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 문학과 솔제니친: 일상의 공포를 어찌할 것인가

-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솔제니친이 문학사의 한 페이지에 조용히 안착된 지 어느덧 3년이 지났다.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전쟁터와 수용소에서 보냈고 그 나머지는 망명국인 미국에서 보냈다. 1994, 고국으로 돌아간 이후, 그의 말년은 제법 길고도 고요했다. 어떻든 90년에 걸친 그의 생애는 20세기 러시아, 즉 소련의 흥망성쇠와 빈틈없이 맞물려 있다.

 

 

1945, 솔제니친은 친구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불온한정치사상을 피력했다는 이유로 체포된다. 소위 수용소 인생의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이 개인적 불행이 역사의 보편적 체험과 만나는 순간, 작가로서의 그의 운명은 새옹지마처럼 바뀌었다.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저항 작가 혹은 반체제 작가라는 말이 붙었으며 그의 소설은 수용소 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큼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것도 많은 부분 정치와 문학의 역학 관계 덕분이다. 말하자면 솔제니친은 스탈린 때문에 수용소 인생을 살았지만(그럼에도 대단히 장수했다!) 작가로서는 불멸이라는 최고의 수혜를 입은 셈이다.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의 주인공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854’)9104반의 죄수이다. 그의 하루는 이렇게 정리된다.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정을 잘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쌓기도 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순번을 맡아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그리고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208)

 

원래 제목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수용소라는 단어가 빠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인용문에 이어지는 마지막 문장이 주는 감동과 미학적 효과는 더 크다. “이렇게 슈호프는 그의 형기가 시작되어 끝나는 날까지 무려 10년을, 그러니까 날수로 계산하면 삼천육백오십삼 일을 보냈다. 사흘을 더 수용소에서 보낸 것은 그 사이에 윤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208) ‘운수 좋은 날의 반전이랄까.

 

슈호프가 수용소에 온 것은 독일군의 포로, 고로 스파이였기 때문이다. , 아무 이유도 없거나 귀걸이, 코걸이 식의 억지 이유이다. 사정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침례교도인 어린 알료쉬카는 기도를 너무 열심히 해서, 반장 추린은 아버지가 부농이라서, 영화감독 체자리는 불온한 영화를 찍어서 등이 체포 이유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문제 삼는 것은 이러한 부조리나 가시적이고 때론 선정적인 폭력이 아니라 그 일차적인 폭력 뒤에 찾아오는, 일상이 돼 버린 만성적인 폭력이다. 가령 슈호프는 더 이상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또 수용소 밖의 세상을 생각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과 이곳뿐이다. 어떻게 하면 영창에 가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체자리가 피우는 저 담배를 한 모금이라도 얻어 피울 수 있을까. 이런 슈호프가 정작 벽돌을 쌓기 시작하면, 놀랍게도, 그야말로 노동의 화신이 된다.

 

이제 슈호프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다. 눈부신 햇살을 받고 있는 눈 덮인 벌판도, 신호를 듣고 몰려나와 작업장을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 죄수들도, 아침부터 파고 있던 구덩이를 아직껏 파지 못하고 또 그곳으로 걸어가는 죄수들도, 철근을 용접하러 가는 녀석들이며, 수리공장 건물에 마루를 얹으려고 가는 죄수들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슈호프는 오직, 이제부터 쌓아올릴 벽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113)

 

소비에트 사회의 이상인 긍정적 주인공(영웅)’이란 노동과의 합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인간, 일말의 회의도 없이 오직 생산과 진보를 위해 노력하는 인간이다. 그런데 당시 소비에트 체제의 불합리한 운용의 희생양인 슈호프가 이런 소비에트적 인간(Homo Sovieticus)의 이상에 근접해 있다는 사실은 대단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수용소 군도>)

 

 

고발문학 혹은 폭로문학이 선전문학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다. 솔제니친의 문학은 지난 세기 내도록 그렇게 정치적 격랑에 따라 평가돼 왔다. 그 와중에도 변함없이 놀라운 것은 수용소 공간이 실존적 정황의 은유로 읽힌다는 점이다. 수용소 안은 수용소 바깥과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평범하고 단조롭다. 오히려 숙청의 공포에 벌벌 떨어야 했던 수용소 바깥이 더 극적이지 않았을까. 그 정도로 󰡔이반 데니소비치󰡕 속의 수용소는 일상의 공간에 가깝다. 관성의 법칙에 지배되는 일상의 공포가 더 무서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으니까.

 

슈호프는 행여나 하고 희뿌연 온도계의 유리관을 힐끔 곁눈질해 본다. 만약, 수은주가 영하 사십일 도를 넘어서면 작업장으로 끌려갈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수은주가 사십 도까지 내려가기는 좀 힘들 것 같다.(15)

 

역시 오늘 날씨는 겨우(!) 영하 27.5밖에 되지 않는다. 등교할 수밖에, 혹은 출근할 수밖에! 그리고 오늘도 무사히!

 

-- 네이버캐스트

 

-- 오늘 분량의 장편소설을 올리다가 이 소설이 생각났습니다. 날씨도 정말 춥고요. 

솔제니친은 많이 읽지도 못했고(무엇보다도, <수용소 군도>를 완독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죠 ㅠ.ㅠ) 그러지도 않겠으나... 여하튼 참 소박하고 착한 작가, 진정한 노동자-소비에트-의 영웅이었던 것 같은데, 이것도 참 아이러니이고... 흠. 아래 사진은 88세의 솔제니친과, 다시 (당연히!) 대통령이 된 푸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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