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없는 유토피아는 가능한가

-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1. 도스토예프스키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바실리 페로프가 그린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화를 보면 이 러시아의 대문호에 대한 우리의 편견이 십분 만족되는 듯싶다. 넓은 이마와 움푹 꺼진 퀭한 두 눈은 곧 광활하고도 깊은 러시아의 영혼을 상징하는 것 같다. 서양인답지 않게 툭 불거진 광대뼈 역시 어딘가 독특한 느낌을 준다. 고동색의 무성한 턱수염 속에서는 이성의 광기와 영성의 은총이 영원토록 사투를 벌이는 것 같다. 끝으로, 어딘가 비스듬히 아래쪽을 향한 저 시선의 끝은 어디일까? 그의 소설을 들추는 수밖에 없다. 우선 전기를 간략히 보자.

 

(바실리 페로프, <도..키>

 

소설가로서의 무게에 비하면 생활인으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래저래 문제가 많았다. 그는 가난한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나 페테르부르크 공병학교를 졸업했다전공에 따라 공무원(무관)이 되었으나 이내 싫증을 냈다. 결국 전업 작가의 길을 택했고 그 순간 가난은 그의 실존이 되었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면 프롤레타리아 작가가 된 셈이다. 뿐더러 간질병이 평생 그를 쫓아다녔다. 도박벽 역시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의 문학 속에서 승화작용을 거친다. 그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과 그들로 인해 고뇌하는 인텔리겐치아에 관한 소설이다. 그 고통이 너무도 크기에 그들은 간질발작이나 도박의 절정과 같은 찰나적인 황홀경을 꿈꾼다. 그들의 목표는 늘 유토피아 건설이다.

 

실제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십대 때 페트라셰프스키 서클을 드나들며 푸리에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의 서적을 읽고 새로운 사회 체제의 가능성을 논하곤 했다. 그 일로 인해 그는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그러나 니콜라이 1세의 애초 각본에 따라 사형 집행 당일 총이 발사되기 직전, ‘사형극이 극적으로 중단된다. 이후 도스토예프스키는 8년간 유형살이를 한다. 다시 문단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극단적 보수주의자에 슬라브주의자가 돼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좌익이나 우익이냐, 무신론자냐 광신도냐, 가 아니다. 삶이라는 것이 그 어떤 이데올로기나 관념보다 소중하다는 것. 바로 이것이 도스토예프스키가 목숨을 대가로 얻어낸 가장 소중한 깨달음이다. 그의 마지막 소설이자 최고 소설로 손꼽히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하 <카라마조프>) 역시 궁극적으론 삶에 바치는 찬가라고 할 수 있겠다.

 

2. 아비를 죽이다 - 친부살해의 테마

 

19세기 후반 스코토프리고니예프스크 시().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지주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는 두 번의 결혼을 통해 세 아들을 얻었다. 첫 부인 소생의 드미트리(28)는 퇴역 중위인데, 난폭한 면이 있으나 타고나길 마음씨가 착하다. 두 번째 부인이 낳은 이반(24)은 이지적이지만 자기중심적인 자연과학도이다. 역시나 두 번째 부인 소생인 알료샤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얌전한 청년으로서 어머니의 광신에 가까운 신심을 물려받아 수도사가 되고 싶어 한다. 그밖에, 암암리에 표도르의 자식으로 통하는 스메르쟈코프가 있는데, 하인 겸 요리사 노릇을 하고 있다. 그를 빼면 모든 아들이 아비에게 버림받고 타인의 품을 전전하며 자라났다. 한데 세 아들이 갑자기 아비의 집을 찾아온다. 대체 왜? <카라마조프>는 여기서 시작된다.

 

 

 

 

 

 

 

 

 

 

 

 

 

 

 

 

일단 문제는 이다. 드미트리는 오래 전에 고인이 된 어머니가 자기 앞으로 남긴 유산을 받아내고자 한다. 물론 표도르가 돈을 내줄 리 없다. 그 와중에 드미트리는 표도르가 오랫동안 눈독을 들인, 그의 사업 파트너이기도 한 그루셴카에게 반하고 만다. 그뿐이 아니다. 겉보기엔 제법 점잖은 이반이 드미트리의 약혼녀인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를 사랑한다. 결국, 아비와 아들이 돈과 여자 때문에 다투고 배다른 두 형제가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기괴한 신경전을 벌이는 형국이 된다.

