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악마의 존재를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다
파우스트가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외치자 메피스토펠레스는 그의 영혼을 접수하기 위해 핏방울 계약서를 챙긴다. 하지만 그때 천사들이 등장하여 야비하게(!) 악마의 노획물을 채간다. 악마의 몸은 욥의 몸처럼 종양과 옴 덩어리로 변하고, 파우스트는 천국으로 인도된다. 전형적인 권선징악에 덧붙여 도저하게 기독교적인 결말인데, 이는 작품의 도입부에서부터 이미 명시됐던 것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처음 등장할 때 자신을 “항상 악을 원하면서도 항상 선을 창조해내는 힘의 일부분”(1, 80)이라고 소개한다. “소생은 항상 부정(否定)을 일삼는 정령입니다! / (…) / 당신들이 죄라느니, 파괴라느니, / 요컨대 악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 제 원래의 본성이랍니다.”(1, 80) 즉, 악마라는 신분상 부정(否定), 죄, 파괴 등 악의 영역을 담당하나 그 역시 궁극적으로는 신에게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구약의 욥기(1장 6-12절)를 괴테 나름으로 다시 풀어쓴 「천상의 서곡」은 대단히 노골적이다.
(이미지 검색하다 보니 이런 욥도 있네요. 여하튼 파우스트는 괴테 판 욥이죠.)
메피스토펠레스가 신(주님) 앞에 나타나 불만을 토로하며 괜히 시비를 건다. 그러자 신은 파우스트를 가리키며 “나의 종이니라!”(1, 23)라며 자랑한다. 그를 유혹하여 타락시키겠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호언장담에도 여유만만하게 응수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까”(1, 24) 얼마든지 건드려보라는 것이다.
“그의 영혼을 그 근원으로부터 끌어내어, / 만일 그것을 붙잡을 수 있다면, / 어디 너의 길로 유혹하여 이끌어보려무나 / 하지만 언젠가는 부끄러운 얼굴로 나타나 이렇게 고백하게 되리라. / 착한 인간은 비록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잘 알고 있더군요, 라고.”(1, 24)
요컨대 <파우스트>에서 악마의 장난과 인간의 방황은 신의 영역에 귀속되며 죄악 역시 신의 뜻에 따라 구원을 담보한다. 신과 계약을 맺고 떠나는 메피스토펠레스도 신의 전지전능함은 물론 무한한 포용력과 사랑에 탄복한다. “때때로 나는 저 노인네를 만나는 게 즐거워. / 그래서 사이가 나빠지지 않도록 조심을 하지. / 위대한 주님치곤 너무 인정이 많아. / 나 같은 악마까지도 인간적으로 대해주니 말이야.”(1, 25) 과연 파우스트의 시험은 메피스토펠레스의 패배로 끝나고 구원과 부활이 마지막을 장식한다. 괴테의 기독교적 낙관론이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실제로 세계와 인간의 모든 모순이 화해와 조화로 수렴된다는 믿음만큼 위안을 주는 것은 없다. 그러나 그런 믿음을 공유할 수 없다면?
(괴테 생전에 발간된 <파우스트> 표지, 라는군요.)
7. 인간 - “언제나 갈망하며 애쓰는 자”
파우스트의 몽상의 핵심은 신이 되고 싶은 욕망이다. 그의 절망은 아무리 버둥거려본들 결국엔 신이 될 수 없다는 깨달음의 산물이다.(“나는 신을 닮지 않았다! 그것을 뼈저리게 느낀다.”(1, 48)) 이런 딜레마가 생기는 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이중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악마와 계약을 맺기 전, 파우스트는 바그너를 앞에 두고 이렇게 말한다.
“내 가슴 속엔 아아! 두 개의 영혼이 깃들어서 / 하나가 다른 하나와 떨어지려고 하네. / 하나는 음탕한 애욕에 빠져 / 현세에 매달려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고, / 다른 하나는 과감히 세속의 티끌을 떠나 / 숭고한 선인들의 영역에 오르려고 하네.”(1, 69)
상승의 욕망과 추락의 욕망, 신의 얼굴과 악마의 얼굴이 한 인간의 내부에 공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노력하는 만큼 방황하고 영원히 뭔가를 갈구하며 그것을 손에 넣고자 애쓴다. “언제나 갈망하며 애쓰는 자.”(2, 381) 바로 이것이 ‘두 개의 영혼’의 투쟁으로 인해 고뇌하는 인간의 아름다운 실존이며, 또 파우스트가 구원받은 근거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 그가 ‘하느님의 종’이길 거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즉, 신이 될 수 없다는 절망에 빠져 악마와 결탁하기까지 했으나 그럼에도 그는 ‘반항’으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삶과 세계 앞에서 경외감을 가졌다(“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대체로 괴테에게 있어서 신의 존재론적 지위는 절대적이다. 그의 자서전 <시와 진실>의 4부 제목대로 “신을 제외하고는 신에 맞설 자가 없다.”
(<시와 진실>이 <파우스트>보다 훨씬 쉬웠던(?) 것 같습니다. 에커만이 쓴 책도 읽어볼 만 해요. '인간' 괴테의 그림을 잡는 데 좀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하지만 조만간 신의 절대성에 회의를 품거나 심지어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반항아들이 등장할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속한 세계는 고답적인 상징과 알레고리가 아니라 적나라한 속악이 판치는 날 것의 현실이다. 그때도 온갖 신화와 알레고리와 천사의 합창을 들으며 구원을 외칠 수 있을까. 결국, 인간과 세계의 모든 모순과 갈등을 신에게로 환원시킬 것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출구를 찾을 것인가, 라는 문제 앞에서 선택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열렬한 반항은 어딘가 위태롭고 그래서 매혹적이지만 반드시 파멸로 귀결된다(가령 크리스토퍼 말로의 파우스트가 그러하다). 반면 경건한 순종은 구원과 부활을 담보하지만 지루하고 밍밍하다.
(크리스토퍼 말로의 <파우스투스 박사>도, 고맙게도(!), 번역돼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분명한 것은 인간은 “두 개의 영혼”을 지닌 존재이며 따라서 모종의 해법이, 적어도 생존 전략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웅장하고 대가적인 필치로 포착한 핵심이다. 강조하건대, 괴테는 이 작품을 완성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괴테의 생애와 파우스트의 생애가 함께 어우러져 미묘한 울림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 인물과 작가의 죽음 역시 공명한다. 괴테가 파우스트에게 반쯤 억지로나마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외칠 수 있는 순간을 선사하고 또 그를 구원한 것은 결국, 스스로에게 선사한 마지막 선물이 아니었을까. 그가 임종의 침상에서 외쳤다는 한마디처럼. “좀 더 많은 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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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렬한 반항은 어딘가 위태롭고 그래서 매혹적이지만 반드시 파멸로 귀결된다(...) 반면 경건한 순종은 구원과 부활을 담보하지만 지루하고 밍밍하다"라는 문장을 쓸 때 염두에 둔 작가는 물론 도..키이고, 그리고 이 사람입니다! ^^; <책세상>판 전집을 몽땅 갖고 있는데(보고만 있어서 흐뭇하다는 ㅋㅋ), 저작권 풀리면서 계속 많이 나오고 있네요, 좋은 일입니다 ^^