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현실과 조작 현실 사이에서 파괴되는 개인의 삶
-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1974년 2월 20일 수요일, 여성 카니발 전날 밤, 어느 도시에서 스물일곱 살의 젊은 여자가 저녁 6시 45분경 누군가가 주최하는 댄스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나흘 후, 드라마틱하게 - 사실 그렇게 표현해야만 한다.(중략) - 사건이 전개된 이후, 일요일 저녁 거의 비슷한 시간에 -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저녁 7시 4분경에 - 그녀는 발터 뫼딩 경사의 집 초인종을 누른다. 그는 마침 사적인 이유가 아닌 직무상의 이유로 아랍 족장으로 분장을 하고 있던 참이다. 그녀는 놀란 뫼딩에게 조서를 작성하라며 진술한다. 자신이 낮 12시 15분경 자기 아파트에서 베르너 퇴트게스 기자를 총으로 살해했으며, 뫼딩이 아파트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그를 “데려갈” 수 있을 거라고 했고, 그녀 자신은 12시 15분에서 저녁 7시까지 후회의 감정을 느껴 보기 위해 시내를 이리저리 배회했지만, 조금도 후회되는 바를 찾지 못했노라고.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체포해 주길 부탁하며, “사랑하는 루트비히”가 있는 그곳에 자신도 기꺼이 있고 싶노라고 말한다.(11-12)
이것이 소설의 초두에 제시된 사건의 전말이다. 화자의 관심은 2월 20일 수요일에서 24일 일요일까지 4박 5일에 걸쳐 일어난 사건의 원인과 과정을 추적, 해부하는 데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국민의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천방지축으로 날뛰다가 급기야 깡패 집단이 돼 버린 언론이 노골적인 비판의 대상이 된다. 애초 이 소설의 모델이었던, 사상적 경향성을 띤 한 지식인이 소설적 변용을 통해 그저 ‘선량한 시민’ 혹은 ‘민간인’으로 거듭난다. 카타리나 블룸은 평범하고 성실한 가정 관리사로서 평소 행실에 있어서도 “새치름하고 뻣뻣하다고까지 알려져 있고, 지인들과 친구들 사이에서 ‘수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55)는 27세의 이혼녀이다. 그녀의 삶이 흔들린 것도 역시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입장이 아니라 사랑 때문이다. 사랑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 중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것, 따라서 말해지기 가장 곤란한 것이다. 바로 그것이 여러 층위의 폭력에 노출된다.
사실 관계를 재구성해 보면 이렇다. 카타리나는 어느 댄스파티에서 루트비히 괴텐이라는 남자를 만나 첫 눈에 반하고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 함께 밤을 보낸다. 그날 새벽, 그가 쫓기는 몸임을 알게 되자, 거의 외우다시피 익혀온 ‘우아한 강변한 삶’ 아파트의 도면을 떠올려 그를 ‘비밀 통로’로 탈출시킨 다음, 평소 그녀에게 치근대온 한 신사(슈트로입레더)의 별장에 그를 숨긴다. 이로써 그녀는 처벌 받아 마땅한 범법 행위를 저질렀다. 그럼에도 수사와 언론 보도, 그로 인해 그녀가 감당해야 하는 일련의 불쾌한 일에는 소름이 돋는다. 가령 황색 저널리즘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악랄하고 천박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퇴트게스 기자를 보라. 이제 막 어려운 암 수술을 끝낸, 카타리나의 어머니를 인터뷰하려는 시도가 좌절되자 그는 “모든 속임수 중에서 가장 간단한 속임수”, 즉 페인트 공으로 변장해 병실에 잠입한다.
그는 블룸 부인에게 사실들을 들이댔지만, 그녀가 괴텐을 전혀 몰랐던 탓에 모든 것을 이해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그녀는, “왜 그런 결말이 날 수밖에 없었을까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자이퉁>에는 이렇게 썼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듯이,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었겠지요.” 블룸 부인의 진술을 다소 바꾼 것에 대해 그는 기자로서 ‘단순한 사람들의 표현을 도우려는’ 생각에서 그랬고, 자신은 그런 데 익숙하다고 해명했다.(107)
블룸 부인의 당혹감과 의구심이 기자의 ‘윤문’ 작업 끝에 카타리나의 행위에 필연성을 부여하는 증언으로 바뀐다. 이렇듯 개인의 내밀한 삶이 조서와 보도 자료의 형식으로 환원되는 순간, 진실과 거짓, 실제 현실과 조작 현실 사이의 경계는 무의미해진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밀실’이 파괴된다. “맙소사, 그는 오기로 예정되어 있는 바로 그 남자였어요. 그와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가 감방에서 나올 때까지 몇 년 동안 기다려야 한다고 해도요.”(61) 그녀가 볼터스하임 부인 앞에서 했던 말이다. 실상 우리 중 누구도 신문과 같은 언론 매체를 통해 예컨대 그녀의 사랑 고백을 엿들을 권리는 없다. 더러 대상이 누구냐, 상황이 어떠냐에 따라 몹시 그러고 싶어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작가가 암시하듯, 언론이란(적어도 ‘특정’ 언론은) 그 본질상 ‘불가피하게’ 무자비한 폭력의 주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 낸 것이다.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 중에 <빌트>지와의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
한데 흥미롭게도 이 소설은 은근히 고발적인 팸플릿의 냄새를 풍긴다. “-라고 한다”, “-이 알려졌다”라는 식의 문체는 조서와 신문을 연상시키며 화자가 얻은 정보의 출처 및 전달 방식 역시 경찰과 언론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에 대한 상당히 냉혹한 보고서이다. 퇴트게스 기자를 향해 연거푸 방아쇠를 당기는 그녀의 분노에 공감하는 순간 우리 역시 폭력의 공범이 되는 셈이지만 이 역시 ‘불가피한’ 것이 아닐까.
-- 네이버캐스트
이 소설을 토대로 만든 영화. 보는 내내 무척 춥고 불쾌했어요. 하나 마나 한 대선이 돼버린, 그 때문에 더 추워진 연말, 이 소설과 이 영화와, 또 이 소설에 관심을 갖게 해준 한 정치가 등이 떠오른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