 

 

 

 

 

 

 

 

 

 

 

 

 

 

 

 

이렇듯 <카라마조프>는 그 상상력의 측면에서 거의 신화에 가깝다. 아들이 아비를 살해하고 아비의 여자를 탐한다, 라니. 그 거칠고 적나라한 표현 방식에 있어서는 시쳇말로 막장 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질투에 사로잡힌 아들이 아비의 집에 쳐들어와 아비의 얼굴을 문자 그대로 짓밟고 쌍욕을 퍼붓는 장면을 보라. 이 소설이 두툼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빨리 읽히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 오이디푸스 신화 자체의 선정적이고 도발적인 측면과 작가의 직설적인 화법. 물론 추리 소설적인 장치(“누가 표도르를 죽였는가?”)도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런 소설적 흥미의 저변에 깔린 것은 죄와 벌, 자유와 양심, 신의 존재와 그 가치 등 대단히 철학적인 물음이다.

 

특히 <카라마조프>에서 친부살해는 일차적 의미의 범죄(아비를 죽이다)를 넘어 정치적 혁명(-차르를 죽이다), 나아가 형이상학적 반항과 무신론(신을 죽이다)을 아우른다. 실제로 이 소설이 쓰일 무렵 무신론과 허무주의를 표방한 급진파 쪽에서 각종 테러가 일어났고 황제(알렉산드르 2) 시해 시도도 있었다. <카라마조프>는 이런 현상에 대한 극우파 작가의 우려와 불안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이데올로기적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젊은 날 새로운 유토피아 건설에 목말라 했으며 그로 인해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이 소설의 주인공들의 정신적 편력에 대한 작가의 태도가 단순한 찬반’(Pro et Contra)에 그칠 리는 없지 않겠는가. (계속~)

 

-- <신동아>

 

 

 

고전을 영화화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녔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백치>. 므이시킨의  전기에 작가 도..키의 사형 직전의 체험을 은근슬쩍 집어넣었죠. 소개 없이도 누가 누구인지 보이죠? 로고진 - 나스타시야 필립포브나 - 므이시킨 - 아글라야, 입니다. 물론, '번안' 영화라 일본 이름이었지만 -_-;; 

로고진 역은 물론(!) 미후네 토시로, 그리고 나스타시야 역에 참 잘 어울렸던 하라 세츠코입니다. 주로 구로사와 아키라보다는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 많이 나오긴 하는데요... 정윤희처럼, 감격스러운 미모입니다 ㅎ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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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1-02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음사에서 새로 나온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직접 번역하신 분이 바로 푸른괭이님이시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졸업후 대학 입학하기 전까지 '두세달의 추운 겨울' 동안에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이 바로 <까라마조프 형제들>이었답니다. 대략 32년쯤 전에 읽었었지만 아직도 소설 속 장면들이 눈에 선하네요. 나중에 언젠가 이 작품을 다시 읽게 된다면 그때는 꼭 푸른괭이님의 번역본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오래 전에 제가 남겨뒀던 기록도 덧붙여봅니다.
* * *





푸른괭이 2013-01-03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다시 읽어보시면 감회가 새로울 겁니다^^; 라끼찐에 대한 인상이 강하셨나 봐요? "경박한 재줏꾼"이라는 말도 딱 맞는 것 같네요...^^;
 

실제 현실과 조작 현실 사이에서 파괴되는 개인의 삶

-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1974220일 수요일, 여성 카니발 전날 밤, 어느 도시에서 스물일곱 살의 젊은 여자가 저녁 645분경 누군가가 주최하는 댄스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나흘 후, 드라마틱하게 - 사실 그렇게 표현해야만 한다.(중략) - 사건이 전개된 이후, 일요일 저녁 거의 비슷한 시간에 -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저녁 74분경에 - 그녀는 발터 뫼딩 경사의 집 초인종을 누른다. 그는 마침 사적인 이유가 아닌 직무상의 이유로 아랍 족장으로 분장을 하고 있던 참이다. 그녀는 놀란 뫼딩에게 조서를 작성하라며 진술한다. 자신이 낮 1215분경 자기 아파트에서 베르너 퇴트게스 기자를 총으로 살해했으며, 뫼딩이 아파트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그를 데려갈수 있을 거라고 했고, 그녀 자신은 1215분에서 저녁 7시까지 후회의 감정을 느껴 보기 위해 시내를 이리저리 배회했지만, 조금도 후회되는 바를 찾지 못했노라고.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체포해 주길 부탁하며, “사랑하는 루트비히가 있는 그곳에 자신도 기꺼이 있고 싶노라고 말한다.(11-12)

