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 창비시선 238
문태준 지음 / 창비 / 200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향’ 하면 할머니가 떠오른다. 아버지의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의 어머니이다. 자글자글한 주름도, 흙무덤 같은 젖가슴도, 마르고 얼기설기한 손등도, 치맛자락 아래 빼꼼히 드러난 버선발도, 여름날 대청마루에서 구시렁대는 모깃불이나 화롯불에 곰삭아 있는 고구마 냄새도 친할머니의 것이 아니라 외할머니의 것이다. 하여, ‘고향’이라는 낱말은 ‘외갓집’과 맞닿아 있다. 더불어 ‘고향’ 속에 녹아있는 ‘자연’ 또한 외할머니의 것이며 여성의 것이다.

  그가 노래하는 고향은 외할머니의 여성성으로 표출된다. 그의 고향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얻으러 간’(어두워지는 순간) 고향이며, ‘다 쓴 여인네의 분첩’(뜨락 위 한 켤레 신발) 같은 고향이며, ‘흰 찔레꽃처럼 웃는 여자’(봄날 지나쳐간 산집)를 만나는 고향이다. 그의 고향은 붉은 동백으로 피어나 배꽃 고운 길로 이어지며 맷돌 돌리는 소리가 동구 밖 너머까지 아슴푸레한 곳이다. 그래서 그의 시집은 읽는 내내 태초와 같은 편안함을 느끼게 하고 그 편안함은 잘 여문 언어들로 인해 풍경으로 펼쳐진다. 그러나 도시에서 나아 도시에서 성장한 이들에게는 언뜻 읽히지 않는 풍경들도 눈에 띤다. ‘누에의 눈 같기만 했던 빛’(반딧불이에게)이 그러하며 ‘무논에 써레가 지나간 다음’(황새의 멈추어진 발걸음)이 그러하며 ‘가죽나무’를 모르므로 가죽나무를 사랑하였다는 시인의 심상을 짚어내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그의 시에는 직유가 많다. 시 한편에 직유가 세 번 이상 쓰이면 실패한 시라고 한다지만 그는 외려 직유를 갖고 노는 듯하다. 직유를 단순하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적절한 언어로 포장을 한 후 내보이기 때문이리라. 가령,
‘내 숨결이 꺼져가는 화톳불같이 아플 때’(화령고모)라거나, ‘봄은 배꽃 고운 들길을 가던 기다란 냄새의 넌출 같기만 한 것’(배꽃 고운 길)이라거나, ‘죽은 돌들끼리 쌓아올린 서러운 돌탑 같다’(맷돌)는 것들이 그렇다. 단순히 화톳불같이 아프다고 했더라면, 봄은 넌출 같기만 하다고 했더라면, 맷돌은 돌탑 같다라고 했더라면 얼마나 맨송맨송하고 심심했을까. 게다가 그는 직유를 아예 드러내놓고 사용함으로 해서 시에 리듬을 실어주기도 한다.

팔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
을 거두어갔다
- <맨발> 일부

  그의 시는 아름답고 자궁 속을 유영하듯 포근하다. 세상의 그 어떤 소리보다 감미롭고 그 어떤 그림보다 세세하며 은근하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아쉬운 것은 오래도록 마음을 두드리는 울림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풍경을 묘사하고 형상화하는 솜씨는 돋보이지만 그것을 통해 독자에게 질문거리를 던져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시집을 덮고도 아주 오래도록, 시인의 목소리를 기억해내고 그가 던진 질문을 곱씹으며 대답을 궁리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첫 시집과는 달리 시인이 고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번 시집에는 군데군데 시인의 깊이가 엿보인다. 그 깊이는 많은 부분 불교에 빚지고 있다.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 한 호흡이라 부르자 /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워내고 / 피어난 꽃은 한번 더 울려 / 꽃잎을 떨어뜨려버리는 그 사이를 / 한 호흡이라 부르자 / 꽃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처럼 /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 <한 호흡> 전문

  한 호흡은 불교에서 이르는 찰나일 것이다. 찰나생멸(刹那生滅)과 찰나무상(刹那無常)이 잘 드러난 구절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찰나를 이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일 뿐(윤회)이므로 어떠한 것도 영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아버지의 삶이 아무리 홍역 같이 뜨거운 것이라 할지라도 찰나에 스러질 뿐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위로를 담고 있는 말일 터이다. 또 그는 봄빛에 울렁이는 자신의 속내를 ‘봄마음 이리 설레 환속’한 신라의 여승 설요에 빗대기도 한다. 환속을 꿈꿀 만큼 자지러지는 일렁임의 속살이 만져질 것만 같다.
  이뿐만이 아니다. 각주에서 밝혔듯, 피붙이의 영면 앞에서 ‘죽음은 달그림자가 못에 잠기는 것’(당신이 죽어나가는 길을 내가 떠메고)이라고 노래함으로써 열반에 들기를 간절히 염원하기도 하고,

칠석이면 / 두 손으로 곱게 빌던 / 그 돌부처가 / 이제는 당신의 눈동자로 / 들어앉아서 // 어느 생애에 / 내가 당신에게 / 목숨을 받지 않아서 / 무정한 참빗이라도 될까 // 어느 생애에야 / 내 혀가 / 그 돌 같은 / 눈동자를 다 쓸어낼까 // 목을 빼고 천천히 / 울고, 울어서 / 젖은 아침
- <혀> 일부

  윤회를 빌어도 부처 같은 어머니의 사랑은 갚아갈 수 없음을, 그래서 그 정한으로 울고 울 수밖에 없음을 노래하기도 한다. ‘공적(空寂)과 파란(波瀾)을 동시에 읽어낼 줄 안 이 누구였을까’(대나무숲이 있는 뒤란)라는 의문구는 제 잘난 맛에 사는 속세에 대한 반성이라도 구하는 것일까, 마는 모쪼록 서정시인 ‘문태준’이 종교경전도 인문서도 많이많이 읽어 보다 깊은 질문들을 쉬잖고 던져주었으면 참말이지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