 


   관능으로서의 걷기와 걷기에서 소외당한 여성들

    솔닛은 캐롤린 와이버의 ‘오래전부터 구애 행위’였던 걷기를 수용한다. 솔닛은 보조를 맞추면서 함께 걷는다는 섬세한 행위는 두 사람을 감정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결속시킨다고 말한다. 함께 걷는 두 사람은 대화를 중단하면 안 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대화를 이어나가기 힘들 만큼 다른 일에 몰두할 필요도 없다. 걷기 자체가 스스로 매혹의 언어를 구사하고 스킨십을 주도하며 육체적인 결속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여성의 걷기는 성적인 타락과 매춘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혀 여성의 걷기는 통제 당하고 억압당해야 했다. 여성은 길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남자들을 유혹하는 밤거리의 여자로 낙인 찍혔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검사관 앞에서 두 다리를 벌린 채 순결을 검증 받아야 했다. 남성에게 자유로운 영혼을 선물한 걷기가 여성에게는 치욕의 주홍글씨가 된 셈이다. ‘여성의 걷기는 이동이 아닌 공연으로, 둘러보기 위한 걷기가 아닌 보여주기 위한 걷기로, 자신의 체험을 위한 걷기가 아니라 남성 관객의 체험을 위한 걷기로 해석될 때가 많으며, 이는 여성이 의도적으로 관심을 자기에게 쏠리게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아연실색할 노릇이다. 이러한 남성 위주의 사고방식은 현재에도 여전하다. 강간당한 여성이 오히려 ‘취조’와 조롱을 당하고 그녀를 강간한 것은 남성이 아니라 그녀의 미니스커트가 되어 버리는 것이 현실이다. 
    남성에 비해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협소하고 문화적 혜택에서 소외되었었다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인간이면 당연히 누려야 할, 아니 생명 가진 것의 당연한 권리인 ‘걷기’에서조차 차별과 억압을 감내해야 했다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걷기의 역사』, 인간의 보편적 행위인 ‘걷기’를 주제별로 세목화하여 정리한 레베카 솔닛에게 우선, 소박한 박수를 보낸다. 흥미롭기도 했고, ‘도시는 영원히 증식하는 목록이다.’나 ‘걷기와 에세이는 둘 다 즐거움, 나아가 황홀함을 주기 위한 것이며, 따라서 아무도 길을 잃지도 않고, 인적 없는 숲에서 벌레와 빗물로 연명하지도 않고, 낯선 사람과 무덤에서 섹스를 하지도 않고, 전투에 말려들지도 않고, 피안을 맛보지도 않는다.’,  ‘도시 산책에 열심인 사람이면 으레 경험하는 미묘한 상태가 있다. 고독을 즐기는 상태라고 할까. 밤별들이 하늘에 마침표를 찍듯이, 우연한 만남이 어두운 고독에 마침표를 찍는다.’ 따위의 반짝이는 문장들은 꽤나 매혹적이다. 하지만 의욕의 과잉 탓이었는지 각 챕터마다 너무 많은 에피소드들을 삽입한 탓에 산만하고 분주하다는 느낌을 준다.
 
    영화 『토탈 이클립스』에서 랭보로 분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걸음걸이는 활달하고 거침없다. 걸음걸이는 성격을 드러내는 요소 중 하나이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사람이 성큼성큼 걷는 것을 보지 못했고 혈기왕성하고 의욕적인 사람이 어깨를 늘어뜨린 채 좁은 보폭으로 걷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반대로 걸음걸이를 통해 성격을 보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양장을 할 때보다 한복을 입었을 때 더욱 몸가짐이 조신해지듯이 말이다. 그러나 닫힌 공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현대인으로서는 자신만의 걸음새를 만들기란 요원한 일이다. 도심의 정원화는 그래서 더욱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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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03 15: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9-06 0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9-08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