 

이것이 소설의 초두에 제시된 사건의 전말이다. 화자의 관심은 220일 수요일에서 24일 일요일까지 45일에 걸쳐 일어난 사건의 원인과 과정을 추적, 해부하는 데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국민의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천방지축으로 날뛰다가 급기야 깡패 집단이 돼 버린 언론이 노골적인 비판의 대상이 된다. 애초 이 소설의 모델이었던, 사상적 경향성을 띤 한 지식인이 소설적 변용을 통해 그저 선량한 시민혹은 민간인으로 거듭난다. 카타리나 블룸은 평범하고 성실한 가정 관리사로서 평소 행실에 있어서도 새치름하고 뻣뻣하다고까지 알려져 있고, 지인들과 친구들 사이에서 수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55)27세의 이혼녀이다. 그녀의 삶이 흔들린 것도 역시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입장이 아니라 사랑 때문이다. 사랑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 중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것, 따라서 말해지기 가장 곤란한 것이다. 바로 그것이 여러 층위의 폭력에 노출된다.

 

 

 

 

 

 

 

 

 

 

 

 

 

 

 

사실 관계를 재구성해 보면 이렇다. 카타리나는 어느 댄스파티에서 루트비히 괴텐이라는 남자를 만나 첫 눈에 반하고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 함께 밤을 보낸다. 그날 새벽, 그가 쫓기는 몸임을 알게 되자, 거의 외우다시피 익혀온 우아한 강변한 삶아파트의 도면을 떠올려 그를 비밀 통로로 탈출시킨 다음, 평소 그녀에게 치근대온 한 신사(슈트로입레더)의 별장에 그를 숨긴다. 이로써 그녀는 처벌 받아 마땅한 범법 행위를 저질렀다. 그럼에도 수사와 언론 보도, 그로 인해 그녀가 감당해야 하는 일련의 불쾌한 일에는 소름이 돋는다. 가령 황색 저널리즘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악랄하고 천박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퇴트게스 기자를 보라. 이제 막 어려운 암 수술을 끝낸, 카타리나의 어머니를 인터뷰하려는 시도가 좌절되자 그는 모든 속임수 중에서 가장 간단한 속임수”, 즉 페인트 공으로 변장해 병실에 잠입한다.

 

그는 블룸 부인에게 사실들을 들이댔지만, 그녀가 괴텐을 전혀 몰랐던 탓에 모든 것을 이해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그녀는, “왜 그런 결말이 날 수밖에 없었을까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자이퉁>에는 이렇게 썼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듯이,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었겠지요.” 블룸 부인의 진술을 다소 바꾼 것에 대해 그는 기자로서 단순한 사람들의 표현을 도우려는생각에서 그랬고, 자신은 그런 데 익숙하다고 해명했다.(107)

 

블룸 부인의 당혹감과 의구심이 기자의 윤문작업 끝에 카타리나의 행위에 필연성을 부여하는 증언으로 바뀐다. 이렇듯 개인의 내밀한 삶이 조서와 보도 자료의 형식으로 환원되는 순간, 진실과 거짓, 실제 현실과 조작 현실 사이의 경계는 무의미해진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밀실이 파괴된다. “맙소사, 그는 오기로 예정되어 있는 바로 그 남자였어요. 그와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가 감방에서 나올 때까지 몇 년 동안 기다려야 한다고 해도요.”(61) 그녀가 볼터스하임 부인 앞에서 했던 말이다. 실상 우리 중 누구도 신문과 같은 언론 매체를 통해 예컨대 그녀의 사랑 고백을 엿들을 권리는 없다. 더러 대상이 누구냐, 상황이 어떠냐에 따라 몹시 그러고 싶어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작가가 암시하듯, 언론이란(적어도 특정언론은) 그 본질상 불가피하게무자비한 폭력의 주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 낸 것이다.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 중에 <빌트>지와의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

 

한데 흥미롭게도 이 소설은 은근히 고발적인 팸플릿의 냄새를 풍긴다. “-라고 한다”, “-이 알려졌다라는 식의 문체는 조서와 신문을 연상시키며 화자가 얻은 정보의 출처 및 전달 방식 역시 경찰과 언론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에 대한 상당히 냉혹한 보고서이다. 퇴트게스 기자를 향해 연거푸 방아쇠를 당기는 그녀의 분노에 공감하는 순간 우리 역시 폭력의 공범이 되는 셈이지만 이 역시 불가피한것이 아닐까.

