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의 경계를 넘어서: 무모한 행동가? 노회한 독서광?

- 세르반테스(1547-1616), <돈 키호테>(1, 1605/ 2, 1615)

 

 

 

라 만차 지방에 알론소 키하노(()은 정확하지 않다)라는 사람이 살고 있는데, 골격은 튼튼하지만 몸과 얼굴은 비썩 마른, 쉰 살쯤 된 노인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농사일에 전념하고 사냥을 즐기던 그가 별안간 기사소설에 빠진다. 농지까지 팔아가며 소설책을 사들이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책만 읽더니 급기야는 머릿속 골수가 다 말라버려”(1, 45) 정신이 나간다. 방랑기사(편력기사)가 된 것, 아니, 그러기로 결심한 것이다. 몸소 투구를 장만하고 자신의 늙고 비루한 말을 로시난테로, 자신을 골 지방의 아마디스를 본 따 라 만차의 돈 키호테로 명명한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이웃 마을의 어느 농사꾼 처녀는 졸지에 그가 연모하는 엘 토보소의 둘시네아로 바뀐다. 객줏집에서 기사서품식을 치른 그는 두 번째 출정에 앞서 불쌍한 촌사람하나를 꼬드겨 종자로 삼는다.

 

 

 

 

 

 

 

 

 

 

 

 

모든 것을 기사소설에 맞추어 새롭게 창조하려는 그의 옹골찬 몽상에 현실 역시 다부지게 맞선다. 중세 기사의 역을 자처한 배우는 문자 그대로 이빨이 빠진 노인, 기껏해야 불쌍한 몰골의 기사”(다른 번역으로는 슬픈 얼굴의 기사”)일 뿐이고 그가 구원하려는 세상은 더 이상 고답적인 영웅 서사시를 허용하지 않는 시공간이다. 어딜 가든 굶주린 배를 채워야 하고 잠을 자야 하고 무엇보다도 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는 자신이 위대한 모험의 주체가 됐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말썽이나 일으키고 민폐만 끼치는 골치 아픈 늙은이일 뿐이다. 풍차를 거인으로, 여관집의 적포도주 가죽부대를 미코미코나 공주의 적으로 착각하여 공격하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그런데 돈 키호테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녕 몰랐을까? 그의 광기는 자기 최면의 산물, 즉 일종의 연기가 아니었을까? 시골 이발사의 세숫대야를 보고 맘브리노의 투구라고 주장하면서 돈 키호테는 마법을 운운한다. “그래서 자네에게 세숫대야로 보이는 그것도 나에게는 맘브리노 투구로 보이는 것이고, 또 딴사람에게는 다른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1, 336.) 이 대목을 어떻게 해석하든 돈 키호테의 시대착오적인 작태와 노회한 자기기만(혹은 순진한 광기?)는 쉽사리 해석되지 않는다. 마냥 감동하기에는 너무 웃기고, 마냥 웃기에는 너무 처량하다.

 

 

이 소설이 숭고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한 희비극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세계 자체가 분열된 탓이다.(루카치) <돈 키호테>는 신 중심의 세계(중세)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르네상스)를 거쳐 근대의 문턱에 이른 순간에 태어났다. 영웅적이고 낭만적인 열광의 시대가 끝나고 권태와 환멸의 시대, 심지어 범속과 일상의 시대가 찾아온 이다. 돈 키호테는 기사소설에는 나오지 않는 정황과 마주하여 당혹스러워하고 수시로 낭패를 당한다. 그러나 그가 패배하는 횟수(스무 번)만큼 승리한다는 사실(나보코프, <돈 키호테 강의>)을 인지하는 독자는 드물다. <돈 키호테>에서 패배와 승리는 등가이다. 기사로서 돈 키호테의 형상이 망가질수록 그 미학적 가치는 높아진다. 숙박료 지불을 거부한 기사 때문에 종자가 여관집 주인한테 얻어맞고(117) 한뎃잠을 자던 기사가 종자의 배설물을 맡으며 인상을 쓸 때(120) 문학사의 새 페이지가 쓰이는 것이다.

