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엄호텔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구판) 5
마리 르도네 지음, 이재룡 옮김 / 열림원 / 199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하늘은 흐리고, 나는 커피에 보드카를 몇 방울 떨어뜨린다. 오른쪽 엄지손가락에서 시작된 통증이 어깨와 목에까지 이르렀다. 마우스를 쥐고 있는 손은 언제나 긴장한다. 힘이 들어가고, 그것이 통증을 유발한다. 긴장을 눈치 채는 건 통증이다. 통증 때문에 힘을 푼다. 하지만 잠깐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른 팔의 근육들이 또다시 잔뜩 긴장해 있다.  ‘장엄호텔’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세 자매의 불온하고 불안한 일상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곳은 유폐로부터 멀지 않다. 봄은, 영원히 당도하지 않을 것만 같다.

  장엄호텔은 늪지에 세워졌다. 늪은 흡반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저 자신이 거대한 흡반이다. 늪이 빨아들이는 건 ‘장엄호텔’이라 명명된 세 자매의 삶이다. 세 자매는 서서히 부식하고(배관 파이프에 녹이 스는 것처럼) 무너지고(대들보가 붕괴된 것처럼) 침수하고(물에 잠긴 할머니의 묘지처럼) 출구를 잃고(변기가 막히는 것처럼) 사회적 관계로 인해 상처 입는다(쥐와 온갖 해충 떼로부터 공격당하는 호텔처럼). 서로의 관계 또한 부조리하다. 배타와 질시, 험구와 야유, 명령과 굴종을 향해 침몰해 간다. 게다가 류머티즘, 근육함몰증, 혈행장애 등 육체의 질병에도 노출돼 있다.


  옮긴이(이재룡)는 “집, 피난처가 여성성의 상징이라는 바슐라르식 해석은 여기에서는 적절치 않을 것이다. 작가의 표현에 따르자면 이름도 나이도 없는 화자 - 주인공은 영원한 폐경기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호텔은 혈관이 막히고 근육이 허물어져 가는 부성, 혹은 남성의 상징. 네온사인만 남은 거대한 팔루스이며 그것을 삼키는 늪이 바로 여성이 아닐지”라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설득력 없는 말이다. 비평이 아닌 바에야 그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일일이 제시할 필요는 없었겠으나, 그 말을 뱉기까지의 소소한 배경조차 생략하고 게재한 의견은, 그 피상성으로 인해 의혹만 증폭시킬 뿐이다. 왜 그러한가. 집에 대한 바슐라르의 해석이 어째서 라캉으로 옮겨간단 말인가. 비약이 아닌가. 아니면 그것을 눈치조차 못 채는, 내 독법의 문제인가.


  호텔이 “네온사인만 남은 거대한 팔루스”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네온사인’은 그 자체로 거대한 팔루스가 아니던가. 『장엄호텔』에서 네온사인은 어둠 속의 여행객들에게 ‘장엄호텔’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등대로서의 역할을 담당한다. 네온사인은 세계를 향해 세 자매(좁게는 화자)가 드러내는 소통의 욕망이자 역으로 결핍을 가시화하는 하나의 장치일 것이다. 상징계로 편입하고자 하는, 결여가 지닌 욕망의 덩어리. 네온사인은 결국 빛을 상실하고 죽어버린다. 욕망이 지닌 ‘환상성’에 불과했던 것이다. 더구나 ‘장엄호텔’은 세 자매와 함께 동거동락하며 쇠락하는 존재가 아닌가. 다시 말해 『장엄호텔』은 여성성과 남성성의 대립이라기보다는 세계와 개인 간의, 욕망과 결핍 간의 불화, 불일치, 그 안에서 끊임없이 부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고립된 운명에 대한 서사로 읽힌다는 것이다. 늪은 개인이 세계로 나아갈 때 부딪힐 수밖에 없는 하나의 장애물일 것이다. 아니, 세계 자체일지도. 와중에 깨지고 멍들고 으깨지는, 류머티즘과 혈행장애와 근육함몰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 지닌 운명이다.


  하늘은 여전히 흐리고, 나는 또다시 커피에 보드카를 몇 방울 떨어뜨린다. 똑똑, 어디선가 물방울 듣는 소리가 들린다. 누수의 위험에 대한 경고인 것인가. 여전히 오른 쪽 근육은 긴장해 있다. 통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세계를 견디는 일은 이토록 고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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