 

-- 네이버캐스트

 

 

 

이 소설을 토대로 만든 영화. 보는 내내 무척 춥고 불쾌했어요. 하나 마나 한 대선이 돼버린, 그 때문에 더 추워진 연말, 이 소설과 이 영화와, 또 이 소설에 관심을 갖게 해준 한 정치가 등이 떠오른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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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문학과 솔제니친: 일상의 공포를 어찌할 것인가

-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솔제니친이 문학사의 한 페이지에 조용히 안착된 지 어느덧 3년이 지났다.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전쟁터와 수용소에서 보냈고 그 나머지는 망명국인 미국에서 보냈다. 1994, 고국으로 돌아간 이후, 그의 말년은 제법 길고도 고요했다. 어떻든 90년에 걸친 그의 생애는 20세기 러시아, 즉 소련의 흥망성쇠와 빈틈없이 맞물려 있다.

 

 

1945, 솔제니친은 친구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불온한정치사상을 피력했다는 이유로 체포된다. 소위 수용소 인생의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이 개인적 불행이 역사의 보편적 체험과 만나는 순간, 작가로서의 그의 운명은 새옹지마처럼 바뀌었다.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저항 작가 혹은 반체제 작가라는 말이 붙었으며 그의 소설은 수용소 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큼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것도 많은 부분 정치와 문학의 역학 관계 덕분이다. 말하자면 솔제니친은 스탈린 때문에 수용소 인생을 살았지만(그럼에도 대단히 장수했다!) 작가로서는 불멸이라는 최고의 수혜를 입은 셈이다.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의 주인공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854’)9104반의 죄수이다. 그의 하루는 이렇게 정리된다.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정을 잘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쌓기도 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순번을 맡아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그리고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208)

 

원래 제목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수용소라는 단어가 빠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인용문에 이어지는 마지막 문장이 주는 감동과 미학적 효과는 더 크다. “이렇게 슈호프는 그의 형기가 시작되어 끝나는 날까지 무려 10년을, 그러니까 날수로 계산하면 삼천육백오십삼 일을 보냈다. 사흘을 더 수용소에서 보낸 것은 그 사이에 윤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208) ‘운수 좋은 날의 반전이랄까.

 

슈호프가 수용소에 온 것은 독일군의 포로, 고로 스파이였기 때문이다. , 아무 이유도 없거나 귀걸이, 코걸이 식의 억지 이유이다. 사정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침례교도인 어린 알료쉬카는 기도를 너무 열심히 해서, 반장 추린은 아버지가 부농이라서, 영화감독 체자리는 불온한 영화를 찍어서 등이 체포 이유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문제 삼는 것은 이러한 부조리나 가시적이고 때론 선정적인 폭력이 아니라 그 일차적인 폭력 뒤에 찾아오는, 일상이 돼 버린 만성적인 폭력이다. 가령 슈호프는 더 이상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또 수용소 밖의 세상을 생각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과 이곳뿐이다. 어떻게 하면 영창에 가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체자리가 피우는 저 담배를 한 모금이라도 얻어 피울 수 있을까. 이런 슈호프가 정작 벽돌을 쌓기 시작하면, 놀랍게도, 그야말로 노동의 화신이 된다.

 

이제 슈호프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다. 눈부신 햇살을 받고 있는 눈 덮인 벌판도, 신호를 듣고 몰려나와 작업장을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 죄수들도, 아침부터 파고 있던 구덩이를 아직껏 파지 못하고 또 그곳으로 걸어가는 죄수들도, 철근을 용접하러 가는 녀석들이며, 수리공장 건물에 마루를 얹으려고 가는 죄수들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슈호프는 오직, 이제부터 쌓아올릴 벽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113)

 

소비에트 사회의 이상인 긍정적 주인공(영웅)’이란 노동과의 합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인간, 일말의 회의도 없이 오직 생산과 진보를 위해 노력하는 인간이다. 그런데 당시 소비에트 체제의 불합리한 운용의 희생양인 슈호프가 이런 소비에트적 인간(Homo Sovieticus)의 이상에 근접해 있다는 사실은 대단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수용소 군도>)

 

 

고발문학 혹은 폭로문학이 선전문학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다. 솔제니친의 문학은 지난 세기 내도록 그렇게 정치적 격랑에 따라 평가돼 왔다. 그 와중에도 변함없이 놀라운 것은 수용소 공간이 실존적 정황의 은유로 읽힌다는 점이다. 수용소 안은 수용소 바깥과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평범하고 단조롭다. 오히려 숙청의 공포에 벌벌 떨어야 했던 수용소 바깥이 더 극적이지 않았을까. 그 정도로 󰡔이반 데니소비치󰡕 속의 수용소는 일상의 공간에 가깝다. 관성의 법칙에 지배되는 일상의 공포가 더 무서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으니까.