 

돈 키호테가 길을 떠나는 한 이야기는 계속된다. 하지만 그의 존재와 편력은 광기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가 나는 이제 라 만차의 돈 키호테가 아니라 알론소 키하노일세.”(2, 822-823)라고 말하는 순간, 소설은 끝날 수밖에 없다. ‘기사병을 앓는 노망 든 영감에서 선량한 시골 귀족으로 돌아간 그가 기사소설을 모방했던 자신의 지난 삶을 반성한 다음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유산 분배이다. 주인이 우울증으로 죽어간다며 원통해했음에도 자기 몫으로 떨어진 유산(비록 애초 약속 받은 섬은 얻지 못했으나!)에 대한 기쁨을 감추지 않는 산초 판사의 모습은 또한 얼마나 근대적인가.

 

 

 

 

 

 

 

 

 

 

 

 

 

세르반테스는 <돈 키호테>의 마지막 장에 오직 나만을 위해 돈 키호테는 태어났고 나는 그를 위해 태어났다. 그는 행동할 줄 알았고 나는 그것을 적을 줄 알았다.”(2, 829)라고 썼다. 흥미롭게도, ‘행동의 대명사인 돈 키호테는 독서의 쾌감을 만끽하는 여유로운 촌부였던 반면 이 두툼한 책의 저자는 정규 교육도 거의 받지 못했을뿐더러 상이군인, 풀려난 포로, 누명 쓴 세금 징수관 등 여느 모험소설의 주인공 못지않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돈 키호테의 장황한 설교대로(137) ()과 무()는 이토록 상보적이다. 어쩌면 그렇기에 돈 키호테의 가족과 친구가 분서(焚書)’, 이른바 책 화형식에 앞서 진행하는 검열과 심판은 무척 엄격하다.(15장과 6)

 

 

(피카소가 그린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

 

대부분의 책이 불쏘시개 신세로 전락하는데 그 와중에도 <돈 키호테>가 패러디하는 원조 기사소설 <골 지방의 아마디스>, 세르반테스의 첫 소설 <라 갈라테아> 등은 살아남는다. 특히 후자와 그 작가에 대해 신부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보탠다. 실제로 세르반테스는 (<돈 키호테> 2권에서 산손 카르라스코가 전해주듯) 쉰 살이 훨씬 넘어 발표한 <돈 키호테>로 대단한 인기를 얻는다. 뿐더러, 당시 에스파냐 문학의 대부분이 번역물이던 상황에서 그는 에스파냐어로 소설을 쓴 첫 번째 작가”(<모범 소설> 서문)였다.

문학사는 그를 1616423일 같은 날 사망한 셰익스피어와 함께 근대문학의 맨 윗자리에 올려놓았다.

 

* 고유명사의 표기는 일반 독자에게 익숙한 격음으로 바꿨음.

 

-- <책&>

 

--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관한 글을 쓰던 중 너무 힘들어서(ㅠ.ㅠ), 그 못지않게 힘들었던 <돈 키호테>에 관한 저 글을 떠올려 봅니다. 힘내자, 라는 의미에서요 ^^:;

--  <돈 키호테>는 도...키의 <백치>에 모종의 전범을 제공한 소설이기도 하고, 소설 자체보다는 인물형으로서 러시아문학에 큰 영향을 끼치고 했고요.(투르게네프의 <햄릿과 돈 키호테>라는 에세이-논문이 유명합니다.)

-- 겸사겸사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의 이미지도 올려봅니다. (김현의 책이 아니라면, 아마도) 제일 처음 읽은, 그래서 애틋한 마음을 갖고 있는 소설 이론서입니다. 93년, 기숙사와 문학회 동아리 방을 오가며 읽었지 싶은데, 이쪽 저쪽 모두 재건축, 재개발되면서 다 사라졌지만, 책에 대한 기억은 '아.스.라.히.'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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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013-06-19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반 뚜르게네프의 햄릿과 돈키호테를 검색하다 들어왔습니다. 혹시 국내에 위의 서지가 아예 번역되어있지 않은가요? 국회도서관에도 도서검색을 해도 자료가 나오지 않네요 돈을 주고서라도 사서 볼 수 있다면 보고싶은데 ㅠㅠ

푸른괭이 2013-06-19 15:06   좋아요 0 | URL
제가 알기론 한국어 번역은 없답니다. 영어 번역은 쉽게 찾을 수 있을 텐데...ㅠ.ㅠ 사실 그 논문(에세이)의 내용 자체는 무척 단순한데(?) 워낙에 희소(?)해서 더 주목 받는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