 

슈호프는 행여나 하고 희뿌연 온도계의 유리관을 힐끔 곁눈질해 본다. 만약, 수은주가 영하 사십일 도를 넘어서면 작업장으로 끌려갈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수은주가 사십 도까지 내려가기는 좀 힘들 것 같다.(15)

 

역시 오늘 날씨는 겨우(!) 영하 27.5밖에 되지 않는다. 등교할 수밖에, 혹은 출근할 수밖에! 그리고 오늘도 무사히!

 

-- 네이버캐스트

 

-- 오늘 분량의 장편소설을 올리다가 이 소설이 생각났습니다. 날씨도 정말 춥고요. 

솔제니친은 많이 읽지도 못했고(무엇보다도, <수용소 군도>를 완독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죠 ㅠ.ㅠ) 그러지도 않겠으나... 여하튼 참 소박하고 착한 작가, 진정한 노동자-소비에트-의 영웅이었던 것 같은데, 이것도 참 아이러니이고... 흠. 아래 사진은 88세의 솔제니친과, 다시 (당연히!) 대통령이 된 푸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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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의 경계를 넘어서: 무모한 행동가? 노회한 독서광?

- 세르반테스(1547-1616), <돈 키호테>(1, 1605/ 2, 1615)

 

 

 

라 만차 지방에 알론소 키하노(()은 정확하지 않다)라는 사람이 살고 있는데, 골격은 튼튼하지만 몸과 얼굴은 비썩 마른, 쉰 살쯤 된 노인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농사일에 전념하고 사냥을 즐기던 그가 별안간 기사소설에 빠진다. 농지까지 팔아가며 소설책을 사들이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책만 읽더니 급기야는 머릿속 골수가 다 말라버려”(1, 45) 정신이 나간다. 방랑기사(편력기사)가 된 것, 아니, 그러기로 결심한 것이다. 몸소 투구를 장만하고 자신의 늙고 비루한 말을 로시난테로, 자신을 골 지방의 아마디스를 본 따 라 만차의 돈 키호테로 명명한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이웃 마을의 어느 농사꾼 처녀는 졸지에 그가 연모하는 엘 토보소의 둘시네아로 바뀐다. 객줏집에서 기사서품식을 치른 그는 두 번째 출정에 앞서 불쌍한 촌사람하나를 꼬드겨 종자로 삼는다.

 

 

 

 

 

 

 

 

 

 

 

 

모든 것을 기사소설에 맞추어 새롭게 창조하려는 그의 옹골찬 몽상에 현실 역시 다부지게 맞선다. 중세 기사의 역을 자처한 배우는 문자 그대로 이빨이 빠진 노인, 기껏해야 불쌍한 몰골의 기사”(다른 번역으로는 슬픈 얼굴의 기사”)일 뿐이고 그가 구원하려는 세상은 더 이상 고답적인 영웅 서사시를 허용하지 않는 시공간이다. 어딜 가든 굶주린 배를 채워야 하고 잠을 자야 하고 무엇보다도 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는 자신이 위대한 모험의 주체가 됐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말썽이나 일으키고 민폐만 끼치는 골치 아픈 늙은이일 뿐이다. 풍차를 거인으로, 여관집의 적포도주 가죽부대를 미코미코나 공주의 적으로 착각하여 공격하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그런데 돈 키호테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녕 몰랐을까? 그의 광기는 자기 최면의 산물, 즉 일종의 연기가 아니었을까? 시골 이발사의 세숫대야를 보고 맘브리노의 투구라고 주장하면서 돈 키호테는 마법을 운운한다. “그래서 자네에게 세숫대야로 보이는 그것도 나에게는 맘브리노 투구로 보이는 것이고, 또 딴사람에게는 다른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1, 336.) 이 대목을 어떻게 해석하든 돈 키호테의 시대착오적인 작태와 노회한 자기기만(혹은 순진한 광기?)는 쉽사리 해석되지 않는다. 마냥 감동하기에는 너무 웃기고, 마냥 웃기에는 너무 처량하다.

 

 

이 소설이 숭고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한 희비극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세계 자체가 분열된 탓이다.(루카치) <돈 키호테>는 신 중심의 세계(중세)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르네상스)를 거쳐 근대의 문턱에 이른 순간에 태어났다. 영웅적이고 낭만적인 열광의 시대가 끝나고 권태와 환멸의 시대, 심지어 범속과 일상의 시대가 찾아온 이다. 돈 키호테는 기사소설에는 나오지 않는 정황과 마주하여 당혹스러워하고 수시로 낭패를 당한다. 그러나 그가 패배하는 횟수(스무 번)만큼 승리한다는 사실(나보코프, <돈 키호테 강의>)을 인지하는 독자는 드물다. <돈 키호테>에서 패배와 승리는 등가이다. 기사로서 돈 키호테의 형상이 망가질수록 그 미학적 가치는 높아진다. 숙박료 지불을 거부한 기사 때문에 종자가 여관집 주인한테 얻어맞고(117) 한뎃잠을 자던 기사가 종자의 배설물을 맡으며 인상을 쓸 때(120) 문학사의 새 페이지가 쓰이는 것이다.

 

돈 키호테가 길을 떠나는 한 이야기는 계속된다. 하지만 그의 존재와 편력은 광기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가 나는 이제 라 만차의 돈 키호테가 아니라 알론소 키하노일세.”(2, 822-823)라고 말하는 순간, 소설은 끝날 수밖에 없다. ‘기사병을 앓는 노망 든 영감에서 선량한 시골 귀족으로 돌아간 그가 기사소설을 모방했던 자신의 지난 삶을 반성한 다음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유산 분배이다. 주인이 우울증으로 죽어간다며 원통해했음에도 자기 몫으로 떨어진 유산(비록 애초 약속 받은 섬은 얻지 못했으나!)에 대한 기쁨을 감추지 않는 산초 판사의 모습은 또한 얼마나 근대적인가.

 

 

 

 

 

 

 

 

 

 

 

 

 

세르반테스는 <돈 키호테>의 마지막 장에 오직 나만을 위해 돈 키호테는 태어났고 나는 그를 위해 태어났다. 그는 행동할 줄 알았고 나는 그것을 적을 줄 알았다.”(2, 829)라고 썼다. 흥미롭게도, ‘행동의 대명사인 돈 키호테는 독서의 쾌감을 만끽하는 여유로운 촌부였던 반면 이 두툼한 책의 저자는 정규 교육도 거의 받지 못했을뿐더러 상이군인, 풀려난 포로, 누명 쓴 세금 징수관 등 여느 모험소설의 주인공 못지않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돈 키호테의 장황한 설교대로(137) ()과 무()는 이토록 상보적이다. 어쩌면 그렇기에 돈 키호테의 가족과 친구가 분서(焚書)’, 이른바 책 화형식에 앞서 진행하는 검열과 심판은 무척 엄격하다.(15장과 6)

 

 

(피카소가 그린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

 

대부분의 책이 불쏘시개 신세로 전락하는데 그 와중에도 <돈 키호테>가 패러디하는 원조 기사소설 <골 지방의 아마디스>, 세르반테스의 첫 소설 <라 갈라테아> 등은 살아남는다. 특히 후자와 그 작가에 대해 신부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보탠다. 실제로 세르반테스는 (<돈 키호테> 2권에서 산손 카르라스코가 전해주듯) 쉰 살이 훨씬 넘어 발표한 <돈 키호테>로 대단한 인기를 얻는다. 뿐더러, 당시 에스파냐 문학의 대부분이 번역물이던 상황에서 그는 에스파냐어로 소설을 쓴 첫 번째 작가”(<모범 소설> 서문)였다.

문학사는 그를 1616423일 같은 날 사망한 셰익스피어와 함께 근대문학의 맨 윗자리에 올려놓았다.

 

* 고유명사의 표기는 일반 독자에게 익숙한 격음으로 바꿨음.

 

-- <책&>

 

--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관한 글을 쓰던 중 너무 힘들어서(ㅠ.ㅠ), 그 못지않게 힘들었던 <돈 키호테>에 관한 저 글을 떠올려 봅니다. 힘내자, 라는 의미에서요 ^^:;

--  <돈 키호테>는 도...키의 <백치>에 모종의 전범을 제공한 소설이기도 하고, 소설 자체보다는 인물형으로서 러시아문학에 큰 영향을 끼치고 했고요.(투르게네프의 <햄릿과 돈 키호테>라는 에세이-논문이 유명합니다.)

-- 겸사겸사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의 이미지도 올려봅니다. (김현의 책이 아니라면, 아마도) 제일 처음 읽은, 그래서 애틋한 마음을 갖고 있는 소설 이론서입니다. 93년, 기숙사와 문학회 동아리 방을 오가며 읽었지 싶은데, 이쪽 저쪽 모두 재건축, 재개발되면서 다 사라졌지만, 책에 대한 기억은 '아.스.라.히.'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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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013-06-19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반 뚜르게네프의 햄릿과 돈키호테를 검색하다 들어왔습니다. 혹시 국내에 위의 서지가 아예 번역되어있지 않은가요? 국회도서관에도 도서검색을 해도 자료가 나오지 않네요 돈을 주고서라도 사서 볼 수 있다면 보고싶은데 ㅠㅠ

푸른괭이 2013-06-19 15:06   좋아요 0 | URL
제가 알기론 한국어 번역은 없답니다. 영어 번역은 쉽게 찾을 수 있을 텐데...ㅠ.ㅠ 사실 그 논문(에세이)의 내용 자체는 무척 단순한데(?) 워낙에 희소(?)해서 더 주목 받는 것 같습니다 ^^;;
 

 

 

 

6. 악마의 존재를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다

 

파우스트가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외치자 메피스토펠레스는 그의 영혼을 접수하기 위해 핏방울 계약서를 챙긴다. 하지만 그때 천사들이 등장하여 야비하게(!) 악마의 노획물을 채간다. 악마의 몸은 욥의 몸처럼 종양과 옴 덩어리로 변하고, 파우스트는 천국으로 인도된다. 전형적인 권선징악에 덧붙여 도저하게 기독교적인 결말인데, 이는 작품의 도입부에서부터 이미 명시됐던 것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처음 등장할 때 자신을 항상 악을 원하면서도 항상 선을 창조해내는 힘의 일부분”(1, 80)이라고 소개한다. “소생은 항상 부정(否定)을 일삼는 정령입니다! / () / 당신들이 죄라느니, 파괴라느니, / 요컨대 악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 제 원래의 본성이랍니다.”(1, 80) , 악마라는 신분상 부정(否定), , 파괴 등 악의 영역을 담당하나 그 역시 궁극적으로는 신에게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구약의 욥기(16-12)를 괴테 나름으로 다시 풀어쓴 천상의 서곡은 대단히 노골적이다.

 

 

(이미지 검색하다 보니 이런 욥도 있네요. 여하튼 파우스트는 괴테 판 욥이죠.) 

 

 

메피스토펠레스가 신(주님) 앞에 나타나 불만을 토로하며 괜히 시비를 건다. 그러자 신은 파우스트를 가리키며 나의 종이니라!”(1, 23)라며 자랑한다. 그를 유혹하여 타락시키겠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호언장담에도 여유만만하게 응수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까”(1, 24) 얼마든지 건드려보라는 것이다.

 

그의 영혼을 그 근원으로부터 끌어내어, / 만일 그것을 붙잡을 수 있다면, / 어디 너의 길로 유혹하여 이끌어보려무나 / 하지만 언젠가는 부끄러운 얼굴로 나타나 이렇게 고백하게 되리라. / 착한 인간은 비록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잘 알고 있더군요, 라고.”(1, 24)

 

요컨대 <파우스트>에서 악마의 장난과 인간의 방황은 신의 영역에 귀속되며 죄악 역시 신의 뜻에 따라 구원을 담보한다. 신과 계약을 맺고 떠나는 메피스토펠레스도 신의 전지전능함은 물론 무한한 포용력과 사랑에 탄복한다. “때때로 나는 저 노인네를 만나는 게 즐거워. / 그래서 사이가 나빠지지 않도록 조심을 하지. / 위대한 주님치곤 너무 인정이 많아. / 나 같은 악마까지도 인간적으로 대해주니 말이야.”(1, 25) 과연 파우스트의 시험은 메피스토펠레스의 패배로 끝나고 구원과 부활이 마지막을 장식한다. 괴테의 기독교적 낙관론이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실제로 세계와 인간의 모든 모순이 화해와 조화로 수렴된다는 믿음만큼 위안을 주는 것은 없다. 그러나 그런 믿음을 공유할 수 없다면?

 

 

(괴테 생전에 발간된 <파우스트> 표지, 라는군요.)

 

7. 인간 - “언제나 갈망하며 애쓰는 자

 

파우스트의 몽상의 핵심은 신이 되고 싶은 욕망이다. 그의 절망은 아무리 버둥거려본들 결국엔 신이 될 수 없다는 깨달음의 산물이다.(“나는 신을 닮지 않았다! 그것을 뼈저리게 느낀다.”(1, 48)) 이런 딜레마가 생기는 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이중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악마와 계약을 맺기 전, 파우스트는 바그너를 앞에 두고 이렇게 말한다.

 

내 가슴 속엔 아아! 두 개의 영혼이 깃들어서 / 하나가 다른 하나와 떨어지려고 하네. / 하나는 음탕한 애욕에 빠져 / 현세에 매달려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고, / 다른 하나는 과감히 세속의 티끌을 떠나 / 숭고한 선인들의 영역에 오르려고 하네.”(1, 69)

 

상승의 욕망과 추락의 욕망, 신의 얼굴과 악마의 얼굴이 한 인간의 내부에 공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노력하는 만큼 방황하고 영원히 뭔가를 갈구하며 그것을 손에 넣고자 애쓴다. “언제나 갈망하며 애쓰는 자.”(2, 381) 바로 이것이 두 개의 영혼의 투쟁으로 인해 고뇌하는 인간의 아름다운 실존이며, 또 파우스트가 구원받은 근거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 그가 하느님의 종이길 거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 신이 될 수 없다는 절망에 빠져 악마와 결탁하기까지 했으나 그럼에도 그는 반항으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삶과 세계 앞에서 경외감을 가졌다(“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대체로 괴테에게 있어서 신의 존재론적 지위는 절대적이다. 그의 자서전 <시와 진실>4부 제목대로 신을 제외하고는 신에 맞설 자가 없다.”

 

 

 

 

 

 

 

 

(<시와 진실>이 <파우스트>보다 훨씬 쉬웠던(?) 것 같습니다. 에커만이 쓴 책도 읽어볼 만 해요. '인간' 괴테의 그림을 잡는 데 좀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하지만 조만간 신의 절대성에 회의를 품거나 심지어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반항아들이 등장할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속한 세계는 고답적인 상징과 알레고리가 아니라 적나라한 속악이 판치는 날 것의 현실이다. 그때도 온갖 신화와 알레고리와 천사의 합창을 들으며 구원을 외칠 수 있을까. 결국, 인간과 세계의 모든 모순과 갈등을 신에게로 환원시킬 것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출구를 찾을 것인가, 라는 문제 앞에서 선택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열렬한 반항은 어딘가 위태롭고 그래서 매혹적이지만 반드시 파멸로 귀결된다(가령 크리스토퍼 말로의 파우스트가 그러하다). 반면 경건한 순종은 구원과 부활을 담보하지만 지루하고 밍밍하다.

 

 

 

 

 

 

 

(크리스토퍼 말로의 <파우스투스 박사>도, 고맙게도(!), 번역돼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분명한 것은 인간은 두 개의 영혼을 지닌 존재이며 따라서 모종의 해법이, 적어도 생존 전략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웅장하고 대가적인 필치로 포착한 핵심이다. 강조하건대, 괴테는 이 작품을 완성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괴테의 생애와 파우스트의 생애가 함께 어우러져 미묘한 울림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 인물과 작가의 죽음 역시 공명한다. 괴테가 파우스트에게 반쯤 억지로나마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외칠 수 있는 순간을 선사하고 또 그를 구원한 것은 결국, 스스로에게 선사한 마지막 선물이 아니었을까. 그가 임종의 침상에서 외쳤다는 한마디처럼. “좀 더 많은 빛을!”

 

 

**

 

-- "열렬한 반항은 어딘가 위태롭고 그래서 매혹적이지만 반드시 파멸로 귀결된다(...) 반면 경건한 순종은 구원과 부활을 담보하지만 지루하고 밍밍하다"라는 문장을 쓸 때 염두에 둔 작가는 물론 도..키이고, 그리고 이 사람입니다! ^^; <책세상>판 전집을 몽땅 갖고 있는데(보고만 있어서 흐뭇하다는 ㅋㅋ), 저작권 풀리면서 계속 많이 나오고 있네요, 좋은 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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